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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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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순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부민후를 지냈다. 전천추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민후가 되었으며, 선제 시기에 흉노 정벌에 참여했다. 호아장군으로 임명되어 3만여 기를 이끌고 출격하여 전공을 세웠으나, 기한을 지키지 않고 전과를 허위 보고한 죄로 자결했다. 관련 기록은 《한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행적

원봉 4년(기원전 77년), 전천추의 뒤를 이어 부민(富民侯)에 봉해졌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운중태수 재임 중 호아장군(虎牙將軍)이 되어 전광명, 범명우, 한증, 조충국과 함께 흉노 정벌에 나섰다. 전순은 800여 리를 진군하여 단여오수(丹余吾水)에 이르렀고, 1,900여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고, , , 등의 가축 7만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귀환이 늦어졌고, 노획품의 수를 허위로 보고한 것이 드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전천추의 아들로, 무제와 선제를 섬겨 승상에 올랐다. 원봉 4년(기원전 77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부민후를 이었다[1]

2. 2. 흉노 정벌과 죽음

본시 2년(기원전 72년), 운중 태수이자 호아장군(虎牙將軍)이었던 전순은 전광명, 범명우, 한증, 조충국과 함께 흉노 정벌에 나섰다. 전순은 800여 리를 진군하여 단여오수(丹余吾水)에 이르렀고, 1,900여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고, , , 등의 가축 7만여 마리를 노획하는 전공을 올렸다.[1]

같은 해, 선제가 흉노 공격을 계획했을 때, 전순은 3만여 기병을 이끌고 오원군에서 출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이듬해인 본시 3년(기원전 71년) 1월, 전순을 포함한 5명의 장군이 이끄는 15만 기병의 대규모 군세가 흉노를 공격했다.[3] 그러나 전순은 귀환 기한을 지키지 못하고, 노획한 머릿수를 실제보다 부풀려 보고한 사실이 발각되어 조사를 받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4]

3. 출전


  • 반고, 《한서》 권8 선제기·권18 외척은택후표·권94상 흉노전 上

참조

[1] 서적 漢書 公孫劉田王楊蔡陳鄭伝第38 ちくま学芸文庫版『漢書』6、59頁
[2] 서적 漢書 匈奴伝第64上 ちくま学芸文庫版『漢書』7、587頁
[3] 서적 漢書 宣帝紀第8 ちくま学芸文庫版『漢書』1、238-239頁
[4] 서적 漢書 匈奴伝第64上 ちくま学芸文庫版『漢書』7、588-598頁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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