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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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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천추는 전한 고조 시대의 인물로, 무고의 난 당시 여태자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려 무제의 신임을 얻어 승상에 오른 인물이다. 고조의 종묘 낭중으로 있던 중 여태자의 무고의 난에 연루되자 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여태자를 옹호했다. 무제는 전천추를 대홍려에 임명하고 몇 달 후 승상으로 승진시켜 부민후에 봉했다. 승상 재임 기간 동안 염철의와 연왕 유단의 난을 겪었으며, 12년 후 사망하여 정후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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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천추
기본 정보
성씨전(田)
천추(千秋)
시호불명
생몰년도기원전 2세기 ~ 기원전 1세기
시대전한
관직
가족 관계
황제한무제
옹주不疑

2. 생애

고조의 종묘의 낭중(郞中)을 지내던 중, 여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무고의 난). 전천추는 무제에게 여태자를 변호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무제는 전천추를 만나본 후 고조의 영혼이 전천추를 통하여 자신을 일깨운 것이라 생각하고, 바로 대홍려에 임명하였고, 몇 달 후 승상으로 승진시키고 부민(富民侯)에 봉하였다.[4]

단 한 번의 진언으로 이 정도의 고관에 이른 유례가 없었고, 아무런 공적도 없이 승상이 된 것 또한 전대미문의 일이었기 때문에, 흉노의 선우도 이를 비웃었다. 하지만 전천추는 무고의 죄를 묻는데 열을 올리던 무제를 달랬기 때문에, 종전의 재상보다 낫다는 평을 들었다.

무제는 연로한 전천추를 배려하여, 조회 때 작은 수레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해주었다. 때문에 '차 승상'(車丞相)이라고 불렸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 무제가 죽자 대장군 곽광 등과 함께 무제의 유조를 받들어 소제를 옹립하였다. 국정은 곽광이 오로지하였고, 전천추는 이에 협력하였다.

승상을 12년 역임하고 원봉 4년(기원전 77년)에 사망했다. 정후라는 시호를 받았고, 아들 전순이 부민후를 이었으나, 흉노 토벌 당시 노획품을 부풀렸다는 혐의로 자살하여 부민후는 단절되었다.[5]

3. 주요 사건

장릉으로 이주한 의 옛 왕족 전씨 출신이다. 유방의 묘의 낭중이었을 때, 여태자 유거의 난(무고의 화)이 있었다. 이때 전천추는 "아들이 아버지의 무기로 놀면, 그 죄는 태형에 해당합니다. 천자의 아들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어떤 죄에 해당할까요? 머리가 하얀 노인이 잠자리에 나타나 이 말을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상소하여, 무제에게 황태자의 무고함을 깨닫게 했다.[4]

무제는 전천추와 만난뒤 "이 일은 고조의 신령이 나에게 가르쳐 주려 한 것이다. 너는 나의 보좌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즉시 그를 대홍려에 임명했고, 몇 달 후(정화 4년(기원전 89년))에는 유굴리의 후임 승상에 임명하여 부민후[4]로 봉했다.

무제에게 단 한 번의 진언을 한 것을 바탕으로, 몇 달 동안 대홍려를 역임한 시기에도 특별히 언급할 만한 업적도 없고, 다른 공적이나 능력도 없이 승상이 된 것은 전대미문이었으며, 흉노선우도 그 일에 대해 "한나라 승상은 현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가 함부로 상소를 올린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전천추는 무고의 조사를 강화하는 무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하는 등, 이전의 재상보다 뛰어났다고 평가받았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에 무제가 죽자, 대장군곽광 등과 함께 무제의 유조를 받아 소제를 옹립했다. 국정은 곽광에 의해 결정되었고, 전천추는 이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전천추는 승상을 12년 역임하고, 원봉 4년(기원전 77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정후이며, 아들 전순이 부민후를 이었으나, 흉노 토벌 당시 노획품을 부풀렸다는 혐의로 자살하여 부민후는 단절되었다.

3. 1. 무고의 난 변호

고조의 종묘의 낭중(郞中)을 지내던 중, 여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무고의 난). 전천추는 무제에게 여태자를 변호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4]

「子弄父兵,罪當笞;天子之子過誤殺人,當何罪耶?臣嘗夢見一白頭翁教臣言。」|“자식이 아비의 무기를 갖고 놀았을 경우, 채찍으로 잘못을 다스린다. 천자의 자식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으면, 어떻게 벌한단 말인가?" 머리맡에서 백발의 노인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중국어

전천추와 만난 무제는 고조의 영혼이 전천추를 통하여 자신을 일깨운 것이라 생각하고, 바로 전천추를 대홍려에 임명하였고, 몇 달 후 승상으로 승진시키고 부민(富民侯)에 봉하였다.[4]

단 한 번의 진언으로 이 정도의 고관에 이른 유례가 없었고, 또 아무런 공적도 없이 승상이 된 것 또한 전대미문의 일이었기 때문에, 흉노의 선우도 이를 비웃었다. 하지만 전천추는 무고의 치죄에 열을 올리던 무제를 달랬기 때문에, 종전의 재상보다 낫다는 평을 들었다.

3. 2. 연왕 유단의 난 진압

전한 무제가 승상으로 재임할 때, 염철회의(시원 6년(기원전 81년))와 유단의 난(원봉 원년(기원전 80년))이 일어났다. 연왕 유단의 난 당시 전천추는 병석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난이 발각되자 승상의 명령으로 반란자인 상관걸 등을 체포했다.[5]

4. 평가

무고의 난여태자의 무고함을 주장하여 무제의 마음을 돌린 일로 대홍려를 거쳐 승상에까지 오른 전천추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4]


  • 유굴리의 후임으로 승상이 된 것은 전대미문의 일로, 흉노 선우는 "한나라 승상은 현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가 함부로 상소를 올린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비꼬았다.
  • 그러나 전천추는 무고의 조사를 강화하려는 무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하는 등, 이전의 재상들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 무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한 후, 곽광이 국정을 주도하였고 전천추는 이에 전면적으로 협력하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연왕 유단의 난이 발각되었을 때, 병석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상의 명령으로 반란자인 상관걸 등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5]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전 (성씨)장릉으로 이주
아들전순부민후 작위를 이었으나, 흉노 토벌 관련 문제로 자살


참조

[1] 서적 Book of Han https://zh.wikisourc[...]
[2] 서적 Discourses of Salt and Iron
[3] 문서
[4] 문서
[5] 서적 漢書 燕王旦伝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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