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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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장운은 1811년 한양에서 태어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했으나, 뉘우치고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는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으며, 베르뇌 주교로부터 세례를 베풀 권한을 받고 교회 서적 출판인으로 임명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인쇄소를 지키다 체포되어 순교했고,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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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전장운 요한 |
출생일 | 1811년 |
사망일 | 1866년 3월 9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서울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68년 10월 6일 |
시복인 | 교황 바오로 6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전장운은 1811년 한양에서 태어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 슬하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농사와 가죽 가방을 만들며 가족을 부양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으나, 신앙심이 깊지 않아 고문과 박해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이후 어머니의 격려로 뉘우쳤지만, 고해성사를 해줄 사제가 없었다.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귀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결혼 후 세 자녀를 두었고,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 권한을 받고 최형 베드로, 임치화 요셉과 함께 교회 서적 출판인으로 임명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인쇄소에 남아 목판을 지키다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포도청, 의금부를 거쳐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서소문 밖에서 최형과 함께 참수되었다. 망나니에게 "당신은 임금님을 따르십시오. 저는 하느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순교했다.
2. 1. 출생과 성장
전장운은 1811년 한양에서 태어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전장운은 어릴 적부터 농사와 가죽 가방을 만드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2. 2. 배교와 회개
1839년에 전장운은 체포되었지만, 신앙심이 깊지 않아 극심한 고문과 박해로 배교하였고, 석방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 어머니의 격려로 자신의 배교를 뉘우쳤지만, 고해를 받아줄 사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장운은 속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1845년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조선으로 귀국하자, 전장운은 고해성사를 받았고 동료 교우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는 매우 충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2. 3. 신앙 활동과 박해
1839년에 전장운은 체포되었으나, 신앙심이 깊지 않아 극심한 고문과 박해 끝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기해박해 이후, 어머니의 격려로 배교를 뉘우쳤지만, 고해를 해 줄 사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전장운은 속죄를 희망했다.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조선에 귀국하자, 전장운은 고해성사를 받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전장운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베르뇌 주교는 전장운을 독실한 신자로 인정하여 세례 권한을 주고, 최형 베드로, 임치화 요셉과 함께 교회 서적 출판인으로 임명하였다.
박해가 다시 시작되자 인쇄소 주인 임치화는 도피했지만, 전장운은 목판을 지키고자 "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이 목판들을 지켜야 합니다."라며 남았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인쇄소를 급습하여 전장운은 체포되고 목판은 몰수되었다. 전장운은 극심한 고문에도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견뎠다. 포도청에서 1회, 의금부에서 9회 심문과 2회 형문을 받고 장형 32대를 맞은 후, 1866년 3월 6일 형조로 이송되었다. 3월 9일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최형과 함께 참수되었다. 전장운은 망나니가 과거 알고 지내던 전(前) 천주교 신자임을 알아봤다. 망나니가 주저하자, "당신은 임금님을 따르십시오. 저는 하느님을 따르겠습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라고 말했다. 전장운은 참수되었고, 사흘 후 장례가 치러졌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2. 4. 순교
전장운은 1839년에 체포되었지만, 신앙심이 깊지 않아 심한 고문과 박해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기해박해 이후, 어머니의 격려로 배교를 뉘우쳤으나, 고해성사를 해줄 사제가 없었다. 하지만 속죄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귀국하자, 전장운은 고해성사를 받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전장운에게 세례를 베풀 권한을 주고, 교회 서적 출판인으로 임명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인쇄소 주인은 도망갔지만, 전장운은 목판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목판을 압수당하고,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고통을 견뎌냈다.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심문과 형문을 받고, 1866년 3월 6일 형조로 이송, 3월 9일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서소문 밖에서 최형과 함께 참수되었다. 망나니가 과거 알고 지내던 천주교 신자임을 알아보고, "당신은 임금님을 따르십시오. 저는 하느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순교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3. 시복 · 시성
전장운 요한은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2]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3]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1-25
[3]
뉴스
"[교황 방한] 1925년·1968년·2014년…로마에서 서울까지 3번의 시복식"
http://news1.kr/arti[...]
뉴스1
201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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