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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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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교원은 대한제국 관리로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로 활동한 인물이다. 1906년 탁지부 주사로 임명된 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주사, 거창군수, 경상남도 서무과장, 중추원 통역관 등을 역임했다. 1929년 전라북도 참여관, 1933년 황해도 도지사를 거쳐 1938년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흰 옷 폐지 정책을 장려하고,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전쟁 지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사후 친일 재산이 국가 귀속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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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원
기본 정보
이름정교원 (鄭僑源)
로마자 표기Jeong Gyo-won
출생1893년
사망1963년
정치 경력
주요 경력조선총독부 사무관
국민협회 평의원
흥아보국단 평의원
대화숙 이사
친일 활동
친일 행적1934년 인사흥신소에서 발행한 《인사흥신록》에 수록
국민협회 평의원으로 활동
흥아보국단 평의원으로 활동
대화숙 이사로 활동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옹호하고 선전
참고 자료
관련 자료인사흥신소, 《인사흥신록》 (人事興信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교원(鄭僑源)
森田芳夫, 《朝鮮終戦の記録 : 米ソ両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2. 생애

정교원은 1906년 탁지부 주사로 대한제국 관리가 된 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에도 조선총독부에서 관직을 이어갔다. 1917년 경상북도 거창군 군수, 1921년 경상남도 서무과장을 거쳐 1925년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통역관 겸 서기로 근무했다.

1929년 전라북도 참여관, 1930년 전라남도 참여관, 1933년 황해도 도지사로 승진했다. 이러한 고속 승진은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당시 "입지전적인 인물"로 불렸다. 《조선인사흥신록》에 따르면 정교원은 원만한 성격과 배포로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으며,[7][8] 농촌 진흥과 청년 지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았다. 1928년 쇼와대례기념장, 1933년 훈4등 서보장을 받는 등 1933년 기준 정5위 훈4등에 서위되었다.

일제 강점기 흰 옷 폐지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염색을 보급하고 흰 옷을 금지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어 1943년까지 재직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까지 녹기연맹, 배영동지회,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전쟁 지원에 적극 참여했다. 1941년 지원병 제도를 홍보하고, 1943년 조선농지개발영단 이사를 맡는 등 일제에 협력했다.

1944년 고양 군수가 되고, 1945년 6월 5일 충청북도 지사로 부임하여 광복 직전까지 재직했다.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8월 납치된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2. 1. 대한제국 시기

1906년 탁지부 주사가 되면서 대한제국 관리로 임용되었다. 1908년에는 재무감독국 주사에 올랐다. 이후 한일 병합 조약을 맞았다.

2. 2. 일제강점기

1906년 탁지부 주사가 되면서 대한제국 관리로 임용되었다. 1908년에는 재무감독국 주사에 올랐다가 한일 병합 조약을 맞았다.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에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주사로 임명되어 관계에 계속 머물렀다. 1917년에 경상북도 거창군 군수로 승진했고, 1921년에는 경상남도 서무과장을 겸했다. 1925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통역관 겸 서기로 근무하였다.

1926년 2월 18일 이완용 후작 장례식 장의역원을 정할 때, 장의위원회 회장자접시원(會葬者接侍員)의 한 사람으로 진행에 참여했다.[6]

1929년에 전라북도 참여관으로 승진하여 이듬해는 전라남도 참여관을 지냈다. 1933년에는 황해도 도지사로 또다시 승진했다. 이러한 고속 승진은 이례적인 것이라 당시에 "실로 입지전적인 인물"로 불릴 정도였다. 《조선인사흥신록》에 따르면 정교원은 성격이 원만하면서도 배포가 있어 신망이 두터웠던 것으로 되어 있다.

황해도지사로 근무 중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7][8] 이 책자에 실린 인물평에는 정교원이 전라남북도 참여관을 지내면서 농촌 진흥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항일 사상과 같은 "과격한 사상에 휩쓸리기 쉬운 청년의 지도"에 중점을 둔 것이 고위직에 오른 비결이라고 적혀 있다. 1928년 쇼와대례기념장, 1933년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1933년을 기준으로 정5위 훈4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이 입는 흰 옷을 폐지하는 정책을 생활 개선책으로 크게 장려했는데, 정교원은 염색을 보급하고 흰 옷을 입지 못하도록 하는 열렬한 활동을 벌여 도내에서 흰 옷 입은 사람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어 1943년까지 재직했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기 직전까지 전쟁 지원을 위해 여러 사회단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정교원이 참여한 단체는 녹기연맹배영동지회,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으로 모두 친일 또는 전쟁 지원이 직접적인 목적인 단체이다. 1941년에는 지원병 제도를 홍보하기 위한 지원병보급설전대에 참여한 뒤 경성부의 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으며, 1943년부터 특수법인으로 식량 증산을 추진하던 조선농지개발영단의 이사를 맡았다.

2. 3. 해방 이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도지사, 도 참여관, 총독부 사무관, 기타 5개 부문에 선정되었고,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중추원, 관료, 친일단체의 3개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9]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정 후 정교원의 재산이 직권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에 정교원의 후손은 경상북도 성주군 등 전국 각지에 소유한 총 8만 5천여 평의 토지 및 임야를 모두 매각한 뒤 세금은 체납한 채 이듬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9]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발족 후 같은 해 3월에 체포되었지만, 8월에 석방되었다.[1] 1950년 8월에 납치된 이후 소식은 불명이다.[1]

3. 친일 행적 및 논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중추원, 도지사, 도 참여관, 총독부 사무관, 기타의 다섯 부문에 선정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중추원과 관료, 친일단체의 세 부문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5년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정교원의 재산이 직권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에 정교원의 후손은 경상북도 성주군 등 전국 각지에 소유한 총 8만 5천여 평의 토지와 임야를 모두 매각한 뒤 세금은 체납한 채 이듬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9]

4. 평가

정교원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도지사, 도 참여관, 총독부 사무관, 기타 5개 부문에 선정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중추원, 관료, 친일단체의 3개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5년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정교원의 재산은 직권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에 정교원의 후손은 경상북도 성주군 등 전국 각지에 소유한 총 85000평의 토지와 임야를 모두 매각한 뒤 세금은 체납한 채 이듬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9]

참조

[1] 웹사이트 정교원(鄭僑源) http://encykorea.aks[...] 2022-08-24
[2] 서적 조선종전의 기록 : 미소양군의 진주와 일본인의 인양 巖南堂書店 1964-08-15
[3] 문서 인사흥신록 제10판에서는 1921년
[4] 간행물 관보 제1879호 “서임 및 사령” https://dl.ndl.go.jp[...] 1933-04-08
[5] 간행물 관보 제3039호 “서임 및 사령” https://dl.ndl.go.jp[...] 1937-12-22
[6] 뉴스 "성은홍대 고이후작저에 어사타서어하사" 매일신보 1926-02-18
[7]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4-03-18
[8]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4-03-18
[9] 뉴스 친일파 후손들 재산 대거 빼돌렸다 http://www.ohmynews.[...] 경향신문 200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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