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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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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득은은 황국주의 광해교회 소속으로, 문선명이 평양으로 월북하여 만났던 인물이다. 1946년 월남 후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을 방문하여 손을 잘라 피를 먹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방호동 모자의 후원으로 삼각산 집회소를 세웠으며, 박태선이 추종자로 영체교환 의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6.25 전쟁 중 구호 사업을 했으며, 김연을 제자로 삼아 '대성심 기도원'을 설립하고 '생의 원리'를 출판했다. 1963년 '신단정도회'를 만들었으며, 1980년 무렵 신단정도회가 문을 닫은 것으로 보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피갈음 실천과 혼음 사건으로 세계일보에 보도되었으며, 심한 성병에 걸린 것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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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은
기본 정보
정득은의 초상
정득은의 초상
본관영일(迎日)
자명(子明)
태촌(泰村)
생애
출생1384년 (고려 우왕 10년)
사망1453년 5월 17일 (조선 단종 1년)
묘소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관력
과거1414년 (태종 14년) 문과 급제
주요 관직집현전 학사
형조 참판
이조 참판
예조 판서
지중추원사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
좌찬성
판중추원사

2. 종교 활동

정득은은 황국주의 광해교회 소속이었으며, 문선명과도 만난 적이 있다. 1946년경 월남하여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을 찾아갔으나, 자신의 피를 먹이려다 거절당했다.[3] 이후 방호동 모자의 후원으로 삼각산 집회소를 세웠고, 박태선과 영체교환 의식을 했다고 전해진다.[4]

6.25 전쟁 중에는 피난 생활을 하며 에덴유치원을 세워 구호사업을 하기도 했다. 1953년경 김연의 도움으로 용산에 '대성심(大聖心) 기도원'을 설립했고, 1958년에는 방호동에게 받아 쓰게 한 계시문을 '생의 원리(生의 原理)'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1963년 '신단정도회(神檀正道會)'를 설립했으나, 1980년경 정득은의 사망으로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5]

2. 1. 초기 활동

정득은은 황국주의 광해교회 소속이었다고 한다.

신령파 교회를 찾아 평양으로 월북했던 문선명도 정득은을 만났다.

1946년경 월남한 정득은은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을 찾아갔고, 손을 잘라 그 피를 먹이려 했지만 김백문의 거절로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3]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만난 방호동 모자의 후원을 받아 삼각산 집회소를 세웠다.

이무렵 정득은의 추종자 중 한 명이 박태선이었고, 박태선의 집에서 영체교환 의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4]

1950년경 경제적 어려움과 6.25 전쟁으로 이곳저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서울에 에덴유치원이라는 것을 세워 구호사업을 하였다고도 한다.

1953년경 김연이라는 사람을 제자로 삼고 그의 협조로 서울 용산에 '대성심(大聖心) 기도원'이라는 단체를 세웠다.

방호동에게 받아 쓰게 했던 계시문을 1958년 '생의 원리(生의 原理)'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1963년에는 '신단정도회(神檀正道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1980년 무렵 신단정도회가 문을 닫았고, 그 원인은 정득은의 사망으로 추정된다.[5]

2. 2. 단체 설립 및 운영

정득은은 황국주의 광해교회 소속이었다고 한다. 신령파 교회를 찾아 평양으로 월북했던 문선명도 정득은을 만났다.

1946년경 월남한 정득은은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을 찾아갔고 손을 잘라 그 피를 먹이려 했지만 김백문의 거절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3]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만난 방호동 모자의 후원을 받아 삼각산 집회소를 세웠다. 이무렵 정득은의 추종자 중 한 명이 박태선이었고 박태선의 집에서 영체교환 의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4]

1950년경 경제적 어려움과 6.25 전쟁으로 이곳저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서울에 에덴유치원이라는 것을 세워 구호사업을 하였다고도 한다.

1953년경 김연이라는 사람을 제자로 삼고 그의 협조로 서울 용산에 '대성심(大聖心) 기도원'이라는 단체를 세웠다. 방호동에게 받아 쓰게 했던 계시문을 1958년 '생의 원리(生의 原理)'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1963년에는 '신단정도회(神檀正道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1980년 무렵 신단정도회가 문을 닫았고 그 원인은 정득은의 사망으로 추정된다.[5]

2. 3. 계시록 출판

1958년 방호동에게 받아 쓰게 했던 계시문을 《생의 원리(生의 原理)》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5]

3. 혼음 사건

정득은의 친딸은 한 탈퇴 신도에게 '자기 어머니가 인간 이하의 더러운 짓만 하고 다니므로 누구든지 자기 어머니를 가두어 주면 좋겠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정득은의 피갈음 실천 혼음 사건은 세계일보 김경래 기자에 의해 1957년 3월 18일자 세계일보에 보도되었다. 김경래 기자는 정득은을 직접 만나 심한 임질, 매독에 걸린 것을 확인하였다. 정득은은 취재 기자에게 피갈음 행위를 인정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6]

참조

[1] 문서 韓国のペンテコステリズムにおける「祈祷会運動」の展開 https://docs.google.[...]
[2] 뉴스 중앙일보
[3] 웹사이트 기독신문 http://www.kportalne[...]
[4] 잡지 신동아 https://shindonga.do[...] 2014-05-16
[5] 웹사이트 브레이크뉴스 http://www.breaknews[...] 2017-04-28
[6] 웹사이트 교회와신앙 http://www.ame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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