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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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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축하성은 1636년 청나라의 침략으로 일어난 병자호란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는 문서이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이끄는 청군은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했지만, 각지에서 파견된 근왕군이 청군에게 각개격파 당하면서 고립되었다. 결국 인조는 청에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의식을 치렀으며, 조선은 청의 속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청에 인질로 잡혀가고, 명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등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화사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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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으나, 1632년 후금은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압박을 가해왔다.[3] 1636년 국호를 으로 바꾼 후금은 조선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했고, 이는 결국 정축하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637년 1월 28일,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조칙을 내려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3]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복 조건



홍타이지는 조칙에서 조선이 잘못을 뉘우치고 청에 귀순하면 은혜를 베풀 것이라고 회유하면서, 동시에 인질 요구, 군사 파병, 세폐 등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여 조선을 압박했다.

2. 1. 국제 정세

17세기 초,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후 청나라)이 강성해지면서 명나라조선의 관계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전환되면서 후금과의 갈등이 고조되었다.[3]

2. 2. 조선의 상황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군은 전략적 요지에 축성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농성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성을 향했다. 각지의 근왕군 또한 청군의 별동대에 각개격파 당했다.[7]

이괄의 난 등으로 국방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다. 조선은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했으나, 후금(청)의 군사력에 대한 대비는 미흡했다. 인조는 근왕군이 후퇴하자 당황하여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조선군의 청군에 대한 공포감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했다.[7]

당시 조선군은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퇴각한 것이었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12,000명의 군사와 수만의 백성들을 지탱할 수 있는 비축 물자가 없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철의 혹심한 추위로 인한 동사자가 다수 발생했으며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왕인 인조조차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결국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7]

3. 병자호란의 전개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항복 조건은 가혹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


  • 조선은 청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
  • 조선은 명으로부터 받은 고명(조선왕 책봉 문서)과 책인을 청에 헌납할 것.
  • 명과 단교하고 명의 연호는 사용하지 않을 것.
  • 왕의 장남과 차남, 대신의 자식, 대신에게 자식이 없는 경우에는 그 동생을 인질로서 청에 보낼 것. 또한 어떤 불측의 사태가 발생하면 인질인 왕자를 조선왕으로 옹립할 것이니 각오할 것.
  • 청이 명을 정복할 때에는 명령을 내리고, 사신을 보낼 것이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수만 명 규모의 보병·기병·선원을 요구받은 기한까지 지체 없이 파병할 것.
  • 또한 청군이 압록도[4]를 공격하기 위해 배 50척, 수병, 창포 등을 준비해 둘 것.
  • 성절(청 황제의 생일)이나 정월 등 경조사가 있을 때에는 관례에 따라 대신이나 내관이 헌례를 올릴 것.
  • 청군에게 잡힌 조선인 포로가 압록강을 건너거나 조선으로 돌아왔을 경우, 송환할 것.
  • 내외의 여러 신하와 혼인을 맺어 우호를 굳건히 할 것.
  • 신구의 성곽은 청의 사전 허가 없이 수리·증축하지 않을 것.
  • 지금까지와 같이 일본과의 무역을 허가할 것.
  • 매년 금 100냥, 은 1000냥 외에, 수소뿔 활 200개, 표범가죽 100장, 사슴가죽 100장 등 20종류의 물품을 헌납할 것.


1637년 1월 28일,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조칙을 내려 과거의 죄를 용서하고, 조선이 청과의 신의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 조칙에는 명과의 관계 단절, 청의 연호 사용, 왕자와 대신 자제들의 인질 요구, 군사 지원, 포로 송환, 혼인 관계, 성곽 수리 제한, 일본과의 무역 허가, 조공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3]

결국 인조는 1637년 2월 24일,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며 청에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3. 1. 청군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1636년 12월, 홍타이지가 이끄는 청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했다. 청군은 기병 중심의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조선 전역에 공포를 일으켰다. 조선군은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성에서 적을 막는 전술을 사용하려 했으나, 팔기군 중심의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한성으로 직진했다. 각지의 조선 근왕군도 청군 별동대에 의해 각개격파되어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7]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전쟁 준비가 부족했고, 남한산성에는 12,000명의 군사와 수만 명의 백성을 위한 물자가 없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고립되어 보급이 끊겼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인조는 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군사들은 군마를 잡아먹는 상황까지 벌어졌지만, 인조는 항복을 거부했다.[7] 1637년 2월 4일, 청군과의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대립했다.

청군은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남한산성 내부를 포격했다.[7] 조선군은 천자총통으로 반격했으나, 물자 부족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홍이포의 포격은 남한산성 성벽에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조선군의 사기를 꺾었다.[8]

1637년 2월 16일, 봉림대군과 비빈들이 피난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은 2월 19일 남한산성에 전해져 조선군의 항전 의지를 꺾었다. 결국 2월 22일, 인조는 항복을 결정하고, 2월 24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8]

3. 2.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

홍타이지가 이끄는 약 10만 명의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자, 1637년 1월 9일 인조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각 도에 근왕병(勤王兵) 소집 명령을 내렸다.[5]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해야 할 도원수 김자점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각개격파 당했다.[5]

각 도 근왕군의 동향은 다음과 같다.

지역감사/병사병력 규모주요 전투 및 결과비고
강원도감사 조정호약 7,000명1월 19일 검단산 전투 패배, 가평으로 퇴각[6]원주 영장 권정길의 선봉대 1,000여 명이 검단산 진출 후 청군에 격파
함경도감사 민성휘약 7,000명양평에서 김자점과 합류 시도, 김자점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전투 불참북병사 서우신과 지휘권 분쟁, 김자점과 합류 후 병력 23,000명으로 증가했으나 김자점은 움직이지 않음
충청도감사 정세규불명1월 27일 험천에서 남한산성에 신호, 청군 요격에 10여 차례 방어 성공, 탄약 부족 및 지휘관 전사로 퇴각[7]1월 20일 공주 출발
평안도감사 홍명구, 병사 유림불명철원, 연천 등에서 청군 별동대에 저지, 1637년 2월 22일 금화 부근 전투에서 홍명구 전사, 유림은 청군 격퇴 후 물자 부족으로 퇴각1637년 1월 13일 평양 출발
전라도감사 이시방, 병사 김준용약 8,000명 (승병 2,000명 포함)1월 29일 광교산 전투, 김준용이 청군 장수 양고리 사살, 물자 부족으로 수원 퇴각, 이시방 본대는 공주 방면 철수1월 15일 근왕 명령, 전주 군영 출발
경상도감사 심연,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약 40,000명 (8,000명 이상 확실)1637년 1월 28일 쌍령 전투 대패, 허완, 민영 전사, 심연은 조령 이남으로 철수[7]청군 300여 기병과 1,000여 보병에 패배, 조선군 조총병 훈련 미숙과 화약 소진이 원인



결국 8도의 근왕군은 모두 청군에게 각개격파당했고,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7]

3. 3. 남한산성 항전과 강화

청나라 군대가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오자, 조선군은 임진왜란 때처럼 산성에서 적을 막는 전략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바로 한성을 향했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근왕군도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각개격파되어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7] 인조는 근왕군이 후퇴하는 것에 당황하여 청나라 군대를 피해 달아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조선군의 두려움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했다.

조선군은 전쟁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성 안으로 들어온 12,000명의 군사와 수많은 백성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부족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보급을 기대할 수 없었고,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떨어졌다. 게다가 겨울 추위로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았고, 식량마저 바닥나기 시작했다. 인조조차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때우는 상황이었고, 굶주린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결국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7] 하지만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했고, 2월 4일 전쟁을 끝내기 위해 청군과 협상을 시작했지만, 내부에서는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청군은 근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겨냥하여 포를 쏘기 시작했다.[7] 조선군은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곳에 반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물자가 부족하여 오래가지 못했다. 215cm 포신과 10cm 구경에서 발사된 탄환은 남한산성 성벽을 공격했고, 직접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8]

2월 16일, 봉림대군과 왕실 가족들이 피난했던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었다. 이 소식은 2월 19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조선군의 항전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결국 2월 22일, 인조는 항복을 결정했고, 2월 24일 남한산성에서 나오게 되었다.[8]

3. 4. 삼전도의 굴욕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인조는 항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8] 하성이라는 용어를 쓰도록 했다.[8] 처음, 청군은 항복 의식으로서 반합(飯哈)을 요구했다. 이는 마치 장례를 치르듯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항복'하는 것이었다.[9] 나중에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타협에는 성공했지만, 이 또한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의식이었다.[9] 1637년 2월 24일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의 어가(御駕)는 한강을 건너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했고, 공식적으로 청에 항복했다. 임금이 오랑캐라 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것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다고 자부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기념해 삼전도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했다.

4. 강화 조약의 내용

인조1637년 1월 30일(음력 1월 3일)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면서 맺은 조약으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복 조건



인조는 항복의 굴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성(下城)'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했다.[8] 그러나 항복 의식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 굴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9]

1637년 1월 28일,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가 조선 국왕에게 조칙을 내린다. 그대가 올린 상소를 보니, 지난 조칙의 내용을 자세히 적고, 종사와 백성을 위한 계책을 걱정하면서, 명나라가 내린 조칙의 내용을 공개하여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간청했는데, 혹시 내가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가? 그러나 나는 본래 성심으로 대하며, 이전의 말을 반드시 지킬 뿐 아니라, 앞으로 있을 개혁에도 함께 할 것이다. 이제 과거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를 자세히 정하여, 임금과 신하가 대대로 지킬 신의로 삼는다.

만약 그대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되어, 은혜를 잊지 않고 스스로를 맡겨 귀순하여 자손 대대로 이어갈 계책으로 삼으려 한다면, 이제 명나라가 주었던 고명과 책인을 바치고, 그들과의 교류를 끊고, 명의 연호를 버리고, 모든 공문서에 우리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남과 차남을 인질로 하고, 여러 대신들은 아들을, 아들이 없는 자는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약 그대에게 예측 못한 일이 발생하면, 나는 인질로 잡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할 것이다.

내가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 그대 나라의 보병, 기병, 수군을 징발하여, 수만 명을 동원하거나 기한과 집결지를 정하면, 실수가 없도록 하라. 내가 이번에 군대를 돌려 압록도를 공격하여 취할 것이니, 그대는 배 50척과 수병, 창포, 궁시들을 모두 스스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또 대군이 귀환할 때에는 군량을 대접하는 예를 올려야 할 것이다.

성절(聖節), 정월, 동지, 중궁 천추(中宮千秋), 태자 천추, 경조사 등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예를 갖추고 대신과 내관에게 명하여 표문을 받들어 올리도록 하라. 올리는 표문과 전문의 형식, 내가 조칙을 내리거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사신을 보내는 경우 그대와 사신이 만나는 일, 또는 그대 신하가 알현하는 일, 영접하고 전송하는 일, 사신을 대접하는 예절 등은 명나라 때의 관례와 다르지 않도록 하라. 군중의 포로가 압록강을 건너 도망쳐 돌아온다면, 잡아서 본 주인에게 보내야 한다. 속량하고 돌아가려 한다면, 본 주인의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 우리 군사들이 죽을 각오로 싸워 얻은 포로들이니, 그대는 나중에 감히 묶어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내외의 여러 신하와 혼인을 맺어 화목을 굳게 하도록 하라. 새로운 성곽이나 기존 성곽을 수리하거나 증축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오량하(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숙청하라. 일본과의 무역은 그대가 예전처럼 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정에 오게 하라. 나도 장차 사신을 그들에게 보낼 것이다. 동쪽의 오량하에 도피하여 사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지 말고, 발견되면 잡아 보내야 한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내가 살려주고, 거의 멸망할 뻔한 종사를 보존하고, 이미 잃은 처자식도 지켜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장차 신의에 어긋나지 않으면, 그대 나라는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나는 그대 나라가 거듭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큰 조칙으로 보이는 것이다. 숭덕(崇德) 2년 정월 28일.



또한 조선은 매년 다음과 같은 물품을 세폐로 바쳐야 했다.

세폐 품목


5. 병자호란의 영향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하고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1637년 1월 28일,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인조에게 조칙을 내려 조선을 속국으로 삼고 명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3]

조선은 청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명으로부터 받은 고명(조선왕 책봉 문서)과 책인을 반납해야 했다. 또한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청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다. 왕자와 대신의 자제들을 인질로 보내고, 청의 명 정벌에 군사를 지원해야 했다. 성절(청 황제 생일) 등 경조사에는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고, 매년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쳐야 했다.[3]

특히, 조선은 매년 금 100냥, 은 1000냥 외에 수소뿔 활, 표범가죽, 사슴가죽 등 20종류의 물품과 쌀 10000포대를 세폐로 바쳐야 했다.[3]

5. 1. 정치적 변화

1637년 강화조약의 결과로 조선청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명나라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8]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 김상헌 등의 왕족과 대신들이 청나라 선양으로 인질로 끌려갔다.[9]

1640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임경업을 지휘관으로 한 6,0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의 명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1643년 임경업은 명에 투항했다.[8]

1645년 청나라에 볼모로 억류되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했으나, 2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자빈 강씨는 사사되었으며,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이후 효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5. 2. 사회·경제적 피해

정축하성으로 많은 백성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막대한 세폐 부담은 조선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7] 청군은 기병 중심의 편제였고 진격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청나라 군사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선군은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요 지점에 있는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막는 전략을 사용하려 했지만,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성을 향했다. 각 지역의 근왕군 또한 청군의 별동대에 각개격파되어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7]

6. 의의 및 평가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조선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화사상에 기반한 존명배청(尊明排淸) 의식이 강화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3] 김상헌, 최명길 등의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 논쟁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고뇌를 보여준다.

조선은 1393년 이성계가 명나라 초대 황제 주원장에게서 권지조선국사(權知朝鮮國事)에 봉해진 이후 명의 속국이었으나, 정축하성 이후 청의 속국으로 바뀌었다. 조선은 정식으로 청의 속국이 되어 매년 상납하는 물품의 양은 줄었지만, 닛신 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4월 17일)까지 이러한 기조가 유지되었다.[4]

7. 병자호란 관련 인물

병자호란과 관련된 주요 인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 '''인조''':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막는 전략을 세웠으나, 청군의 빠른 진격에 실패하고 항복하였다.
  • '''김상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주전파의 중심 인물이다.
  • '''최명길''':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한 주화파의 중심 인물이다.
  • '''봉림대군''': 강화도로 피난 갔으나,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조선군의 항전 의지를 꺾는 계기가 되었다.

7. 1. 조선

인조는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막는 전략을 세웠으나,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한성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각지의 근왕군 또한 청군의 별동대에 각개격파 당했다.[7] 인조는 근왕군 후퇴에 당황하여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조선군의 사기를 높이지는 못했다.

조선군은 전쟁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퇴각하여, 성 내부의 군사와 백성들을 위한 비축 물자가 없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고립되어 보급이 끊겼고, 겨울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인조조차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때우는 상황이었고, 굶주린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었으며, 아사자가 속출했다.[7] 그럼에도 인조는 항복을 거부했으며, 2월 4일 청군과의 협상을 시작했으나,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을 중심으로 하는 주화파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청군은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했다.[7] 조선군은 천자총통을 이용해 반격했으나, 물자 부족으로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홍이포의 공격은 남한산성 성벽에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조선군의 사기를 꺾었다.[8]

2월 16일, 봉림대군과 비빈들이 피난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은 2월 19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조선군의 항전 의지를 꺾었다. 결국 2월 22일, 인조는 항복을 결정했고, 2월 24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8]

참조

[1] 문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2] 문서 조선국 대관
[3] 문서 조선의 국새
[4] 문서 압록강 하구의 섬
[5]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6] 웹인용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검단산에 도착했으나 적의 습격으로 패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6일 병신 3번째기사
[7]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8]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9]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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