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은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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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국은행 사건은 1948년 1월 26일 일본 제국은행 시이나마치 지점에서 발생한 대규모 독살 사건이다. 후생성 기술관을 사칭한 남성이 은행 직원과 가족 16명에게 청산가리로 추정되는 독극물을 마시게 하여 12명이 사망하고 현금과 수표를 강탈했다. 수사 과정에서 범인이 구 일본군 731부대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템페라 화가 히라사와 사다미치가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히라사와는 고문과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요구했으나 1987년 옥사했다. 사건의 진범과 GHQ의 개입 의혹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잔혹 행위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형태로 재조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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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행 사건 | |
---|---|
사건 개요 | |
명칭 | 제국은행 사건 |
영어 명칭 | Teigin Incident |
사건 정보 | |
발생 장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미아동 (현재의 강북구 미아동) |
위도 | 알 수 없음 |
경도 | 알 수 없음 |
발생 날짜 | 1948년 (쇼와) 23년 1월 26일 |
사건 유형 | 독극물 살인 사건 |
피해 정보 | |
사망자 | 12명 |
부상자 | 알 수 없음 |
실종자 | 알 수 없음 |
피해자 | 알 수 없음 |
피해 규모 | 알 수 없음 |
용의자 정보 | |
범인 | 히라사와 사다미치로 추정 |
혐의 | 알 수 없음 |
동기 | 알 수 없음 |
연루 | 알 수 없음 |
사건 대응 | |
방어 | 알 수 없음 |
대처 | 알 수 없음 |
사과 | 알 수 없음 |
배상 | 알 수 없음 |
추가 정보 | |
![]() |
2. 사건 발생
1948년 1월 26일 오후 3시경, 은행이 문을 닫은 직후 도쿄도 방역반 완장을 찬 중년 남성이 후생성 직원 명찰을 제시하며 제국은행 시이나마치 지점에 나타났다. 그는 "근처 가택에서 집단 이질이 발생했고, GHQ가 은행을 소독하기 전에 예방약을 마셔야 한다"고 은행원과 용무원 가족 16명(8세 ~ 49세)을 속였다.[1]
범인은 치밀한 수법을 사용했다. 희생자 전원이 충분히 마실 수 있도록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는 약물을 사용했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또한 "치아의 에나멜질이 손상되지 않도록 혀를 내밀어 마셔달라"는 등 구체적인 복용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16명 전원이 첫 번째 약을 마시자 위스키를 마셨을 때처럼 가슴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1분 후, 범인이 두 번째 약을 건네자 씁쓸함을 느끼던 사람들은 급히 약을 마셨다.
은행원 중 한 명이 "입을 헹구고 싶다"고 요청하자 범인은 이를 허락했다. 희생자들이 부엌 싱크대에서 입을 헹구려 할 때, 여성 한 명이 실신을 반복하면서 범행이 발각되었다. 이들은 청산가리를 복용한 것으로, 그 결과 1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병원으로 옮겨진 1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범인은 현금 16만 엔과 야스다 은행 이타바시 지점의 수표 1만 7450엔어치를 훔쳐 도주했다. 당시 일본은 상하수도 시설이 미비하여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컸고, 혼란스러운 현장 상황으로 인해 경찰의 초동 수사가 지연되어 범인을 잡지 못했다. 훔친 수표는 사건 다음 날부터 현금으로 환전되었지만, 관계자가 수표 도난을 확인한 것은 사건 발생 이틀 뒤였다.[1]
피해자 16명 중 12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했다. 사망자 중에는 사무원 가족 4명(부부, 딸, 아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3개월 된 태아도 있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은 35세 2인 가족 기준 세후 5200엔, 여성 사무원은 평균 2000엔이었다. 범인이 훔쳐간 18만 엔이 넘는 금액은 신엔 전환이 이루어진 전후 혼란기에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0배 정도 되는 거액이었다.
피해자 명단
구분 | 이름 | 성별 | 나이 | 비고 |
---|---|---|---|---|
시이나마치 지점 내 사망 | W | 남 | 43세 | ||
N | 남 | 39세 | ||
S | 남 | 29세 | ||
A | 여 | 23세 | ||
U | 여 | 19세 | ||
K | 여 | 16세 | ||
T자와 | 남 | 49세 | ||
T자와 | 여 | 49세 | ||
T자와 | 여 | 19세 | ||
T자와 | 남 | 8세 | ||
병원 이송 후 사망 | S | 남 | 22세 | ||
T자와 | 남 | 47세 | ||
병원 이송 후 생존 | Y | 남 | 43세 | ||
A | 여 | 19세 | ||
T | 남 | 20세 | ||
M | 여 | 22세 |
2. 1. 유사 사건
- 1947년 10월 14일, 야스다 은행 에바라 지점에서 "후생기관 의학박사 마츠이 시게루, 후생성 예방국"이라는 명함을 제시한 남자가 "이질 감염 환자가 오전에 예금하러 왔으므로, 은행 직원들과 돈을 소독해야 한다"고 말했다.[86][87] 지점장은 그를 기다리게 하고 순경을 불러 문의했고, 그 사이 남자는 제국은행 사건과 같은 수법으로 직원들에게 약을 먹였다.[88]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으며, 명함은 진짜였지만 마츠이 박사는 알리바이가 있어 범인이 아니었다.[85]
- 1948년 1월 19일, 미쓰비시 은행 나카이 지점에서 "후생성 기관 의학박사 야마구치 지로, 도쿄도 방역과"라는 명함을 제시한 남자가 야스다 은행 에바라 지점 사건과 비슷한 말을 했다.[90] 은행원들에게 약을 먹이고 돈을 소독하려 했으나, 미심쩍게 생각한 지점장이 현금 수송은 없었다고 하자 남자는 소액환에 소독약이라는 액체를 뿌리고 나갔다. 명함은 가짜였다.[89]
3. 초동 수사
사건 발생 후, 경찰은 지점장의 기억, 유사 사건들의 증거물,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몽타주, 사건 다음 날 현금으로 바뀐 수표를 단서로 수사를 진행했다.[91][92] 일본 경시청은 용의자를 다음과 같이 좁혔다.
세 사건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았다.
시체에서 청산 화합물이 검출되자, 경찰은 그 취급법을 알고 있는 구 일본군 세균부대(731부대) 관계자를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육군 제9연구소(노보리토 연구소) 소속 반 시게오(伴繁雄)에게서 유력한 정보를 얻어, 사건 발생 6개월 후인 6월 25일 수사 방향을 군 관계자 일부, 육군의 특수임무 관계자로 좁혔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범행에 사용된 독극물은 단순한 청산가리가 아니라, 노보리토 연구소에서 개발했던 아세톤 시안하이드린(니트릴)과 비슷했다. 경시청은 만주에서 각종 전쟁용 세균을 연구한 이시이 시로와 731부대 전역자 중에 범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수사 요강은 다음과 같았다.[97]
한편, 명함반은 유사 사건에서 악용되었던 마츠이 시게루의 명함을 중심으로 수사했다. 명함을 건넨 날짜, 장소, 상대가 기록되어 있었고, 100장의 명함 중 62장을 회수, 22장은 분실되어 사건과 관계없음을 확인했다. 행방불명된 8장 중 1장이 사건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돌연 일본 미 군정이 육군 관계자에 대한 수사 중단을 명령했다.
4. 히라사와 사다미치 체포와 재판
8월 21일, 마쓰이 시게루와 명함을 교환한 사람 중 한 명인 템페라 화가 히라사와 사다미치가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체포되었다.
히라사와를 체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유 | 내용 |
---|---|
명함 | ‘마쓰이 시게루의 명함’을 받은 사람 중, 히라사와는 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히라사와는 지갑을 도둑맞았다고 도난계를 내보내고 있었다). |
알리바이 | 히라사와는 “사건 발생 시각에 현장 부근을 걷고 있었다”[98] 고 진술했지만, 그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었다. |
전과 | 과거 수표 사기를 한 전과가 있었다. |
돈의 출처 | 사건 직후에 피해 총액과 거의 같은 금액의 돈을 예금했고, 그 출처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99] |
경찰은 히라사와와 피해자들을 대질했지만, 히라사와가 범인이 아니라고 단언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체포될 때부터 히라사와는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했지만, 이후 자백과 부인을 반복했다. 1950년 7월 24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1심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51년 9월 29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항소가 기각되었으며, 1955년 4월 7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5월 7일에 사형이 확정되었다.[98][99]
마쓰모토 세이초 등 지원자들이 히라사와의 구명 운동을 시작했다. 지원자들은 히라사와의 진술이 고문에 가까운 취조와 광견병 예방 접종의 부작용에 의한 코르사코프 증후군의 후유증인 정신질환(허언증)에 의한 것이기에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1954년(쇼와 29년), 이바라키현에서 보건소 직원으로 속여 사람들에게 청산을 먹인 대량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수법이 제국은행 사건과 매우 유사하여 히라사와의 변호인이 조사를 위해 현지에 잠입했지만, 체포된 용의자가 음독자살하여 소득이 없었다.
히라사와는 1962년(쇼와 37년) 미야기 형무소로 이감되었는데, 《타임》지는 환경이 좋지 않은 토호쿠로 히라사와를 보내 자연사시키려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100] 1968년(쇼와 43년) 재심특례법안이 제출되었고, 1969년(쇼와 44년) 법무대신이 사형수 7명에게 개별 특사를 검토했을 때 히라사와도 대상이었지만, 특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대 법무대신들이 히라사와의 사형집행 명령서에 서명을 거부하는 가운데, 1987년(쇼와 62년) 5월 10일, 히라사와는 하치오지 의료 형무소에서 95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히라사와 옥사 직후, 수사본부에 협력했던 반 시게오가 텔레비전에 출연해 범인은 히라사와가 아닌, 전 일제 육군 관계자라고 강조했다. 수사에 참가했던 나루치 히데오는 수기에서 “제국은행 사건은, 히라사와처럼 독극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인물은 불가능하며, 진범은 원래 비밀 부대에 있던 인물이다”[101]라고 썼다.
히라사와가 죽은 뒤에도 그의 양자와 지원자들이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 청구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헤이세이 20년) 현재, 도쿄 고등법원에 19번째 재심 청구가 신청 중이다.
4. 1. 자백을 둘러싼 논란
히라사와 사다미치는 체포 당시부터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했지만, 1948년 9월 23일부터 자백을 시작하여 10월 12일에 기소되었다. 그러나 12월 20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열린 공판에서 자백을 번복하고 무죄를 주장했다. 1950년 7월 24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고, 1951년 9월 29일 도쿄 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 1955년 4월 7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하여 5월 7일에 사형이 확정되었다.[98][99]히라사와의 자백은 여러 차례 번복되었다. 8월 21일 체포된 후, 경시청 송치 전 조사에서 한 번 자백했으나("환상의 자백"), 송치 후 검사 조사에서는 처음에는 부인, 이후 자백, 다시 부인하는 등 번복했다.
- 환상의 자백: 8월 23일 밤, 도쿄 도착 직후 히라사와는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담당 형사 이키이 고고로는 자백 조서를 작성하지 않아, 이 자백은 "환상의 자백"이 되었다.
- 송치 후 부인: 검사 다카기 하지메의 조사에서 히라사와는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했다.
- 자백의 시작: 1948년 9월 23일부터 히라사와는 자백을 시작했다. 10월 8일과 9일, 검사 이데이 요시오가 조서를 작성했다.
- 재차 부인: 재판 시작 직전, 히라사와는 자백을 철회하고 다시 부인했다. 그는 "최면술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77]
히라사와의 변호인단은 다카기 하지메의 조사가 고문에 가까웠고, 히라사와의 자백은 강요 또는 유도된 것이므로 증거 능력이 없으며, 이데이 요시오의 검면 조서는 날조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77]
히라사와는 1948년 8월 25일 유치장 안에서 유리 펜으로 왼쪽 손목 정맥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78]
히라사와는 UPI 통신사의 어네스트 호브렉트와의 인터뷰에서 경찰이 자신을 예의 바르게 대했고, 자백을 위한 고문은 없었으며, 자신을 조사한 검사 다카기 하지메를 "최고 수준의 신사(하이스트 클래스 제트먼)"라고 칭찬했다. 또한, 정신 감정서에는 히라사와의 정신 상태가 자백 후 평온해지고 숙면을 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라사와의 변호인 야마다 요시오는 히라사와가 고스게 구치소 이관 후 "밤이 되면 부처님이 매일 와서 노래를 하고 놉니다. 저는 이제 현신이 아니라 불신입니다."라고 말하는 등, 그가 미쳤다고 직감했다고 진술했다.[79]
이후 히라사와는 옥사할 때까지 무죄를 주장했다.[80]
5. 사형 판결 이후
마쓰모토 세이초, 고미야마 유시로 등 지원자들이 히라사와 사다미치의 구명 운동을 시작했다. 히라사와의 지원자들은 히라사와의 진술이 고문에 가까운 취조와 광견병 예방 접종의 부작용에 의한 코르사코프 증후군의 후유증인 허언증에 의한 것이기에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오무라 도쿠조 박사의 감정에 따르면, 사형 판결의 결정적 수단이 된 자백 조서 3통은 조사에 관여하지 않은 이데 요시오 검사가 백지에 히라사와의 지문을 찍게 한 것이었다.[98][99]
1962년 미야기 형무소로 이감된 히라사와를 두고 《타임》지는 환경이 좋지 않은 토호쿠로 보내 그를 자연사시키려는 것이 아니냐고 힐문했다.[100] 1968년 재심특례법안이 제출되었고 1969년 폐안되었는데, 법무대신이 사형수 7명에게 개별 특사를 검토했을 때 히라사와도 그 대상이었지만, 결국 특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대 법무대신들이 모두 히라사와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을 거부하는 가운데, 1987년 5월 10일, 히라사와는 폐렴으로 하치오지 의료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향년 95세였다. 히라사와 옥사 직후인 5월 25일, 수사본부에 협력해 왔던 반 시게오가 텔레비전에 출연해 범인은 히라사와가 아닌, 전 일제 육군 관계자라고 강조했다. 수사에 참가했던 나루치 히데오는 후에 수기에서 “제국은행 사건은, 히라사와처럼 독극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인물은 불가능하며, 진범은 원래 비밀 부대에 있던 인물이다”[101]라고 썼으며, “731부대원 중 50여 명을 조사한 결과, 경력·알리바이·인상이 일치하는 것은 ㅅ모 중령(사건 당시 51세, 사건 이듬해 병사)밖에 없다”[102]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731부대에서 ‘ㅅ 중령’과 성과 이름이 모두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성씨에 이름은 비슷하지만 다른 인물이 두 명 있었다는 증언이 있어, 나루치가 두 사람 이상을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히라사와가 죽은 뒤에도 그의 양자와 지원자들은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 청구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현재, 도쿄 고등법원에 19번째 재심 청구가 신청 중이다.
6. 독극물에 대한 의문점
시체 해부와 토사물, 그릇에 남은 액체 성분을 도쿄 대학과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분석했지만, 액체의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청산 화합물이라는 사실만 밝혀졌다. 도쿄 대학의 후루하타 다네모토와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나카다테 규헤이( 中舘久平|나카다테 규헤이일본어)의 감정이 서로 엇갈려 100% 정확한 감정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61]
당시 《요미우리 신문》 기자는 육군 제9연구소에서 아세톤 시안히드린(청산나이트릴)이라는 약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석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보통의 청산가리와 달리, 청산나이트릴은 마시고 1, 2분 후에 효과가 나타나는 지효성이 있다. 그러나 시체 해부 결과 청산화물이라는 것까지만 밝혀진 상황에서, 경찰 수사가 731부대에서 크게 멀어지자 보도와 취재도 방향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731부대에 대한 취재도 정지되었다.[61]
후루하타 다네모토는 제국은행 사건의 범인이 사용한 것은 "오래되어 풍화된 청산칼륨"이었다고 추정했다. 피해자는 구토하는 등 순수한 청산칼륨 중독과는 다른 증상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청산칼륨의 일부가 공기와 반응하여 탄산칼륨이 되었기 때문이다.[61]
7. 진범 논란
히라사와 사다미치가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범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여러 가지 주장과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수사 과정에서 GHQ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개입 여부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주요 진범 관련 주장:
- 구 일본군 관계자 설: 범인은 독극물 사용에 능숙한 전문가이며, 구 일본군, 특히 731부대나 육군 제9연구소(노보리토 연구소) 관련자라는 주장이다.
- 범인이 사용한 독극물이 일반적인 청산가리가 아니라, 지효성(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을 가진 아세톤 시안하이드린(일명 니트릴)과 유사하다는 점.[97]
- 범인이 사용한 피펫이 세균 연구소나 군에서 사용되던 고마고메 형 피펫이라는 점.[96]
- 범인이 약물 투여 시 매우 침착했다는 점.[96]
- 수사 과정에서 731부대 관계자 ㅅ모 중령(사건 이듬해 병사)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동일 인물이 없다는 증언이 있다는 점.[102]
- GHQ 개입설: GHQ가 731부대의 정보와 인력을 독점하기 위해 수사에 개입하여, 731부대 관련 수사를 중단시키고 히라사와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주장이다.
- 1948년 3월, 미 군정이 731부대 관련 수사와 보도를 금지했다는 사실이 1985년 요미우리 신문 보도로 밝혀졌다.[51]
- 히라사와의 셋째 딸의 남자친구였던 연합군 군인 엘리 하사가 히라사와의 알리바이를 증언할 수 있었으나, 법원이 증인 신청을 허가하지 않았다는 점.[53]
- 기타 주장:
- 히라사와가 종범이거나 부분적으로 관여했다는 설.
- 히라사와가 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범행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설.[72]
- 1954년 발생한 유사 사건(도쿠주쿠 마을 일가 9명 독살 방화 사건)의 용의자가 자살하면서 진상 규명이 어려워졌다는 점.
GHQ 개입에 대한 반론:
- GHQ는 일본 경찰의 수사에 협력했지만, 압력이나 개입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 수사본부는 히라사와 체포 후에도 구 육군 특무기관 계통 수사를 계속했다는 증언이 있다.
- 히라사와 체포 당시에도 수사본부는 구군 관계자 범인설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
이처럼 진범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부족한 상황이다. 히라사와 사다미치는 옥사했지만, 그의 양자와 지원자들은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 청구를 계속하고 있다.[71]
참조
[1]
문서
被害金額は、東京地裁の第1審判決書(昭和25年<1950年>8月31日)による。
[2]
학술지
琺瑯質かエナメル質か、間葉性エナメル質かエナメロイドか
https://doi.org/10.2[...]
鶴見大学
[3]
문서
帝銀事件の裁判で平沢貞通に死刑判決をくだした裁判官・江里口清雄によると、この巡査は「交番の若い教習所を出たばかりのおまわりさん」だった。自称「厚生技官」の犯人が行員らに薬を飲ませようとしたまさにその時、この若い警官がきて「赤痢がどこに出たのですか」と聞いた。すると犯人は「そんなことを警察が知らぬようじゃしょうがないじゃないか」云々と警官を怒鳴りつけた。若い警官は恐縮し、敬礼して出て行った。それを見た行員らは、それまで疑いの気持ちをもっていたのに、警官の態度を見て、てっきり本物の厚生技官であると信用してしまった。江里口清雄は「この警察官は意識しない犯罪幇助」を犯してしまったと述べ「事実の中には全く頭などでは考えられない、小説家でもちょと思いつかないような事実があるのであります」と評した。また江里口は、この時は犯人の薬が非常に薄かったため効き目がなく未遂に終わったこと、1人だけ最後まで犯人を疑い薬を飲むふりだけして飲まなかった者がいたこと、もし犯人の毒薬が濃く死者が出ていたら毒を飲んだふりをした者がいたため失敗していたはずであることも述べている。
日本弁護士連合会
[4]
문서
現行の刑事訴訟法は、帝銀事件発生の半年後、1948年(昭和23年)7月10日に公布され、容疑者の裁判が始まったあとの1949年(昭和24年)1月1日から施行された。
[5]
웹사이트
第2回国会 衆議院 本会議 第13号 昭和23年2月2日
https://kokkai.ndl.g[...]
[6]
문서
帝銀事件の捜査線上に浮かんだ容疑者は約5800名にも及んだ(高木1981、p.179)。平沢は、帝銀事件の犯人の人相と似ていたため、比較的早い段階で捜査の対象になったものの、有力容疑者にはなっていなかった。1948年8月18日、平塚八兵衛が話をきくため平沢の長女の勤め先に行くと、初対面の長女は「また、調べられるのですか」と言って急に泣き出し、平塚を驚かせた。以前、平塚とは別の刑事が聞き込みに来たことがあり、長女は、もし父が本当に犯人だったら、と気をもんでいたためであった。
新潮文庫版
[7]
뉴스
帝銀事件余聞 人相書を描いた絵師の話
1949-07-01
[8]
뉴스
帝銀事件
1985-05-23
[9]
서적
法曹あの頃(下)
日評選書
[10]
웹사이트
第2回国会 参議院 司法委員会 閉会後第1号 昭和23年9月13日
https://kokkai.ndl.g[...]
[11]
서적
死刑 消えゆく最後の野蛮
日本評論社
[12]
웹사이트
小樽で平沢貞通氏の春画発見!
https://www.gasho.ne[...]
2021-06-30
[13]
서적
科学捜査論文「帝銀事件」―法医学、精神分析学、脳科学、化学からの推理
[14]
웹사이트
日本語研究室 - 言葉の雑学その2 ~土地カンで捜査のプロがカンカン!?~
https://www.tv-asahi[...]
2022-05-07
[15]
서적
法曹あの頃(下)
日評選書
[16]
문서
新潮文庫版
[17]
웹사이트
https://kokkai.ndl.g[...]
[18]
뉴스
新潮文庫版
1985-05-23
[19]
문서
新潮文庫版
[20]
법률
東京高等裁判所 昭和56年(お)1号 決定
[21]
웹사이트
なぜ行員たちは乾杯するように毒を飲んでしまったのか――生存者が語った"帝銀事件"の悪夢「平沢は犯人と思えません」
https://bunshun.jp/a[...]
[22]
서적
帝銀事件の真実―平沢は真犯人か?
[23]
판결문
最高裁判所大法廷「昭和26(れ)2518」判決
1955-04-06
[24]
웹사이트
第2回国会 参議院 司法委員会 閉会後第1号 昭和23年9月13日
https://kokkai.ndl.g[...]
[25]
서적
愛憎を越えて―宿命の妻・平沢マサの手記
都書房
[26]
서적
日本の裁判史を読む事典
自由国民社
[27]
웹사이트
第22回国会 参議院 法務委員会 第2号 昭和30年3月31日
https://kokkai.ndl.g[...]
[28]
잡지
帝銀容疑者平沢画伯を父にもった娘の手記
1948-11
[29]
웹사이트
帝銀事件ホームページ
https://www.gasho.ne[...]
1962-06-28
[30]
서적
帝銀事件はこうして終わった―謀略・帝銀事件
[31]
뉴스
女死刑囚に初恩赦
1969-09-05
[32]
서적
藪の中の死体
新潮社
[33]
잡지
1993-07-11
[34]
서적
帝銀事件はこうして終わった
現代書館
[35]
서적
帝銀事件平沢貞通と一店主の半生
つげ書房新社, 鹿砦社
[36]
뉴스
Noose or Pneumonia?
http://www.time.com/[...]
タイム (雑誌)
[37]
간행물
週刊読売
1974-12-21
[38]
간행물
帝銀事件の二十七年間 消えてしまった遺族を追跡する!!
女性自身
1975-04-24
[39]
방송
誤判の生贄 ~魂の画家 死刑囚・平沢貞通~
北海道放送
[40]
국회기록
第108回国会 参議院 法務委員会 第2号 昭和62年5月14日 「089 遠藤要」
https://kokkai.ndl.g[...]
1987-05-14
[41]
서적
帝銀事件の真実―平沢は真犯人か?
講談社
1987
[42]
주간지
自殺未遂を起こした帝銀事件「平沢貞通」養子の葛藤
週刊新潮
2011-03-17
[43]
주간지
第19次再審請求の最中に孤独死していた『平沢貞通』養子
週刊新潮
2013-10-17
[44]
뉴스
帝銀事件・平沢元死刑囚の養子?死亡 東京の自宅で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13-10-02
[45]
뉴스
帝銀事件の再審請求終了 養子死亡で東京高裁 弁護団は異議
https://web.archive.[...]
産経新聞
2013-12-03
[46]
웹사이트
帝銀事件、20回目の再審請求
http://www.asahi.com[...]
2015-11-25
[47]
논문
二十次再審請求に提出された自白・目撃供述の心理学鑑定書
明治大学平和教育登戸研究所資料館
2019-09-25
[48]
논문
帝銀事件と奇術
1956-12-01
[49]
서적
近代日本奇術文化史
東京堂出版
2020
[50]
기타
[51]
간행물
自警
警視庁
1948-12
[52]
기타
帝銀事件と陸軍登戸研究所 ̶捜査手記から明らかになる旧日本陸軍の毒物研究̶
[53]
국회기록
第41回国会 衆議院 法務委員会再審制度調査小委員会 第1号 昭和37年10月10日
https://kokkai.ndl.g[...]
1962-10-10
[54]
기타
[55]
기타
[56]
기타
[57]
기타
[58]
기타
[59]
서적
帝銀事件捜査手記
[60]
기타
[61]
기타
[62]
뉴스
帝銀事件 米でGHQ機密文書発見 731部隊も捜査対象 毒物使用、教練通
読売新聞
1985-03-08
[63]
기타
[64]
서적
帝銀事件の全貌と平沢貞通
[65]
간행물
帝銀事件の悪夢
文藝春秋
1955
[66]
서적
甲斐捜査手記
[67]
논문
『甲斐捜査手記』より明らかになった旧日本陸軍の毒物研究とネットワークおよびGHQと交わされた"ギブ・アンド・テイク"
https://hdl.handle.n[...]
明治大学平和教育登戸研究所資料館
[68]
국회기록
法務委員会 第8号 昭和37年12月7日
https://kokkai.ndl.g[...]
1962-12-07
[69]
논문
帝銀事件の毒殺の手口と毒物の謎をめぐって
明治大学平和教育登戸研究所資料館
2019-09-25
[70]
강연
帝銀事件と日本の秘密戦:捜査過程で判明した日本軍の実態
明治大学平和教育登戸研究所資料館
2021-08-07
[71]
웹사이트
コラム 帝銀事件とは何だったのか-13 Vol.13 原渕 勝仁さん
https://ghq.club/?p=[...]
2021-07-04
[72]
문서
平沢クロ説に立つ中村正明によると、平沢貞通はコルサコフ病特有の記憶障害のうえに双極性障害と離人症も加わり解離性同一性障害(旧称「多重人格障害」)が生じていた(中村正明『科学捜査論文「帝銀事件」―法医学、精神分析学、脳科学、化学からの推理』2008年刊)。平沢が精神病質|サイコパス(精神病質者)だったなら、毒殺の時も落ち着き払いピペットを持つ手が緊張で震えることもなかったこと、犯行後も罪悪感をもたず口が達者で魅力的な人物に見えたこと、逮捕した刑事や取り調べを行った検事が見た平沢は不誠実な嘘つきだったのに拘置所の看守や支援者が見た平沢は生き仏のような人格者だったという二重人格性(弁護士の遠藤誠は「平沢氏普賢菩薩説」([[平沢貞通#エピソード]])を主張した)も合理的に説明できる。平沢冤罪説に立ち再審弁護団とも深くかかわった原渕勝仁は、平沢がコルサコフ症候群だったため「平沢の自白は証拠にならないということなのだが、逆に考えてみると、平沢には自分が犯行に及んだことも記憶から消失していた。だから自分はやってないと本気で死ぬまで〝嘘〟を主張し続けたともうがった見方ができなくもない。弁護団会議で、そのような平沢に不利になるような話をすることはタブーなのだが(下略)」と「
https://ghq.club/?p=[...]
[73]
문서
「東京高等裁判所 昭和31年(お)13号 決定」によると、獄中の平沢貞通は弁護士とともに「いわゆる帝銀事件の真犯人は平沢でなくH(原文では氏名を実名表記)であることが新に発見されたから、平沢に対しては無罪の言渡を為すべき理由があり、旧刑事訴訟法第四百八十五条第六号により再審請求をする」と主張したが、却下された。その後も平沢らは「未遂事件の犯人の目撃者のうち数名はHが似ていると証言」「Hの指紋は流れ指紋だが、帝銀椎名町支店に残された犯人の指紋も流れ指紋」「大村得三の筆跡鑑定によれば事件翌日に犯人が換金した小切手の裏書の筆跡はHと同一の可能性がある」「真犯人は自家用車で犯行直後の警戒網を巧みにくぐり抜けたはずだが、Hは自家用自動車を持っていた」などの理由を挙げて真犯人はHだと主張し続けたが、棄却された(「
https://web.archive.[...]
[74]
문서
佐伯省によると、731部隊の諏訪敬三郎(次項)を真犯人と主張した捜査二課の「成智主任は、他の捜査官は傍流だと言っているが、本当は犯人に対する人々の目を七三一部隊に向けさせるために、お人好しの成智が特命捜査主任などというもっともらしい名称を与えられて利用されただけで、'''主流の鈴木清捜査統括主任は上海で人体毒殺実験をやった陸軍中野学校出の特務機関員を本命とみて捜査していた'''のである」と指摘している。
批評社
2002
[75]
문서
秦郁彦によると、成智英雄がいうS中佐ことS・S(原書では実名)という姓名の人物は日本陸軍の軍医将校名簿には存在しない。該当しそうな似た名前の人物は、軍医大佐のS・K(精神科。原書では実名。1902年生まれ)と、軍医中佐のS・N(皮膚科医。原書では実名。1898年生まれ)の2人だけで、2人とも経歴は731部隊とは無関係だった。成智とその賛同者は明らかにS・Nのほうを念頭に置いていたと考えられるため、秦は1987年秋、F県(原書では実名表記)にあるS・Nの本籍地まで行って写真を入手し、帝銀事件の生き残りの1人M(旧姓。結婚後はT姓。原書では実名表記)に見てもらったが「犯人ではない」という返事を得た。
https://bunshun.jp/a[...]
文藝春秋社
1993
[76]
서적
疑惑α―帝銀事件 不思議な歯医者
講談社出版サービスセンター
1996
[77]
웹사이트
東京高等裁判所昭和31年(お)13号決定
https://web.archive.[...]
[78]
간행물
哀れむべき人間 ―わたしの見た平沢貞通―
週刊朝日
1950-08-06
[79]
문서
企画展「帝銀事件と登戸研究所」関連イベント 主催:明治大学平和教育登戸研究所資料館 特別プログラム 第二回講演会「帝銀事件第二十次再審請求の現状」
https://www.meiji.ac[...]
2021-06-16
[80]
회의록
第46回国会 衆議院 法務委員会 第41号 昭和39年6月5日
https://kokkai.ndl.g[...]
1964-06-05
[81]
웹사이트
帝銀事件を論ず
https://www.aozora.g[...]
청공문고
[82]
웹사이트
哀れなトンマ先生
https://www.aozora.g[...]
青空文庫
[83]
웹사이트
目をあいて見る
https://www.aozora.g[...]
青空文庫
[84]
웹사이트
表彰番組・事績
https://www.j-ba.or.[...]
一般社団法人 日本民間放送連盟
2021-05-30
[85]
문서
세이초, 위의 책 24쪽
[86]
문서
원문: 『厚生技官 医学博士 松井蔚 厚生省予防局』
[87]
문서
원문: 「赤痢感染した患者が、午前中に預金に訪れていることが判明したので、銀行内の行員と金を消毒しなければならない」
[88]
문서
원문: 「まったく寝耳に水の話だが署で確認する」
[89]
문서
세이초, 위의 책 23쪽
[90]
문서
원문: 『厚生省技官 医学博士 山口二郎 東京都防疫課』
[91]
문서
세이초, 위의 책 27쪽
[92]
문서
세이초, 위의 책 28쪽
[93]
문서
세이초, 위의 책 29쪽
[94]
문서
세이초, 위의 책 31쪽
[95]
문서
세이초, 위의 책 32쪽
[96]
문서
세이초, 위의 책 33쪽
[97]
문서
세이초, 위의 책 40쪽
[98]
문서
원문: 「事件発生時刻は現場付近を歩いていた」
[99]
문서
이 예금은 춘화를 그려 판 돈이라는 설도 있지만, 본인은 부정했고, 아직도 출처가 불분명하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소설 제국은행 사건》(小説帝銀事件)에서 춘화를 그렸다는 것이 알려지면 히라사와 자신의 화가로서의 명성에 누가 되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100]
웹사이트
Noose or Pneumonia?(타임지의 해당 기사)
http://www.time.com/[...]
2012-07-04
[101]
문서
원문: 「帝銀事件は平沢のように毒物に関する知識が何も持たない人物には不可能で、真犯人は元秘密部隊にいた人物」
[102]
문서
원문: 「731部隊の内50数人を調べた結果、経歴・アリバイ・人相が合致するのはS中佐(事件時51歳、事件翌年に病死)しかいない」
[103]
웹인용
당시의 신문 지면
https://web.archive.[...]
2011-03-11
[104]
웹인용
다카스기 하루오의 칼럼: 보도 사진과 인권
https://web.archive.[...]
201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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