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60년부터 기원전 445년까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의 배경은 아테네의 세력 확장, 메가라의 이탈, 스파르타의 경계심 등이며,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 반란에 아테네가 개입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전쟁 초기 아테네는 해상에서 우위를 점하며 승리했으나, 이집트 원정 실패, 보이오티아 반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기원전 451년 휴전 이후, 제2차 신성 전쟁과 보이오티아 반란을 거쳐 기원전 446/445년에 30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조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테베의 전쟁 - 펠로폰네소스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심의 그리스 도시 국가 간 장기간 전쟁으로, 아테네의 팽창주의가 스파르타의 불만을 촉발하여 발발,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나 아테네 제국 몰락과 그리스 세계 쇠퇴를 가져왔으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주요 기록이다.
  • 테베의 전쟁 - 코린토스 전쟁
    코린토스 전쟁은 기원전 395년부터 387년까지 스파르타와 테베, 아테네, 코린토스, 아르고스 등이 주축이 된 반(反)스파르타 동맹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스파르타의 패권에 대한 불만과 페르시아의 지원으로 시작되어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스파르타는 패권을 유지했으나 테바이와의 갈등으로 상실했다.
  • 델로스 동맹 - 펠로폰네소스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심의 그리스 도시 국가 간 장기간 전쟁으로, 아테네의 팽창주의가 스파르타의 불만을 촉발하여 발발,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나 아테네 제국 몰락과 그리스 세계 쇠퇴를 가져왔으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주요 기록이다.
  • 델로스 동맹 - 칼리아스 평화조약
    칼리아스 평화조약은 기원전 450/449년경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에 체결되었다고 전해지는 조약으로, 델로스 동맹의 반란 진압을 도왔지만, 조약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 아르고스의 전쟁 - 펠로폰네소스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심의 그리스 도시 국가 간 장기간 전쟁으로, 아테네의 팽창주의가 스파르타의 불만을 촉발하여 발발,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나 아테네 제국 몰락과 그리스 세계 쇠퇴를 가져왔으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주요 기록이다.
  • 아르고스의 전쟁 - 코린토스 전쟁
    코린토스 전쟁은 기원전 395년부터 387년까지 스파르타와 테베, 아테네, 코린토스, 아르고스 등이 주축이 된 반(反)스파르타 동맹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스파르타의 패권에 대한 불만과 페르시아의 지원으로 시작되어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스파르타는 패권을 유지했으나 테바이와의 갈등으로 상실했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전쟁 개요
명칭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기원전 460년 – 기원전 445년
장소고대 그리스 본토
결과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합의, "30년 평화"로 비준
교전 세력
교전 1델로스 동맹, 아테네 주도, 아르고스
교전 2펠로폰네소스 동맹, 스파르타 주도, 테베
지휘관
교전 1 지휘관페리클레스, 키몬, 레오크라테스, 톨미데스, 뮈로니데스, 카르니오스
교전 2 지휘관플레이스토아낙스, 니코메데스
영토 변화
주요 변화메가라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반환, 트로이젠과 아카이아는 독립, 아이기나는 아테네에 조공을 바치지만 자치권을 유지, 분쟁은 중재로 해결
주요 전투
주요 전투 목록아이기나 전투, 타나그라 전투 (기원전 457년), 오이노피타 전투, 제2차 신성 전쟁, 코로네이아 전투 (기원전 447년)

2. 배경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아테네의 장성 건설, 메가라의 변절, 스파르타의 ‘아테네 제국’에 대한 경계 등이 있다.[6][7]

아테네와 피라이우스를 연결하는 장성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아테네스파르타는 함께 페르시아를 상대로 공동으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처했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현대의 학자들이 ‘헬라스 동맹’(''Hellenic League'')이라고 부르는 패권을 쥐게 되었고, 기원전 479년 결정적인 승리로 끝난 미칼레 해전을 전면적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페르시아를 그리스 본토에서 물리친 후 그리스의 반격에서도 양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아테네는 에이온을, 스파르타는 비잔티움을 페르시아의 세력권에서 분리시켰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된 파우사니아스 장군의 난폭하고, 참주적인 행동으로 동맹 도시들은 스파르타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고, 그들은 아테네로 뭉쳤다. 그리고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여 기원전 478년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델로스 동맹 지도.


이 시점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테네에서는 반 스파르타 노선을 취하고 있던 테미스토클레스가 기원전 470년대에 도편 추방되었다. 그의 지위에는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밀티아데스의 아들이며, 친 스파르타 파인 키몬이 올랐다. 하지만 전쟁의 조짐은 기원전 460년대 말, 타소스 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타소스 인들은 스파르타에게 아티카를 침공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스파르타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지진과 헤일로타이와 위성 도시의 반란으로 실행에 이르지는 못했다.[60]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장성을 완성하기 전에 자신들의 우수한 병력으로 아테네를 기습할 계획을 하고 있었지만, 이 반란으로 실행을 하지 못했다.[61]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스파르타에서 일어난 헤일로타이의 반란이었다. 이 반란을 스스로의 힘으로 진압하지 못하자, 스파르타는 오래된 헬레네 동맹에 호소하며 동맹국과 아테네에 원군을 요청했고, 아테네는 키몬이 이끄는 4000명을 보냈다.[62][63] 그러나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그들의 행동에서건, 아니면 아테네군의 등장에서건 스파르타군을 모욕한 것이 되었고, 스파르타는 동맹국 중 아테네 군만 홀대했다.[64] 이러한 행위는 키몬의 정치적 신뢰를 파괴하였고, 이것으로 에피알테스가 주도하는 아테네의 반대파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으며, 이런 낭패를 당한 직후 도편 추방당했다. 스파르타의 적대 행위에 대한 증거는 명백했고, 아테네는 대응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헬레네 동맹을 탈퇴하고, 북방의 강력한 국가인 테살리아스파르타의 동맹국 코린트와 분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서 탈퇴한 메가라, 그리고 수세기동안 스파르타의 천적이었던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고 대결 자세를 밝혔다. 동시에, 아테네는 반란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해 추방당한 헤일로타이를 코린트 만에 있는 나우파크토스에 정착시켜 주었다. 기원전 460년경, 아테네는 코린트와 다른 여러 펠로폰네소스 국가들과 분쟁을 벌였고, 더 큰 전쟁이 임박한 것은 막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2. 1. 헬라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20년 전, 아테네스파르타페르시아 전쟁에서 협력하여 그리스를 지켜냈다. 스파르타는 헬라스 동맹의 패권을 장악하고 기원전 479년 미칼레 해전을 지휘하며 페르시아를 격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장군 파우사니아스의 전횡으로 동맹 도시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이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여 기원전 478년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맹주가 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는 초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아테네의 반 스파르타 노선을 취하던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70년대에 도편 추방되었고,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의 아들이자 친 스파르타 파인 키몬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460년대 말, 타소스 인의 반란 때 스파르타에 아티카 침공을 요청했고, 스파르타가 이를 수락했지만, 지진과 헤일로타이 반란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스파르타에서 일어난 헤일로타이 반란이었다. 스파르타는 헬라스 동맹에 원군을 요청했고, 아테네는 키몬이 이끄는 4000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는 아테네 군을 홀대했고, 이는 키몬의 정치적 신뢰를 파괴했다. 결국 키몬은 도편 추방을 당했다. 이후 아테네는 헬라스 동맹을 탈퇴하고, 테살리아, 메가라,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와 대결 자세를 취했다. 아테네는 나우파크토스에 헤일로타이를 정착시키기도 했다.

2. 2.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갈등 심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협력한 직후에는 비교적 원만했다. 아테네에서는 반(反)스파르타 노선을 주장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기원전 470년대에 도편 추방되었고, 친(親)스파르타 성향의 키몬이 집권하면서 양국 관계는 개선되었다.[14] 그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세력 확장에 대한 경계심을 키우고 있었다.[6] 아테네가 피레아스를 연결하는 장성을 건설하고,[8] 메가라펠로폰네소스 동맹을 탈퇴하여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는 등의 사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38]

기원전 460년대 타소스의 반란 당시, 스파르타는 아티카 침공을 고려하기도 했다.[16][17] 그러나 지진과 헤일로타이 반란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16][60][61]

2. 3. 헤일로타이 반란과 아테네의 개입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스파르타에서 일어난 헤일로타이의 반란이었다.[62][63] 스파르타는 자체적인 힘으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헬라스 동맹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에 아테네키몬이 이끄는 4,000명의 병력을 파병했다.[64] 그러나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는 아테네 군의 혁신적인 기풍과 도리스인이 아닌 이질적인 출신 성분을 경계하여 아테네 군만 돌려보내는 모욕적인 행위를 저질렀다.[20]

이 사건으로 키몬은 정치적 신뢰를 잃고 도편 추방되었다.[16][17]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적대 행위에 대응하여 헬라스 동맹을 탈퇴하고, 테살리아, 아르고스, 메가라와 동맹을 맺으며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동시에 아테네는 반란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해 추방당한 헤일로타이를 코린트 만에 있는 나우팍토스에 정착시켜 주었다.[60]

250px

3. 전개

그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리비아이나로스가 이집트의 대부분을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로부터 이탈시켜 반기를 들었다. 이나로스는 아테네에 원군을 요청했고, 아테네는 마침 키프로스에 있던 함대 200척을 보냈다. 그 한편으로 아테네는 그리스의 적과도 싸움을 벌여 여러 전선에 군대를 분산시켜 싸웠다. 기원전 460년과 그 다음 해에 아테네는 코린토스·에피다우로스 군과 싸워 패했지만, 케크리팔레이아에서는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격파했다. 또한 아이기나와의 전쟁도 시작되었지만, 이쪽은 아테네가 우세하게 진행되어 아이기나 시를 포위했다.

아테네가 여러 전선에 군대를 분산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코린토스는 수비가 허술했던 메가라를 공격했다. 코린토스 측은 메가라를 방어하려면 아테네는 아이기나에 전개해 있던 군대를 불러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테네는 아이기나의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노년대(51세에서 59세)와 청년대(18세와 19세)를 동원하여 미로니데스의 지휘하에 메가라로 보냈다. 그들은 코린토스군과 호각으로 싸워 진지를 굳게 지켰고, 양군은 물러났다. 노인들에게 조롱당한 코린토스군은 12일 후에 돌아왔지만, 아테네군에게 패했다. 그때 코린토스군의 많은 병사들이 주위에 도랑이 있는 막다른 사유지에 들어가 아테네군에 포위되어 전멸했다.

같은 도리스인이기 때문에 스파르타와 오랫동안 동맹을 맺고 있던 보이오스, 퀴티니온, 네소네온 등의 도시를 포함하는 도리스에 아테네의 동맹국 포키스가 침공하여 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 어린 왕 플레이스토아낙스를 대신하여 장군 니코메데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중장 보병 1500명과 그 동맹국 군 10000명이 도리스로 파견되어, 포키스가 점령한 도시를 내놓는 조약을 강요했다. 그러나, 해로로 돌아가려 해도 쿠사 만을 아테네 함대가, 육로로 돌아가려 해도 게라네이아 고개를 넘는 육로는 아테네와 메가라와 페가이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오티아로 향했다.

이에 대해 아테네는 아르고스군 10000명 외 동맹국을 합쳐 총 14000명의 군대로 출격했지만, 그중 테살리아 기병은 도중에 스파르타 측으로 배신했다. 그리고 기원전 457년에 타나그라 전투가 일어나, 양군 모두 다수의 사상자를 냈지만, 스파르타와 그 외 동맹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 군은 메가라에 들어가 게라네이아 고개를 넘어 귀국했다.

아테네는 미로니데스가 이끄는 군대를 보이오티아로 보내 오이노피타에서 보이오티아 군을 격파하고 타나그라의 방벽을 무너뜨리고 포키스와 로크리스를 지배하에 두고 테바이를 제외한 모든 보이오티아를 세력 하에 두어 전세를 회복했다. 그 후 곧 아이기나가 아테네에 굴복했고, 아이기나는 방벽을 무너뜨리고 선박을 제공하고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게다가 아테네는 톨미데스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했고, 그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주항하여 스파르타의 조선소를 불태우고 칼키스를 함락시키고 시키온에 상륙하여 시키온인을 격파했다.

3. 1. 초반: 아테네의 공세 (기원전 460년 ~ 기원전 457년)

기원전 460년, 아테네는 이집트 반란을 지원하는 동시에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며 여러 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다.[21] 초기에는 코린토스와 에피다우로스 군에게 할리에이스에서 패배했지만,[25] 케크리팔레이아(아이기나와 에피다우로스 해안 사이의 작은 섬) 해전에서 승리하고[65] 아이기나를 포위하는 등 해상에서 우위를 점했다.[1] 아테네의 이러한 공세에 위협을 느낀 아이기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연합하여 아테네에 대항하였으나, 해전에서 패배하고 70척의 함선을 나포당했다.[26]

그리스의 삼단노선, 그리스 국가들이 사용한 주요 선박 유형.


|150px|오른쪽|섬네일|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의 주요 병력이었던 호프라이트]]

아테네가 이집트와 아이기나에 병력을 집중한 틈을 타, 코린토스는 메가라를 침공하여 아테네 군을 분산시키려 했다.[67] 그러나 아테네는 노년층과 청년층으로 구성된 예비군을 뮈로니데스 지휘 하에 파견하여 코린토스 군과 대등하게 싸웠다.[27] 12일 후, 코린토스 군이 재차 공격해 왔으나 아테네 군에게 패배했고, 퇴각 중 많은 병사들이 농장 도랑에 갇혀 섬멸당했다.

현대 학자들은 전쟁 초기에 아테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메가라에 대한 통제를 꼽는다. 메가라는 아테네 노잡이들이 육로로 이동할 수 있는 코린트 만의 편리한 항구를 제공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상당수의 선박이 파게 항구에 보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8] 게라네이아 협곡은 소규모 병력으로도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에,[39] 코린트 지협이 봉쇄되고 아테네 함대가 코린트 만과 사론 만에 주둔한 상황에서 아티카는 펠로폰네소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했다.

3. 2. 타나그라 전투와 오이노피타 전투 (기원전 457년)



스파르타는 도리스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아테네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병하여 타나그라 전투가 벌어졌다.[29][30] 어린 왕 플레이스토아낙스를 대신하여 장군 니코메데스가 이끄는 스파르타의 중장보병 1,500명과 그 동맹국 병력 10,000명이 도리스에 파견되었는데, 이는 아테네의 동맹국 포키스가 도리스 인과의 동질감으로 스파르타와 오랜 동맹을 맺고 있던 보이오스, 퀴티니온, 네소네온 등의 도시를 포함한 도리스를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 군은 포키스에 점령한 도시를 내놓으라는 조약을 강요했지만, 귀환길에 문제가 발생했다. 해로로 돌아가는 길인 크사 만은 아테네 함대가 지키고 있었고, 육로인 게라네이아 고개를 넘는 길은 아테네, 메가라, 페가이가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 군은 보이오티아로 향했다.[31][32]

한편, 아테네는 아르고스 군 1,000명 등을 포함, 총 14,000명의 군대로 출격했다. 이 중 테살리아 기병은 도중에 스파르타 측으로 배신했다. 타나그라 전투에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스파르타와 동맹군이 승리했다. 이후 스파르타 군은 메가라로 들어가 게라네이아 고개를 넘어 귀국했다.

타나그라 전투 후, 아테네는 뮈로니데스의 지휘 하에 보이오티아로 진군하여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보이오티아 군을 격파했다.[36] 이 승리로 아테네는 테바이를 제외한 모든 보이오티아, 포키스, 로크리스를 장악하고 타나그라의 방벽을 무너뜨렸다.[36] 얼마 후, 아이기나가 아테네에 굴복하여 방벽을 파괴하고 선박을 제공하였으며, 델로스 동맹의 조공국이 되었다.[37] 아테네는 톨미데스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일주하며 스파르타의 조선소를 불태우고, 칼키스를 함락시켰으며, 시키온에 상륙하여 시키온에 승리를 거두었다.[36]

3. 3. 아테네의 패배와 휴전 (기원전 454년 ~ 기원전 451년)

기원전 454년, 아테네는 이집트 원정에서 메가비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에게 대패하였다.[41] 이들은 나일강의 프로소피티스 섬에서 1년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섬을 점령당하고 거의 모든 병력을 잃었다.[41] 이집트 반란을 주도한 이나로스는 붙잡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 패배로 아테네의 에게해 지배력이 크게 흔들렸고, 이후 몇 년간 델로스 동맹 재편과 세력권 안정에 주력하게 되었다.[43] 같은 해,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겨 동맹에 대한 재정 통제를 강화했다.[42]

한편, 테살리아에서 추방된 왕 오레스테스는 아테네에 복위를 요청했다. 아테네는 그를 돕기 위해 파르살로스를 침공했지만, 테살리아 기병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후 페리클레스가 이끄는 함대가 시키온 인들을 물리치고 아카르나니아를 침공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기원전 451년, 도편 추방에서 돌아온 키몬의 중재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5년간의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44][45] 이후 아테네는 에게해 지역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3. 4. 휴전 이후: 제2차 신성 전쟁과 보이오티아 반란 (기원전 449년 ~ 기원전 447년)

기원전 449년, 스파르타제2차 신성 전쟁을 일으켜 델포이포키스로부터 독립시켰다.[49][50] 기원전 448년, 아테네는 델포이를 다시 포키스에 반환하며 스파르타와 대립했다.[49][50]

기원전 448년 보이오티아에서 아테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기원전 447년, 톨미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군은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보이오티아, 로크리스, 에우보이아 군에게 패배했고, 아테네는 보이오티아를 상실했다.[51][52]

3. 5. 30년 평화 조약과 전쟁의 종결 (기원전 446년 ~ 기원전 445년)

기원전 448년, 보이오티아에서 아테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아테네 장군 톨미데스가 이끄는 군대가 출격하여 카이로네이아를 점령했으나, 기원전 447년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보이오티아, 로크리스, 에우보이아 군에게 패배했다.[52] 이 패배로 아테네는 보이오티아를 포기해야 했다.[52]

코로네이아 전투의 패배는 에우보이아와 메가라의 반란을 촉발시켰다.[51] 페리클레스는 에우보이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갔으나, 메가라가 코린토스, 시키온, 에피다우로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고, 스파르타 군이 아티카를 침공하면서 철수해야 했다.[53][54] 페리클레스는 협상과 뇌물을 통해 스파르타 왕 플레이스토아낙스를 설득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55]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스파르타로 돌아간 후 이점을 활용하지 못한 혐의로 기소되어 추방당했다.[56]

스파르타의 위협이 사라지자, 페리클레스는 50척의 배와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우보이아로 돌아가 반란을 진압했다.[55] 칼키스의 지주들은 재산을 잃었고, 아테네의 삼단노선 선원을 살해한 헤스티아이아 주민들은 추방되고 2,000명의 아테네 정착민으로 대체되었다.[55]

기원전 446년 또는 기원전 445년 겨울,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30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51] 이 조약으로 메가라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반환되었고, 트로이젠과 아카이아는 독립 국가가 되었으며, 아이기나는 아테네에 조공을 바치되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51] 또한, 분쟁은 중재로 해결하고, 각 당사자는 상대방의 동맹을 존중하기로 합의했다.[51] 아테네는 니사이아, 페가이, 트로이젠, 아카이아 등을 펠로폰네소스 측에 반환했고,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로 깨지게 된다.

4. 결과 및 영향

기원전 446년 또는 기원전 445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삼십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57][59] 아테네는 니사이아, 페가이, 트로이젠, 아카이아를 펠로폰네소스 측에 반환했고,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을 인정했다.[57][59] 이 조약으로 아테네의 해상 패권과 스파르타의 육상 패권이 인정되며 양대 세력 간 균형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깨졌다.[57]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반기는 아테네의 세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57] 아테네는 보이오티아와 메가라를 육상에서 장악하고, 함대로 해상을 지배했다.[57] 그러나 기원전 447년과 기원전 446년의 사건들로 이러한 지위가 무너졌고, 평화 조약은 양극 체제의 그리스를 만들었다.[58]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초전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전쟁의 경험은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양측의 전략과 전술에 영향을 미쳤다.

5. 주요 인물

5. 1. 아테네

5. 2. 스파르타

5. 3. 기타

6. 역사적 의의

7. 한국에의 시사점

참조

[1] 서적 Pausanias's Description of Greece https://books.google[...] Macmillan 1898
[2] 논문 Oenoe Painting in the Stoa Poikile, and Herodotus' Account of Marathon https://www.jstor.or[...] 1985
[3] 문서
[4] 서적 Thucydides https://books.google[...] Clarendon Press 1900
[5] 문서 The Peloponnesian War
[6] 간행물 Thucydides On Policy, Strategy, And War termination 2013
[7] 간행물 Thucydides On Policy, Strategy, And War termination 2013
[8] 문서 The Peloponnesian War
[9] 간행물 Thucydides On Policy, Strategy, And War termination 2013
[10] 간행물 Thucydides On Policy, Strategy, And War termination 2013
[11] 웹사이트 Library http://perseus.uchic[...] 2020-10-10
[12] 문서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13] 문서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14] 문서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15] 문서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16] 문서 The Peloponnesian War
[17] 논문 Sparta's Role in The First Peloponnesian War 1977
[18] 문서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19] 문서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20] 문서 The Peloponnesian War
[21] 문서 The Peloponnesian War
[22] 서적 A Selection of Greek Historical Inscriptions to the end of the Fifth Century B.C. 1969
[23] 서적 Greek Historical Inscriptions 478-404 BC 2017
[24] 문서
[25] 문서 The Peloponnesian War
[26] 문서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27] 문서 The Peloponnesian War
[28] 문서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29] 문서
[30] 문서 The Peloponnesian War
[31] 문서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32] 웹사이트 Library https://www.perseus.[...]
[33] Cite Cimon
[34] 문서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35] 논문 Sparta and The First Peloponnesian War 1985
[36] 문서 Thucydides 1.108 https://www.perseus.[...]
[37]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38]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39]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39]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40] 논문 Sparta and The First Peloponnesian War 1985
[41]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42] 서적 Greek Historical Inscriptions 478 - 404 Oxford University Press
[43]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44]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45] 문서 Library 11.86 http://perseus.uchic[...]
[46]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47]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48] 기타 Pericles 17
[49] 문서 Thucydides, I, 112 https://www.perseus.[...]
[50] 기타 Pericles 21
[51] 웹사이트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Peloponnesian War http://www.warhorses[...]
[52] 백과사전 Pericles
[53] 문서 Thucydides, II, 21 https://www.perseus.[...]
[54] 희곡 The Acharnians 832 https://www.perseus.[...]
[55] 기타 Pericles 23
[56] 기타 Pericles 22
[57] 서적 The Athenian Empire
[58]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59]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60] 서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101
[61] 논문 Sparta's Role in The First Peloponnesian War 1977
[62]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63]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64] 서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102
[65] 서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105
[66]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67] 서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105-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