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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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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42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도조 내각의 주도 하에 '대동아 전쟁 지원을 위한 총선거'라는 명목으로 실시되었다. 대정익찬회가 주도하여 치러졌으며, 모든 정당이 해산되고 대정익찬회에 합류하면서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 하에서 진행되었다. 선거 결과 대정익찬회 추천 후보가 압승을 거두었으며, 전시 동원 체제를 강화하고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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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선거 개요
국가일본 제국
선거 유형의회 선거
이전 선거1937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전 선거 연도1937년
다음 선거1946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다음 선거 연도1946년
선출 의석466석
과반 의석234석
선거 날짜1942년 4월 30일
선거 결과
1942년 일본 총선거, 결합된 득표율
각 선거구별 득표율 지도
주요 정당
지도자도조 히데키
정당대정익찬회
이전 선거 의석421석
획득 의석381석
총리
직책내각총리대신
선거 전 총리도조 히데키
선거 전 정당대정익찬회
선거 후 총리도조 히데키
선거 후 정당대정익찬회
관련 정보
아베 노부유키[[파일:Abe Nobuyuki.jpg|150x150px]]
아베 노부유키 취임일1942년 2월
아베 노부유키 선거구불출마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일본 내에서는 강력한 지도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신체제 운동이 일어났다.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일국일당 조직인 대정익찬회를 결성, 국민 동원 체제의 핵심으로 삼았다.[1]

1940년 근로국민당과 우익 정당인 동방회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자발적으로 해산하여 대정익찬회에 합류했고, 좌익 정당들은 해산되었다.

1937년 제2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선출된 중의원 의원의 임기는 1941년 제2차 고노에 내각에 의해 1년 연장되었다.[4] 이는 반정부 세력의 확대를 막고 군부에 협력적인 의원들로 의회를 구성하여 익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내무성은 정부와 군의 주도로 추천 후보 제도를 도입하여 국책에 충실한 의원들로 구성된 새로운 의회 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1942년 2월 23일 아베 노부유키를 회장으로 하는 익찬 정치체제 협의회가 결성되어 추천 후보를 선정했다.[6]

추천 후보는 선거 자금 지원 등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반면, 비추천 후보는 여러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를 야기했다.

3. 선거 과정

1940년, 근로 국민당, 우익 정당인 동방회, 입헌양정회 등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자발적으로 해산하여 대정익찬회에 합류했다. 이후, 대정익찬회에 합류한 정치가들에 의해 익찬의원동맹이 결성되었고, 태평양 전쟁 (대동아 전쟁) 하에서 군부의 방침을 추인하는 '''익찬 체제'''를 지지하는 기능을 수행했다.[1]

1937년 전회 총선거에서 선출된 중의원 의원의 임기는 1941년 중의원 의원 임기 연장에 관한 법률에 의해 1년 연장되었다.[4] 제2차 고노에 내각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대미 영전 시기에 "반정부적 세력의 신장이 보이면 적국에 '민심 이반'이라고 선전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임기 재연장을 요구했지만,[5] 군부에 협력적인 정치인만으로 의회를 점거하여 익찬 체제를 강화하려는 의견이 우세했다.

내무성 "혁신 관료"는 정부나 군 주도로 "추천 후보" 제도를 도입하여 국책에 충실한 의원만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자유 선거를 대신하는 새로운 선거 원리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1942년 2월 23일, 전 수상 아베 노부유키를 회장으로 하는 익찬 정치체제 협의회(익협)가 결성되어 후보자 추천을 주도했다. 기성 정당 출신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어 익찬회 내부 혁신파가 반발하기도 했다.

추천 후보는 선거 자금 (임시 군사비)을 지급받고, 군부나 대일본익찬장년단 등의 지원을 받아 유리한 위치에 섰다. 반면, 비추천 후보는 (스즈키 분지, 아사누마 이네지로 등) 입후보를 포기하거나, 선거 운동에서 유권자에 대한 간섭을 받는 등 불공정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해산된 좌익정당 인사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고, 대정익찬회에 합류하지 않은 동방회만 무소속 출마가 가능했다.[1] 도조 히데키 총리의 도조 내각1942년 4월 말, 둘리틀 공습 직후 "대동아 전쟁 지원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다.[1]

정당내역공고 전
bgcolor="#CE2029" |익찬 정치체제 협의회 추천466
bgcolor="#전송" |익찬 정치체제 협의회 비추천613
총계1,079
[https://dl.ndl.go.jp/info:ndljp/pid/1351321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일람. 제21회]



4. 선거 결과

의석득표수득표율bgcolor="#CE2029" |익찬 정치 체제 협의회 추천381bgcolor="#DDDDDD" |익찬 정치 체제 협의회 비추천85총계466100.0%유효표수 (유효율)99.01%무효표·백표수 (무효율)0.99%투표자수 (투표율)83.15%기권자수 (기권율)16.85%유권자수100.0%출처: [https://www.stat.go.jp/data/chouki/27.html 총무성 통계국]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결과


투표율은 83.1%로 매우 높았는데, 이는 전시 상황과 치열했던 선거전을 반영한 결과였다. 일부 선거구에서는 후보자가 무투표로 당선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승전 소식과 전쟁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대정익찬회 압승의 주요 원인이었다.[1]

선거 결과 일본은 형식적으로 일당 체제가 되었으나, 익찬회 내부에서도 파벌이 형성되어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1]

4. 1. 정당별 의석수

정당의석수
대정익찬회381석
무소속85석
합계466석



이 선거에서 대정익찬회는 381석을, 무소속(비추천) 후보는 85석을 획득하였다.[1]

5. 주요 당선자 및 낙선자

도조 내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613명의 후보가 지지 없이 출마했으며, 이 중 466명만이 지지를 받았다.[1] 여러 비추천 후보들이 선거에서 당선되었는데, 여기에는 하토야마 이치로(훗날 총리를 역임했으며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할아버지), 미키 다케오(훗날 총리를 역임), 아베 간(아베 신조 총리의 할아버지), 미키 부키치 등이 있었다.[2][3] 낙선자 중에는 전후 공직에서 추방된 인물들도 있었지만, 사이토 다카오와 같이 전후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도 있었다.

5. 1. 비고

이 선거는 북방 영토에서 마지막으로 실시된 중의원 의원 총선거였다.[1] 또한 남성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된 마지막 국정 선거였다.[1] 본래 1941년 4월 29일에 임기가 만료될 예정이었으나, 전시 하의 특례 조치로 당시 중의원 의원에 한하여 그 임기를 1년간 연장하는 것을 법률(중의원 의원의 임기 연장에 관한 법률)로 정했고, 그것이 만료됨에 따라 실시된 총선거이다.

6. 한국의 관점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참정권이 완전히 박탈된 상태였다. 이 선거는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적인 식민 통치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이 선거를 통해 일본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이는 한국에 대한 억압 정책 강화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7. 영향

1940년 대정익찬회가 발족되어 국민동원체제의 핵심 조직이 되면서, 일본은 강력한 지도 체제를 형성하기 위한 신체제운동이 일어났다.[1] 익찬선거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치러진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일한 국정 선거였다.

익찬선거는 일본의 전시 동원 체제를 강화하고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조 내각은 익찬 정치체제 협의회를 통해 추천 후보 제도를 도입하여, 국책에 충실한 의원들로 의회를 구성하려 했다.[1] 추천 후보들은 선거 자금과 여러 단체의 지원을 받아 유리한 위치에 섰던 반면, 비추천 후보들은 선거 운동에 어려움을 겪었다.[2][3]

이러한 불공정한 선거 환경에도 불구하고, 비추천 후보 85명이 당선되었고, 이들은 전후 일본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익찬회 내부의 파벌 갈등과 비추천 의원들의 활동은 일본 정치의 다양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후, "익찬" 선거는 여당 또는 친여당 후보만 출마를 허용하거나 반정부 후보가 선거 방해를 받는 선거를 조롱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6] 이는 익찬선거가 공정성을 잃은 선거의 대명사로 여겨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참조

[1] 서적 The Pursuit of Power in Modern Japan 1825-1995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 뉴스 Japanese prime minister's another DNA http://english.donga[...] 2014-01-15
[3] 논문 Occupation Authorities, the Hatoyama Purge and the Making of Japan's Postwar Political Order http://www.japanfocu[...] 2014-01-15
[4] 간행물 議会制度百年史 資料編 大蔵省印刷局
[5] 서적 アジア・太平洋戦争 岩波書店
[6] 뉴스 香港立法会、親中派だけの「'''翼賛選挙'''」に 民主派「抵抗難しい」 https://mainichi.jp/[...] 2021-05-19
[7] 간행물 『官報』昭和18年8月2日 p.37 https://dl.ndl.go.jp[...]
[8] 간행물 『官報』第5076号、昭和18年12月13日
[9] 간행물 『官報』第5169号、昭和19年4月10日
[10] 간행물 『官報』第5254号、昭和19年7月20日
[11] 간행물 『官報号外』昭和21年12月18日 第89回帝国議会 衆議院議事速記録第16号 https://teikokugi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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