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틀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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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둘리틀 공습은 1942년 4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일본 본토를 처음으로 공습한 사건이다.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일본의 기세를 꺾기 위해, 육군 항공대 소속 지미 둘리틀 중령이 지휘하는 16대의 B-25 폭격기가 항공모함 호넷에서 발진하여 도쿄, 요코스카, 나고야 등 일본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 이 공습으로 일본에는 87명이 사망하고 가옥 400여 채가 파괴되었으며, 일본군은 큰 충격을 받아 미드웨이 해전을 서두르는 등 전략적 변화를 겪었다. 공습에 참여한 미군들은 대부분 중국에 불시착하거나 소련에 억류되었으며, 8명은 포로로 잡혀 전쟁 범죄자로 취급되어 3명이 처형되었다. 둘리틀 공습은 미국의 대일 적개심을 고조시켰으며, 이후 여러 영화와 책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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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공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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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공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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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 태평양 전쟁 중 일본 본토 공습의 일부 |
날짜 | 1942년 4월 18일 |
장소 | 도쿄 수도권 및 기타 일본 도시 |
결과 | 미군의 선전 승리; 미군 및 연합군의 사기 진작, 일본 산업 및 사기 저하 미군 공격대 전력 손실 저장-장시 작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250,000명의 중국 민간인 사망 |
교전 세력 | |
연합군 | |
지휘관 | |
연합군 | 제임스 H. 둘리틀 |
일본군 |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
전력 | |
연합군 | B-25 미첼 중형 폭격기 16대 항공병 80명 (장교 52명, 사병 28명) 항공모함 2척 순양함 4척 구축함 8척 |
일본군 | 미상 수의 가와사키 Ki-61 히엔 전투기 및 대공포 |
사상자 | |
연합군 | B-25 16대 손실 (15대 파괴, 1대 소련에 억류) 3명 사망 8명 포로 (4명은 구조되어 생존, 4명은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 3명 처형, 1명 질병으로 사망) |
일본군 | 50명 사망 400명 부상 (민간인 포함) 5명 선원 포로 순찰정 5척 침몰 거의 전환된 항공모함 1척 손상 |
영향 | |
일본 | 잠수모함 1척 소파 감시정 5척 침몰, 7척 손상 전투기 1대, 공격기 1대, 폭격기 3대 사고 손실 사망자 87명, 가옥 피해 286채 이상 |
미군 | |
피해 | B-25 전손 16대 함재 폭격기 1대 사고 손실 전사 1명, 행방불명 2명, 포로 8명 |
2. 배경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계속 패배하였다. 1942년 2월 24일에는 일본 해군 잠수함이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주 산타 바바라 엘우드의 정유소를 포격하여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76][77] 이러한 상황은 미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일본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일본 본토에 대한 보복 공격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1941년 12월 21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합동참모본부와 회의를 갖고 진주만 공격 이후 국민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일본을 가능한 한 빨리 폭격해야 한다고 말했다.[56]
이에 따라 미군은 일본의 수도 도쿄를 폭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해군은 미 해군 항공모함에 의한 본토 공습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만한 충분한 방어 수단을 갖추지 못했다.
1930년 시점에서 일본 해군은 미국 해군이 보유한 렉싱턴급 항공모함( 렉싱턴, 사라토가)에 의한 도쿄 공습과 항공모함 함재기의 폭격, 그리고 독가스에 의한 시민 피해를 지적하고 있었다.[78] 미군 항공부대가 소련 영토나 알류샨 열도에 기지를 설치하여 육상기로 일본 본토를 공습할 가능성도 있었다.[79]
일본군은 미군 항공모함의 접근을 조기에 탐지하고 격퇴하기 위해 감시선과 초계기를 배치했지만, 그 수가 부족하여 경계망에 허점이 많았다.[79] 또한, 일본군은 미군 항공모함 함재기의 항속거리가 짧다고 판단하여,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해상에서 항공모함을 요격하려는 전략을 세웠지만, 이는 도쿄 공습을 막는 데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1941년 12월 8일 개전 당시, 미국 해군은 작전 행동 가능한 항공모함 7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에서 일본 해군은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함 부대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항공모함 포획에는 실패했다.[81]
개전 이후, 일본 해군 잠수함 부대는 몇 차례 미 항공모함을 발견했지만, 피해를 줄 수 없었다.[81][82] 1942년 1월 초순, I-3 잠수함이 하와이 근해에서 미군 기동부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82] 1월 12일에는 I-6 잠수함이 사라토가를 대파했지만, 연합 함대는 렉싱턴의 격침을 확신하고 경계 태세를 완화했다.[83][84]
하지만, 미국군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1942년 2월 초순의 마셜-길버트 제도 기동 공습을 시작으로 웨이크섬이나 미나미토리시마 등 일본군의 경계가 허술한 거점에 견제 공격을 감행했다.[87][88] 일본 해군은 잠수함이나 육상 기지 항공대로 요격 또는 정찰 공격을 실시했지만, 미 기동부대를 포착할 수 없었다.[85][86]
2. 1. 미국의 공습 계획
미국은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과 일본 해군 잠수함의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주 엘우드 정유소 포격에 대한 대응으로, 국민 사기를 높이고 일본에 보복하기 위해 일본 본토, 특히 수도 도쿄를 폭격할 계획을 세웠다.[102]당시 미국 육군은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했지만, 일본을 폭격할 수 있는 기지는 없었다. 소련 영토는 일소 중립 조약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고, 미국 해군 항공모함 함재기는 항속거리가 짧아 항공모함을 일본 근해까지 접근시켜야 하는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해군 잠수함 승무원이 "항속 거리가 긴 육군의 폭격기를 항공모함에서 발진시키면 어떻겠는가"라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안했다.[107] 1942년 1월, 해군 작전부 작전 참모 프랜시스 S. 로우 해군 대령은 항공모함 호넷의 상황을 확인하던 중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얼네스트 J. 킹 제독과 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H. 아놀드에게 보고되었다.[108][109][110][111]
헨리 H. 아놀드는 지미 두들리틀 중령을 임무 지휘관으로 선정했다.[107][112] B-18, B-23, B-25, B-26이 후보로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B-25가 선정되었다.[113] B-25B 24기가 개조되었고, 제17 폭격대(제34, 제37, 제95 폭격 중대, 제89 정찰 중대)에서 자원자를 선발했다.[114][115]
개조 내용은 연료 탱크 증설, 하부 포탑 제거, 노르덴 폭격 조준기를 간이 조준기로 교체, 후부 포탑 제거 및 위장 덮개 설치 등이었다.[114][117][118][119] 1942년 2월 1일, 노퍽 해상에서 B-25B 발진 시험이 성공했다.[120][121]
이 작전은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며, 폭격 후 항공모함에 착함하는 대신 일본 열도를 횡단하여 중화민국 동부에 착륙할 예정이었다.[124] 장제스는 일본의 보복을 우려하여 착륙 연기를 요구했고, 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착륙을 소련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125][126] 결국 B-25는 항공모함 호넷 호에서 발진하고, 엔터프라이즈 호가 호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127]

3. 경과
1942년 4월 1일, 16대의 B-25 미첼을 탑재한 항공모함 호넷 및 호위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도중에 엔터프라이즈와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합류해 일본으로 향했다.[128][129][130][131] 4월 17일, 미 해군 함선 레이다에 비친 국적 불명의 2척의 어선을 초계기로 확인하던 중 일본군의 감시정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들 중 1척은 경순양함 내슈빌의 포격으로 격침되었고(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의 공격도 받고 있었다), 승무원 14명 전원은 함정과 운명을 같이했다.
4월 18일 02:10(혹은 03:15), 미 함대는 초계정을 시인했다. 그것은 일본군 특설감시정 제23일동丸(90톤)에 발견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52][140] 제23일동丸은[141] 경순양함 내슈빌의 포격과 F4F 와일드캣(엔터프라이즈)의 기총사격을 받고[139] 07:23에 격침되었다. 미군은 순양함 주포 포탄 915발(혹은 928발), 12.7mm 기관총 1200발, SBD 도우트리스 1기 격추(승원은 탈출)와 30분을 소모했고,[139] 제23일동丸은 06:45에 ‘적 항공모함 2척, 구축함 3척 발견’을 무전으로 알렸다.[144]
미국 함대의 공격으로 일본 특설감시정대는 5척 침몰, 7척 손상, 전사 33명, 전상자 23명의 피해를 입었다.[52][173] 그러나 특설감시정대의 보고는 미군 기동부대의 기습 계획을 무산시켰다는 점에서 작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174][175]
미 함대는 일본군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에, 야간 폭격 계획을 취소[52][132]하고, 예정보다 7시간 빠른 08:15부터 B-25 폭격기를 발함했다.[176] 마지막 B-25가 09:16에 발함한 후, 함대는 즉시 퇴피했다.[177][178][179]
제임스 H. 두들리트 중령이 이끄는 16대의 B-25 폭격기는 일본 본토를 폭격한 후, 대부분 중국으로 향했으나, 일부는 소련에 착륙하거나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
3. 1. 공습

제임스 H. 두들리트 중령이 이끄는 16대의 B-25 미첼 폭격기는 1942년 4월 18일 도쿄, 가와사키, 요코스카, 나고야, 고베 등 일본 주요 도시를 공습했다.[182] 일본군 방공망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일부 B-25는 민간 지역에 기총소사를 가하여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63][64]
공습을 마친 B-25들은 대부분 동중국해를 건너 중국 본토로 향했으나, 연료 부족, 악천후, 중국 측의 지원 미비 등으로 인해 대부분 불시착하거나 추락했다.[68] 1대의 B-25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하여 승무원들이 억류되었다.[58][68]
미군은 일본에서 약 650nmi 떨어진 곳( 부근)에서 일본 초계정 23호 ''닛토 마루''(70톤급 순찰선)에 발견되었다.[52][140] 이 배는 ''내슈빌''호의 포격으로 침몰했다.[139] 두들리토와 마크 미처 함장은 B-25를 즉시 발진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계획보다 10시간 앞당겨졌고 일본에서 170nmi 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71]
16대의 항공기 모두 8시 20분에서 9시 19분 사이에 안전하게 발진했지만, 두들리토의 폭격기는 마지막 순간에 상승하기 전에 물에 거의 부딪힐 뻔했다. B-25는 일본을 향해 비행했는데, 대부분 2~4대의 항공기로 편대를 이루었고, 탐지되지 않도록 파도 위 수면을 따라 단독 비행했다.[71]
항공기는 발진 6시간 후인 정오경 도쿄 시간에 일본 상공에 도착하여 약 457.20m 상승하여 도쿄의 군사 및 산업 시설 10곳, 요코하마의 2곳, 요코스카, 나고야, 고베, 오사카의 각 1곳에 폭격을 가했다. 일부 B-25는 일본 상공에서 가벼운 대공포화와 소수의 적 전투기(기-45와 시제 기-61(후자는 Bf 109로 오인됨))를 만났지만, 폭격기는 한 대도 격추되지 않았다.[274] 많은 목표물이 폭격기의 기수 사수에 의해 기총소사를 받았다.[281]

16대 중 15대의 항공기는 일본 남동쪽 해안을 따라 남서쪽으로 날아가 중국 동부로 향했다. 에드워드 J. 요크 대위가 조종한 B-25 한 대는 연료가 매우 부족하여 소련으로 향했다.[215] 절강성의 여러 비행장이 무선 표지기를 이용하여 유도하고, 연료를 보급하여 충칭(당시 중국 국민당 수도)으로 계속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124] 주요 기지는 주저우였는데, 모든 항공기가 그곳으로 이동했지만, 홀시는 기동부대에 대한 가능한 위협 때문에 경고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급습자들은 중국으로 가는 비행 중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고, 항공기는 연료가 부족했으며, 날씨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81][91] 승무원들은 중국에서 예정된 기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중국 동부 상공에서 탈출하거나 중국 해안을 따라 불시착했다.[71]
15대의 항공기 모두 13시간의 비행 후 중국 해안에 도착하여 불시착하거나 승무원들이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1등 중위 로버트 M. 그레이와 함께 했던 20세의 병장 리랜드 D. 팩터는 중국 상공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동안 사망했는데, 이 승무원에서 유일하게 사망한 사람이었다. 2개의 승무원(10명)이 실종되었다.
에드워드 요크 대위가 지휘하는 16번째 항공기(8번째 발진 - AC #40-2242)는 소련으로 비행하여 보즈드비젠카의 블라디보스토크 너머 약 64.37km 지점에 착륙했다. 소련은 일본과 전쟁 중이 아니었고 소일 중립 조약이 공식적으로 발효 중이었기 때문에, B-25는 압수되었고 승무원들은 구금되었다.[7]
발진 순서대로 16대의 항공기는 다음과 같다.[3]
미육군항공대 일련번호 | 애칭 | 비행대 | 표적 | 조종사 | 결과 |
---|---|---|---|---|---|
40-2344 | 도쿄 | 제임스 H. 두들리트 중령 | 중국 거저우(Quzhou) 추락 | ||
40-2292 | 37th BS | 도쿄 | 트래비스 후버 소위(1st Lt. Travis Hoover) | 중국 닝보(Ningbo) 추락 | |
40-2270 | 위스키 피트(Whiskey Pete) | 95th BS | 도쿄 | 로버트 M. 그레이 소위(1st Lt. Robert M. Gray) | 중국 거저우(Quzhou) 남동쪽 추락 |
40-2282 | 95th BS | 도쿄 | 에버렛 W. 홀스트롬 소위(Everett W. Holstrom) | 중국 상라오(Shangrao) 남동쪽 추락 | |
40-2283 | 95th BS | 도쿄 | 데이비드 M. 존스 대위(David M. Jones) | 중국 거저우(Quzhou) 남서쪽 추락 | |
40-2298 |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 | 95th BS | 도쿄 | 딘 E. 홀마크 소위(1st Lt. Dean E. Hallmark) | 중국 원저우(Wenzhou) 해상 불시착 |
40-2261 | 더 럽처드 덕(The Ruptured Duck) | 95th BS | 도쿄 | 테드 W. 로손 소위(Ted W. Lawson) | 중국 창수(Changshu) 해상 불시착 |
40-2242 | 95th BS | 도쿄 | 에드워드 J. 요크 대위(Edward J. York) | 소련 프리모르스키 변경주(Primorsky Krai) 억류 | |
40-2303 | 휘얼링 더비시(Whirling Dervish) | 34th BS | 도쿄 | 해럴드 F. 왓슨 소위(1st Lt. Harold F. Watson) | 중국 난창(Nanchang) 남쪽 추락 |
40-2250 | 89th RS | 도쿄 | 리처드 O. 조이스 소위(1st Lt. Richard O. Joyce) | 중국 거저우(Quzhou) 북동쪽 추락 | |
40-2249 | 하리 카리어(Hari Kari-er) | 89th RS | 요코하마 | C. 로스 그리닝 대위(Charles Ross Greening) | 중국 거저우(Quzhou) 북동쪽 추락 |
40-2278 | 피클 핑거 오브 페이트(Fickle Finger of Fate) | 37th BS | 요코하마 | 윌리엄 M. 바워 소위(William M. Bower) | 중국 거저우(Quzhou) 북동쪽 추락 |
40-2247 | 더 어벤저(The Avenger) | 37th BS | 요코스카 | 에드가 E. 맥엘로이 소위(1st Lt. Edgar E. McElroy) | 중국 난창(Nanchang) 북쪽 추락 |
40-2297 | 89th RS | 나고야 | 존 A. 힐거 소령(John A. Hilger) | 중국 상라오(Shangrao) 남동쪽 추락 | |
40-2267 | TNT | 89th RS | 고베 | 도널드 G. 스미스 소위(1st Lt. Donald G. Smith) | 중국 창수(Changshu) 해상 불시착 |
40-2268 | 배트 아웃 오브 헬(Bat Out of Hell) | 34th BS | 나고야 | 윌리엄 G. 패로우 소위(William G. Farrow) | 중국 닝보(Ningbo) 남쪽 추락 |
3. 2. 일본군의 반응
일본군은 미군의 기습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방공망의 허점을 드러냈다. 일본 해군은 미 항모전단을 추격했으나 실패했고, 육군은 요격기를 발진시켰으나 B-25를 격추하지 못했다.[182] 일본군은 B-25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며, 체포된 미군 포로들을 전쟁범죄자로 취급하여 처형했다.1942년 4월 9일, 일본 해군은 진주만 방면에서 다수의 정찰기를 확인하고, 14~15일에는 북방 방면에서 다수의 정찰기 출현으로 "알류산 방면에 강력한 부대가 활동 중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가졌다.[223] 그러나 연합함대와 제5함대 모두 미국의 기동부대의 본토 공습을 예상하지 못했다.[61][223]
4월 18일 오전 6시 30분, 제23일동환으로부터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기동부대 발견"이라는 통보를 받은 일본군은 경계를 강화했다.[224][225][226] 하지만 미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발견 위치는 본토에서 600해리 이상 동쪽이었다.[224] 일본 해군은 미국군의 공격은 항속거리가 짧은 함재기가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227] 미국군기(공격거리 250해리)의 발진과 관동 지방 공습은 다음날(4월 19일) 새벽이라고 추측했다.[62][228]
이에 연합함대는 "대미국 함대 작전 제3법"을 발령했다.[229][230] 콘도 노부타케 해군 중장(기함 아타고)의 제2함대에 미 기동부대의 포착·격멸을 명령했다(연합함대 기밀 제801번 전보).[227][230]
공습 당시 요코스카에는 고토급 중순양함 2척(아타고, 고토〈정비 중〉)[232], 수상기모함 미즈호[230], 제4구축대의 유우다츠급 구축함 2척(아라시, 노와키)가 정박해 있었고,[230] 항공모함 쇼호는 도쿄만에서 훈련 중이었으며,[234] 미카와만에는 중순양함 마야(제4전대)가 있었다.[230]
제2함대와 경계부대는 외양으로 나가 미 기동부대를 수색했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4월 20일 저녁에 작전을 중지했다.[233][246][247]
당시 남운 기동부대는 인도양에서 행해진 실론 해전에서 일본으로 귀환 중이었고, 타이완 근해를 항행 중이었다.[61][249] 남운 지휘하의 제2항공전대에 속한 항공모함 2척(소류, 히류)에도 요격 명령이 내려졌지만,[250] 관동 연안의 미 기동부대를 포착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251]
요코스카 군항에는 다수의 함정이 정박해 있었고, 쇼호·아타고·고토·아라시·노와키 등이 발포했지만, 모두 명중탄은 없었다.[252][253]
일본 해군의 통보를 받은 육군은 각지의 항공부대와 방공부대에 방어 및 초계 명령을 내렸다.[182]
미사와 해군항공대 제11항공함대 제26항공전대의 키사라즈 기지에서는 일식육상공격기 부대가 미 함대 수색에 출격했다.[239][262]
미토 육군비행학교는 교관인 히라하라 킨지 조장이 구칠식 전투기로 출격했지만, B-25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271] 그러나, 시작 전투기 "키61"(후의 삼식전투기 "히엔") 시작 2·3호기에 탑재한 호103 일식십이·칠밀리 고정기관포 사격 시험을 위해, 미토 비행학교를 방문하고 있던 육군비행실험부 실험대의 아라마키 요지 소좌, 우메카와 료사부로 준위가 키61로 요격했다. 아라마키기는 장비의 탄약통을 대용탄(연습탄)에서 실탄으로 변경하기 위해 이륙이 늦어져, 적과 만날 수 없었지만, 우메카와기는 대용탄 그대로 선행 이륙하여, B-25 11번기를 포착하여, 백연을 내뿜게 했다.[272] 그러나 11번기는 격추에는 이르지 못하고 이탈했다.
요코스카 항공대에서는, 미야자키 유 비행병조 등 3기의 영전이 출격하여, 초계 비행에 임하고 있었다. 영전대는 "쌍발기 2기가 시험비행으로 뜨므로 주의하라"는 통지를 받고 있었고, 대공포화 속을 나는 B-25를 통지가 있던 아군기로 오인했다. 영전대가 적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착륙하고 나서였다.[275]
동해지역에서는, B-25 도착까지 시간이 있었던 것으로, 공습 전에 요격기가 출격했다. 스즈카 해군항공대에서 구육식함상전투기 9기, 구육식함상공격기, 구칠식함상공격기 6기가 출격했지만, 허탕으로 끝났다.
발표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 측 피해는 사망 87명, 중상 151명(그중 후일 사망 1명), 경상 311명 이상, 물적 피해는 가옥 400호로, 그중 가옥 전파·전소 112동(180호) 이상, 반파·반소 53동(106호) 이상이었다.[278][279]
쇼와 천황은 스기야마 겐 참모총장이 아니라 도쿠니노미야 야스히코 왕 방위총사령관에게 "진상을 직접 보고하라"고 명했다. 그에 대해 도쿠니노미야 방위총사령관은 "적기는 한 기도 격추할 수 없었습니다. 또 지금과 같은 체제로는 국내 방위는 불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294]
1942년 4월 21일, 고베 앞바다에서 시험 중이던 수상기모함 아키즈시(함장 마유즈미 하루오 대좌)는 "B-25를 발견, 포격하여 격퇴했다"고 보고한다.[313] 실제는, 구육식 육상 공격기 또는 더글러스 수송기에 대한 오사격이었다.[314][315]
한편, 일본군에 체포된 폭격기 탑승원 8명은, 도시의 무차별 폭격과 비전투원에 대한 기총사격을 실시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포로가 아니라 전쟁 범죄자로 취급되었다.[316]
1943년 4월 23일, 미국은 도리틀 대원이 처형된 것을 처음으로 보도한다.[323] 또한, 일본 정부에 항의한다.[324]
4. 결과
둘리틀 공습 직후, 둘리틀 중령은 16대의 항공기가 모두 손실되었고, 표적에 대한 피해가 미미하여 공격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으로 귀환하면 군사재판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11] 그러나 이 기습 공격은 미국의 사기를 북돋았다. 둘리틀은 1942년 4월 28일 중국에 있는 동안 대령 계급을 건너뛰고 준장으로 두 계급 특진했으며, 6월 미국으로 귀환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1942년 7월 둘리틀 장군이 에글린 공군기지 시설을 방문했을 때, 현지 신문은 그의 방문을 보도하면서도 에글린에서의 비밀 훈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북아프리카의 제12항공군, 지중해의 제15항공군, 그리고 영국의 제8항공군을 지휘했다.
80명의 공습대원 전원은 공로비행훈장을 받았고, 공습 중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자색심장훈장을 받았다. 모든 대원은 중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또한, 데이비드 J. 새처 상병과 토머스 R. 화이트 중위는 중국에서 부상당한 대원들이 일본군을 피하도록 도운 공로로 은성훈장을 받았다. 둘리틀은 모든 대원이 승진할 수 있도록 성공적으로 주장했다.
28명의 대원들은 중국-버마-인도 극장에 남아 1년 이상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중 5명이 전사했다.[11] 19명의 대원들은 미국으로 귀환 후 지중해 극장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중 4명이 전사하고 4명이 포로가 되었다.[11] 9명의 대원들은 유럽 작전 극장에서 복무했으며, 그중 1명이 전사했고, 데이비드 M. "데이비" 존스는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다.[11] 공습 후 15개월 이내에 총 12명의 생존자가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2명의 생존자는 부상의 심각성으로 1944년 미 육군항공대에서 제대했다.[12]
이 작전은 항공모함에서 B-25가 이륙하는 것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야간 작전이 미래에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셔틀 폭격 작전은 귀환하는 항공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항공모함 전단 전술임이 입증되었다.[17]
미국 조종사들은 계획대로 착륙하는 대신, 유도를 위한 지상 조명이 부족하여 낙하산으로 탈출해야 했다. 중국 비행장 승무원들은 B-25의 예상치 못한 조기 도착과 이전에 있었던 일본군 공습에 대한 우려 때문에 유도등과 활주로 조명이 켜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만약 채널릿이 작전 세부 사항을 알았다면 결과는 미국인들에게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채널릿은 중국에 효과적인 항공 감시망을 구축했는데, 이를 통해 공습대에 대한 최신 도착 정보를 비행장 승무원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고, 일본군 공습의 위험이 없음을 확인하여 안전한 착륙을 위해 필요한 시점에 착륙등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17]
장제스는 공습대에 중국의 최고 군사훈장을 수여했고,[17] 그의 일기에서 일본이 이 수치심으로 인해 목표와 전략을 바꿀 것이라고 예측했다.[17] 실제로 이 공습은 일본 제국군 본부 직원들에게 충격이었다. 직접적인 결과로 일본은 유사한 셔틀 폭격 작전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 영토를 공격했다. 고위 지휘부는 국내 방어를 위해 공격 작전 지원에서 상당한 공군 자원을 철수했다.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폭격기 기지로 미국이 이 섬들을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알류샨 열도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그렇지 않으면 미드웨이 해전에 사용되었을 두 척의 항공모함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 공습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성과는 일본 고위 지휘부가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매우 비효율적인 병력 배치와 공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잘못된 의사 결정을 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17]
후치다 미쓰오와 미와 시게요시는 폭격기들이 "예상보다 훨씬 낮게" 비행하여 육군 전투기를 피했던 "일방통행" 공습을 "뛰어난 전략"으로 간주했다. 쿠로시마는 이 공습이 "일본을 강타하는 한기처럼 지나갔다"고 말했고, 미와는 육군이 9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단 한 대도 아니었다"고 비판했다.[17]
훗날 있을 파괴적인 B-29 슈퍼포트리스의 일본 공습과 비교했을 때, 둘리틀 공습은 물질적 피해가 거의 없었으며, 발생한 피해도 쉽게 복구되었다. 초기 보고에 따르면 12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18] 도쿄에서는 정유 저장 시설, 제철소, 여러 발전소가 목표였다. 요코스카에서는 류호를 강타하여 11월까지 취역이 지연되었다. 6개의 학교와 한 군 병원도 피해를 입었다. 일본 당국은 포로로 잡힌 조종사들의 항공기가 목표물을 타격했다고 보고했다.[18]
최소한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진주만 공격과 그 후 일본의 영토 확장으로 여전히 타격을 입고 있던 미국의 사기는 폭격 소식이 발표되자 치솟았다.[18] 일본 언론은 이 공격을 민간인에 대한 잔혹하고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묘사하도록 지시받았다. 전쟁 후 사상자 수는 사망 87명, 중상 151명, 경상 311명 이상으로 집계되었으며, 어린이도 사망자에 포함되었고 신문은 부모들에게 포로로 잡힌 폭격대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공유해달라고 요청했다.[18]
일본 해군은 미군 특별 임무 부대의 위치를 찾아 추격하려고 시도했다. 5척의 항공모함과 최고의 해군 항공기 및 조종사를 중심으로 제2함대는 즉시 미군 항공모함 부대의 위치를 찾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미군 함대가 하와이로 귀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18]
일본 해군은 또한 1941년 일본 함대가 하와이에 접근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미군 항공모함 부대가 일본 본토에 접근하도록 허용하고, 무사히 탈출하도록 허용한 특별한 책임을 져야 했다.[18] 이러한 혼란과 일본이 이제 공습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진주만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던 미군 항공모함 함대를 파괴하려는 결의를 강화했고, 그 결과 몇 주 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결정적인 패배로 이어졌다.[17]
폭격 이후 미국은 4월 "여전히 매우 부족한 서해안"을 걱정했고, 조지 마셜은 "일본이 샌디에이고 공장을 공격한 후 멕시코로 날아갈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17]
폭격 이후 특이한 결과가 나타났는데, 비밀 유지를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기자의 질문에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허구의 먼 땅인 "샹그릴라"[19][20]에서 출격했다고 답변했다. 폭격의 진실은 1년 후인 1943년 4월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21] 해군은 1944년 샹그릴라를 취역시켰다.
두리틀 기습대는 1940년대 후반부터 2013년까지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재회 행사를 열었다. 매년 재회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생존한 기습대원들이 명단을 부르고, 지난 해 사망한 동료 기습대원들을 위한 조용하고 사적인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이 추모식에는 80명의 기습대원 각자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은잔이 사용되었으며, 사망한 대원들의 잔은 거꾸로 놓였다. 각 대원의 이름은 잔에 바로 세운 상태와 거꾸로 된 상태 모두 새겨져 있었다. 기습대원들은 각 재회 행사에 함께 제공된 꼬냑 한 병으로 건배를 했다.[22] 2013년, 남은 기습대원들은 포트 월턴 비치에서 마지막 공개 재회 행사를 열기로 결정했다. 병과 잔은 2006년까지 미국 공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보관되어 왔다. 2006년 4월 19일, 이러한 기념품들은 미국 공군 국립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23]
2013년 4월 18일, 에글린 공군기지에서 생존한 기습대원들을 위한 마지막 재회 행사가 열렸으며, 로버트 하이트만이 유일하게 참석하지 못했다.[24]
생존한 기습대원들에 의한 "전사 동료들을 위한 마지막 건배"는 B-25 비행 시범에 이어 2013년 11월 9일 미국 공군 국립 박물관에서 열렸으며, 리처드 E. 콜, 에드워드 세일러, 데이비드 대처가 참석했다.[25]
밀러 중위와 기습대 사학자 캐롤 V. 글라인즈 대령을 포함한 다른 7명의 남성은 작전을 위한 노력으로 명예 기습대원으로 간주된다.[12]
두리틀 기습대 자녀 협회는 2006년 4월 18일, 당시 두리틀 기습대와 생존 대원들의 승인을 받아 설립되었다. 두리틀 기습대의 자손들은 장학금 기금을 위한 모금 행사를 조직하고 두리틀 기습대 재회 행사를 계속해서 주관하고 있다. 2019년 재회 행사는 리처드 E. 콜 중령의 추모식에서 열렸다.[26]
빌 보워(Bill Bower) 대령, 두들리 특공대의 마지막 생존 비행기장은 2011년 1월 10일 콜로라도주 볼더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7][28] 에드워드 세일러(Edward Saylor) 중령은 2015년 1월 28일 워싱턴주 서머에서 94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29] 로버트 L. 하이트(Robert L. Hite) 중령은 2015년 3월 29일 테네시주 내슈빌의 요양원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0][31] 하이트는 두들리 특공대의 마지막 생존 포로였다. 데이비드 J. 새처(David J. Thatcher) 상사는 2016년 6월 22일 몬태나주 미줄라에서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리처드 E. 콜 중령은 2019년 4월 9일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4]
미국 공군 국립박물관에는 둘리틀 급습 관련 유물이 가장 광범위하게 전시되어 있다. 중심 전시물은 두리틀 소장의 항공기인 ''40-2344''호로 도색 및 표시된, 거의 새것과 같은 B-25 폭격기이다. 노스아메리칸 항공이 1958년 급습대에 기증한 이 폭격기는 ''호넷''의 비행갑판을 재현한 곳에 전시되어 있다. 항공기 주위에는 두리틀, ''호넷'' 함장 마크 미처(Marc Mitscher)를 포함한 군인과 해군 장병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마네킹 여러 개가 있으며, 폭격기의 폭탄과 탄약을 싣는 모습도 연출되어 있다. 또한, 급습대가 매년 개최하는 재회식에서 사용한 은색 술잔, 비행복과 개인 장비 일부, 중국 상공에서 탈출할 때 한 급습대원이 사용한 낙하산, 16개 편대의 단체 사진 등의 다른 물품도 전시되어 있다.
미 공군에서 퇴역한 마지막 B-25 폭격기는 에글린 공군기지(Eglin AFB)의 공군 무장 박물관(Air Force Armament Museum)에도 전시되어 있으며, 역시 두리틀 장군의 항공기 표식을 하고 있다.[35]
항공기 잔해 조각과 두리틀에게 수여된 훈장은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6년 하와이 오아후섬 포드 섬에 설립된 태평양 항공 박물관 진주만(Pacific Aviation Museum Pearl Harbor)에는 둘리틀 급습 당시 사용된 ''더 럽쳐드 덕(The Ruptured Duck)'' 표식을 한 B-25 폭격기가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다.[36]
텍사스주 샌 마르코스의 기념 항공대(Commemorative Air Force) 박물관에는 두리틀이 급습 당시 조종했던 B-25의 조종석 장갑판이 소장되어 있다.
에드먼드 고속도로(사우스캐롤라이나주 302번)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26번 주간 고속도로의 교차로 중, 전 컬럼비아 육군 항공 기지(Columbia Army Air Base) 근처의 교차로는 두리틀 급습대 교차로로 명명되었다.
중국 저장성 거주시 강산시에는 둘리틀 급습대와 급습 후 지원을 제공한 중국인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37][38]
캘리포니아주 알라메다에 있는 USS 호넷 박물관(https://uss-hornet.org/)에도 둘리틀 급습에 관한 소규모 전시회가 있었다.
4. 1. 일본의 피해
도쿄 공습으로 일본은 민간인을 포함하여 87명이 사망하고 151명이 중상을, 311명 이상이 경상을 입었다. 가옥 400여 채가 파괴되었고, 그중 112동(180호) 이상이 완전히 불타거나 파괴되었으며, 53동(106호) 이상이 반파 또는 반소되었다.[278][279] 이 중 9명은 일본군 고사포 파편에 의한 피해로 인정되었다.[280]군사적 피해는 경미했으나, 요코스카 군항에서 잠수모함에서 항공모함으로 개조 중이던 류호(당시 이름 다이게이)가 폭탄을 맞아 손상되었다.[57] 요코스카를 폭격한 13번기는 일본 해군의 중추를 폭격하는 데 성공하고, 대공포화 속을 이탈했다.[219]
가쓰시카구에 있는 미즈모토 국민학교에서는 고등과 학생 이시데 미쓰노스케가 기총사격을 받고 사망했다.[282] 아사히신문사는 「귀축의 적, 교정을 사격」등을 보도했다.[283][284]
대본영은 피해를 축소하여 "적기 9기를 격추, 손해 경미"라고 발표했지만,[295][296][297] 당일은 맑은 날이었고 추락한 항공기는 한 기도 확인되지 않아 "황군은 공기(9기와 공기를 건 말장난)를 격추한 것이다"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299][300]
일본군은 국제법상 금지된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고의적으로 한 경우도 있었다.[281] 14번기는 나고야 병원을 폭격했는데, 이는 제3사단 사령부를 노린 공격이 빗나간 것이다.[286] 16번기는 다른 B-25에 비해 적극적으로 기총사격을 했다.
4. 2. 미군의 피해
둘리틀 공습으로 16대의 B-25 중 15대가 손실되었다.[287] 1기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불시착했고, 승무원들은 억류되었다.[68] 나머지 15대는 일본 열도를 횡단하여 중화민국 동부에서 승무원들이 낙하산으로 탈출하면서 전손되었다.[68]
폭격기대 승무원 중에서는 전사 1명, 행방불명 2명, 포로 8명이 발생했다.[288][289] 포로로 잡힌 8명 중 3명은 처형되었고, 1명은 옥사했다.[288][289]
일본군에 체포된 폭격기 탑승원 8명은 도시 무차별 폭격과 비전투원에 대한 기총사격을 실시한 전시 국제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전쟁 범죄자로 취급되었다.[316] 1942년(쇼와 17년) 8월 28일, 상하이시에서 개정된 군사 재판(제13군 군사재판소)에서 8명 전원에게 "인도에 반하는 행위를 저지른 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319][320] 10월 15일, 상하이 경마장에서 조종사 2명과 사수 1명이 처형되었다.[321] (딘 E. 할마크〈홀마크〉중위, 윌리엄 패로 중위, 해롤드 스패츠 상사).
나머지 5명은 사형 집행이 유예되었다.[321] 로버트 J. 메더 소위는 1943년(쇼와 18년) 12월 1일에 난징에서 영양실조로 인한 적리와 각기로 사망했다. 1945년(쇼와 20년) 8월 20일에 포로가 석방되었다. 16번기 폭격수 제이콥 디셰이저는 기독교 전도자가 되어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330][331]
한편, 지휘관 두리틀 중좌는 작전 실패를 우려하여 군사재판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210] 그러나 실제로는 두 계급 특진하여 준장이 되었고,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292]
4. 3. 전후 처리
일본 육군은 둘리틀 공습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습에 사용된 저장성 남쪽의 중국군 비행장을 파괴하는 작전을 실시했다. 1942년 5월 중순부터 9월 30일까지 약 18만 명의 병력과 3개 비행 전대를 동원하여 비행장을 파괴하고 중국 제3전구군 34개 사단을 격퇴했다.[9] 이 작전은 저장-장시 작전(작전명 세이고 작전)으로, 일본 제국 육군은 중국 동부 연안 지방이 다시 일본 공격에 이용되는 것을 막고 중국인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시작했다.[13] 약 약 51799.50km2에 달하는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일본군은 둘리틀 부대원을 찾는 과정에서 약 1만 명의 중국 민간인을 학살했다.[13] 중국 측 추산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 수는 25만 명에 달한다.[13]둘리틀 공습에 참여한 16대의 비행기와 80명의 조종사 중 대부분은 중국 민간인과 군인들의 도움으로 안전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들을 도왔던 중국인들은 일본군에게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일본군은 미군을 숨겨준 대가로 많은 중국인들을 고문하고 처형했으며, 약 25만 명의 중국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된다.[8]
일본군은 체포한 미군 포로 8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하여 전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319][320] 1942년 10월 15일, 상하이 경마장에서 조종사 2명과 사수 1명이 처형되었다.[321] 나머지 5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로버트 J. 메더 소위는 1943년 12월 1일에 난징에서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했다.[329] 나머지 포로들은 1945년 8월 20일에 석방되었다.[330][331]
미국은 1943년 4월 23일, 둘리틀 특공대원이 처형된 것을 처음으로 보도했다.[323] 일본의 행위를 야만적이라고 비난하고, 대일 적개심을 고조시키는 선전에 이용했다.[325]
5. 영향
둘리틀 공습은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우선, 진주만 공격 이후 침체되어 있던 미국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17] 일본 언론은 이 공격을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폭격으로 묘사했지만,[18] 미국에서는 일본 본토를 타격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성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 해군은 미군 항공모함 부대를 추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7] 이는 일본 해군 지휘부를 혼란에 빠뜨렸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미드웨이 해전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17]
공습 이후 미국은 서해안 방어를 걱정했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공습대가 샹그릴라에서 출격했다고 답변했다.[19][20] 진실은 1년 후 공개되었고,[21] 해군은 샹그릴라 항공모함을 취역시켰다.
둘리틀 특공대는 1940년대 후반부터 2013년까지 거의 매년 재회 행사를 가졌다.[22] 2013년 마지막 공개 재회 행사가 열렸고,[24] 2013년 11월 9일 미국 공군 국립 박물관에서 마지막 건배가 있었다.[25]
5. 1. 전략적 영향
도쿄 공습은 일본군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고, 미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일본군의 자원을 본토 방위에 묶어두는 효과를 가져왔다. 일본 해군은 미 항모전력 격멸을 위해 미드웨이 해전을 계획하게 되었고, 이는 태평양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349]이 공격을 보고받은 일본 육군과 해군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장관은 충격을 받았다.[67][345] 야마모토 장관은 寺島健(테라시마 켄) 중장(예비역)에게 보낸 서한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하와이 공격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결국 하와이를 점령하지 않았다면 북쪽 루트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346]
'둘리틀 공습'이 군사 작전이라기보다는 전의 고양을 위한 선전 작전임을 간파하고, 다음 공습은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여 각 부서에 경고를 발령한 부대도 있었다.[347][348] "본토 공습을 받고 야마모토 장관이 일본 본토의 안전 확보를 위해 미 항모 격멸을 위한 미드웨이 섬 공략 작전을 기획했다"는 설도 있지만,[349] 미드웨이 작전 자체는 둘리틀 공습 이전부터 검토되고 있었다.[96][350]
하지만 둘리틀 공습 이전부터 일본 해군(특히 연합함대)은 미 해군 항모 기동부대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었다.[352][353]
본 공습 전에 기획된 미드웨이 작전은 여러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352][354]
- 일본군의 미드웨이 섬 점령으로 반격하는 미군 함대·기동부대 격멸
- 미드웨이 섬의 전선 기지화로 일본 본토 방면으로의 미군 잠수함 활동 봉쇄, 비행 초계 병력 진출로 미 항모의 기동 작전 봉쇄
- 10월 예정의 하와이 공략 작전까지의 '잇기'
미드웨이 작전에 반대하던 군령부와,[355] 관심이 적었던 일본 육군이[99][356][357] 둘리틀 공습을 받고 미드웨이 작전에 갑자기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67][358][359] 여기에는 "항모에서 항속거리가 긴 폭격기를 발진시켜 공습을 하는" 전법에 대해 일본 측에는 반격 수단이 없었고, 따라서 "적 항모를 적극적으로 포착 격멸한다", "초계 기지를 전진시킨다"밖에 선택지가 없었다는 측면이 있다.[353]
1942년 5월 5일,[360]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은 야마모토 장관에게 미드웨이 섬과 알류샨 열도 점령 작전을 인가했고,[361][362] 육군도 이 작전에 일목 부대를 제공했다.[344][363] 이 알류샨 작전에는 일본군에게 귀중한 항모 2척(준요, 류조)이 투입되었다.[364]
남운 기동부대 사령부와 제2함대 사령부는 승무원 휴식, 함선 수리, 인사 이동에 따른 함대 및 항공대 기량 저하로 작전 연기를 요구했지만,[231][365] 야마모토 이하 연합함대 사령부는 거절했다.[366][367]
둘리틀 공습이 미드웨이 작전에 준 영향 중 하나로 일본 해군의 함대 간 오류가 있다.[368] 내지 귀환 후 도쿄의 군령부와 해군성을 방문하여 차기 작전 설명을 받은 남운 기동부대 사령부와 제2함대 사령부는 미드웨이 작전의 목적을 "초계 기지 전진(미드웨이 섬의 일본군 거점화)에 의한 미 항모의 본토 습격 저지"로 받아들였다.[368] 그러나 세토나이카이의 연합함대 사령부는 미드웨이 작전의 주목적을 미군 기동부대 격멸로 여기고 있었다.[368] 이러한 인식 차이는 전함 야마토에서의 도상 연습에서 드러난다.[368] 우가키 마토메 연합함대 참모장은 연합함대의 의도를 상세히 설명했지만, 연합함대·남운 기동부대·제2함대 간 작전 해석은 끝까지 통일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68]
일본군은 둘리틀 공습 재발을 막기 위해 작전에 이용되었던 저장성(장제스 정권) 이남의 중국 국민당군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게 함으로써, 폭격기에 의한 기습 작전을 저지하려 했다.[344] 이에 따라 중국 주둔군이 실시한 작전이 浙贛作戦(절강전)이다.[247][359] 작전은 1942년 5월 중순부터 7월에 걸쳐 실시되었고,[359] 약 18만 명의 병력과 3개 육군 비행전대를 동원하여 목표 비행장 파괴와 그곳을 방어하는 구주동이 이끄는 항일전쟁 제3전구군 34개 사단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전은 1942년 9월 30일에 종료 발표되었다. 연합군은 중국 대륙에서 일본 본토를 공습하는 작전을 세웠고, 투입 예정이던 B-24 폭격 부대가 이동 중이었다. 그러나 浙贛作戦(절강전)에 의해 사용 예정이던 비행장이 공격 점령되었기 때문에, 이 부대는 루마니아 유전 공습 작전인 타이달웨이브 작전으로 전용되었다.
이 공습은 제국 방위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344] 동부군 사령관 나카무라 고타로 육군 대장은 육군 방공학교 및 고사포 제7연대의 고사기관포를 황거 주변 닛카츠 극장과 국기관 옥상에 배치하고, 1942년 4월 20일 독립비행 제47중대를 방위사령관 지휘하에 두어 제국 방공 임무에 종사하게 했다. 군에서는 이 목적에 적합한 비행장으로 성증 비행장을 건설하였다.
5. 2. 한국에 대한 영향
둘리틀 공습은 일본 제국의 군사적 역량을 분산시켜, 간접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군의 자원이 본토 방위에 집중되면서, 한국 내에서의 통제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5. 3. 전후의 평가와 기념
도쿄 공습은 군사적 성과보다는 심리적, 정치적 효과가 더 컸던 작전으로 평가된다. 기습 공격 직후, 둘리틀은 부대원들에게 16대의 항공기가 모두 손실되었고, 표적에 대한 피해는 상대적으로 미미했기에 이 공격은 실패했다고 믿으며, 미국으로 귀환하면 군사재판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3] 그러나 이 기습 공격은 미국의 사기를 북돋았다. 둘리틀은 1942년 4월 28일 중국에 있는 동안 대령 계급을 건너뛰고 준장으로 두 계급 특진했으며, 6월 미국으로 귀환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3]80명의 레이더 전원은 공로비행훈장을 수여받았고, 기습 공격 중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자색심장훈장을 수여받았다. 모든 둘리틀 레이더는 중국 정부로부터도 훈장을 받았다. 또한, 데이비드 J. 새처 상병(로손 부대의 항공기 기관사/포수)과 토머스 R. 화이트 중위(스미스 부대의 비행 외과의/포수)는 중국에서 로손 중위 부대의 부상당한 부대원들이 일본군을 피하도록 돕는 공로로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3]
둘리틀 특공대는 1940년대 후반부터 2013년까지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재회 행사를 열었다. 매년 재회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생존한 기습대원들이 명단을 부르고, 지난 해 사망한 동료 기습대원들을 위한 조용하고 사적인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이 추모식에는 80명의 기습대원 각자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은잔이 사용되었으며, 사망한 대원들의 잔은 거꾸로 놓였다. 각 대원의 이름은 잔에 바로 세운 상태와 거꾸로 된 상태 모두 새겨져 있었다. 기습대원들은 각 재회 행사에 함께 제공된 꼬냑 한 병으로 건배를 했다.[22] 2013년, 남은 기습대원들은 원래 작전을 위한 훈련을 받았던 에글린 공군기지에서 멀지 않은 플로리다주 포트 월턴 비치에서 마지막 공개 재회 행사를 열기로 결정했다.[24]
2013년 4월 18일, 에글린 공군기지에서 생존한 기습대원들을 위한 마지막 재회 행사가 열렸으며, 로버트 하이트만이 유일하게 참석하지 못했다.[24] 생존한 기습대원들에 의한 "전사 동료들을 위한 마지막 건배"는 B-25 비행 시범에 이어 2013년 11월 9일 미국 공군 국립 박물관에서 열렸으며, 리처드 콜, 에드워드 세일러, 데이비드 대처가 참석했다.[25]
미국 공군 국립박물관에는 둘리틀 급습 관련 유물이 가장 광범위하게 전시되어 있다. 중심 전시물은 둘리틀 소장의 항공기인 ''40-2344''호로 도색 및 표시된, 거의 새것과 같은 B-25 폭격기이다. 노스아메리칸 항공이 1958년 급습대에 기증한 이 폭격기는 ''호넷''의 비행갑판을 재현한 곳에 전시되어 있다.[35]
중국 저장성 취저우시 강산시에는 둘리틀 급습대와 급습 후 지원을 제공한 중국인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37][38]
6. 대중문화
도쿄 공습은 여러 영화와 소설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1944년 영화 《퍼플 하트》는 도쿄 공습 포로들의 고문과 처형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였다.
같은 해에 개봉한 《도쿄 상공 30초》는 중국 해안에 추락하여 중상을 입은 테드 로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스펜서 트레이시가 지미 둘리틀 역을, 밴 존슨이 로슨 역을 연기했다. 이 영화의 장면들은 나중에 《미드웨이》(1976)와 TV 미니시리즈 《전쟁과 기억》에 사용되었다.
2001년 영화 《진주만》(알렉 볼드윈이 둘리틀 역)은 공습에 대한 허구적 묘사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텍사스주 코퍼스 크리스티에 있는 퇴역 항공모함 USS 렉싱턴(USS Lexington)(CV-16)을 일본 항공모함으로, USS 컨스텔레이션(USS Constellation)(CV-64)을 도쿄 공습이 시작된 호넷으로 사용했다.[47][48]
2019년 영화 《미드웨이》에서 에런 에크하트가 지미 둘리틀을 연기하며 공습 장면이 묘사된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영화들이 도쿄 공습을 소재로 다루었다.
제목 | 국가 | 연도 |
---|---|---|
{{lang|en|The Purple Heart|퍼플 하트|} | } || 미국 || 194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