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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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조 내각은 1941년 10월 18일부터 1944년 7월 22일까지 1009일간 재직했다. 고노에 내각의 붕괴 이후, 도조 히데키가 총리, 육군대신, 내무대신 등을 겸임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주요 정책으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 연합국과의 전쟁을 결정하고, 대동아 전쟁을 선포했다. 전시 체제 강화를 위해 성청 재편, 인재 등용,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지만, 마리아나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1944년 7월 18일 내각이 총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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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내각 | |
---|---|
개요 | |
![]() | |
내각 명칭 | 도조 내각 |
한자 표기 | 東條內閣 |
로마자 표기 | Tōjō Naikaku |
내각 종류 | 거국일치내각 |
정당 | 대정익찬회 익찬정치회 |
총리 | 도조 히데키 |
총리 임기 시작 | 1941년 10월 18일 |
총리 임기 종료 | 1944년 7월 22일 |
이전 내각 | 제3차 고노에 내각 |
다음 내각 | 고이소 내각 |
선거 및 의회 | |
선거 |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익찬선거) |
의회 | 제77회-84회 제국의회 |
해산 | 1942년 4월 30일 (임기 만료) |
주요 인물 | |
천황 | 쇼와 천황 |
수상 | 도조 히데키 |
수상 임명 당시 직책 | 육군대신, 현역 육군대장 |
2. 재직 기간
1941년 (쇼와 16년) 10월 18일 ~ 1944년 (쇼와 19년) 7월 22일이며, 재직 일수는 1009일이다.[1]
고노에 후미마로 전 내각총리대신은 중국 대륙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 철병, 독일 및 이탈리아 왕국과의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탈퇴 등을 요구하는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민주당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육군과의 갈등 속에서, 사실상의 개조 내각인 제3차 고노에 내각 발족 3개월 만에 도조 히데키 육상과 결렬, 각료 불일치가 발생하여 일방적으로 내각을 포기했다.
해군은 해군대신으로 도요다 소에무를 추천했지만, 도조는 도요다의 반 육군적인 태도에 우려를 표명하여 천황에 의한 육해군 협력의 명을 방패 삼아 거부했다. 군으로부터 군부 대신 추천이 거부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해군 내에서 영향력이 컸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원수)도 도요다 추천에 쓴소리를 했고, 해군은 굴복하여 오이카와 전 해상이 시마다 시게타로를 다시 추천했다. 그들과 우리의 해군력 차이를 아는 해군은 대미 전쟁 회피파가 주류였지만, 시마다 해군은 "해군 대신 한 명이 반대해서 전쟁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대미 개전파"에 동조했다.
3. 내각의 성립 배경
고노에와 도조는 시국 수습을 위해 황족 내각 성립을 원했고, 육군 대장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을 차기 총리 후보로 생각했다. 쇼와 천황은 "육군·해군이 평화 방침에 일치한다면"이라는 조건으로 히가시쿠니노미야 수반을 승인했다. 그러나 기나이치 내대신이 도조에게 확인한 결과, 도조는 신임 총리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생각을 보였다. 기도는 "황족의 지도로 정치·군사 지도가 이루어져 만약 실정이 발생할 경우, 국민의 원망이 황족에게 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대했고, 다시 중신 회의에 자문했다. 결국 "강경론을 주장하는 도조야말로 역설적으로 군부를 억누를 수 있다"는 기도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도조에게 조각의 대명이 내려졌다.
도조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는데, 이는 '중장 승진 후 최소 5년이 지나야 대장 승진 자격을 얻는다'는 진급 기준에서 이례적인 조치였다. 도조는 총리 외에도 육군대신, 내무대신 등을 겸임하며 막대한 권력을 쥐었다. 쇼와 천황은 도조에게 "대미 교섭 지속"을 지시했고[16], 도조는 교섭파인 도고 시게노리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했다. 도조가 3개 직책을 겸임한 것은 미일 교섭이 일본의 양보로 타결될 경우 예상되는 사회 동요를 경찰과 육군의 힘으로 억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17].
해군은 해군대신으로 도요다 소에무를 추천했지만, 도조는 도요다의 반 육군적 태도에 우려를 표명하며 거부했다. 군부 대신 추천이 거부된 것은 이례적이었지만, 해군은 굴복하여 오이카와 전 해상이 시마다 시게타로를 다시 추천했다.
4. 내각의 주요 정책 및 활동
도고 외무대신은 취임하자마자 외무성 내의 친독파를 숙청하고 대미 교섭 추진론으로 외무성을 통일했다. 그러나 일본이 고노에 총리라는 "문민 정권"에서 도조 총리 겸 육군 대신이라는 전쟁 개전을 위한 "군사 정권"으로 전환된 것을 영국이나 미국 등 민주주의 국가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명목상으로는 당시 코델 헐 국무장관에 의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후에 베노나 문서 공개로 발각된 미국 연방 정부 내부에 잠복하여 소비에트 연방 (코민테른)의 스파이로서 첩보 활동도 했던 해리 화이트 재무 차관보 (헨리 모겐소 재무 장관의 부하 중 한 명)가 작성한 헐 노트를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보낸 "최후 통첩"으로 멋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대미 교섭을 단념했고, 도조 내각은 개전론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도조 내각은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 등 연합국에 대한 개전에 굳어졌다.
일본 시간 12월 8일의 영령 말레이 침공 및 진주만 공격으로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쇼와 천황의 명의로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가 반포되었고, 도조 총리는 "대조를 받들어"라는 제목으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결의를 표명했다. 또한, 4일 뒤인 같은 해 12월 12일의 각의 결정에서 제1차 고노에 내각 이래 이미 전투를 벌이고 있던 중일 전쟁 (중국 사건)을 포함하여, 연합국과의 전쟁 호칭을 "대동아 전쟁"으로 하기로 했다.
4. 1. 대외 정책
고노에 후미마로 전 내각총리대신은 중국 대륙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철병과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에서 탈퇴 등을 요구하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민주당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육군과의 갈등 속에서, 사실상의 개조 내각인 제3차 고노에 내각 발족 3개월 만에 도조 히데키 육상과 결렬하여 각료 불일치가 발생했고, 이를 받아들여 후임 내각이 모색되는 와중에 일방적으로 내각을 포기했다.[16]
도조는 총리 취임과 함께 쇼와 천황으로부터 "대미 교섭의 지속"을 지시받았다.[16] 도조는 그 뜻을 받들어 교섭파인 도고 시게노리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했다. 도조가 3개 직책을 겸임한 것은 미일 교섭이 일본의 양보로 타결될 경우 예상되는 사회의 동요를 경찰과 육군의 힘으로 억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17]
4. 2. 국내 정책
도조는 총리 외에도 육군대신, 내무대신 등을 겸임하며 막대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도조 막부'''"라고 조롱받았다. 쇼와 천황으로부터 "대미 교섭의 지속"을 지시받은[16] 도조는 그 뜻을 받들어 교섭파인 도고 시게노리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했다. 도조가 3개 직책을 겸임한 것은 미일 교섭이 일본의 양보로 타결될 경우 예상되는 사회의 동요를 경찰과 육군의 힘으로 억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17]. 육군대신 겸임은 기도 다카요시의 제안으로, 대미 교섭 타결 시 대륙에서 철병을 확실하게 실시하려는 의도였다.
해군은 해군대신으로 도요다 소에무를 추천했지만, 도요다의 반 육군적인 태도에 우려를 표명한 도조가 천황에 의한 육해군 협력의 명을 방패 삼아 거부했다. 군으로부터 군부 대신 추천이 거부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해군 내에서 영향력이 컸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원수)도 도요다 추천에 쓴소리를 했고, 해군은 굴복하여 오이카와 전 해상이 시마다 시게타로를 다시 추천했다. 그들과 우리의 해군력 차이를 아는 해군은 대미 전쟁 회피파가 주류였지만, 시마다 해군은 "해군 대신 한 명이 반대해서 전쟁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대미 개전파"에 동조했다.
도고 외무대신은 취임하자마자 외무성 내의 친독파를 숙청하고 대미 교섭 추진론으로 외무성을 통일했다. 그러나 일본이 고노에 총리라는 "문민 정권"에서 도조 총리 겸 육군 대신이라는 전쟁 개전을 위한 "군사 정권"으로 전환된 것을 영국이나 미국 등 민주주의 국가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개전 다음 해에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익찬 선거)를 실시하면서 도조는 겸임하고 있던 내무 대신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정통 내무 관료인 유자와 미치오가 취임했다.
또한 전시 체제 강화를 위해 대동아성, 군수성을 비롯한 성청 재편, 인재 등용, 중앙 집권화를 실시했다. 도조가 직접 군수 대신을 겸임한 결과, 상공 대신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전후에 총리도 역임)는 국무 대신 겸임 상태로 군수 차관으로 이례적인 "강등"이 되었다. 한때 육군성·해군성을 해체하고 "국방성"으로 재편하는 구상까지 있었다. 대동아성 설치에 반대하여 도고 외무대신이 사임했기 때문에, 후임인 타니 마사유키가 취임할 때까지 외무 대신을 겸임했다. 도쿄도와 시정촌장의 관선 도입을 골자로 한 시제·정촌제 개정에 관련된 제국 의회의 심의 과정에서, 익찬 정치회의 반감을 산 유자와 내무 대신이 숙청되는 등 그 정권 기반은 일본군의 패퇴·전황 악화와 함께 약화되어 갔다. 한편 도조는 작전에 대한 지도력을 높이기 위해 통수권 침범의 의혹을 넘어 참모 총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별다른 실효성은 없었고, 오히려 "도조 막부다"라며 도조 비판을 더할 뿐이었다.
총력전 수행을 위해 1942년(쇼와 17년)에 일반 국민 동원과 국가 보상을 규정한 법률인 '전시 재해 보호법'이 제정되었으며, 법 제23조에서 주택·가재의 급여금, 법 제24조에서 요양, 장애, 중단(절단), 유족 장례의 급여금을 규정했다. 이들은 패전 후 1946년(쇼와 21년) 9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SCAP)에 의해 폐지되었다.
4. 3. 내각의 붕괴
전임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는 중국 대륙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철병과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탈퇴 등을 요구하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민주당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육군과의 갈등 속에서, 사실상 개조 내각인 제3차 고노에 내각 발족 3개월 만에 도조 히데키 육상과 결렬되어 각료 불일치가 발생했고, 이를 받아들여 후임 내각이 모색되는 와중에 내각을 일방적으로 포기했다.
고노에와 도조는 시국 수습을 명목으로 황족 내각 성립을 원했고, 육군 대장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을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했다. 쇼와 천황은 "육군·해군이 평화 방침에 일치한다면"이라는 조건으로 히가시쿠니노미야 수반을 승인했다. 그러나 기나이치 내대신은 황족 수반에 반대했고, 중신 회의 자문을 거쳐 "강경론을 주장하는 도조가 역설적으로 군부를 억누를 수 있다"는 기도 의견이 받아들여져 도조에게 조각의 대명이 내려졌다.
도조는 총리, 육군대신, 내무대신 등을 겸임하며 막대한 권력을 쥐어 "'''도조 막부'''"라는 조롱을 받았다. 쇼와 천황으로부터 "대미 교섭 지속"을 시사받은[16] 도조는 교섭파인 도고 시게노리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했다. 도조의 3개 직책 겸임은 미일 교섭이 일본의 양보로 타결될 경우 예상되는 사회 동요를 경찰과 육군으로 억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17].
해군은 해군대신으로 도요다 소에무를 추천했으나, 도조는 도요다의 반 육군적 태도를 우려하여 천황에 의한 육해군 협력의 명을 방패 삼아 거부했다. 해군은 오이카와 전 해상을 통해 시마다 시게타로를 다시 추천했다. 시마다 해군은 "해군 대신 한 명이 반대해서 전쟁 기회를 놓치는 것은 좋지 않다"며 "대미 개전파"에 동조했다. 그러나 도고 외무대신은 외무성 내 친독파를 숙청하고 대미 교섭 추진론으로 외무성을 통일했다.
코델 헐 국무장관의 헐 노트를 미국 연방 정부 내 소비에트 연방 (코민테른) 스파이 해리 화이트 재무 차관보가 작성, 일본 정부에 보낸 "최후 통첩"으로 멋대로 받아들여 대미 교섭을 단념, 도조 내각은 개전론으로 전환했다.
일본 시간 12월 8일 영령 말레이 침공 및 진주만 공격으로 개전 후, 쇼와 천황 명의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 조서"가 반포되었고, 도조 총리는 라디오 방송으로 일본 국민에게 결의를 표명했다. 12월 12일 각의 결정에서 중일 전쟁 (중국 사건)을 포함, 연합국과의 전쟁 호칭을 "대동아 전쟁"으로 결정했다.
개전 다음 해 익찬 선거 실시에 따라 도조는 내무 대신을 사임, 유자와 미치오가 취임했다.
전시 체제 강화를 위해 대동아성, 군수성을 비롯한 성청 재편, 인재 등용, 중앙 집권화를 실시했다. 도조가 군수 대신을 겸임, 상공 대신 기시 노부스케는 국무 대신 겸 군수 차관으로 "강등"되었다. 도쿄도와 시정촌장 관선 도입을 골자로 한 시제·정촌제 개정 관련 제국 의회 심의 과정에서 익찬 정치회 반감을 산 유자와 내무 대신이 숙청되는 등 정권 기반은 일본군 패퇴·전황 악화와 함께 약화되었다. 도조는 참모 총장까지 겸임했으나, "도조 막부다"라며 도조 비판만 더했다.
총리 경험자 등 중신들과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해군 대령 등 황족 그룹은 타도 내각 공작을 수면 아래에서 진행했다.
마리아나 해전과 사이판 함락으로 미국군 본토 폭격 (일본 본토 공습)이 쉬워지면서, 기시 노부스케 국무 대신(군수 차관)이 강화를 진언했고, 도조 총리 요구를 기시가 거부하여 각내 불일치가 발생[18], 1944년 7월 9일 사이판 함락 책임을 지는 형태로 7월 18일 도조 내각은 총사퇴했다.
5. 내각 명단
도조 내각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1]
직책 | 이름 | 출신 | 재임 기간 |
---|---|---|---|
내각총리대신 | 도조 히데키 | 군인(육군 대장, 일본 육사 17기)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외무대신 | 도고 시게노리 | 귀족원 의원(무소속구락부)·관료(외무성) | 1941년 10월 18일 ~ 1942년 9월 1일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2년 9월 1일 ~ 1942년 9월 17일 | ||
타니 마사유키 | 관료(외무성) | 1942년 9월 17일 ~ 1943년 4월 20일 | |
시게미쓰 마모루 | 관료(외무성) | 1943년 4월 20일 ~ 1944년 7월 22일 | |
내무대신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1년 10월 18일 ~ 1942년 2월 17일 | |
유자와 미치오 | 관료(내무성) | 1942년 2월 17일 ~ 1943년 4월 20일 | |
안도 기사부로 | 군인(예비역 육군 대장, 일본 육사 11기) | 1943년 4월 20일 ~ 1944년 7월 22일 | |
대장대신 | 가야 오키노리 | 관료(대장성)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2월 19일 |
이시와타 소타로 | 귀족원 의원(귀족원)·관료 (대장성) | 1944년 2월 19일 ~ 1944년 7월 22일 | |
육군대신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
해군대신 | 시마다 시게타로 | 군인(해군 대장·해병 32기)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17일 |
노무라 나오쿠니 | 군인(해군 대장·해병 35기) | 1944년 7월 17일 ~ 1944년 7월 22일 | |
사법대신 | 이와무라 미치요 | 관료(사법성)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문부대신 | 하시다 구니히코 |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4월 20일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3년 4월 20일 ~ 1943년 4월 23일 | ||
오카베 나가카게 | 귀족원 의원(연구회)· 관료 (외무성) | 1943년 4월 23일 ~ 1944년 7월 22일 | |
농림대신 | 이노 히로야 | 관료(농림성)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4월 20일 |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 중의원 의원(익찬정치회) | 1943년 4월 20일 ~ 1943년 11월 1일 | |
상공대신 | 기시 노부스케 | 관료(상공성)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10월 8일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3년 10월 8일 ~ 1943년 11월 1일 | ||
농상대신 |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 중의원 의원(익찬정치회) | 1943년 11월 1일 ~ 1944년 2월 19일 |
우치다 노부야 | 중의원 의원(익찬정치회) | 1944년 2월 19일 ~ 1944년 7월 22일 | |
군수대신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3년 11월 1일 ~ 1944년 7월 22일 | |
체신대신 | 데라지마 겐 | 군인(예비역 해군 중장·해병 31기)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10월 8일 |
하타 요시아키 (겸임) | 1941년 12월 2일 ~ 1943년 11월 1일 | ||
철도대신 | 데라지마 겐 (겸임) | 1941년 10월 18일 ~ 1941년 12월 2일 | |
하타 요시아키 | 귀족원 의원(연구회) | 1941년 12월 2일 ~ 1943년 11월 1일 | |
운수통신대신 | 하타 요시아키 | 귀족원 의원(연구회) | 1943년 11월 1일 ~ 1944년 2월 19일 |
고토 게이타 | 민간 (도쿄 급행 전철 사장) | 1944년 2월 19일 ~ 1944년 7월 22일 | |
척무대신 | 도고 시게노리 (겸임) | 1941년 10월 18일 ~ 1941년 12월 2일 | |
이노 히로야 (겸임) | 1941년 12월 2일 ~ 1942년 11월 1일 | ||
대동아대신 | 아오키 가즈오 | 귀족원 의원(연구회) | 1942년 11월 1일 ~ 1944년 7월 22일 |
후생대신 | 고이즈미 지카히코 | 군인(예비역 육군 군의 중장)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국무대신 | 스즈키 데이이치 | 군인(예비역 육군 중장·일본 육사 22기)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10월 8일 |
기시 노부스케 | 관료(상공성) | 1943년 10월 8일 ~ 1944년 7월 22일 | |
안도 기사부로 | 군인(예비역 육군 대장·일본 육사 11기) | 1942년 6월 9일 ~ 1943년 4월 20일 | |
오아사 다다오 | 중의원 의원(익찬정치회) | 1943년 4월 20일 ~ 1944년 7월 22일 | |
아오키 가즈오 | 귀족원 의원(연구회) | 1942년 9월 17일 ~ 1942년 11월 1일 | |
고토 후미오 | 귀족원 의원(연구회)·관료 (내무성) | 1943년 5월 26일 ~ 1944년 7월 22일 | |
국무대신 | 후지와라 긴지로 | 민간(오지 제지 회장) | 1943년 11월 17일 ~ 1944년 7월 22일 |
내각서기관장 | 호시노 나오키 | 귀족원 의원(연구회)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법제국장관 | 모리야마 에이이치 | 관료(내무성)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5. 1. 성청 재편 이전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11월 1일)
직책 | 이름 | 출신 | 재임 기간 |
---|---|---|---|
내각총리대신 | 도조 히데키 | 군인(육군 대장, 일본 육사 17기)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외무대신 | 도고 시게노리 | 귀족원 의원(무소속구락부)·관료(외무성) | 1941년 10월 18일 ~ 1942년 9월 1일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2년 9월 1일 ~ 1942년 9월 17일 | ||
타니 마사유키 | 관료(외무성) | 1942년 9월 17일 ~ 1943년 4월 20일 | |
내무대신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1년 10월 18일 ~ 1942년 2월 17일 | |
유자와 미치오 | 관료(내무성) | 1942년 2월 17일 ~ 1943년 4월 20일 | |
대장대신 | 가야 오키노리 | 관료(대장성)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2월 19일 |
육군대신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
해군대신 | 시마다 시게타로 | 군인(해군 대장·해병 32기)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17일 |
사법대신 | 이와무라 미치요 | 관료(사법성)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문부대신 | 하시다 구니히코 |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4월 20일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3년 4월 20일 ~ 1943년 4월 23일 | ||
농림대신 | 이노 히로야 | 관료(농림성)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4월 20일 |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 중의원 의원(익찬정치회) | 1943년 4월 20일 ~ 1943년 11월 1일 | |
상공대신 | 기시 노부스케 | 관료(상공성)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10월 8일 |
도조 히데키 (겸임) | 1943년 10월 8일 ~ 1943년 11월 1일 | ||
체신대신 | 데라지마 겐 | 군인(예비역 해군 중장·해병 31기)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10월 8일 |
하타 요시아키 (겸임) | 1941년 12월 2일 ~ 1943년 11월 1일 | ||
철도대신 | 데라지마 겐 (겸임) | 1941년 10월 18일 ~ 1941년 12월 2일 | |
하타 요시아키 | 귀족원 의원(연구회) | 1943년 10월 8일 ~ 1943년 11월 1일 | |
척무대신 | 도고 시게노리 (겸임) | 1941년 10월 18일 ~ 1941년 12월 2일 | |
이노 히로야 (겸임) | 1941년 12월 2일 ~ 1942년 11월 1일 | ||
후생대신 | 고이즈미 지카히코 | 군인(예비역 육군 군의 중장)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국무대신 | 스즈키 데이이치 | 군인(예비역 육군 중장·일본 육사 22기) | 1941년 10월 18일 ~ 1943년 10월 8일 |
기시 노부스케 | 관료(상공성) | 1943년 10월 8일 ~ 1944년 7월 22일 | |
안도 기사부로 | 군인(예비역 육군 대장·일본 육사 11기) | 1942년 6월 9일 ~ 1943년 4월 20일 | |
오아사 다다오 | 중의원 의원(익찬정치회) | 1943년 4월 20일 ~ 1944년 7월 22일 | |
국무대신 | 아오키 가즈오 | 귀족원 의원(연구회) | 1942년 9월 17일 ~ 1942년 11월 1일 |
고토 후미오 | 귀족원 의원(연구회)·관료 (내무성) | 1943년 5월 26일 ~ 1944년 7월 22일 | |
내각서기관장 | 호시노 나오키 | 귀족원 의원(연구회)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법제국장관 | 모리야마 에이이치 | 관료(내무성) | 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
전임 내각총리대신인 고노에 후미마로는 중국 대륙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철병과 독일 및 이탈리아 왕국과의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에서 탈퇴 등을 요구하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민주당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육군과의 갈등 속에서 사실상의 개조 내각인 제3차 고노에 내각 발족 3개월 만에 도조 히데키 육상과 결렬되어 각료 불일치가 발생했고, 이를 받아들여 후임 내각이 모색되는 와중에 일방적으로 내각을 포기했다.
후임 내각에는 고노에와 도조 모두 시국 수습을 명목으로 황족 내각의 성립을 원했고, 육군 대장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을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했다. 나루히코 왕은 현역 군인이며 군부에 대한 변명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쇼와 천황은 "육군・해군이 평화의 방침에 일치한다면"이라는 조건으로 히가시쿠니노미야 수반을 승인했다. 그러나 기나이치 내대신이 도조에게 확인한 결과, 도조는 어디까지나 신임 총리에게 책임을 떠넘기겠다는 생각을 보였다. 그래서 기도가 "황족의 지도로 정치・군사 지도 이루어진다고 해서 만약 실정이 발생했을 경우 국민의 원망이 황족에게 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히가시쿠니노미야 수반에 반대했고, 다시 중신 회의에 자문했다. 결국 "강경론을 주장하는 도조야말로 역설적으로 군부를 억누를 수 있다"는 기도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도조에게 조각의 대명이 내려졌다. 히가시쿠니노미야는 훗날 종전 후 1945년8월 17일에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참고로 도조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지만, '중장 승진에서 최소 5년이 지나야 대장 승진 자격을 얻는다'는 진급 기준에서 이례적인 조치였다.
도조는 총리 외에도 육군대신, 내무대신 등을 겸임하며 막대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도조 막부'''"라고 조롱받았다. 조각의 대명을 받들면서 쇼와 천황으로부터 "대미 교섭의 지속"을 시사받은[16] 도조는 그 뜻을 받들어 교섭파인 도고 시게노리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하는 등, 도조의 3개 직책 겸임 역시, 미일 교섭이 일본의 양보로 타결될 경우 예상되는 사회의 동요를 경찰과 육군의 힘으로 억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17]. 육상 겸임은 기도의 제안이며, 대미 교섭 타결 시 대륙에서 철병을 확실하게 실시하려는 의도였다.
해군은 해군대신으로 도요다 소에무를 추천했지만, 도요다의 반 육군적인 태도에 우려를 표명하는 도조가, 천황에 의한 육해군 협력의 명을 방패 삼아 거부했다. 군으로부터 군부 대신 추천이 거부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해군 내에서 영향력이 컸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원수)도 도요다 추천에 쓴소리를 했고, 해군은 굴복하여 오이카와 전 해상이 시마다 시게타로를 다시 추천했다.
5. 2. 성청 재편 이후 (1943년 11월 1일 ~ 1944년 7월 22일)
1943년 11월 1일, 내각이 개편되었다.[13]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직책 | 이름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도조 히데키 | 육군대신, 군수대신 겸임[5] |
외무대신 | 시게미쓰 마모루 | |
내무대신 | 안도 기사부로 | |
대장대신 | 가야 오키노리 | 1944년 2월 19일 면직 |
이시와타 소타로 | 1944년 2월 19일 임명 | |
육군대신 | 도조 히데키 | 내각총리대신, 군수대신 겸임[5] |
해군대신 | 시마다 시게타로 | 1944년 7월 17일 면직 |
노무라 나오쿠니 | 1944년 7월 17일 임명, 첫 입각 | |
사법대신 | 이와무라 미치요 | |
문부대신 | 오카베 나가카게 | |
농상대신 |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 1944년 2월 19일 면직 |
우치다 노부야 | 1944년 2월 19일 임명 | |
군수대신 | 도조 히데키 | 내각총리대신, 육군대신 겸임[5] |
운수통신대신 | 핫타 요시아키 | 1944년 2월 19일 면직 |
고토 게이타 | 1944년 2월 19일 임명, 첫 입각 | |
대동아대신 | 아오키 가즈오 | |
후생대신 | 고이즈미 지카히코 | |
국무대신 | 오아사 다다오 | |
국무대신 | 고토 후미오 | |
국무대신 | 기시 노부스케 | |
국무대신 | 후지와라 긴지로 | 1943년 11월 17일 임명 |
내각서기관장 | 호시노 나오키 | |
법제국장관 | 모리야마 에이이치 |
도조 내각은 전시 체제 강화를 위해 대동아성, 군수성을 비롯한 성청 재편, 인재 등용, 중앙 집권화를 실시했다. 도조가 직접 군수대신을 겸임하면서 상공대신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는 국무대신 겸 군수 차관으로 강등되었다. 육군성과 해군성을 통합하여 "국방성"으로 재편하려는 구상도 있었다.
도쿄도와 시정촌장의 관선 도입을 골자로 한 시제·정촌제 개정 과정에서 익찬 정치회의 반감을 산 유자와 미치오 내무대신이 숙청되는 등 정권 기반은 약화되었다. 도조는 참모총장까지 겸임했지만, "도조 막부"라는 비판을 받았다.
중신들과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해군 대령 등 황족 그룹은 타도 내각 공작을 진행했다. 도조는 중신들을 각료로 기용하여 이를 극복하려 했다.
마리아나 해전과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 본토 공습이 쉬워지자, 기시 노부스케 국무대신(군수 차관)은 강화를 주장했고, 도조 총리는 사직을 요구했다. 기시가 이를 거부하면서 내각 불일치가 발생했고,[18] 1944년 7월 9일 사이판 함락의 책임을 지고 7월 18일 도조 내각은 총사퇴했다.
참조
[1]
웹사이트
Tōjō Cabinet
http://www.kantei.go[...]
[2]
문서
大命降下時の階級は陸軍中将。内閣発足当日の10月18日に陸軍大将に昇進。
[3]
문서
前の第20回衆議院議員総選挙が行われたのは1937年(昭和12年)4月30日であったため、本来の任期は1941年(昭和16年)4月30日までであった。しかし、1年間任期延長したため、1942年(昭和17年)4月30日に任期満了を迎え、同日、第21回衆議院議員総選挙の投票が行われた。
[4]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41-10-18
[5]
문서
首相就任時から1942年(昭和17年)2月17日まで内相、陸相を兼任。内相兼任を免じられた後、同年9月1日から17日まで外相、陸相兼任。外相退任後、翌1943年(昭和18年)4月20日から23日まで陸相、文相兼任。文相兼任を解かれた後、同年10月8日から陸相、商工相兼任し11月1日から省庁再編により陸相、軍需相兼任。
[6]
문서
大東亜省設置に反対し、外相辞任。
[7]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42-09-01
[8]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42-09-17
[9]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43-04-20
[10]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42-02-17
[11]
문서
東京帝国大学医学部教授。
[1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41-12-02
[1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43-11-01
[14]
문서
東京急行電鉄社長。
[15]
문서
王子製紙会長。
[16]
문서
9月6日の御前会議で決定された「帝国国策遂行要領」では「10月上旬頃までに対米交渉がまとまる見込みがなければアメリカに対して開戦すること」を規定していたが、昭和天皇は「これを白紙に戻して再検討すること」を命じた(白紙還元の御諚)。
[17]
서적
日本はなぜ開戦に踏み切ったか 「両論併記」と「非決定」
新潮選書
2012-06-20
[18]
서적
悪と徳と岸信介と未完の日本
産経新聞社
2012-04
[19]
웹사이트
届かぬ訴え~空襲被害者たちの戦後~
https://www.nhk.or.j[...]
201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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