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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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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랑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손책과 대립하다가 후에 그의 부하가 되었다. 193년 손책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198년 원술의 사주를 받아 손책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손책에게 생포되었다. 손책은 조랑의 능력을 인정하여 부하로 삼았고, 조랑은 문하적조가 되어 태사자와 함께 손책을 따랐다.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책에게 패배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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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랑
인물 정보
이름조랑
로마자 표기Zu Lang
생몰년도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지미상
소속
소속 세력자립 세력
주요 활동
주요 활동강동 지역 약탈
생애
초기 활동손권의 모친 습격 시도
최후태사자에게 사살됨
기타
섬긴 세력없음 (자립)
가족 관계미상

2. 생애

후한단양군 경현 일대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일각에서는 종교 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2년경부터 세력을 모아 활동했으며, 당시 외숙인 단양태수 오경에게 의탁하고 있던 손책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1] 193년에는 경현에서 손책을 포위하여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으나, 정보 등의 활약으로 손책을 놓쳤고 결국 패주하였다.[1][2]

197년(건안 2년), 황제를 참칭한 원술오군태수 진우가 손책의 배후를 교란하기 위해 조랑 등 단양 지역 세력에게 접근하여 관직 인수(印綬)를 보내 회유했다.[4][3] 조랑도 이에 호응했으나, 손책이 먼저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진우 등을 정벌하면서 무산되었다.[4]

198년[5], 원술의 사주를 받아 다시 손책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손책이 직접 단양을 정벌하면서 생포되었다.[6] 손책은 과거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았던 조랑을 용서하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문하적조(門下賊曹)로 삼았다. 이후 조랑은 손책에게 항복태사자와 함께 손책 군대의 길잡이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2. 1. 초기 활동과 손책과의 대립

경현을 중심으로 단양, 선성 등지에서 세력을 형성했던 인물이다. 일각에서는 종교 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2년(초평 3년), 손책이 외숙인 단양태수 오경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손책은 여범, 손하 등과 함께 수백 명의 병사를 모았다. 이때 조랑은 손책을 급습하여 거의 죽일 뻔했으며, 손책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손책은 오경의 지원을 받아 조랑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193년(초평 4년), 오경과 손책이 다시 조랑을 공격하자, 조랑은 경현에서 손책을 포위하며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정보와 기병 1명이 용맹하게 손책을 보호하며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손책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1] 결국 조랑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물러났다.[2]

197년(건안 2년), 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자, 조정서주여포, 회계태수 손책, 오군태수 진우(陳瑀) 등에게 원술 토벌을 명했다. 그러나 광릉군 해서(海西)에 주둔하던 진우는 손책이 원술 토벌을 위해 출진한 틈을 타 그의 영토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진우는 도위(都尉) 만연(萬演) 등을 시켜 단양군 일대에 관직 임명을 약속하는 인수(印綬) 30여 개를 몰래 뿌리며 반란을 사주했고, 조랑도 이 인수를 받았다.[4] 또한 손책에게 원한이 있던 원술 역시 조랑에게 인수를 보내 손책의 배후를 치도록 부추겼다.[3] 하지만 손책은 이러한 배후의 움직임을 미리 간파하고 신속하게 대응하여 진우와 엄백호를 먼저 정벌하며 위기를 넘겼다.[4]

198년[5], 원술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조랑 등 단양 지역 세력과 산월을 선동하여 손책에게 반기를 들게 했다. 이에 손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단양으로 진격하여 선성(宣城) 등 7개 현을 평정하고 마침내 조랑을 생포했다.[6] 손책은 과거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았던 조랑에게 "너는 예전에 날 습격하여 말안장까지 찍기도 했었지. 내가 지금은 군대를 모아 공업(功業)을 이루고자 한다. 오래 묵은 원한은 제쳐두고 오직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쓰려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며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용서하고 회유했다. 이에 감복한 조랑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손책에게 복종했다. 손책은 조랑을 문하적조(門下賊曹)라는 직책에 임명했으며, 이후 조랑은 비슷한 시기에 손책에게 항복한 태사자와 함께 손책 군대의 길잡이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사서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2. 2. 손책에게 귀순

192년 (초평 3년), 손책은 외숙이자 단양태수오경에게 의탁하여 여범, 손하와 함께 수백 명의 병사를 모으고 있었다. 이때 경현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조랑은 손책을 급습하여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손책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1]

193년(초평 4년) 손책은 오경, 여범, 손하 등과 함께 조랑을 공격하여 반격에 나섰다. 전투 중 손책이 다시 조랑군에게 포위되어 궁지에 몰렸으나, 정보와 기병 1명이 필사적으로 손책을 보호하며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1] 결국 조랑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물러났다.[2]

197년(건안 2년), 원술후한 황실을 무시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중나라), 조정에서는 서주여포, 회계태수 손책, 오군태수 진우(陳瑀)에게 원술 토벌을 명했다. 그러나 광릉군 해서(海西)에 주둔하던 진우는 오히려 손책이 출진한 틈을 타 오군과 회계군을 차지하려는 속셈을 품고, 몰래 부하 만연(萬演) 등을 보내 단양군 일대에 관직 인수(印綬) 30여 개를 뿌리며 회유 공작을 펼쳤다. 조랑 역시 진우가 보낸 인수를 받았다.[4] 비슷한 시기, 원술도 손책에게 원한을 품고 조랑 등 단양의 산월 세력에게 인수를 보내 손책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선동했다.[5] 하지만 손책은 이러한 움직임을 미리 간파하고 신속하게 군사를 움직여 진우와 엄백호 세력을 먼저 정벌하였다.[3][4]

198년, 손책은 본격적으로 단양군 평정에 나서 선성(宣城) 등 7개 현을 점령하고 마침내 조랑을 생포했다.[6] 손책은 조랑에게 과거의 원한을 언급하며 말했다. "너는 예전에 나를 습격하여 내 말안장까지 베었었지. 하지만 나는 지금 군대를 일으켜 큰 공업을 이루려 한다. 지난 원한은 묻어두고 오직 능력에 따라 인재를 쓸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에 조랑은 감복하여 손책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머리를 찧으며 사죄했다. 손책은 조랑을 용서하고 문하적조(門下賊曹)라는 직책에 임명했다. 이후 조랑은 역시 손책에게 항복했던 태사자와 함께 손책 군대의 길 안내를 맡았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사서가 아닌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손책이 아직 원술 휘하에 있을 때 손책에게 패배했다고만 간략하게 언급된다.

4. 각주

[1][2][3][4][5][6]

참조

[1] 서적 삼국지 55권 오서 제10 정보
[2] 서적 삼국지 50권 오서 제5 손파로 오부인 제경
[3] 서적 삼국지 56권 오서 제11 여범
[4] 서적 강표전
[5] 서적 자치통감 62권 한기 제54 헌제 건안 3년
[6] 서적 삼국지 51권 오서 제6 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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