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른도르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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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른도르프 전투는 1758년 7년 전쟁 중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러시아군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전투이다. 전투는 프로이센이 러시아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전투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군의 끈질긴 저항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 전투는 18세기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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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른도르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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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조른도르프 전투 |
다른 이름 | 독일어: Schlacht bei Zorndorf 일본어: ツォルンドルフの戦い 영어: Battle of Zorndorf |
일부 | 7년 전쟁 중 제3차 슐레지엔 전쟁 |
장소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조른도르프 (현재 폴란드, 서포모제 주, 사르비노보) |
날짜 | 1758년 8월 25일 |
결과 | 결론 없음 |
교전 세력1 | 프로이센 왕국 |
교전 세력2 | 러시아 제국 |
지휘관 및 병력 | |
프로이센 지휘관 | 프리드리히 2세 |
프로이센 병력 | 36,000명, 포 167문 |
러시아 지휘관 | 빌림 페르모르 |
러시아 병력 | 42,590명, 포 210문 |
사상자 | |
프로이센 사상자 | 11,390–12,800명 |
프로이센 전사자 | 3,680명 |
프로이센 부상 및 실종 | 7,710명 |
러시아 사상자 | 16,000명 |
러시아 노획된 포 | 30문 |
러시아 노획된 깃발 | 27개 |
관련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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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보 |
2. 7년 전쟁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1748) 이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 지방을 얻었지만,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슐레지엔을 되찾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 우위를 회복하려 하면서 시작되었다.[1] 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프랑스는 대서양 무역에서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오스트리아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이에 영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변화는 외교 혁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쟁 초기, 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분당 최소 4번의 일제 사격을 할 수 있었고, 일부는 5번까지 가능했다. 프로이센은 로스바흐 전투와 로이텐 전투에서 승리하며 유리한 고지를 점했지만, 동시에 여러 국가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758년 4월, 프로이센과 영국은 영-프로이센 협약을 체결하여 영국은 프리드리히에게 연간 67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영국은 또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페르디난트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페르디난트는 프랑스군을 하노버와 베스트팔렌에서 몰아내고 엠덴 항구를 탈환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1758년 늦여름까지 전투는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프로이센은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싸워야 했고, 슐레지엔, 포메라니아, 마그데부르크, 동프로이센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다. 1758년,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의 진격에 대처하기 위해 오데르 강 동쪽의 브란덴부르크-노이마르크에서 36,000명의 프로이센군을 이끌고 8월 25일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42,590명의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2. 1. 외교 혁명
1756년, 유럽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가 재편되는 '외교 혁명'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는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도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이에 맞서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하노버 선제후국, 헤센-카셀 방백국 등 독일 내 영방 국가들과 연합했다.2. 2. 프로이센의 초기 승리와 위기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결과 슐레지엔 지방을 획득하였다.[1] 1757년 말, 프로이센은 로스바흐 전투와 로이텐 전투에서 승리하며 슐레지엔 일부를 되찾았다. 그러나 1758년 8월, 윌리엄 페르모르 휘하의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을 침공하여 베를린에서 100km 지점까지 진격해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려 했다.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들의 합류가 베를린 함락을 의미한다고 판단, 러시아군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당시 퀴스트린을 포위하던 페르모르는 코사크의 기습으로 이 사실을 알고 포위를 풀고 퀴스트린 북동쪽 10km 지점인 조른도르프에 자리를 잡았다.
로이텐 전투 승리 후, 프로이센군은 남하하여 올로모우츠를 포위했지만, 돔슈타틀 전투에서 보급 부대가 패배하고 러시아군이 베를린으로 접근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군을 요격하기 위해 북상했다. 4만 3천 명의 러시아군은 이미 베를린에서 100km 지점에 도달하여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할 움직임을 보였다.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군을 이끌고 러시아군 후방에 도착하자, 양군은 조른도르프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3. 지형
조른도르프는 억센 전나무, 황무지, 옅은 녹색 섬과 같은 경작지로 가득한 상당한 규모의 이탄 황무지였다. 18세기 중반에는 늪이 많았고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결국 프로이센군은 튼튼하고 넓은 길을 개발했지만, 1758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조른도르프는 늪지 웅덩이가 특징이었고, 오데르 강에서 약 8.05km 정도 떨어진 반도였으며, 강보다 약 약 15.24m 높이에 위치해 있었다. 토마스 칼라일은 100년 후 이 지역을 둘러보고 오래된 기록들을 조사했는데, 그는 이러한 늪지대를 "누수"라고 불렀으며, 폭이 약 2~3마일로, 대부분 밑바닥이 없고, 느린 시내와 고인 웅덩이로 얽혀 있었다고 묘사했다. 조른도르프는 거의 통과할 수 없는 지형의 이러한 늪지대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1]
4. 전투
1758년 8월 25일, 조른도르프에서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이 격돌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군의 좌익을 공격하며 사선 공격 전술을 시도했으나, 러시아군의 완강한 저항과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양측은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고,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4. 1. 전투의 전개
8월 25일, 프리드리히의 보병대는 어린 징집병으로 구성된 러시아 "관측군"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들리츠의 유명한 기병대가 공격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러시아 기병대는 프로이센군과 충돌했지만 패주하여 러시아 보병대 진영으로 도망쳐야 했고, 먼지와 화약 연기에 혼란을 겪은 그들은 러시아 기병대를 프로이센군으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했다.한편, 프리드리히의 보병대는 러시아군의 좌익을 공격했다. 프리드리히는 로이텐 전투에서 승리했던 사선 공격을 다시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뒤쪽에 늪지대가 있어 후퇴할 수 없었고, 프리드리히 군대의 좌익 역시 불리한 지형과 러시아군의 성공적인 저항으로 인해 러시아군을 포위할 수 없었다. 결국 전투는 좁은 전장에서 양측 군대가 극도로 피비린내 나는 정면 충돌을 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어진 전투에서 양측은 곧 화약을 다 써버렸고, 백병전을 벌였다. 프로이센 대대 중 일부가 지치는 기미를 보이자, 프리드리히 자신이 직접 이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동시대인들은 이 전투를 18세기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묘사했다. 한 프로이센 장교는 "러시아군의 시신이 줄지어 전장을 덮고 있었고, 그들은 대포에 입을 맞추며 우리 칼에 몸이 갈갈이 찢겨나갔지만,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라고 보고했다. 전투 후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인들을 죽이는 것이 그들을 이기는 것보다 더 쉽다."라고 말했다.
4. 2. 전투의 특징
조른도르프 전투는 18세기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양측 모두 엄청난 사상자를 냈으며, 특히 러시아군의 끈질긴 저항이 프로이센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프로이센 장교는 "러시아군의 시신이 줄지어 전장을 덮고 있었고, 그들은 대포에 입을 맞추며 우리 칼에 몸이 갈갈이 찢겨나갔지만,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라고 보고했다. 전투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인들을 죽이는 것이 그들을 이기는 것보다 더 쉽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이 전투는 좁은 전장에서 양측 군대가 극도로 피비린내 나는 정면 충돌을 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양측은 곧 화약을 다 써버렸고, 백병전을 벌였다. 프로이센 대대 중 일부가 지치는 기미를 보이자, 프리드리히 대왕 자신이 직접 이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5. 여파
조른도르프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은 1만 1,390명, 러시아군은 약 1만 6,000명의 사상자를 냈다.[1] 러시아군이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도 물러서지 않은 것은 프로이센군과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투 후 프리드리히는 러시아군과의 소모전을 중단시키기 위해 기병대를 철수시켰고, 러시아군은 보급선과 다시 연결될 수 있었다. 페르모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승전보를 보냈고, 표트르 루먄체프 백작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란츠베르크로 이동했다. 이 전투로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의 합류가 저지되었다.
5. 1. 전술적, 전략적 결과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은 각각 11,390명, 약 16,000명의 사상자를 내어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1] 전투는 어느 한쪽의 결정적인 승리 없이 끝났지만,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다.러시아군은 엄청난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아 프로이센군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투 후 기병대를 철수시켜 러시아군과의 소모전을 중단시키고, 러시아군이 보급선과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표트르 루먄체프 백작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란츠베르크로 이동했다.
전투 소식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빈, 파리에서 승리로 축하받았다. 프리드리히는 페르모어가 떠난 것을 러시아군의 후퇴라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군이 질서 정연하게 진군한 것이었다. 프로이센군은 러시아군을 추격했지만, 추가 공격은 하지 않았다.
이 전투의 결과로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의 합류가 저지되었고, 프리드리히는 전투를 자신의 승리로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그 결과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5. 2. 동맹국 간의 갈등
페르모어가 이끌던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와 갈등을 겪었다. 빈에서 온 사절은 러시아 진영에 있으면서 페르모어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페르모어는 오스트리아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점을 들어 오스트리아군의 능력에 대해 비난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헨리 공자가 지휘하는 약한 군대에 맞서 작센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너무 느리게 진격하여 헨리 공자의 군대는 오스트리아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오스트리아군이 거둔 성과는 작은 프로이센 요새와 1,400명의 수비대를 점령한 것뿐이었고, 이마저도 오스트리아군이 아닌 제국(''Reichsarmee'') 군대가 달성한 것이었다.전투 후, 프리드리히는 기병대를 철수시켜 코사크와의 소규모 전투를 중단시켰고, 러시아군은 보급 마차와 다시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페르모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승전보를 보내고, 표트르 루먄체프 백작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란츠베르크로 진군했다.
6. 문화적 영향
카를 뢰클링의 1904년 작품 "폰 뷜로 연대 전선 앞에서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20세기 초 군인 영웅주의의 이상을 널리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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