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명선은 일제강점기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부대에서 전령으로 활동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군에서 사단장, 군단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1972년과 1982년 두 차례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사회안전부 부부장과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사망 후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으며, 김일성의 조문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홍명희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정치인으로, 장편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 참여, 언론 및 교육계 활동 후 해방 후 남북협상 참여, 월북하여 북한에서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역할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허헌
허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3·1 운동 관련자 변호와 신간회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건준위 부위원장, 민전 공동의장 등을 지내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월북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 김정일
김정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최고지도자로, 김일성 사망 후 권력을 승계하여 조선로동당 총비서 및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통치하며 3대 세습, 핵무기 개발, 남북 정상회담 등의 사건과 경제난, 인권 탄압 등의 문제를 겪은 인물이다. - 1994년 사망 -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은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외교 정책, 워터게이트 사건, 그리고 사임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 1994년 사망 - 정한주
정한주는 대한민국의 교육인이자 노동운동가, 정치인으로, 노동조합 활동과 공공 부문, 교육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헌신한 인물이다.
조명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조명선 |
출생일 | 1923년 11월 27일 |
출생지 | 요덕군, 함경남도, 일본 제국 |
사망일 | 1994년 7월 8일 |
사망 원인 |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고 심장마비 |
묘지 | 애국렬사릉 |
정치 | |
소속 정당 | 조선로동당 |
중앙위원회 위원 | 조선로동당 제6기 중앙위원회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제5기 최고인민회의 |
경력 |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임기 시작 | 1980년 10월 14일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임기 종료 | 미상 |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임기 시작 | 1972년 12월 25일 |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임기 종료 | 1977년 12월 17일 |
수상 | |
훈장 | 국기훈장 1급 공화국영웅 (1992년) 김일성훈장 (1972년, 1982년) |
2. 항일 무장 투쟁 및 군 경력
조명선은 일제강점기 김일성이 이끌던 항일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했으며, 해방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하여 군과 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인민군의 사단장, 군단장, 집단군 총참모장,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등 군 주요 직책을 역임했으며,[7] 한국 전쟁 이후 군의 사회주의 건설 참여와 군사력 강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 또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및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도 입지를 다졌고,[7][4] 공화국영웅 칭호를 두 차례 수여받는 등[7]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후 사회안전성 부부장,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7][3]
2. 1. 항일 무장 투쟁
일제강점기 당시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했으며, 초기에는 전령 임무를 수행했다.[7] 1937년 6월에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정식으로 입대하였다.[2] 처음에는 유격전과 산악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점차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김일성의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조명선이 항일 무장 투쟁 시기 김일성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보호한 충직한 호위병으로 묘사된다.[2] 그의 이러한 충성심과 지휘 능력은 높이 평가받아 군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는 배경이 되었다.[2] 1945년에는 대대장 직책까지 올랐다.[3]2.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해방 이후 38선 이북으로 귀환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활동했다. 1950년 8월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된 뒤 조선인민군 사단장이 되었고,[7][3] 이후 군단장, 집단군 총참모장,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등 군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7] 한국 전쟁 이후 군대를 사회주의 건설과 군 강화에 동원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1966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7]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1970년)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3] 1972년 12월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처음으로 공화국영웅 칭호와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7][3]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4]
1982년에는 다시 한번 공화국영웅 칭호와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았으며,[7][3] 같은 해 사회안전성 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7][3] 1989년부터 1994년까지는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을 지냈다.[7][3]
사후 장례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구락부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동료들이 안장된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이곳에는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반신상도 세워져 있다.[7] 그는 김일성 명의의 마지막 조화와 조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7]
3. 사망
김일성과 같은 날 사망했다.[1] 그의 죽음은 7월 24일에 발표되었으며, '예상치 못한' 일로 묘사되었다.[1]
사후 그의 시신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구락부(고위간부 장례식장)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7] 장례식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모두 조문을 보냈으며, 조명선은 김일성으로부터 조문을 받은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1] 또한 김일성 명의로 된 마지막 조화와 조의를 받았다.[7]
시신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을 비롯해 김일성 주석의 항일빨치산 동료들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는 평양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고,[7] 그의 묘에도 흉상이 세워졌다.[1]
참조
[1]
웹사이트
항일빨치산 조명선, 김 주석과 같은 날 사망
http://www.tongilnew[...]
2021-11-03
[2]
웹사이트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한생토록 간직하고 산 참된 전사
https://rodong.rep.k[...]
[3]
웹사이트
북한지역정보넷
http://www.cybernk.n[...]
2021-11-03
[4]
서적
Directory of Officials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https://books.google[...]
[5]
웹인용
『金日成 빨치산 동지 사망소식듣고 심장발작 사망』
https://www.donga.co[...]
2023-10-02
[6]
웹인용
조명선 (趙明善)JO Myong Son
https://www.yna.co.k[...]
2023-10-02
[7]
뉴스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