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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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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명선은 일제강점기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부대에서 전령으로 활동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군에서 사단장, 군단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1972년과 1982년 두 차례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사회안전부 부부장과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사망 후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으며, 김일성의 조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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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명선
본명조명선
출생일1923년 11월 27일
출생지요덕군, 함경남도, 일본 제국
사망일1994년 7월 8일
사망 원인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고 심장마비
묘지애국렬사릉
정치
소속 정당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조선로동당 제6기 중앙위원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제5기 최고인민회의
경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임기 시작1980년 10월 14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임기 종료미상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임기 시작1972년 12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임기 종료1977년 12월 17일
수상
훈장국기훈장 1급
공화국영웅 (1992년)
김일성훈장 (1972년, 1982년)

2. 항일 무장 투쟁 및 군 경력

조명선은 일제강점기 김일성이 이끌던 항일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했으며, 해방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하여 군과 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인민군의 사단장, 군단장, 집단군 총참모장,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등 군 주요 직책을 역임했으며,[7] 한국 전쟁 이후 군의 사회주의 건설 참여와 군사력 강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 또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및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도 입지를 다졌고,[7][4] 공화국영웅 칭호를 두 차례 수여받는 등[7]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후 사회안전성 부부장,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7][3]

2. 1. 항일 무장 투쟁

일제강점기 당시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했으며, 초기에는 전령 임무를 수행했다.[7] 1937년 6월에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정식으로 입대하였다.[2] 처음에는 유격전과 산악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점차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김일성의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조명선이 항일 무장 투쟁 시기 김일성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보호한 충직한 호위병으로 묘사된다.[2] 그의 이러한 충성심과 지휘 능력은 높이 평가받아 군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는 배경이 되었다.[2] 1945년에는 대대장 직책까지 올랐다.[3]

2.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해방 이후 38선 이북으로 귀환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활동했다. 1950년 8월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된 뒤 조선인민군 사단장이 되었고,[7][3] 이후 군단장, 집단군 총참모장,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등 군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7] 한국 전쟁 이후 군대를 사회주의 건설과 군 강화에 동원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

1966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7]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1970년)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3] 1972년 12월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처음으로 공화국영웅 칭호와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7][3]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4]

1982년에는 다시 한번 공화국영웅 칭호와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았으며,[7][3] 같은 해 사회안전성 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7][3] 1989년부터 1994년까지는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을 지냈다.[7][3]

사후 장례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구락부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동료들이 안장된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이곳에는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반신상도 세워져 있다.[7] 그는 김일성 명의의 마지막 조화와 조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7]

3. 사망

김일성과 같은 날 사망했다.[1] 그의 죽음은 7월 24일에 발표되었으며, '예상치 못한' 일로 묘사되었다.[1]

사후 그의 시신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구락부(고위간부 장례식장)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7] 장례식에는 김일성김정일 모두 조문을 보냈으며, 조명선은 김일성으로부터 조문을 받은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1] 또한 김일성 명의로 된 마지막 조화와 조의를 받았다.[7]

시신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을 비롯해 김일성 주석의 항일빨치산 동료들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는 평양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고,[7] 그의 묘에도 흉상이 세워졌다.[1]

참조

[1] 웹사이트 항일빨치산 조명선, 김 주석과 같은 날 사망 http://www.tongilnew[...] 2021-11-03
[2] 웹사이트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한생토록 간직하고 산 참된 전사 https://rodong.rep.k[...]
[3] 웹사이트 북한지역정보넷 http://www.cybernk.n[...] 2021-11-03
[4] 서적 Directory of Officials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https://books.google[...]
[5] 웹인용 『金日成 빨치산 동지 사망소식듣고 심장발작 사망』 https://www.donga.co[...] 2023-10-02
[6] 웹인용 조명선 (趙明善)JO Myong Son https://www.yna.co.k[...] 2023-10-02
[7] 뉴스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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