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근 (18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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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성근은 한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1893년 무과에 급제하여 일본 유학 후 대한제국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접대위원으로 활동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직전 육군 참장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 소속으로 일본군 소장과 중장으로 진급했다. 은퇴 후에는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중일 전쟁을 지원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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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근 (187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조성근 |
한글 | 조성근 |
한자 | 趙性根 |
가타카나 | 쵸 소-군 |
히라가나 | ちょうせいこん |
로마자 표기 | Cho Sung-Geun |
기본 정보 | |
출생 | 1876년 음력 3월 12일 |
사망 | 1938년 양력 5월 15일 |
군 복무 정보 | |
복무 | 대한제국 육군 일제강점기 |
복무 기간 | 1893년 ~ 1931년 |
최종 계급 | 대한제국 육군 참장 일본군: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러일 전쟁 |
기타 이력 | 중추원 참의 |
2. 생애
조성근은 한성부 출신으로, 1893년 무과에 합격하고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1896년 귀국 명령을 받았으나 불복종하고 1897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대한제국 군인과 일제 강점기 일본 제국 육군 장교 및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1][2]
2. 1. 대한제국 시기
1893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대에서 근무하다가 1895년 관비유학을 명 받아 일본으로 갔다. 당시 계급은 부위였다. 이듬해 귀국 명령이 내려졌으나, 조성근은 명령에 불복종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1897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당초 징계를 내렸다가 이를 취소했다.[1]대한제국 군대의 부위로 다시 임용된 조성근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관 등으로 근무했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 승진했고,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접대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보병 참령, 1905년 보병 부령이 되었으며, 육군연성학교 교관을 지냈다. 1906년 의친왕을 수행하여 일본으로 가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장을 받았다.[1]
1906년 보병 정령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무관학교 교장에 올랐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앞두고 육군 참장이 되었으며, 군부 참모국장과 군무국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군대 해산 후에는 군무국장과 친위부 무관을 지냈다. 1908년 일본 정부는 조성근이 러일 전쟁 때 병참 업무에 세운 공로를 인정하여 700JPY을 은사금으로 수여했다.[1]
2. 2. 일제 강점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조선주차군사령부 소속을 명받았다. 1920년 일본 제국 육군 소장, 1928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1년 전역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상여액 1840JPY과 퇴직특별사금 및 수당액 11971JPY을 받았다.[1]은퇴 후에도 각종 관변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만주사변 발생 후 일본군의 중국 침략을 옹호했으며, 1931년 말 만몽재주동포협의회 위원장을 맡았다. 1933년 군국주의 성격이 강한 경성국방의회 부회장, 1934년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하며 중국 침략에 이념적으로 대비한 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 준비위원, 1937년 중일 전쟁 지원을 위한 여성 단체 애국금차회 발기인을 맡았다.[1]
1932년 이봉창이 히로히토를 겨냥해 폭탄을 투척한 사건(사쿠라다몬 사건) 직후, 여러 유력 인사들과 회합하여 일본 내각 및 조선총독부에 사죄하고 자체 근신하기로 결의했다.[1] 1936년 최린 주도의 조선 징병제 실시 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중일 전쟁 발발 후 징병제와 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공개적으로 환영하며 병력 동원에 적극 참여했다.[1]
1933년 총독부 자문 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고, 두 번째 임기 재직 중이던 1938년 사망했다.[1]
일본 정부로부터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 1920년 훈3등 서보장과 종군기장, 1928년 훈2등 서보장과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5년 다년간 근무 성적이 우수하여 은배를 받았다.[1] [2]
3. 사후 평가
조성근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는다.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 및 군 부문,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군인 부문에 선정되었다.[1]
4. 상훈
참조
[1]
간행물
官報 第3858号「叙任及辞令」
1925-07-03
[2]
간행물
官報 第1431号「叙任及辞令」
1931-10-05
[3]
뉴스
人物사전 趙南俊의 名門家 이야기 /斗溪 李丙燾와 학자 인맥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0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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