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와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지프 와튼은 1826년에 태어나 1909년에 사망한 미국의 기업가, 발명가, 과학자, 자선가이다. 그는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나 사업가로 활동하며 백납, 벽돌, 아연, 니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니켈 산업을 개척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베들레헴 철강 회사의 지배 지분을 인수하여 미국 해군과의 계약을 통해 회사를 성장시켰다. 또한 스와스모어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기부하여 교육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와튼 스쿨을 설립하여 경영 교육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과학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정치 및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미국 제조업을 보호하는 관세 법안 통과를 위해 로비 활동을 펼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의 정치가, 과학자, 발명가, 작가, 출판인, 외교관으로서 미국 독립 선언문 초안 작성,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 체결, 피뢰침과 프랭클린 스토브 발명, 전기에 대한 연구,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출판, 사회 개혁 활동, 필라델피아 도서관 설립, 미국 헌법 제정 참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며 미국 건국과 계몽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법학대학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법학대학원은 1790년 제임스 윌슨의 법률 강의로 시작되어 미국 최초의 법학 저널을 발행하고, 2019년 케리 로스쿨로 명칭을 변경하여 다양한 연구와 공익 변호사 지원을 하며 높은 입학 경쟁률을 보이는 로스쿨이다. - 미국의 경영학자 - 허버트 사이먼
허버트 사이먼은 제한된 합리성 개념을 제시하고 조직 내 의사결정 과정을 연구하여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학자, 인지심리학자, 컴퓨터 과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인공지능 분야 초기 연구에 기여했고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인지과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 미국의 경영학자 -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그리스계 해운업 거물의 아들로 MIT 미디어랩 공동 설립자이자 소장을 역임한 컴퓨터 과학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는 "건축 기계" 개념 구상,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연구 선도, "데일리 미" 개념 제시, 『디지털의 미래』 저술, OLPC 프로젝트 주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나, MIT 미디어랩의 제프리 엡스타인 기금 수령 관련 논란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 펜실베이니아주의 공화당 당원 - 커트 실링
커트 실링은 1988년부터 2009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투수로 활동하며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하고 3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으며, 통산 3,000탈삼진을 달성하고 은퇴 후에는 ESPN 해설가로 활동했으나 해고되었고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 펜실베이니아주의 공화당 당원 - 존 유
존 유는 대한민국 서울 출신 미국 법학자이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법학대학원 교수로,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법무부에서 테러 용의자 고문 허용 등의 법률 해석을 주도하여 논란을 일으켰으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국 교육과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조지프 와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1826년 3월 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사망 | 1909년 1월 1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직업 | 산업가 |
배우자 | 1854년, 애나 코빗 러버링 |
자녀 | 조안나 W. 리핀코트, 메리 L. 와튼, 애나 W. 모리스 |
![]() |
2. 초기 생애와 교육
조지프 와튼은 1826년 3월 3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진보적인 힉사이트 퀘이커 가문의 열 명의 자녀 중 다섯 번째였다. 그의 부모인 윌리엄 와튼과 데보라 피셔 와튼은 모두 퀘이커 가문 출신의 저명한 초기 미국 이민자 가문 출신이었다.
와튼의 외할아버지인 새뮤얼 R. 피셔는 필라델피아와 런던 간의 번창하는 상업 사업과 해운 팩킷 라인을 운영했고, 그의 외할머니인 한나 로드만은 코넬 대학교의 공동 설립자인 에즈라 코넬의 조상인 토마스 코넬의 후손이었다. 그의 부계 조부는 상인이었고, 벨뷰 저택이라는 시골집과 저택을 소유했다. 와튼의 두 외할머니는 모두 한나라는 이름을 가졌고 뉴포트 출신이었다.
와튼은 필라델피아 센터 시티의 스프루스 가와 4번가 근처에 있는 가족 집과 현재의 노스 필라델피아에 있는 시골 저택인 벨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와튼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신사였고, 몇 가지 질병으로 인해 정규 직업을 갖지 않았지만,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고, 필라델피아 학교 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아내 데보라와 함께 힉사이트 목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가족은 종종 인근의 슈킬 강, 데보라의 할아버지 조슈아 피셔의 더 클리프스와 같은 인근 저택을 방문했고, 필라델피아 주변의 시골로 주말 말과 마차 여행을 갔으며, 때로는 작은 퀘이커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소년 시절, 와튼은 필라델피아 외곽 마을에 있는 두 개의 퀘이커 기숙 학교와 도시의 여러 사립 학교에 다녔다. 14세에서 16세 사이에 와튼은 사립 튜터의 지도를 받아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16세에 그는 당시 도시에서 태어난 힉사이트 퀘이커의 흔한 꿈인 농부의 삶을 배우고 성숙해지라는 부모의 조언을 따랐다. 그는 3년 동안 웨스트체스터 근처에 있는 조셉과 아비가일 월튼의 가족 농장에서 하숙했다.
와튼은 건장한 체격으로 성장했으며 키는 약 1.83m였고 진지하지만 쾌활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승마, 수영, 슈킬 강에서 보트 타기를 포함한 스포츠에 능숙했다. 겨울 동안 와튼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프랑스어와 독일어와 같은 언어를 공부했는데, 이는 과학 및 기술에 대해 배우는 데 유용했다. 그는 또한 마틴 한스 보예의 필라델피아 연구소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초기 시절에 와튼과 그의 형제들은 발명가이자 건설자인 사이러스 맥코믹과 새뮤얼 F. B. 모스와 동일시했다.
3. 경력
19세에 와튼은 2년 동안 회계사에게 견습생으로 일하며 비즈니스 방식과 부기를 익혔다. 21세가 되어서는 형 로드만과 함께 백납을 생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와튼의 화학 분야 스승이었던 마틴 보예는 면실유 정제법을 개발했는데, 와튼 형제는 이를 이용해 수익성 있는 추출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49년, 와튼은 건조된 점토를 틀에 압착하는 특허 기계를 사용하여 벽돌을 만드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벽돌 사업은 경쟁이 치열했고 경기 변동에도 민감했다. 와튼은 벽돌과 기계를 팔기 위해 여러 지역을 다녔지만, 결국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그는 사업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1853년, 와튼은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및 리하이 아연 회사에 합류했다. 그는 처음에는 채광 작업을 관리했고, 이후에는 산화 아연 공장을 맡았다. 와튼은 공장을 위한 새로운 헌장을 협상하며 능력을 보여주었고, 1857년부터 1858년까지 이어진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아연 공장을 신중하게 운영하여 수익을 내는 데 성공했다.
1860년, 와튼은 회사 이사회와의 어려운 협상 끝에 리하이 아연 회사를 위해 미국 최초로 금속 아연을 생산하는 공장을 개발했다. 그는 다음 경기 순환을 예측하고 공장을 4년간 임대했으며, 미국 남북 전쟁 시기에 수요가 늘어난 황동 제조에 사용되는 금속 아연 판매를 통해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이 성공은 이후 그의 다양한 사업 확장의 발판이 되었다.
3. 1. 니켈 산업
1863년, 와튼은 주화에 니켈을 사용하는 데서 이익을 얻고자 아연 사업 지분을 매각하고 뉴저지주 캠든에서 니켈 제조를 시작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니켈 광산에 있는 니켈 광산과 정련 공장을 인수했다. 캠든 공장은 10번가 동쪽에 위치했으며, 쿠퍼 크릭에 인접해 있었다. 와튼은 캠든 공장 이름을 아메리칸 니켈 워크스(American Nickel Works)로 변경했고, 이곳은 그의 사업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주화에 니켈 사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곧 캠든 공장에 화재가 발생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와튼은 1868년에 공장을 재건했으며, 이후 니켈이 주화 제작에 선호되면서 니켈 생산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그는 세계 최초의 가공성 니켈과 니켈 자석 개발로 널리 명성을 얻었으며, 1878년 파리 박람회에서는 금메달을 수상했다. 그의 공장은 미국에서 유일하게 니켈을 생산하는 곳이었고, 세계 공급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펜실베이니아 갭 광산의 표면 퇴적물이 고갈되자, 와튼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서드베리에 있는 광산에서 니켈 광석을 구매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외국 니켈 제조업체들의 견제를 경험하면서 시장 경제와 보호무역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와튼은 경영진과 직접 소통하며 정기적으로 광산과 제조 공장을 점검하는 현장 중심 경영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는 인수한 사업의 경제적 효율성과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제품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와튼은 40년간 니켈 사업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었으나, 1900년경 외국과의 경쟁 심화로 사업 전망이 어두워졌다. 이에 와튼과 다른 여러 미국 및 캐나다 니켈 기업들은 1902년에 국제 니켈 회사(Inco)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그는 캠든의 아메리칸 니켈 워크스와 갭 광산을 새로운 회사의 지분으로 매각하고, Inco의 이사 12명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시기 와튼의 사업 제국은 이미 다른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다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니켈 제조에 대한 의존도는 낮아진 상태였다.
3. 2. 베들레헴 스틸
1870년대부터 와튼은 선철과 강철 레일을 생산하던 베들레헴 아이언 컴퍼니(Bethlehem Iron Company)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회사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고, 이사회에서 가장 큰 주주가 되어 결국 회사의 지배 지분을 확보했다. 다만, 회사의 일상적인 운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1885년, 와튼은 미국 해군과의 단조 강철 장갑 생산 계약을 성공적으로 따냈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영국(휘트워스)과 프랑스(슈나이더)의 제철소를 직접 방문하여 고품질 강철을 단조하는 최신 공장 설계를 연구했다.
이러한 해외 기술 도입을 바탕으로 베들레헴 아이언 컴퍼니는 미국 최초로 고강도 강철 단조 공장을 건설했다. 이 공장에서는 차량 장갑과 군함에 사용될 포 등을 생산했다. 회사는 이후 베들레헴 스틸 컴퍼니(Bethlehem Steel Company)로 이름을 바꾸고, 해군과의 계약 등을 통해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며 성장했다. 와튼 역시 이를 통해 꾸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1901년 와튼은 회사를 매각했지만, 이후에도 광범위한 철광석과 석탄 채굴 및 정제 사업을 통해 미국 내 주요 선철 생산자로서의 입지를 유지했다.
3. 3. 뉴저지 부동산 및 수자원 사업
1854년 필라델피아는 행정 구역 확장을 통해 세수를 늘렸고, 미국 남북 전쟁 이후 인구가 급증했다. 1870년경 센테니얼 박람회 개최를 앞두고 도시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늘어난 인구에 비해 물 공급은 부족했고, 수질 정화 기술의 부재와 주요 수원인 델라웨어 강과 슈킬 강의 심각한 오염으로 인해 물 부족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필라델피아의 장티푸스 발병률은 미국 내에서 가장 높았으며, 부유층은 주로 병에 담긴 샘물을 구매해 마셨다.
이러한 상황에서 와튼 가문의 벨뷰 맨션 저택은 식수 저장을 위한 새로운 저수지 건설 부지로 거론되며 필라델피아 시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대응하여 와튼은 1870년대부터 뉴저지 남부의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최종적으로 파인랜즈 지역에 약 388.50km2에 달하는 광대한 토지를 확보했는데, 이곳은 여러 강과 호수로 채워지는 풍부한 대수층을 가지고 있었다. 파인랜즈의 물은 상대적으로 깨끗했기에, 와튼은 이 물을 수도관과 펌프 시설을 통해 필라델피아로 공급하는 대규모 사업을 구상했다. 그는 시가 관리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시민들이 주식과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사업 자금을 조달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필라델피아와 뉴저지 양쪽에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뉴저지에서는 주 외부로 물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와튼의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 한편, 벨뷰 저택 부지는 시에 수용되었으나, 저수지 건설 계획은 지역 정치 문제와 더불어 1890년대에 여과를 통한 수질 정화 기술이 도입되면서 필요성이 사라져 최종적으로 취소되었다. 대신 이 부지는 개발업자들에게 매각되어, 필라델피아 북부의 새로운 산업 단지 인근에 주택을 공급하는 용도로 개발되었다.
3. 4. 광산 및 철도 사업
와튼은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광산, 공장, 철도 등 많은 산업 기업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뉴저지주 포트 오람 지역에 광석과 철 고로가 포함된 토지를 구매했는데, 이곳은 모리스 운하와 철도 근처에 위치했으며, 후에 와튼을 기리기 위해 와튼으로 개명되었다.
그는 미국 여러 지역에 걸쳐 광산을 소유하거나 개발했다.
또한 사우스저지 지역에서는 석유와 비료를 생산하는 멸치 어유 공장, 현대적인 임업 식재 사업, 크랜베리 농장, 사탕무 농장 등 다양한 기업을 시작했다.
철도 사업에도 깊이 관여하여 리딩 컴퍼니와 리하이 밸리 철도를 비롯한 여러 철도 회사 운영에 참여했다. 그는 광석과 완제품을 효율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철도망과 지선 건설을 추진했다. 와튼은 이러한 광범위한 사업을 관리하며 통신, 운송, 제조 분야의 새로운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대규모 산업을 수익성 있게 운영하는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4. 정치 및 사회 활동
수십 년에 걸쳐 와튼은 워싱턴 D.C.에서 로비 활동을 펼쳐 미국 제조업 보호를 위한 관세 법안 통과에 기여했다. 그는 대규모 사업을 옹호했으며, 확고한 공화당 지지자였다. 와튼은 미국 주화에 니켈 사용을 성공적으로 옹호했으나, 니켈 관세에 대한 로비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는데, 이는 그가 미국 내 니켈 생산에 대한 사실상 독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873년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 속에서도 그는 활동을 이어갔다.
와튼은 제조업 관련 기업들의 산업 연맹 지도자이자 미국 철강 협회의 주요 로비스트 및 회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벤자민 해리슨을 포함한 여러 미국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고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에 더 많은 자본 참여를 허용하기 위해 파트너십을 지원하는 펜실베이니아 총회의 법안 통과를 위한 로비 활동을 통해 성공시켰다.
와튼은 다양한 분야의 저명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와 조지프 레이디, 천문학자 새뮤얼 랭글리, 과학자 켈빈 경, 미국 상원 의원 제임스 블레인과 저스틴 모릴, 실업가 앤드루 카네기, 야금학자 알프레드 크루프를 포함한 국제적인 인사들을 자택에 초대했다.
5. 과학 연구
조지프 와튼은 자연에 관심을 가진 과학자였으며, 학술 출판을 통해 천문학과 야금학을 포함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학술 논문을 작성하여 여러 편을 미국 철학회에 제출했다. 그는 1869년에 미국 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
1883년부터 1884년 겨울까지 몇 달 동안 전 세계적으로 해 질 녘 하늘이 유난히 붉게 물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부에서는 이 현상이 크라카토아 화산 폭발로 인해 전 세계 대기 중에 퍼진 먼지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반면, 철강 용광로에서 나오는 붉은 갈색 먼지가 원인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와튼은 이 현상에 호기심을 느껴 직접 조사에 나섰다. 어느 날 아침, 가볍게 눈이 내리자 집 근처 들판에서 눈을 모아 녹이고 증발시킨 뒤, 야금 연구용 현미경으로 남은 입자를 관찰했다.
관찰 결과, 입자들은 "불규칙하고, 납작하며, 덩어리진" 유리 조각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는 필라델피아 항구에 도착한 마닐라발 선박을 찾아갔는데, 이 배는 크라카토아 화산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을 항해하며 바다에 떠다니는 엄청난 양의 부석 때문에 항해 속도가 느려졌다고 했다. 이 부석은 크라카토아 화산에서 분출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와튼은 선원에게서 부석 표본을 얻어 자신이 눈 속에서 채취한 먼지 입자와 비교했고, 두 입자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893년, 와튼은 이 먼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담은 논문을 미국 철학회 창립 150주년 기념회에서 발표했다. 또한 그는 이중성단에서 오는 빛의 색 변화, 즉 도플러 효과를 이용하여 지구로부터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제안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이 원리를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변하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와튼은 생전에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야금학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으며,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6. 스와스모어 대학교
1864년, 조지프 와튼은 어머니 데보라 피셔 와튼, 그리고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뉴욕시 등지의 힉사이트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필라델피아 외곽에 스워스모어 대학교를 설립했다. 스워스모어 대학교는 남녀 모두가 특정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프렌즈의 전통에 기반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의 필요성을 충족시켰다.
와튼은 대학에 재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캠퍼스 내 프렌즈 회의소 건립과 과학 건물 건립에도 기여했다. 그의 어머니 데보라 역시 1862년부터 1870년까지 스워스모어 이사회에서 활동했으며, 조지프는 1870년부터 1909년까지 이사로, 1883년부터 1907년까지는 이사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종종 캠퍼스를 방문하여 여러 차례 졸업 연설을 했다.
7. 와튼 스쿨
조지프 와튼은 보호 관세와 경기 순환을 포함한 경제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썼다. 19세기 후반 상업 교육이 주로 현장 훈련이나 견습에 의존하는 현실을 보고, 사업 개발 및 운영, 경제 변동 예측 및 대응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교의 필요성을 느꼈다.
1881년, 와튼은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10만달러를 기부하여 "금융 및 경제 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이후 와튼 스쿨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는 자신이 과거 워싱턴 D.C.에서 미국 기업을 위해 로비 활동을 펼쳤던 경험을 바탕으로, 학교 교수진이 경제적 보호주의를 옹호할 것을 명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와튼 스쿨은 설립자의 초기 의도에 머무르지 않고 점차 교육 범위를 확장했다. 세계적인 시각을 받아들이며 정치학 및 당시 발전하던 사회 과학과 같은 다른 학문 분야를 교육 과정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점차 현대적인 사업 관리 및 금융 교육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와튼 스쿨은 경영학, 금융, 관리 분야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을 최초로 도입한 대학 수준의 교육 기관이었다.
개교 이래 와튼 스쿨은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경영대학원 중 하나로 꾸준히 인정받고 있다. 다만 2023년에는 ''파이낸셜 타임즈'' MBA 순위 집계 방식 변경 등의 이유로 해당 순위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명단에서 제외되기도 했다.[2]
8. 개인적인 삶
와튼은 건장한 체격으로 성장했으며 키는 약 1.83m였고 진지하지만 쾌활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승마, 수영, 슈킬 강에서 보트 타기를 포함한 스포츠에 능숙했다. 겨울 동안 필라델피아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과학 및 기술 학습에 유용한 프랑스어와 독일어 같은 언어를 공부했으며, 마틴 한스 보예의 필라델피아 연구소에서 화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와튼은 육체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생애 말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다. 72세까지 그는 필라델피아 근처 그의 온탈라우나(Ontalauna) 저택 연못에서 손님들과 함께 스케이트를 탔고, 저녁 식사 후 가족들과 산책을 자주 했다. 그는 평생 동안 신체 운동을 했고,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순한 알코올 음료의 섭취도 제한하는 등 절제된 생활을 했다. 80세가 다 되었을 때, 그는 카누를 타고 콜로라도 강을 따라 내려가고 양동이를 타고 광산으로 들어가 네바다의 은광을 방문했으며, 81세에는 손자 조셉 와튼 립핀콧과 함께 독일을 방문하여 카이저 빌헬름 2세를 만나 그의 요트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에서의 코크스 제조와 뉴저지 북부의 철에 대한 자신의 자산 감독을 계속했다.
그는 문학을 널리 읽었으며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의 시 중 상당수는 해외 여행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1873년 유럽 방문 후 "스튜어드슨의 이야기", 광산 시찰을 위해 쿠바를 방문한 후 "로열 팜"과 "쿠바의 양키 필리스틴의 '달콤한 합리성'", 1889년 멕시코 방문 후 "멕시코"를 썼다. 그의 금광을 보기 위한 네바다로의 국내 여행은 "협곡의 언덕"이라는 시를 낳았다.
9. 사망
와튼은 1907년 뇌졸중을 겪었으나 회복하였다. 이후 1909년 1월 11일 필라델피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지는 필라델피아 외곽, 펜실베이니아주 발라 시노이드에 위치한 로럴 힐 묘지에 마련되었다.
10. 유산
와튼은 생애 말년까지 육체적으로나 사업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72세까지 필라델피아 근처 저택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탔으며, 80세가 넘어서도 콜로라도 강 탐험, 네바다 은광 방문, 독일 방문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펜실베이니아에서의 코크스 제조 및 뉴저지 북부의 철 관련 사업 감독도 계속했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주로 해외 여행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 유럽, 쿠바, 멕시코, 네바다 등을 여행하며 느낀 감상을 시로 표현했다.
1907년 뇌졸중을 겪은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09년 1월 11일, 필라델피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그는 필라델피아의 로럴 힐 묘지 내 가족 묘역에 안장되었다.[5]
참조
[1]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1-04-26
[2]
웹사이트
Wharton falls off Financial Times' 2023 MBA ranking for first time in 25 years
https://www.thedp.co[...]
[3]
서적
[4]
뉴스
Joseph Wharton is Dead. Prominent Ironmaker Expires at Home in Philadelphia.
1909-01-12
[5]
문서
Philadelphia
https://www.phillyma[...]
[6]
웹사이트
For the Record: Joseph Wharton
http://www.upenn.edu[...]
Penn Current
2012-01-19
[7]
간행물
The Origin of New Jersey Place Names
http://mapmaker.rutg[...]
New Jersey Public Library Commission
1945-05
[8]
웹사이트
History of Wharton Borough; Morris County, New Jersey
http://nynjctbotany.[...]
NY-NJ-CT Botany Online
[9]
웹사이트
UCLA QB Josh Rosen is a bonafide star. Now how well can he handle the ensuing fame?
https://www.si.com/c[...]
2016-08-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