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마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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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마이컨은 1924년 일리노이주 졸리엣에서 태어난 미국의 농구 선수이다. 디폴 대학교에서 대학 농구 선수로 활약하며 2차례 헬름스 재단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1945년에는 NIT 우승을 이끌었다. 1946년 시카고 아메리칸 기어스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여 NBL 득점왕을 차지했고,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로 이적하여 NBA 시대를 개척했다. NBA에서 득점왕 3회, MVP 1회, 7번의 챔피언십 우승을 기록하며, 리그 초창기를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ABA 커미셔너를 역임하며 3점슛 라인을 도입하는 등 농구 발전에 기여했다. 1959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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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이컨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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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지 마이컨 |
본명 | 조지 로렌스 마이컨 주니어 |
로마자 표기 | George Lawrence Mikan, Jr. |
애칭 | 미스터 바스켓볼 |
사망 여부 | 사망 |
사망일 | 2005년 6월 1일 |
출생일 | 1924년 6월 18일 |
출생지 | 미국 일리노이주 졸리엣 |
사망지 |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 |
신장 | 208cm |
체중 | 111kg |
학력 정보 | |
고등학교 | 졸리엣 카톨릭 아카데미 |
대학교 | 디폴 대학교 |
선수 경력 | |
포지션 | C |
등번호 | 99 |
프로 시작 년도 | 1946년 |
프로 은퇴 년도 | 1954년, 1956년 |
소속팀 | 시카고 아메리칸 기어스 (1946–1947)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1947–1953, 1955) |
코치 경력 | |
코치 시작 년도 | 1957년 |
코치 은퇴 년도 | 1958년 |
감독 팀 |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1957) |
수상 내역 | |
BAA/NBA 챔피언 | 5회 (1949, 1950, 1952-1954) |
NBA 올스타 선정 | 4회 (1951-1954) |
NBA 올스타 게임 MVP | 1회 (1953) |
올-BAA/NBA 퍼스트팀 | 6회 (1949-1954) |
NBA 득점왕 | 3회 (1949-1951) |
NBA 리바운드 왕 | 1회 (1953) |
NBA 25주년 올타임팀 | 해당 없음 |
NBA 35주년 올타임팀 | 해당 없음 |
NBA 50주년 올타임팀 | 해당 없음 |
NBA 75주년 기념팀 | 해당 없음 |
NBL 챔피언 | 2회 (1947, 1948) |
NBL 시즌 MVP | 1회 (1948) |
올-NBL 퍼스트팀 | 2회 (1947, 1948) |
NBL 득점왕 | 1회 (1948) |
헬름스 재단 올해의 선수 | 2회 (1944, 1945) |
스포팅 뉴스 올해의 선수 | 1회 (1945) |
올-아메리칸 컨센서스 퍼스트팀 | 3회 (1944–1946) |
영구 결번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99번), 디폴 블루 데몬스 (99번) |
기록 | |
NBA/BAA/NBL 총 득점 | 11,764점 (22.6 ppg) |
BAA/NBA 총 득점 | 10,156점 (23.1 ppg) |
NBA 총 리바운드 (최근 5시즌) | 4,167개 (13.4 rpg) |
BAA/NBA 총 어시스트 | 1,245개 (2.8 apg) |
기타 정보 | |
명예의 전당 헌액 | 1959년 |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 2006년 |
포지션 | 센터 |
2. 유년 시절 및 대학 경력
1924년 6월 18일, 조지 로렌스 마이컨 주니어는 일리노이주 졸리엣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키가 컸던 그는 13세에 이미 약 1.83m(약 183cm)에 달했으나, 큰 키는 오히려 놀림감이 되어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구부정한 자세로 다니기도 했지만, 한 수녀의 조언으로 자신의 신체 조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졸리엣 가톨릭 고등학교 재학 중 무릎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고, 회복하는 동안 키는 203cm까지 자랐다. 하지만 심한 근시 때문에 안경을 썼는데, 당시 농구 코치는 안경을 쓴다는 이유로 그가 농구를 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잠시 농구의 꿈을 접고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로 전학하기도 했으나, 농구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농구 선수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여러 과정을 거쳐 시카고의 디폴 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마이컨은 자신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농구 선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나중에 신문 스포츠 기사를 통해 아들의 활약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디폴 대학교에서의 생활과 활약은 그의 농구 경력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 1. 유년 시절
1924년 6월 18일, 조지 로렌스 마이컨 주니어는 일리노이주 졸리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 조셉, 어머니는 리투아니아인 미니였으며, 형제 조와 에드, 누나 마리가 있었다.[10] 할아버지 조지 마이컨은 1874년경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크로아티아 비보디나에서 태어나 1891년 펜실베이니아주 브래독으로 이민 왔다.[9] 할아버지는 1906년 펜실베이니아주 앨러게니에서 다른 크로아티아 이민자 마리야와 결혼했고, 1907년 마이컨의 아버지 조셉이 태어났다. 이후 가족은 졸리엣으로 이사하여 선술집을 열었다.[10]어린 시절 마이컨은 무릎을 심하게 다쳐 1년 반 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기도 했다. 할머니는 마이컨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 했지만, 그는 차고 벽에 붙은 골대를 향해 공을 던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미 어릴 때부터 키가 컸던 마이컨은 13세 무렵에는 약 1.83m(약 183cm)에 달했다. 하지만 큰 키는 오히려 놀림감이 되어 콤플렉스가 되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항상 구부정한 자세로 다녔다. 졸리엣 가톨릭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무릎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어 오랫동안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
1938년, 마이컨은 시카고의 퀴글리 대주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가톨릭 사제가 되기를 꿈꿨으나,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졸리엣 가톨릭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마쳤다.[11] 부상으로 쉬는 동안에도 키는 계속 자라 203cm에 이르렀지만, 심한 근시 때문에 농구 코치로부터 "안경을 낀 사람은 농구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농구 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다시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때 신학교로 전학했고, 1941년 졸업 무렵에는 법률 분야로 진로를 바꾸는 것을 고려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마이컨은 조지 쿠건 코치의 지도로 몰래 연습하며 노트르담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쿠건 코치는 마이컨의 실력이 명문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다른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결국 마이컨은 1942년 시카고의 디폴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의 키는 약 1.83m(약 208cm), 몸무게는 약 111.13kg(약 111kg)였으며, 큰 체격 때문에 움직임이 다소 어색했고 근시로 두꺼운 안경을 착용했다.[12] 마이컨은 성직자의 길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끝까지 숨겼고, 그의 아버지는 신문 스포츠 기사를 통해 아들이 농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2. 2. 디폴 대학교

고등학교 재학 중 마이컨은 28세의 신인 디폴 농구 코치 레이 메이어를 만났다. 당시 키 큰 선수는 농구를 하기에 너무 어색하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총명하고 지적이지만 어색하고 수줍어했던 마이컨에게서 잠재력을 본 메이어의 생각은 혁신적이었다.[11] 메이어는 마이컨을 자신의 키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자랑스러워하는 자신감 있고 공격적인 선수로 만들었다. 메이어와 마이컨은 강도 높은 훈련을 했고, 마이컨은 양손으로 정확하게 훅슛을 하는 법을 배웠다. 골밑에서 좌우 번갈아 슛을 반복하는 이 훈련 루틴은 나중에 마이컨 드릴로 알려지게 된다.[12] 또한, 메이어는 마이컨에게 스피드 백 치기, 댄스 레슨, 줄넘기 등을 시키며 그의 민첩성을 키우고 완벽한 운동선수로 만들려 했다.[4]
마이컨은 NCAA 경력을 디폴에서 시작하면서부터 동료들을 압도했다. 그는 자신의 키와 힘으로 상대를 위협했고, 훅슛으로 공격에서 막을 수 없었다. 리그에서 가장 거칠고 투지 넘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종종 부상을 안고 경기를 뛰고 거친 파울로 상대 센터들을 괴롭혔다.[11] 특히 마이컨은 농구 슛이 림에 도달하기 전에 쳐내는 골텐딩 능력으로 농구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에는 골텐딩 규칙이 없었기에, 마이컨은 "우리는 키 주변에 4명의 선수를 배치하고 내가 바스켓을 지키는 존 디펜스를 펼쳤다. 상대 팀이 슛을 하면, 그냥 뛰어올라 쳐냈다"고 회상했다. 이 때문에 NCAA(그리고 나중에는 NBA)는 공이 슛의 정점에 도달하거나 백보드를 맞고 림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을 경우 공을 터치하는 것을 금지하는 골텐딩 규칙을 도입했다.[1] 오클라호마 A&M의 키 약 2.13m 센터였던 밥 컬랜드는 마이컨을 상대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NCAA 센터 중 한 명이었다.[13]
마이컨은 1944년과 1945년에 헬름스 재단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세 번이나 올 아메리카 농구 선수로 뽑혔다. 1942-43 시즌 데폴대는 마이컨의 활약으로 19승 5패를 기록하며 NCAA 남자 농구 토너먼트에 처음 출전해 파이널 포(Final Four)까지 진출했다. 1943-44 시즌에는 22승 4패로 전국 랭킹 4위에 올랐고, NIT 준결승에서 밥 커랜드가 이끄는 오클라호마 주립 대학교를 꺾었으나 결승에서 세인트 존스 대학교에 패했다. 1944-45 시즌에는 평균 23.9득점으로 전국 득점 1위를 차지했고, 팀을 NIT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NIT는 NCAA 토너먼트보다 더 권위 있는 대회로 여겨졌다.[14] 마이컨은 NIT에서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는데, 로드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혼자 53점을 넣는 등 3경기에서 총 120점을 기록하며 팀의 71-54 볼링 그린 주립 대학교전 승리를 이끌었다.[12] 최종 학년인 1945–46 시즌에도 평균 23.1득점으로 득점왕과 올 아메리칸에 선정되었으며, 시카고 스타디움에서 열린 노트르담 대학교와의 경기에서는 23,000명의 관중 앞에서 팀의 63-47 승리를 이끌었다. 이 해 데폴대는 19승 5패를 기록했다.
3. 프로 경력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6년, 대학을 졸업한 마이컨은 프로 농구계에 뛰어들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 스포츠 리그가 생겨나고 있었고, 농구계 역시 여러 리그가 난립하는 상황이었다. 전미 농구 리그(NBL)의 시카고 아메리칸 기어스는 대학 농구 스타였던 마이컨을 영입하기 위해 당시 스포츠 역사상 최고액인 5년 6만달러 계약을 제시했다.[24] 마이컨은 첫 시즌부터 리그 득점 1위를 차지하고 팀을 NBL 우승과 월드 프로페셔널 농구 토너먼트 우승으로 이끌며 MVP에 선정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15][24]
하지만 기어스 구단주가 독자적인 리그 프로 농구 리그 오브 아메리카(PBLA) 창설을 시도하다 실패하면서 팀이 해체되었고, 마이컨은 1947년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로 이적하게 되었다.[1][24] 레이커스에서도 마이컨의 활약은 계속되어 팀을 NBL 우승으로 이끌었다.[18]
1948년, 레이커스를 포함한 NBL의 주요 4개 팀이 신흥 리그인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로 이적했다. 마이컨은 BAA에서도 첫 시즌부터 득점왕[43]과 올BAA 1st 팀에 선정되며 리그 최고의 선수임을 증명했고, 레이커스를 BAA 우승으로 이끌었다. 1949년 BAA가 NBL의 나머지 팀들을 흡수하여 NBA가 탄생하자, 마이컨과 레이커스는 새로운 리그에서도 성공을 이어갔다. 마이컨은 짐 폴라드, 번 미켈슨, 슬레이터 마틴 등과 함께 NBA 역사상 첫 왕조를 구축하며 팀을 여러 차례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NBA 첫 3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고, 리바운드 부문에서도 최상위권 성적을 기록했다. 그의 압도적인 골밑 장악력 때문에 NBA는 1951년 골밑 제한 구역을 기존 약 1.83m에서 약 3.66m로 두 배 넓히는 규칙 변경을 단행했는데, 이는 "마이컨 룰"로 불리기도 했다.[1][22]
마이컨은 NBL 우승 1회, BAA/NBA 우승 5회를 포함하여 총 6번의 프로 농구 챔피언십 우승을 경험했다. 잦은 부상과 가족과의 시간을 이유로 1954년 은퇴를 선언했으나, 1955-56 시즌 중반 잠시 복귀했다가 시즌 종료 후 최종 은퇴했다.[1] 그는 NBA 역사상 최초로 통산 10,000점을 돌파한 선수[23]였으며, 1959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액된 인물 중 한 명이다.[1]
3. 1. 시카고 아메리칸 기어스 (1946-1947)

1945년–1946년 대학 시즌이 끝난 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으로 귀환 군인들이 늘어나며 미국 내 프로 스포츠가 활기를 띠던 시기에 마이칸은 전미 농구 리그(NBL)의 시카고 아메리칸 기어스와 계약했다. 당시 여러 프로 농구 리그가 난립하던 상황에서 스타 선수 확보는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했고, 기어스는 마이칸에게 5년간 6만달러라는 당시 스포츠 역사상 최고액의 계약을 제시했다.[24]
마이칸은 1946-47 NBL 시즌 후반부에 기어스 소속으로 25경기에 출전하여, 시즌 평균 16.5득점으로 리그 1위를 차지했다.[1][24] 그는 팀을 1946년 월드 프로페셔널 농구 토너먼트에서 우승으로 이끌었고, 5경기에서 100점을 득점하며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15][24] 또한, 기어스는 NBL 챔피언십도 제패했으며, 마이칸은 올 NBL 팀에 선출되었다.[1][12][24]
그러나 1947-48 NBL 시즌 시작 전, 기어스의 구단주 모리스 화이트는 팀을 NBL에서 탈퇴시키고 자신이 모든 팀과 경기장을 소유하는 24개 팀 규모의 새로운 리그, 프로 농구 리그 오브 아메리카(PBLA) 창설을 시도했다.[1][24] 이 대담한 구상은 리그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금난으로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하고 1947년 11월에 해체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24] NBL과의 재통합도 거부당했고, 기어스는 결국 해체되었으며, 화이트는 마이칸에게 급여를 지불할 수 없게 되어 계약이 해지되었다.[24]
자유 계약 선수가 된 마이칸을 영입할 권리는, 1946년 창단되어 1947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로 연고지를 이전하고 팀명을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로 개명한 팀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마이칸은 존 쿤들라 코치가 이끄는 레이커스 소속 선수가 되었다.[1][24]
3. 2.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1947-1954, 1956)
대학 시절 원정 경기로 미네소타를 방문했던 마이컨은 추운 날씨 탓에 이 지역에 좋은 인상을 갖지 못했고, 레이커스가 자신의 소유권을 획득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베리아로 드래프트되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커스 구단은 이 뛰어난 농구 선수를 붙잡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존 쿤드라를 코치로 영입하고, 지역 미네소타 대학교 출신인 토니 야로시와 돈 칼슨을 영입했으며, 스탠퍼드 대학교 스타 선수였던 짐 폴라드와 1.2만달러 계약을 맺어 선수단을 강화했다. 마이컨은 변호사와 함께 미니애폴리스 팀 대표를 만났지만, 3시간의 협상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카고행 마지막 비행기가 이미 떠난 후였고, 마이컨은 미니애폴리스에 더 머물게 되었다. 협상은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고, 결국 마이컨은 레이커스와의 계약서에 서명했다.마이컨을 비롯한 스타 선수들을 갖춘 레이커스는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폴에서 큰 지지를 받으며 두 도시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 레이커스에서의 첫 시즌(1947-48), 마이컨은 1,195점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 1위에 올랐고, NBL 역사상 유일하게 한 시즌 1,000점 이상을 득점한 선수가 되었다.[16] 정규 시즌 후 리그 MVP[17]로 선정되었고, 레이커스는 NBL 챔피언에 등극했다.[18] 압도적인 실력으로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디비전 1위를 차지했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오크쇼시 올스타스와 블랙호크스를 차례로 꺾고 파이널에 진출하여, 밥 데이비스가 이끄는 로체스터 로열스를 물리치고 NBL 우승을 차지했다. 1948년 4월에는 월드 프로페셔널 농구 토너먼트 우승을 이끌었으며, 결승전에서 뉴욕 르네상스를 상대로 토너먼트 기록인 40점을 득점하며 MVP로 선정되었다.[19]
이 시즌을 전후하여 NBL의 경쟁 리그였던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 후의 NBA)가 NBL을 흡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NBL에 유력 선수들이 많았지만, 대도시를 연고로 하는 팀이 많은 BAA가 자금력에서 우위에 있었다. 1948년, BAA는 NBL에서 비교적 시장 규모가 큰 4개 팀을 영입했는데, 여기에는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포트 웨인 피스톤스, 인디애나폴리스 제츠, 그리고 당시 레이커스의 라이벌이었던 로체스터 로열스가 포함되었다.
새로운 리그인 BAA로 옮긴 첫 해(1948-49 시즌), 마이컨은 다시 한번 득점 선두를 차지하며 단일 시즌 득점 기록을 경신했다. 레이커스는 1949 BAA 파이널에서 워싱턴 캐피털스를 꺾고 우승했다.
1949년, BAA와 NBL이 합병하여 NBA가 탄생했다. 17개 팀으로 시작된 첫 1949–50 NBA 시즌에서 레이커스는 센트럴 디비전에 속했다. 마이컨은 경기당 평균 27.4점, 2.9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또다시 득점왕에 올랐다.[20] 레이커스는 51승 17패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플레이오프를 거쳐 1950 NBA 파이널에서 시라큐스 내셔널스와 맞붙었다. 1차전에서는 레이커스의 후보 가드 밥 해리슨이 40피트 거리에서 버저 비터를 성공시키며 원정에서 2점 차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네 경기를 양 팀이 나눠 가졌고, 6차전에서 레이커스가 110–95로 승리하며 첫 NB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마이컨은 플레이오프에서 경기당 31.3점을 기록했다.[1]

1950–51 NBA 시즌에도 마이컨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정규 시즌에서 개인 최고 기록인 경기당 평균 28.4점을 기록하며 다시 득점왕을 차지했고, 경기당 평균 3.1 어시스트를 기록했다.[20] 이 해 NBA는 리바운드 통계를 새로 도입했는데, 마이컨은 이 부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경기당 14.1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시라큐스의 돌프 셰이스(경기당 16.4개)에 이어 리그 2위를 차지했다.[20] 같은 해, 마이컨은 NBA 역사상 가장 특이한 경기 중 하나에 참여했다. 포트 웨인 피스톤스와의 경기에서 피스톤스가 19–18로 앞서자, 마이컨에게 공이 가면 역전당할 것을 우려한 피스톤스는 득점 시도 없이 공을 돌리기만 했다.[21] 당시에는 공격 시간을 제한하는 샷 클락이 없었기 때문에 경기는 그대로 19–18로 끝났다. 이는 역대 NBA 최저 득점 경기로 기록되었으며, 4년 후 샷 클락이 도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이컨은 이 경기에서 레이커스의 18점 중 15점을 혼자 득점하여 팀 득점의 83.3%를 책임지는 NBA 기록을 세웠다.[21] 포스트시즌에서는 1951 NBA 서부 디비전 파이널에서 로체스터 로열스를 상대하기 전 다리 골절 부상을 당했다. 마이컨은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경기에 나섰지만, 로열스가 3승 1패로 승리했다. 수십 년 후인 1990년, 마이컨은 당시 다리에 플레이트를 부착한 채 한 발로 뛰어다니면서도 경기당 20점 정도를 기록했다고 회상했다.[1]
1951–52 NBA 시즌에 NBA는 골밑 제한 구역(페인트 존)을 기존 6피트에서 12피트로 두 배 넓히기로 결정했다. 선수들은 이 구역 안에 한 번에 3초 이상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넓어진 제한 구역은 마이컨과 같은 빅맨들이 공격 시 골대에서 더 멀리 떨어지도록 강제하는 효과가 있었다.[1] 이 규칙 변경의 주요 지지자는 마이컨을 최대 라이벌로 여겼던 뉴욕 닉스의 코치 조 랩칙이었으며, 이 규칙은 "마이컨 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22] 마이컨은 여전히 경기당 23.8점을 기록했지만, 이전 시즌의 27.4점에 비하면 감소한 수치였다. 그의 필드 골 성공률도 .428에서 .385로 떨어졌다. 하지만 경기당 13.5개의 리바운드(리그 1위)와 3.0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20] 1952년 1월 20일, 로체스터 로열스와의 2차 연장전 경기에서는 개인 최고 기록인 61점을 득점하며 팀의 91-81 승리를 이끌었다. 이는 당시 조 풀크스의 63점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마이컨의 득점은 나머지 팀 동료들의 득점 합계(30점)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그는 또한 당시 기록이었던 36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시즌 후 레이커스는 1952 NBA 파이널에 진출하여 뉴욕 닉스와 맞붙었다. 이 시리즈는 첫 6경기 동안 양 팀 모두 자신의 홈 코트에서 경기를 치르지 못한 기묘한 시리즈였다. 레이커스의 미니애폴리스 오디토리움은 이미 다른 일정으로 예약되어 있었고, 닉스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링링 브라더스 앤 바넘 앤 베일리 서커스가 사용하고 있었다. 대신 레이커스는 세인트 폴에서, 닉스는 습하고 조명이 어두운 69연대 병기창에서 경기를 치렀다. 닉스의 냇 클리프턴과 해리 갤러틴의 집요한 더블 팀 수비에 시달렸지만, 레이커스는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 갔다. 유일한 실제 홈 경기였던 7차전에서 레이커스는 82–65로 승리하며 닉스를 4승 3패로 꺾고 NBA 타이틀을 되찾았으며, 팀원들은 7500USD의 상금을 받았다.[22]
1952–53 NBA 시즌 동안 마이컨은 경기당 평균 20.6점, 개인 최고 기록인 경기당 평균 14.4리바운드(리그 1위), 경기당 2.9어시스트를 기록했다.[20] 1953 NBA 올스타전에서는 22점과 1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MVP를 수상했다. 레이커스는 1953 NBA 파이널에 진출하여 다시 한번 닉스를 4승 1패로 꺾고 우승했다.[1]
1953–54 NBA 시즌, 당시 29세였던 마이컨은 점차 기량이 하락하여 경기당 평균 18.1점, 14.3리바운드, 2.4어시스트를 기록했다.[20] 하지만 그의 리더십 아래 레이커스는 또 다른 NBA 타이틀을 획득하며 팀의 3연패와 6년 만에 5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NBA 역사에서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왕조는 1957년부터 1969년까지 11번의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 셀틱스 왕조 다음가는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1]
1953-54 시즌 종료 후 마이컨은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가족이 생겼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농구 외의 전문적인 세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선수 생활 동안 겪은 10번의 골절과 16바늘의 봉합 수술 등 잦은 부상도 은퇴의 한 요인이었다.[1] 마이컨 없이 레이커스는 1955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파이널에는 오르지 못했다. 1955–56 NBA 시즌 중반, 마이컨은 레이커스 선수단에 복귀했다. 그는 37경기에 출전했지만 오랜 공백으로 인해 이전의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평균 10.5점, 8.3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했고,[20]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첫 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시즌 종료 후 마이컨은 최종적으로 은퇴했다. 그의 통산 10,156점은 당시 NBA 최고 기록이었으며, 그는 NBA 역사상 최초로 통산 10,000점을 돌파한 선수였다.[23] 그는 1959년 첫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AP 통신에 의해 20세기 전반기를 빛낸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1]
3. 3. 은퇴 번복과 복귀 (1956)
1953–54 NBA 시즌이 끝난 후 마이컨은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나는 가족이 생겼고, 그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농구 외의 전문적인 세상에서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선수 생활 동안 10번의 골절과 16바늘의 봉합 수술을 겪는 등 부상 문제도 은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1] 마이컨이 없는 레이커스는 1955 NBA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파이널 무대에는 오르지 못했다.1955–56 NBA 시즌 중반, 마이컨은 레이커스 선수단에 복귀했다. 그는 37경기에 출전했으나 오랜 공백으로 인해 이전과 같은 경기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평균 10.5점, 8.3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데 그쳤고,[20] 레이커스는 1956 NBA 플레이오프 첫 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이 시즌을 끝으로 마이컨은 최종적으로 은퇴했다. 그는 NBA 역사상 최초로 통산 10,000점을 돌파한 선수였으며, 총 10,156점을 기록했다.[23]
4. 은퇴 후 경력
1954년, NBA는 저득점 경기가 잦았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4초 공격 제한 시간(샷 클락) 제도를 도입했다. 마이컨은 이를 통해 자신이 활약했던 치열한 하프코트 농구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느꼈다. 결국 그는 1954-55 시즌 훈련 캠프 시작 3일 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가족 곁에 있고 싶다", "농구 외의 분야로 나아갈 때"라고 밝혔으며, 누적된 부상(골절 10곳, 봉합 16곳) 역시 은퇴의 주요 원인이었다.[25]
마이컨이 떠난 레이커스는 클라이드 러브렛이 그의 자리를 메우며 40승 32패로 선전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며 레이커스의 연속 우승은 여기서 멈췄다. 1955-56 시즌에는 마이컨의 동료였던 짐 폴라드마저 은퇴했고, 팀은 시즌 초반 연패에 빠졌다. 위기에 처한 레이커스는 마이컨에게 현역 복귀를 간청했고, 그는 시즌 중반 팀에 합류했다. 하지만 1년 이상의 공백과 부상 후유증으로 전성기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37경기에 출전해 평균 10.5득점 8.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팀 성적도 33승 39패에 그쳤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밥 페팃이 이끄는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게 패배했다. 시즌 종료 후, 마이컨은 다시 한번 은퇴를 선언하며 코트를 완전히 떠났다. NBL, BAA, NBA 세 리그 통산 11,764득점은 당시 역대 1위 기록이었다.
1956년, 마이컨은 공화당 후보로 미네소타 제3선거구에서 미국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현직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재선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마이컨은 현역 의원 로이 위어에게 48% 대 52%의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마이컨 117,716표, 위어 127,356표). 선거 후 법조계로 돌아가려 했으나, 약 6개월간 일감을 얻지 못해 생명 보험을 해지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25]
프로 스포츠계에서의 시도 역시 순탄치 않았다. 1957-58 시즌, 당시 레이커스 단장이 된 존 컨들라의 설득으로 마이컨은 팀의 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팀이 9승 30패라는 극심한 부진에 빠지자 마이컨은 사임했고, 컨들라가 다시 코치직을 맡았다. 레이커스는 해당 시즌 19승 53패라는 팀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1] 코치직 실패 이후 마이컨은 기업법 및 부동산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성공을 거두었고, 미니애폴리스에서 건물을 매입해 개조하기도 했다.[1]
1967년, 마이컨은 NBA의 경쟁 리그로 출범한 아메리칸 농구 협회(ABA)의 초대 커미셔너로 임명되며 농구계에 복귀했다. 그는 ABA의 흥행을 위해 빨강, 하양, 파랑 세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공인구를 고안했는데, 이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과 성조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ABA의 상징이 되었다.[1] 또한, 현대 농구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3점 라인을 도입하는 혁신을 이끌었다.[26] 마이컨은 1969년에 커미셔너 직에서 물러났지만[27], ABA는 1976년까지 존속하며 미국 프로 농구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28]
1980년대 중반, 마이컨은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가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1960년)하고 ABA의 미네소타 머스키스와 미네소타 파이퍼스가 사라진 지 약 25년 만에 미니애폴리스에 다시 프로 농구팀을 유치하기 위한 활동을 이끌었다.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1989-90 시즌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창단되는 성과를 거두었다.[1]
1994년에는 시카고를 연고로 하는 프로 롤러 하키 팀 시카고 치타스의 공동 소유주이자 이사회 의장을 맡아 롤러 하키 인터내셔널 리그에 참여했으나, 팀은 창단 2년 만에 해체되었다.[29]
5. 개인 생활 및 사망
1947년, 마이컨은 아내 패트리샤와 결혼하여 사망할 때까지 58년을 함께했다. 마이컨 부부는 여섯 자녀(아들 래리, 테리, 패트릭, 마이클, 딸 트리샤, 모린)를 두었다.[21] 아들 래리 마이컨은 미네소타 대학교를 졸업하고 NBA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1970-71 시즌 동안 선수로 활동했다. 또한 마이컨에게는 한 살 아래 동생 에드 마이컨이 있었는데, 그 역시 디폴 대학교에서 농구를 했고 BAA와 NBA의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등에서 선수로 뛰었다.[30] 평생 동안 마이컨은 코트에서는 강인했지만 사생활에서는 친절하고 상냥한, 전형적인 "젠틀 자이언트"로 여겨졌다.[21]
말년에 마이컨은 당뇨병과 신부전증으로 고생했다. 결국 이 질병으로 인해 오른쪽 다리를 무릎 아래까지 절단해야 했다. 의료 보험 적용이 중단되면서 마이컨은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11] 그는 NBA와 선수 노조를 상대로 1965년 이전에 은퇴한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연금이 월 1700USD로 너무 낮다고 주장하며 오랜 법정 투쟁을 벌였다. 이는 소위 "큰돈 시대(Big money era)"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의 권리를 위한 싸움이었다. 전미 농구 은퇴 선수 연합(NBRPA)의 멜 데이비스에 따르면, 마이컨은 새로운 단체 협약이 체결되어 자신의 시대 선수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때까지 버티고자 했으나, 2005년 그의 건강 상태는 악화되었다.[4][21] 마이컨은 생의 마지막 5년 동안 일주일에 세 번, 한 번에 4시간씩 신장 투석 치료를 받았다.[4][21]
2005년 6월 1일, 마이컨은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서 당뇨병 및 기타 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향년 80세에 사망했다.[4][21]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애도를 받았으며, NBA 최초의 슈퍼스타가 말년을 연금 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였다는 사실이 주목받았다. 많은 해설가와 전문가들은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현역 선수들이 NBA 초창기 선수들의 생활 보장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현역 스타였던 샤킬 오닐은 "마이컨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고, 마이컨의 장례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같은 해 NBA 플레이오프에서는 오닐이 속한 마이애미 히트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경기 시작 전, 마이컨을 추모하는 1분간의 묵념이 진행되었다.
2022년 10월 30일, 레이커스는 마이컨이 선수 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99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는 행사를 열었다.
6. 유산 및 평가
조지 마이컨은 현대 농구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1][3] NBA 최초의 슈퍼스타로서 프로 농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그의 등장은 장신 선수들이 경기를 지배하는 현대 농구의 흐름을 예고했고,[1][3] 밥 쿠지는 마이컨이 초창기 NBA를 이끌며 리그의 인기와 신뢰도를 높였다고 평가했다.[4] 실제로 초창기 NBA는 마이컨의 인기에 크게 의존했으며,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G. 마이컨 대 닉스"라는 간판이 걸리기도 했다.[12]
이전까지 농구는 상대적으로 단신 선수들이 주를 이뤘으나, 208cm의 큰 키와 민첩성을 겸비한 마이컨의 등장은 '빅맨'의 시대를 열었다.[1][3] 그는 훅슛과 리바운드, 블록슛으로 경기를 지배했으며, 이는 현대적인 센터 플레이의 원형이 되었다. 그의 압도적인 영향력 때문에 NBA는 여러 규칙을 변경하거나 도입하게 되었다.
- '''골텐딩''': 마이컨이 상대의 슛을 골대 근처에서 쳐내는 것을 막기 위해 1943년 대학 농구에서 도입되었고, 이후 프로 리그에도 적용되었다.
- '''제한 구역 확대''': 마이컨을 골대에서 더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NBA는 제한 구역의 너비를 6피트에서 12피트로 두 배 넓혔다. 이는 "마이컨 룰"이라고 불린다.
- '''샷 클락''': 1950-51 시즌 포트웨인 피스톤스가 마이컨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지공 작전을 펼쳐 19-18이라는 기록적인 저득점 경기가 나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12] 이 경기에서 마이컨은 팀 득점 18점 중 15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팀 전체 득점의 83.3%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처럼 지루한 경기 운영을 막기 위해 1954년 24초 샷 클락이 도입되었으며, 마이컨의 존재 역시 이 규칙 도입에 영향을 미쳤다.[3]
마이컨은 선수들의 기량 발전에 기여하는 연습법을 남기기도 했다.
선수 은퇴 후, 1967년 새로 출범한 ABA의 초대 커미셔너를 맡아 리그 운영에도 기여했다.
- '''3점 슛''': ABA는 마이컨 커미셔너 시절 3점 슛 규칙을 도입했는데, 이는 나중에 NBA에도 도입되었다.
- '''3색 공''': ABA의 상징이 된 빨강, 하양, 파랑의 3색 공인구 역시 마이컨 재임 시절 도입되었다. 현재 올스타전 3점 슛 콘테스트의 '머니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미네소타 지역에 프로 농구팀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1989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창단으로 이어졌다.
마이컨은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수많은 영예를 안았다. 그는 NBL, BAA, NBA에서 총 7번의 우승, 올스타전 MVP, 3번의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6번의 올-NBA 팀에 선정되었다.[1][3][12] 그는 NBA 통산 11,764 득점(경기당 평균 22.6점), 13.4 리바운드, 2.8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은퇴 당시 NBA 역대 최다 득점자였다.[3][12][32] AP통신은 그를 20세기 전반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선정했으며, 헬름스 체육 재단 역대 올아메리카 팀(1952년), NBA 25주년, 35주년, 50주년 기념팀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1][3][12] 1959년에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액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33] 2022년에는 크로아티아계 미국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37] 같은 해 10월 30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는 그의 등번호 99번을 영구 결번했다.[38] 그의 1948년 보우먼 트레이딩 카드는 한때 가장 비싼 농구 카드로 기록되기도 했다.[36]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홈구장인 타겟 센터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3]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홈구장인 크립토닷컴 아레나에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배너가 걸려 있다.[35]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졸리엣에도 동상과 벽화가 있다.
마이컨의 영향력은 후대 선수들에게도 이어졌다. 샤킬 오닐은 "마이컨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장례 비용을 지원했다.[31] 마이컨의 죽음은 초기 NBA 선수들의 재정적 어려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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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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