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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B. 코텔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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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B. 코텔류는 1862년에 태어나 1940년에 사망한 미국의 정치인이자 기업가이다. 그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비서로 일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행정부에서 초대 상무부 및 노동부 장관, 우정부 장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07년 공황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서 위기 완화에 힘썼으며, 이후 콘솔리데이티드 가스 회사의 사장으로 민간 기업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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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B. 코텔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지 B. 코텔류 (1905–1907년경)
조지 B. 코텔류 (1905–1907년경)
본명조지 브루스 코텔류
출생1862년 7월 26일
출생지미국 뉴욕주 뉴욕 시
사망1940년 10월 23일
사망지미국 뉴욕주 뉴욕 시
정당공화당
배우자릴리 모리스 하인즈
학력웨스트필드 주립 대학교 (학사)
조지타운 대학교 (법학 학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법학 석사)
공직
미국의 44대 재무부 장관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임기 시작: 1907년 3월 4일

임기 종료: 1909년 3월 7일

전임: 레즐리 쇼

후임: 프랭클린 맥비
미국의 42대 우정장관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임기 시작: 1905년 3월 6일

임기 종료: 1907년 1월 14일

전임: 로버트 윈

후임: 조지 마이어
공화당 전국 위원회 의장임기 시작: 1904년 6월 23일

임기 종료: 1907년 1월 7일

전임: 헨리 페인 (대행)

후임: 해리 뉴
미국의 초대 상무노동부 장관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임기 시작: 1903년 2월 18일

임기 종료: 1904년 6월 30일

전임: (신설)

후임: 빅터 H. 멧커프
대통령 비서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임기 시작: 1900년 5월 1일

임기 종료: 1903년 2월 18일

전임: 존 애디슨 포터

후임: 윌리엄 로브 주니어

2. 어린 시절

조지 B. 코텔류는 1862년 7월 26일 뉴욕에서 피터 크롤리어스 코텔류 주니어와 로즈 시어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652년 뉴네덜란드에 정착한 이민자 자크 코텔류를 조상으로 둔 오래된 뉴네덜란드계 가문이었다. 그는 브루클린의 공립학교, 펜실베이니아주의 나사렛 홀 육군 사관학교, 그리고 롱아일랜드의 헴스테드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았다.[1]

1882년, 20세의 나이로 코텔류는 매사추세츠주 웨스트필드에 위치한 교원 양성 대학인 웨스트필드 보통학교(현재의 웨스트필드 주립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워싱턴 D.C.로 가 컬럼비안 대학교(현재의 조지 워싱턴 대학교)와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 재학 중 파이 시그마 카파 형제단의 일원이었다. 대학 졸업 후 코텔류는 교직에 몸담았으며, 이후 속기 과정을 수료하고 속기법을 익혔다.[1]

1888년 9월 15일, 코텔류는 릴리 모리스 힌즈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1]

3. 초기 경력

1891년 조지 B. 코텔류는 뉴욕의 우편 검사관 비서직을 얻었다.[1] 이듬해인 1892년에는 워싱턴 D.C.로 옮겨 제4 보조 우정장관실 서기로 승진하였다.[1][2] 1895년, 당시 우정장관이었던 윌슨 S. 비셀의 추천으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코텔류를 대통령 수석 서기로 임명했다.[1][2]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자신의 후임자인 윌리엄 매킨리에게 코텔류를 개인 비서로 추천하였다.[1][2]

매킨리 행정부에서도 코텔류는 대통령 개인 비서로 일하며 백악관 사무실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1][2] 1901년 9월 6일, 매킨리 대통령은 뉴욕주 버펄로에서 열린 범아메리카 박람회의 음악당에서 방문객들과 인사하던 중 무정부주의자 리언 촐고츠가 쏜 총에 맞았다.[1][2] 총탄 두 발을 맞고 쓰러지는 매킨리 대통령을 코텔류를 포함한 측근들이 급히 부축했다.[1][2] 매킨리 대통령은 코텔류의 팔에 안겨 My wife... be careful, Cortelyou, how you tell her--oh, be careful.|나의 부인... 조심해, 코텔류, 그녀에게 말해줘. 오, 조심하라구.eng라고 속삭인 것으로 전해진다.[1][2] 매킨리 대통령은 피격 8일 후 사망하였다.[2]

4. 루스벨트 행정부

시어도어 루스벨트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후, 코텔류에게 백악관을 더 전문적인 조직으로 개혁하도록 지시했다. 코텔류는 백악관 의전을 위한 절차와 규칙을 개발하고, 기존의 관행을 체계화했다. 또한 대통령 집무실과 언론 사이의 소통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기자들에게 작업 공간을 마련해주고, 주요 사안에 대해 브리핑했으며,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특히 현직 대통령이 검토할 수 있도록 최초로 체계적인 언론 보도 스크랩을 구축했는데, 이는 언론을 통해 여론을 파악하려는 대통령의 첫 시도로 여겨진다.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코텔류는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1903년 2월 18일부터 1904년 6월 30일까지 신설된 미국 상무노동부의 초대 장관을 지냈다. 이후 1905년 3월 6일부터 1907년 1월 14일까지 미국 우정장관을 역임했으며, 1907년 3월 4일부터 1909년 3월 7일까지는 미국 재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정치적으로도 코텔류는 1904년부터 1907년까지 공화당 전국 위원회 의장을 맡아 루스벨트 대통령의 성공적인 재선을 도왔다.

한편, 1903년 4월 9일에는 파이 무 알파 신포니아 형제단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이 형제단이 창설된 뉴잉글랜드 음악원 출신이다.

4. 1. 1907년 공황 대처

1907년 3월 4일부터 1909년 3월 7일까지 코텔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아래에서 미국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이 시기는 파괴적인 1907년 공황이 발생한 때와 겹친다. 코텔류는 그의 전임자 레즐리 쇼처럼 은행 시스템을 보호하는 것이 재무부의 임무라고 믿었지만, 동시에 재무부만으로는 경제적 안정을 유지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국립 은행에 3500만달러의 정부 자금을 예치하고 정부 채권을 매입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더 나아가 미래의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코텔류는 더 탄력적인 통화 시스템의 필요성을 옹호하고 중앙은행 시스템의 창설을 권고했다.

이러한 코텔류의 주장은 1908년 앨드리치 브리랜드 법의 통과로 이어졌다. 이 법은 공황과 같은 위기 상황 시 특별 통화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중앙은행 설립 논의를 위한 위원회를 창설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1913년 연방준비제도 창설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5. 이후의 생애, 사망과 유산

재무 장관 사임 후, 코텔류는 콘솔리데이티드 에디슨으로 나중에 알려진 콘솔리데이티드 가스 회사(Consolidated Gas Company)의 사장으로 취임하며 민간 기업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또한 현재는 폐쇄된 콘 에디슨 에너지 박물관의 의장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40년 10월 23일 사망할 때까지 롱아일랜드 헤일사이트에 있는 자택 '하버 라이트(Harbor Lights)'에서 살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에디스 루스벨트는 코텔류의 아내와 가까운 친구였기에 그의 집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의 유해는 콜드스프링하버의 세인트 존 교회(St. John's Church) 기념 묘지에 안장되었다.

조지 B. 코텔류의 묘지


앨라배마주 워싱턴군에 있는 비법인지역사회인 코텔류는 조지 코텔류가 우정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기존의 리처드슨(Richardson)에서 그의 이름을 따 변경된 것이다.[2] 1942년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자유호 중 한 척의 이름이 정해졌으며, 이 배는 이후 화물선 USS ''세투스''가 되었다.

참조

[1] 간행물 Chapter Invisible 1941-01
[2] 서적 Place Names in Alabama The University of Alabama Press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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