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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톨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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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톨런드는 아일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작가로, 자유사상가로 불리며 종교와 정치 분야에서 급진적인 사상을 펼쳤다. 그는 1696년 저서 《기독교는 신비가 아니다》에서 성경의 합리적 해석을 주장하며 기존 교회의 권위에 도전했고, 이후 범신론적 사상과 유대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톨런드는 공화주의와 자유를 옹호했으며, 18세기 영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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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톨런드
기본 정보
이름존 톨랜드
다른 이름야누스 유니우스 톨랜드, 션 오 투할레인, 에오간 나 레아바르 (책의 존)
출생일1670년 11월 30일
출생지아닥, 도니골 주, 아일랜드 왕국
사망일1722년 3월 11일
사망지푸트니, 서리, 영국
철학적 배경
지역서양 철학
시대계몽주의
주요 관심사자유, 신학, 물리학
주요 아이디어범신론
영향존 로크

2. 생애

존 톨런드는 아일랜드 북서부 이시호윈 반도의 가톨릭교회 배경에서 태어났으나, 16세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16][17] 이후 글래스고 대학교, 에든버러 대학교, 라이덴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등에서 공부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16][17]

1696년 출간한 그의 첫 저서 ''신비가 아닌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영어)는 이성을 강조하며 기독교 교리의 신비성을 부정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24] 이 책으로 인해 그는 런던 대배심에 기소되었고, 아일랜드에서는 그의 책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지기도 했다.[18]

옥스퍼드를 떠난 후 주로 런던에 거주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갔고, 유럽 대륙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722년 런던 퍼트니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9][20] 그는 스스로 작성한 묘비명을 통해 자유와 학문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21] 그의 사후 피에르 데 마조에 의해 전기가 쓰여졌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존 톨런드는 아일랜드 북서부 이시호윈 반도의 아다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주로 가톨릭 신자가 많고 아일랜드어가 사용되는 곳이었다.[16]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세례명은 '야누스 유니우스(Janus Junius)'였는데, 이는 로마 신화의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로마 공화국의 설립자로 알려진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존'이라는 이름은 소년 시절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사용하기 시작했다.[16]

16세에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후,[17] 장학금을 받아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16] 1690년, 19세의 나이로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17] 이후 부유한 영국 비국교도의 후원으로 장학금을 받아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했으며,[17] 이후 영국 옥스퍼드에서도 거의 2년(1694–1695) 동안 학업을 이어갔다. 후원자들은 톨런드가 비국교도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17] 옥스퍼드 시절 그는 뛰어난 학식과 함께 "종교심이 부족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옥스퍼드 시절 집필을 시작하여 1696년 출간한 그의 첫 저서 ''신비가 아닌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eng)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24] 이 책에서 톨런드는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는 진정한 신비가 없으며, 신앙의 모든 교리는 이성으로 이해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4] 또한 교부들이 참된 기독교를 타락시켰으며, 기독교는 본래 유대교적이었다고 주장하며 합리적인 교리를 강조했다.[24] 이 주장은 즉각적인 반박에 부딪혔고, 런던 대배심에 의해 기소되기도 했다. 아일랜드 출신이었던 톨런드에 대해 아일랜드 의회는 그의 책이 아일랜드 성공회의 핵심 교리에 반한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불태울 것을 결의했다. 1697년, 그가 아일랜드를 떠난 사이 더블린에서 그의 책 세 권이 실제로 소각되었다.[18] 톨런드는 이러한 조치를 취한 개신교 입법자들을 가톨릭의 이단 심문관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18]

2. 2. 저술 활동과 논란

톨런드는 옥스퍼드 시절 연구를 바탕으로 1696년 첫 저서인 『신비가 아닌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영어)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는 진정한 신비가 없으며, 신앙의 모든 교리는 적절하게 훈련된 이성을 통해 자연의 원리로부터 이해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부들이 참된 기독교를 타락시켰으며, 기독교는 원래 유대교적이었다고 보았다.[24]

이 책은 출간 즉시 여러 반박에 부딪혔으며, 톨런드는 런던 대배심에 기소되었다. 그는 아일랜드 왕국의 신민이었기에, 아일랜드 의회 의원들은 그의 책이 아일랜드 성공회의 핵심 교리에 반한다는 이유로 그를 화형에 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톨런드가 1697년 아일랜드를 떠나자, 그의 부재 중에 책 세 부가 더블린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18] 톨런드는 이러한 조치를 취한 개신교 입법자들을 "저자를 붙잡을 수 없을 때 책을 불태우는 교황 종교 재판관"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18]

옥스퍼드를 떠난 후 톨런드는 남은 생애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냈지만, 유럽 대륙, 특히 독일과 네덜란드를 자주 방문했으며 1707년부터 1710년까지는 대륙에서 살았다. 1722년 3월 10일, 런던 퍼트니(Putney)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극심한 빈곤 속에서 펜을 손에 쥔 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19][20] 죽기 직전 스스로 작성한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담겨 있다.[21]

> 그는 자유의 주창자였고, 모든 종류의 학문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누구의 추종자나 의존자도 아니었다. 찡그림이나 운명도 그가 선택한 길에서 벗어나도록 굽힐 수 없었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그의 저작을 찾아보라.

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에르 데 마조가 톨런드의 전기를 썼다.

2. 3. 죽음

톨런드는 1722년 3월 10일 런던의 퍼트니(Putney)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9][20] 그는 극심한 빈곤 속에서 펜을 손에 쥔 채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19] 죽음을 앞두고 그는 스스로 묘비명을 작성했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그는 자유의 주창자였고, 모든 종류의 학문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누구의 추종자나 의존자도 아니었다. 찡그림이나 운명도 그가 선택한 길에서 벗어나도록 굽힐 수 없었다."[21] 묘비명은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그의 저작을 찾아보라."는 말로 끝맺는다.[21]

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에르 데 마조에 의해 톨런드에 대한 긴 전기가 쓰여졌다.

3. 정치 사상

존 톨런드는 자유사상가로서 정치적으로 휘그당을 지지했으며, 공화주의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초기에는 입헌군주제와의 조화를 모색하는 저술 활동을 했으나, 점차 교회와 국가의 위계질서에 반대하며 군주제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등 급진적인 사상으로 나아갔다.

톨런드는 인간의 본질적 특징으로 자유를 강조했으며, 정치 제도는 질서 유지뿐 아니라 자유 보장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성관용을 좋은 사회의 근간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교회와 국가의 권위를 중시하는 토리주의와는 명확히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당시 영국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유대인에게도 적용하여 그들의 귀화와 공직 참여 권리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 활동에는 때로 선동적인 측면이나 반가톨릭주의 정서를 이용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3. 1. 공화주의와 입헌군주제

존 톨런드는 휘그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정치 논문을 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제임스 해링턴, 앨저넌 시드니, 존 밀턴과 같은 17세기 중반의 주요 공화주의 사상가들의 전기를 쓰거나 저작을 편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 《자유로운 잉글랜드》(Anglia Libera)와 《국가의 해부》(State Anatomy)는 입헌군주제와 조화를 이루려는 영국 공화주의자의 관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이다. 특히 《자유로운 잉글랜드》는 하노버 왕위 계승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1701년 톨런드가 하노버를 방문했을 때 선제후 소피아로부터 환대를 받기도 했다.

1699년 톨런드가 저술한 "존 밀턴의 생애"의 첫 페이지. 노트르담 대학교 헤스버그 도서관에서 디지털화함.


《신비가 없는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를 출간한 이후 톨런드의 사상은 점차 더 급진적으로 변화했다. 그는 교회 내부의 위계질서에 반대했으며, 이러한 생각은 국가의 위계질서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그는 주교와 왕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았고, 군주제가 신으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은 통치 형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1704년 저서 《세레나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Serena)에서는 '범신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진리가 어떻게 도출되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왜 잘못된 인식에 빠지기 쉬운지를 분석했다.

정치적으로 톨런드는 자유가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 제도가 단순히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설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성과 관용은 그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의 두 가지 기둥이었다. 이는 휘그주의의 지적인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교회국가 모두에서 신성한 권위를 강조하는 토리주의(토리당)와는 명확히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자유롭게 태어난 시민들 사이의 완전한 평등에 대한 톨런드의 믿음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관용의 대상이었지만 여전히 외부인으로 취급받던 유대인 공동체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는 1714년에 쓴 《유대인 귀화의 이유》(Reasons for Naturalising the Jews)라는 글에서 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의 귀화를 허용하고 그들이 공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톨런드의 정치 활동이 항상 지적인 논의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 팸플릿에는 선동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자코바이트를 비판할 때는 당시 사회에 퍼져 있던 저급한 반가톨릭주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하노버 왕조를 지지하면서 그의 공화주의적 성향은 다소 누그러졌다. 그는 시민적 덕목과 사회적 조화, '정의로운 자유'와 '이성의 보존과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군주를 이상적으로 보았지만, 실제 조지 1세월폴이 이끌던 과두정치는 톨런드가 생각했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3. 2. 자유와 이성

존 톨런드는 조지 버클리 주교에 의해 자유사상가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1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지만, 주로 교회 기관을 비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지적 활동 중 상당 부분은 휘그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정치 논문을 쓰는 데 할애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그를 제임스 해링턴, 앨저넌 시드니, 존 밀턴과 같은 17세기 중반의 주요 공화주의자들의 전기를 쓰거나 그들의 저작을 편집한 인물로 기억한다. 그의 저서 ''Anglia Libera''와 ''State Anatomy''는 입헌군주제와 조화를 이루려는 영국 공화주의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산문이다. 1701년 하노버를 잠시 방문했을 때, 그는 ''Anglia Libera''에서 하노버 왕위 계승을 지지한 덕분에 선제후 소피아의 환대를 받기도 했다.

''Christianity Not Mysterious'' 출간 이후 톨런드의 견해는 점차 더 급진적으로 변화했다. 그는 교회 내 위계질서에 반대했으며, 이러한 생각은 국가 내 위계질서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그는 주교와 왕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군주제는 신으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은 통치 형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1704년 저서 ''Letters to Serena''에서는 "범신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진리가 어떻게 도출되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왜 잘못된 인식("허위 의식")에 빠지기 쉬운지에 대해 신중하게 분석했다.

정치적으로 톨런드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자유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특징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 제도가 단순히 질서를 확립하는 것을 넘어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설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톨런드에게 이성과 관용은 좋은 사회를 이루는 두 가지 기둥이었다. 이는 휘그주의의 가장 세련된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교회국가 모두에서 신성한 권위를 내세우는 토리당과는 명확히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자유롭게 태어난 시민들 사이의 완전한 평등에 대한 톨런드의 신념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용인되었지만 여전히 외부인으로 취급받던 유대인 공동체에도 적용되었다. 그는 1714년 저서 ''Reasons for Naturalising the Jews''에서 외국 태생 유대인의 귀화를 허용하고 그들이 공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시모네 루자토의 1638년 저서 ''Discourse on the Jews of Venice''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톨런드의 활동이 항상 순수한 지적 사색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 팸플릿에는 선동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자코바이트를 공격할 때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저급한 반가톨릭주의 정서를 이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3. 3. 유대인의 권리 옹호

존 톨런드는 자유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핵심 특징이라고 보았다. 그는 정치 제도가 단순히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톨런드에게 이성관용은 좋은 사회를 이루는 두 기둥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자유롭게 태어난 모든 시민 사이의 완전한 평등을 지향했으며, 이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주변인이었던 유대인 공동체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톨런드는 유대인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1705년 출판된 『기독교 교회의 원시적 헌법』(Primitive Constitution of the Christian Churcheng)과 『나자레누스』(Nazarenuseng)에서는 유대인 기독교도의 한 분파인 에비온파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기존 교회를 비판했다.

1714년에는 『유대인의 귀화론, 그리고 모든 편견에 대한 유대인의 옹호』(Reasons for Naturalising the Jewseng)를 저술하여, 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의 귀화를 허용하고 그들이 공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25]. 이 책은 유대인의 완전한 시민권과 평등권을 주장한 최초의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저작은 시모네 루자토의 1638년 저서 《베네치아 유대인에 관한 담론》(Discorso circa il stato de gl'Hebreiita)의 영향을 받았다.

1718년에는 "유대교도가 받드는 진정한 기독교"라는 개념을 통해, 로마 제국의 이교도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했으며 교황 제도가 이를 더욱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유대교의 의식을 비난하는 기독교 측 주장이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기존 기독교 세계를 비판하고 유대인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했다[24][26].

4. 종교 사상

톨런드는 존 로크인식론적 합리주의에 영향을 받아 종교를 이성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다. 그의 첫 주요 저작인 ''신비가 아닌 기독교''(eng, 1696)는 성경의 모든 계시가 인간 이성으로 이해 가능하며, 신앙에는 본질적인 신비가 없다고 주장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은 제목과 내용 면에서 로크의 ''기독교의 합리성''(1695)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으나, 로크 본인은 연관성을 부인했으며 이는 에드워드 스틸링플리트와의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톨런드는 성경의 문자적 권위와 성경 정경의 형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밀턴의 생애''(1698)와 그 후속작 ''아민토르''(1699)를 통해 신약 외경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성경의 역사적 진위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톨런드의 사상은 범신론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1704년 출간된 ''세레나에게 보내는 편지''(eng)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설명하며 '범신론'(panthe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 책에서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기초를 세우고 미신과 편견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분석했다. 또한 물리적 운동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정지 상태 역시 운동의 한 형태라고 주장했다. 1705년에는 ''소시니즘의 진정한 상태, 범신론자에 의해''(eng)라는 저작을 통해 스스로를 명확히 범신론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톨런드의 진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데이비드 버먼과 같은 학자들은 톨런드가 실제로는 무신론자였으며,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여 자신의 급진적인 견해를 범신론이라는 용어 뒤에 숨겼다고 주장한다. 버먼은 톨런드가 묘사한 범신론적 신이 사실상 비인격적이고 결정론적인 물질 세계와 다름없어, 전통적인 의미의 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석했다.[11] 톨런드 스스로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철학(외교 철학)과 신뢰하는 소수에게만 밝히는 철학(밀교 철학)을 구분했는데, 이는 그의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전략으로 여겨진다.

그의 후기 저작 중 하나인 ''판테이스티콘, 또는 소크라테스 학회의 기념 양식''(lat, 1720)은 영국 국교회의 예배 형식을 모방하여 이교도 작가들의 글을 인용한 일종의 전례문으로, 사적으로 소량 인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불쾌감과 논란을 일으켰다. 전반적으로 톨런드의 종교 사상은 당대의 정통 신학과 교회 권위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으며, 이성과 합리성을 통해 종교적 믿음과 경전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받는다.

4. 1. 성경의 합리적 해석

톨런드의 첫 저서인 ''신비가 아닌 기독교''(1696)는 옥스퍼드 시절 집필되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는 진정한 신비가 없으며, 오히려 신앙의 모든 교리는 이성을 통해 자연의 원리로부터 이해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즉각적인 반발을 샀고, 런던 대배심에 기소되기도 했다. 그는 아일랜드 왕국 신민이었기에 아일랜드 의회는 그를 화형에 처하려 했으나, 1697년 그가 아일랜드를 떠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대신 그의 부재 중에 책 세 권이 더블린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이는 책의 내용이 아일랜드 성공회의 핵심 교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톨런드는 이러한 조치를 "저자들을 불태우려 했으나 잡지 못하자 책을 대신 처형한 교황 종교 재판관"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신비가 없는 기독교》는 제목과 내용 면에서 로크의 1695년 저서 《기독교의 합리성》과 유사성이 지적되었으나, 로크 본인은 이러한 동일성을 부인했으며, 이는 에드워드 스틸링플리트와의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톨런드는 로크의 인식론적 합리주의를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여, 성경의 모든 계시는 궁극적으로 인간 이성으로 이해 가능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의미 없는 것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보았다.

톨런드는 이후 저작에서도 성경 비판을 이어갔다. 1698년 출간된 《밀턴의 생애》(Life of Milton)에서는 "그리스도와 사도들, 다른 위인들의 이름으로 된 수많은 위작"을 언급하며 신약 성경의 진위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저술한 《아민토르, 또는 밀턴의 생애 옹호》(Amyntor, or a Defence of Milton's Life, 1699)에서는 오늘날 신약 외경으로 불리는 문헌들의 목록을 제시하며 성경 정경 형성의 역사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나사레누스》(Nazarenus)에서는 초기 기독교의 에비온파와 같은 다양한 흐름에 주목하며, 제도화된 종교를 위해 성경 정경의 범위가 인위적으로 확립되었음을 시사했다.

톨런드는 공개적인 주장(외교 철학)과 신뢰하는 이들에게만 밝히는 내밀한 생각(밀교 철학)을 구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의 급진적인 성경 해석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4. 2. 범신론

톨런드는 폴앙리 티리 돌바크 남작의 물리적 운동에 대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세레나에게 보내는 편지''(eng, 1704)에서, 운동이 없는 상태인 '정지'는 단순히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운동의 특별한 경우라고 주장했다. 즉, 힘이 충돌할 때 겉으로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물체도 실제로는 움직이는 물체와 마찬가지로 많은 활동과 수동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또한 미신의 발생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통해 인간 이성이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논하고, 단일론적 실체론 비판을 통해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전개했다.

톨런드의 초기 주요 저작인 《신비가 없는 기독교》(eng, 1696)는 존 로크의 《기독교의 합리성》(eng, 1695)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이로 인해 로크는 자신의 견해와의 동일성을 부인하며 에드워드 스틸링플리트와 철학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책에서 톨런드는 로크의 인식론적 합리주의를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여,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거나 이성에 반하는 교리가 없으며, 모든 계시는 결국 인간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거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후 톨런드는 《밀턴의 생애》(eng, 1698)에서 신약 성경의 진위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 그리고 다른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으로 된 수많은 가짜 작품들"을 언급했는데, 이에 대한 반박으로 《아민토르, 또는 밀턴의 생애 옹호》(eng, 1699)를 저술하며 오늘날 신약 외경으로 불리는 문헌들의 목록을 제시하고 성경 정경 형성의 역사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톨런드는 1705년 출판된 《소시니즘의 진정한 상태, 범신론자에 의해》(eng)에서 스스로를 범신론자(pantheist)로 명확히 규정했다. 그는 《세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과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는 이유를 분석하며 '범신론'(panthe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범신론'이라는 용어 자체는 조셉 래프슨(Joseph Raphson)이 1697년 저서 ''lat''에서 스피노자를 논하며 'pantheismus'라는 라틴어 형태를 사용한 것이 최초로 여겨지며[22][23], 톨런드가 이를 영어 'pantheism'으로 번역하여 대중화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데이비드 버먼과 같은 학자들은 톨런드가 실제로는 무신론자였으며, 대중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자신의 진정한 견해를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주장한다. 버먼은 톨런드가 신을 비인격적이고 결정론적인 물질적 범신론의 신으로 축소했으며, 이는 사실상 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석했다.[11] 이러한 맥락에서 톨런드가 공개적인 철학(외교 철학)과 신뢰하는 이들에게만 밝히는 철학(밀교 철학)을 구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푸크(Fouke)는 톨런드가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했으며, 그의 주된 목적은 독단주의나 허식을 폭로하고 타인의 담론을 내부에서부터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고 분석한다.

톨런드는 또한 《판테이스티콘, 또는 소크라테스 학회의 기념 양식》(lat, 1720)이라는 저작을 소량 인쇄하여 사적으로 배포했는데, 이는 영국 국교회 예배 형식을 모방하여 이교도 작가들의 구절로 구성된 일종의 전례문으로,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제목 자체의 도발성과 함께, 실제로 범신론자들의 비밀 결사가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 점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후기 저작으로는 《나사레누스》(eng)와 《테트라디무스》(eng) 등이 있으며, 《나사레누스》에서는 초기 교회의 에비온파와 같은 유대 기독교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제도화된 종교의 성경 해석을 비판했고, 《테트라디무스》에는 밀교와 외교 철학의 구분에 대한 역사적 연구인 '클리도포루스'(lat)가 포함되어 있다.

4. 3. 종교 비판

톨런드는 16세에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으며, 이는 그의 종교 비판 사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의 첫 저서인 ''신비가 아닌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 1696)는 옥스퍼드 시절 집필을 시작한 것으로,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는 진정한 신비가 없으며 신앙의 모든 교리는 이성으로 이해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존 로크의 ''기독교의 합리성''(''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95)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으나, 로크 자신은 연관성을 부인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큰 반발을 일으켜 런던의 대배심에 기소되었고, 아일랜드에서는 의회가 그의 화형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그가 아일랜드를 떠난 후, 그의 부재중에 더블린에서 책 세 부가 공개적으로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톨런드는 이러한 탄압을 "저자들을 불태울 수 없을 때 책을 처형하는 교황 종교 재판관"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톨런드는 존 밀턴의 전기를 다룬 ''밀턴의 생애''(''Life of Milton'', 1698)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 다른 위인들의 이름으로 된 수많은 가짜 작품들"을 언급하며 신약 성경의 진위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에 그는 ''아민토르, 또는 밀턴의 생애 옹호''(''Amyntor, or a Defence of Milton's Life'', 1699)를 통해 반박하면서, 오늘날 신약 외경으로 불리는 문헌들의 목록을 제시하고 성경 정경 형성 과정의 역사적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의 종교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급진적으로 변모하여, 교회 내 위계뿐 아니라 국가 내 위계에도 반대하며 주교와 왕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군주제가 신성한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704년 저서 ''세레나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Serena'')에서는 범신론(panthe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과 사람들이 "허위 의식"에 빠지는 이유를 분석하고, 일원론적 실체론 비판을 통해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전개했다. 톨런드는 1705년 ''소치니파에 대해 쓰여진, 범신론자에 의한 진술''(''Socinianism Truly Stated, by a pantheist'')에서 스스로를 범신론자로 명확히 규정했다. 영어 단어 'pantheism'은 톨런드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설명하며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조지프 래프슨이 1697년 저서에서 사용한 라틴어 'pantheismus'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2][23]

인식론적으로 톨런드는 존 로크의 합리주의를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여, 성경에는 명료하고 합리적인 사실이나 교리가 없으며, 모든 계시는 인간적인 것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버먼과 같은 학자들은 톨런드가 자신의 진정한 무신론을 의도적으로 숨겼으며, 그가 제시한 범신론적 신은 사실상 신이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한다.[11]

톨런드는 교회 제도와 특정 종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기독교 교회의 원시적 헌법''(''Primitive Constitution of the Christian Church'', 1705년경 유통된 비밀 저작)과 ''나사레누스''(''Nazarenus'')에서는 초기 교회의 유대인 기독교도인 에비온파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교회의 통치 구조와 제도화된 종교를 위해 성경 정경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확대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나아가 그는 자유롭게 태어난 시민들 사이의 완전한 평등을 주장하며, 이러한 신념을 당시 영국 사회에서 차별받던 유대인 공동체에도 적용했다. 1714년 저서 ''유대인 귀화의 이유''(''Reasons for Naturalising the Jews'')에서는 외국 태생 유대인의 귀화를 요구하고 공직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유대인의 완전한 시민권과 평등권을 주장한 최초의 저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4][25] 그는 1718년에는 유대교가 받들던 진정한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이교도들에 의해 억압되었고, 교황 제도가 기독교를 왜곡하면서 유대교 의식을 비난했지만 이는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기존 기독교 세계를 비판하고 유대인을 옹호했다.[24][26]

톨런드는 ''판테이스티콘, 또는 소크라테스 학회의 기념 양식''(''Pantheisticon, sive formula celebrandae sodalitatis socraticae'')이라는 저작을 사적으로 소량 인쇄하여 배포했는데, 이는 영국 국교회 예배 형식을 모방하여 이교도 작가들의 구절을 인용한 일종의 전례문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그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모두 정치적 사기극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세 사기꾼의 논고''(''Treatise of the Three Impostors'')라는 논쟁적인 저작을 썼다는 소문에 휩싸였다. 이 책은 중세부터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왔다는 소문이 있었고, 톨런드는 프랑스의 장 루세에게서 개인적인 사본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그러한 원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27]

톨런드는 공개적으로 말하는 내용(외교 철학)과 신뢰하는 친구들에게만 털어놓는 내용(밀교 철학)을 구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톨런드가 자신의 급진적인 사상을 숨기거나, 타인의 주장을 내부에서 비판하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의 정치 팸플릿 중 일부는 자코바이트를 공격하면서 당시의 저급한 반가톨릭주의 정서를 이용하는 선동적인 측면도 있었다.

5. 주요 저작



존 톨런드는 자유사상가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 걸쳐 1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기존 교회 기관에 대한 비판에 중점을 두었으며, 지적 활동의 상당 부분은 휘그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정치 논평 작성에 할애되었다. 또한 제임스 해링턴, 앨저넌 시드니, 존 밀턴과 같은 17세기 중반의 주요 공화주의자들의 전기를 쓰거나 그들의 저작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자유로운 잉글랜드》(''Anglia Libera'')와 《국가 해부》(''State Anatomy'')는 입헌 군주제와 타협점을 찾으려는 영국 공화주의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톨런드의 첫 저서인 『신비가 아닌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 1696)는 옥스퍼드 시절 집필을 시작한 것으로,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는 진정한 신비가 없으며 모든 신앙 교리는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즉각적인 반발을 샀고, 런던 대배심에 기소되었다. 아일랜드 방문 중에는 아일랜드 의회가 그의 화형을 제안했으며, 그가 출국한 후 더블린에서 그의 책 세 권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이는 그의 주장이 아일랜드 성공회의 핵심 교리에 반했기 때문이다. 톨런드는 이러한 조치를 "저자들을 불태울 수 없을 때 책을 처형하는 교황 종교 재판관"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신비가 아닌 기독교』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로크의 1695년 저서 《기독교의 합리성》(''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과의 연관성에 대해 로크는 자신의 의견과의 동일성을 부인했으며, 이는 에드워드 스틸링플리트와 로크 사이의 철학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톨런드의 다음 주요 저작인 『존 밀턴의 생애』(''Life of Milton'', 1698)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 그리고 다른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으로 된 수많은 가짜 작품들"을 언급하며 신약 성경의 진위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톨런드는 『아민토르, 또는 밀턴의 생애 옹호』(''Amyntor, or a Defence of Milton's Life'', 1699)를 통해 답변하며, 오늘날 신약 외경으로 불리는 작품들의 목록을 제시하고 성경 정경의 역사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톨런드의 사상은 점차 급진적으로 변모하여 교회와 국가 내 위계질서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아갔다. 그는 주교와 왕이 다르지 않으며, 군주제가 신성한 권위를 부여받은 정부 형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1704년 저서 『세레나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Serena'')에서는 "범신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진리가 도출되는 방식과 사람들이 "허위 의식"에 빠지는 이유를 분석했다. 이 책에서 그는 유물론적 형이상학을 제시하기도 했다. 1705년 출판물 《소키니즘의 진정한 상태》(''Socinianism Truly Stated, by a pantheist'')에서는 자신을 명확히 범신론자로 규정했다.

정치적으로 톨런드는 자유가 인간 본성의 핵심이며, 정치 제도는 질서 유지뿐 아니라 자유 보장을 위해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이성과 관용은 좋은 사회의 기반이었으며, 이는 신성한 권위를 중시하는 토리주의와 대립하는 휘그주의의 세련된 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자유와 평등 사상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외부인이었던 유대인 공동체에도 적용되었다. 1714년 저서 《유대인 귀화의 이유》(''Reasons for Naturalising the Jews'')에서 그는 외국 태생 유대인의 귀화를 주장하고 공직을 허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톨런드는 또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정치적 사기극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논쟁적인 저서 ''세 사기꾼의 논고''(''Treatise of the Three Impostors'')를 저술했다는 소문에도 휩싸였다. 이 책은 중세부터 필사본 형태로 존재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현재는 실존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후기 주요 저작으로는 《나사레누스》(''Nazarenus'', 1718)가 있는데, 이는 초기 교회 내 에비온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제도화된 종교를 비판한다. 또한 《테트라디무스》(''Tetradymus'', 1720)에는 밀교와 외교 철학의 구분을 다룬 역사적 연구 '클리도포루스'(Clidophorus)가 포함되어 있다. 사적으로 배포된 《판테이스티콘》(''Pantheisticon'', 1720)은 영국 국교회 예배를 모방하여 이교도 작가들의 구절로 구성된 전례 형식을 제시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톨런드는 자신의 철학을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방식(외교 철학)과 신뢰하는 친구들에게만 털어놓는 방식(밀교 철학)을 구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톨런드의 주요 저작 목록이다. (완전한 목록은 아님)


  • ''Christianity Not Mysterious: A Treatise Shewing, That there is nothing in the Gospel Contrary to Reason, Nor Above It: And that no Christian Doctrine can be properly called A Mystery'' (1696) (『기독교는 신비가 아니다』)
  • ''세뇨르 베르나르도 다반차티의 동전에 관한 담론, 1588년, 존 톨런드가 이탈리아어에서 번역'' (''A Discourse upon Coins, by Seignor Bernardo Davanzati, a Gentleman of Florence, 1588, translated out of Italian by John Toland'', 1696).
  • ''톨런드 씨에 대한 변호'' (''An Apology for Mr. Toland'', 1697) (『기독교는 신비가 아니다』에 관한 저작).
  • ''상비군이 자유 정부와 일치하지 않고, 잉글랜드 군주의 헌법을 절대적으로 파괴한다는 논증'' (''An Argument Shewing, that a Standing Army Is Inconsistent with a Free Government, and absolutely destructive to the Constitution of the English Monarchy'', 1697)
  • ''개혁된 민병대: 외국 세력을 예방하거나 제압하고, 공공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국내에서 영구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잉글랜드에 일정한 육군을 제공하는 쉬운 계획.'' (''The Militia Reformed: An easy scheme of furnishing England with a constant land force, capable to prevent or to subdue any foreign power, and to maintain perpetual quite at home, without endangering the public liberty.'', 1698).
  • ''존 밀턴의 생애, 그의 작품의 역사 외에도, 인물, 서적, 종파, 정당, 의견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특징을 담고 있다.'' (''The Life of John Milton, containing, besides the history of his works, several extraordinary characters of men, of books, sects, parties and opinions.'', 1698)
  • ''아미토르, 또는 '''밀턴의 생애'''''에 대한 옹호 ''(I) 그러한 종류의 모든 글에 대한 일반적인 변호, (II) 원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그의 사도 및 기타 저명인사에게 귀속된 서적 목록, 성경 정경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언급, (III) 가우덴 박사가 아니라 찰스 1세 국왕이 저자임을 증명하는 서적 Eikon Basilike의 완전한 역사'' (''Amyntor, or a Defence of '''Milton's Life''''' ''Containing (I) a general apology for all writings of that kind, (II) a catalogue of books attributed in the primitive times to Jesus Christ, his apostles and other eminent persons, with several important remarks relating to the canon of Scripture, (III) a complete history of the book Eikon Basilike proving Dr Gauden and not King Charles I to be the author of it.'', 1699).
  • 제임스 해링턴의 ''오세아나 및 기타 작품'' 편집 (Editing of James Harrington's ''Oceana and other Works'', 1700)
  • ''정당에 의한 통치의 기술, 특히 종교, 정치, 의회, 벤치, 사역에서, 정당의 나쁜 영향과 함께.'' (''The Art of Governing by Parties, particularly in Religion, Politics, Parliament, the Bench, and the Ministry; with the ill effects of Parties.'', 1701).
  • ''Anglia Libera; 또는 잉글랜드 왕관의 제한과 계승이 설명되고 주장됨.'' (''Anglia Libera; or the limitation and succession of the crown of England explained and asserted.'', 1701).
  • ''다음 외국인 계승자를 위한 제한, 또는 새로운 색슨족: 두 신사 간의 회의에서 논의됨; 의회 의원에게 보낸 편지'' (''Limitations for the next Foreign Successor, or A New Saxon Race: Debated in a Conference betwixt Two Gentlemen; Sent in a Letter to a member of parliament'', 1701)
  • ''두 동인도 회사의 통합 제안'' (''Propositions for Uniting the Two East India Companies'', 1701)
  • ''영국과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현재의 사건과 관련된 국가의 역설, 주로 폐하의 왕자적이고 경건하며 매우 은혜로운 연설을 기반으로 함'' (''Paradoxes of State, relating to the present juncture of affairs in England and the rest of Europe, chiefly grounded on his Majesty's princely, pious and most gracious speech''., 1702).
  • ''하노버 왕족을 잉글랜드로 초청할 이유.... 프랑스에 대항하여 강력한 전쟁을 수행하려는 주장과 함께.'' (''Reasons for inviting the Hanover royals into England.... Together with arguments for making a vigorous war against France.'', 1702).
  • ''빈디키우스 리베리우스.'' (''Vindicius Liberius.'', 1702). (『기독교는 신비가 아니다』에 대한 방어).
  • ''세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s to Serena'', 1704)
  • ''프로이센 및 하노버 궁정의 계정'' (''The Account of the Courts of Prussia and Hanover'', 1705)
  • ''소키니즘의 진정한 상태'' (''Socinianism Truly Stated'', by "A Pantheist", 1705)
  • 마티아스 시너의 ''프랑스에 대항하여 영국인을 선동하는 필립 연설'' 번역 (Translation of Matthäus Schiner's ''A Philippick Oration to Incite the English Against the French'', 1707)
  • ''아데이스이다이몬 – 또는 "미신 없는 남자"'' (''Adeisidaemon – or the "Man Without Superstition"'', 1709)
  • ''오리게네스 유다이카이'' (''Origines Judaicae'', 1709)
  • ''복원의 기술'' (''The Art of Restoring'', 1710)
  • ''고교회 사제의 야코비티즘, 위증 및 교황주의'' (''The Jacobitism, Perjury, and Popery of High-Church Priests'', 1710)
  • ''사악한 사제에 맞선 정직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호소'' (''An Appeal to Honest People against Wicked Priests'', 1713)
  • ''덩케르크 또는 도버'' (''Dunkirk or Dover'', 1713)
  • ''복원의 기술'' (''The Art of Restoring'', 1714) (로버트 할리, 옥스퍼드와 모티머 백작|로버트 할리에 반대)
  • ''모든 다른 국가와 동일한 조건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유대인을 귀화시킬 이유. 또한 모든 국가의 모든 저속한 편견에 대한 유대인의 옹호 포함.'' (''Reasons for Naturalising the Jews in Great Britain and Ireland on the same foot with all Other Nations. Containing also, A Defense of the Jews, Against All Vulgar Prejudices in all Countries.'', 1714) (『유대인 귀화론, 및 모든 편견에 대한 유대인의 옹호』)
  • ''영국 국가 해부학'' (''State Anatomy of Great Britain'', 1717)
  • ''국가 해부학의 두 번째 부분'' (''The Second Part of the State Anatomy'', 1717)
  • ''나자레누스: 또는 유대인, 이방인 및 무함마드 기독교, 바나바의 고대 복음서의 역사를 포함... 또한 나자레누스의 역사에서 설명된 기독교의 원래 계획.... ...고대 아일랜드 기독교의 요약과 함께...'' (''Nazarenus: or Jewish, Gentile and Mahometan Christianity, containing the history of the ancient gospel of Barnabas... Also the Original Plan of Christianity explained in the history of the Nazarens.... with... a summary of ancient Irish Christianity...'', 1718) (『나자레누스』)
  • ''교황의 빠르고 최종적인 파괴의 가능성'' (''The Probability of the Speedy and Final Destruction of the Pope'', 1718)
  • ''히파티아 또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덕이 있으며, 가장 박식하고, 모든 면에서 훌륭한 여성의 역사, 알렉산드리아의 성직자들이 대주교의 자존심, 경쟁심 및 잔혹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조각조각 찢어 죽였으며, 일반적으로 성 시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당연히 받을 자격이 없는 여성'' (''Hypatia or the History of a most beautiful, most virtuous, most learned and in every way accomplished lady, who was torn to pieces by the clergy of Alexandria to gratify the pride, emulation and cruelty of the archbishop commonly but undeservedly titled St Cyril'', 1720)
  • ''테트라디무스'' (''Tetradymus'', 1720) (라틴어 저작. 영어 번역은 1751년 출판)
  • ''판테이스티콘'' (''Pantheisticon'', 1720) (라틴어 저작. 영어 번역은 1751년 출판)
  • ''기독교 교회의 원시 헌법'' (''The Primitive Constitution of the Christian Church'', 1705년경; 사후 출판, 1726)
  • ''켈트 종교와 학문의 역사, 드루이드의 계정 포함'' (''History of the Celtic Religion and Learning Containing an Account of the Druids'', 1726)[14] (켈트의 종교・드루이드를 다룬 저작)
  • ''존 톨런드 씨의 여러 조각 모음'', P. 데스 마이저스 편집, 2권. (''A Collection of Several Pieces of Mr John Toland'', ed. P. Des Maizeaux, 2 vols., 1726) (사후 출판된 저작 모음집)

6. 유산과 영향

톨런드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의무에 있어 미덕의 원칙을 옹호했지만, 이는 냉소주의와 사리사욕이 만연했던 로버트 월폴 시대의 잉글랜드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의 지적 명성은 동시대 및 후대의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몽테스키외 등 저명한 사상가들의 그늘에 가려지기도 했다.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그의 저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에서 톨런드를 포함한 자유 사상가들을 언급하며 "지난 40년 동안 태어난 사람들 중 콜린스, 톨런드, 틴들, 첩, 모건과 스스로 자유 사상가라고 칭했던 그 모든 부류의 사람들의 글을 한 단어라도 읽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런드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기독교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는 당시 기성 교회의 권위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세습되고 의문 없이 받아들여지는 권위에 대한 도전을 담고 있었다. 이는 신학적으로나 정치적, 철학적으로 매우 급진적인 시도로 평가받는다. 한편, 아일랜드 성공회 주교였던 조지 버클리는 성직자 제도를 비판한 그의 여러 저서를 근거로 톨런드를 최초의 자유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톨런드의 사상은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랑스의 폴앙리 돌바크는 톨런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톨런드가 ''세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장한, 운동의 부재 즉 정지는 단순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운동의 특수한 상태라는 개념은 돌바크의 물질 운동론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톨런드의 영향력에 대해 인문학 교수 로버트 패티슨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2세기 전에 기득권층은 그를 이단으로 화형시켰을 것이다. 2세기 후에는 그를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비교 종교학 교수로 만들었을 것이다. 18세기 초 영국의 합리적인 프로테스탄트 분위기 속에서 그는 단지 무시당해 죽었을 뿐이다."[28] 이는 그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톨런드는 사후에 재평가받기도 했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장서가이자 편집자인 토마스 홀리스는 런던의 서적상 앤드루 밀러에게 공화주의 정부를 옹호하는 작품들의 출판을 의뢰했는데, 1760년에 출판된 이 시리즈에는 톨런드의 작품도 포함되었다.[29]

참조

[1] 서적 John Toland (1670–1722) Coiscéim 1994
[2] 웹사이트 Biography of John Toland by his contemporary Pierre des Maizeaux https://openlibrary.[...] 1722-05-26
[3] 웹사이트 The Dictionary of Ulster Biography http://www.newulster[...] 1993
[4] 서적 History of the City of Dublin 1854
[5] 간행물 'Manuscripts of Mine Abroad': John Toland and the Circulation of Ideas, c.1700-1722
[6] 서적 'John Toland, his Methods, Manners and Mind' https://books.google[...] McGill-Queen's Press - MQUP 1984-10
[7] 웹사이트 A Collection of Several Pieces of John Toland https://openlibrary.[...]
[8] 서적 The Historical Atlas of the Jewish People Hutchinson
[9] 간행물 John Toland's Borrowings from Simone Luzzatto: Luzzatto's Discourse on the Jews of Venice (1638) the Major Source of Toland's Writing on the Naturalization of the Jews in Great Britain and Ireland (1714) https://www.jstor.or[...] 1969
[10] 서적 'Making Man in Reason''s Image : The Enlightenment and the Birth of Modern Humanity'
[11] 서적 "Disclaimers in Blount and Toland"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12] 서적 The Triumph of Vulgarity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3] 웹사이트 The manuscripts, Letter from Andrew Millar to Thomas Cadell, 16 July, 1765. Andrew Millar Project. University of Edinburgh. http://www.millar-pr[...] 2016-06-03
[14] 웹사이트 A critical history of the Celtic religion and learning: containing an account of the Druids ... with the history of Abaris, the Hyperborian, priest of the sun; to which is added, an abstract of the life of the author http://archive.org/d[...] Edinburgh, Findlay 1815-12-15
[15] 서적 John Toland (1670–1722) Coiscéim 1994
[16] 문서 トーランドの伝記は同時代人 Pierre des Maizeauxによって書かれた(1722年)。
[17] 서적 十八世紀イギリス思想史 上 筑摩叢書
[18] 서적 History of the City of Dublin 1854
[19] 간행물 'Manuscripts of Mine Abroad': John Toland and the Circulation of Ideas, c.1700-1722
[20] 문서 1911 Encyclopædia Britannica
[21] 서적 'John Toland, his Methods, Manners and Mind' https://books.google[...] 1984-10
[22] 서적 Encyclopedia of Religion and Nature https://books.google[...] A&C Black 2008
[23] 서적 Bodies of Thought: Science, Religion, and the Soul in the Early Enlightenment 2008
[24] 문서 ポリアコフ III
[25] 문서 John Toland, Reasons for Naturalising the Jews in Great Britain and Ireland on the same foot with all Other Nations. Containing also, A Defense of the Jews, Against All Vulgar Prejudices in all Countries. 1714
[26] 문서 『ナザレ人』:John Toland, Nazarenus: or Jewish, Gentile and Mahometan Christianity, containing the history of the ancient gospel of Barnabas. Also the Original Plan of Christianity explained in the history of the Nazarens with a summary of ancient Irish Christianity. 1718
[27] 서적 'Making Man in Reason''s Image : The Enlightenment and the Birth of Modern Humanity'
[28] 서적 The Triumph of Vulgarity Oxford University Press
[29] 웹사이트 The manuscripts, Letter from Andrew Millar to Thomas Cadell, 16 July, 1765. Andrew Millar Project. University of Edinburgh. http://www.millar-pr[...] 2016-06-03
[30] 서적 "Disclaimers in Blount and Toland"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31] 문서 Philosophy and Theology in a Burlesque Mode: John Toland and the Way of Paradox 2007
[32] 문서
[33] 간행물 英国尚古家列伝(15)ジョン・トーランド 2011-03
[3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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