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해블리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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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해블리첵은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농구를 했으며, 1962년부터 1978년까지 보스턴 셀틱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그는 가드와 포워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하는 스윙맨으로, 8번의 NB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으며, 1974년에는 NBA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 1965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보여준 결정적인 스틸은 그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은퇴 후에는 NBA 35주년 기념 팀과 NBA 50주년 기념 "역대 위대한 50인의 선수"에 선정되었으며, 201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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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해블리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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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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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40년 4월 8일 |
출생지 | 오하이오주 마틴스 페리 |
사망일 | 2019년 4월 25일 |
사망지 | 플로리다주 주피터 |
신장 | 196cm |
체중 | 92kg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슈팅 가드 |
별칭 | Hondo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브리지포트, 오하이오주) |
대학교 |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1959–1962) |
드래프트 년도 | 1962 |
드래프트 순위 | 1라운드, 7순위 |
드래프트 팀 | 보스턴 셀틱스 |
프로 시작 년도 | 1962년 |
프로 은퇴 년도 | 1978년 |
등번호 | 17 |
소속 팀 | 보스턴 셀틱스 (1962–1978) |
영구 결번 | 보스턴 셀틱스 No. 17 |
수상 경력 | |
NBA 우승 | 8회 (1963–1966, 1968, 1969, 1974, 1976) |
NBA 파이널 MVP | 1974 |
NBA 올스타 선정 | 13회 (1966–1978) |
올-NBA 퍼스트 팀 | 4회 (1970–1973) |
올-NBA 세컨드 팀 | 7회 (1963, 1965, 1967–1969, 1974, 1975) |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 5회 (1972–1976) |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 3회 (1969–1971) |
NBA 올-루키 퍼스트 팀 | 1963 |
NBA 기념 팀 | 35주년, 50주년, 75주년 |
NCAA 우승 | 1960 |
NCAA 올-아메리칸 세컨드 팀 | 1962 (Consensus) |
올-아메리칸 서드 팀 | AP (1961) |
올-빅 텐 퍼스트 팀 | 2회 (1961, 1962) |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영구 결번 | No. 5 |
통계 | |
득점 | 26,395 (평균 20.8점) |
리바운드 | 8,007 (평균 6.3개) |
어시스트 | 6,114 (평균 4.8개) |
명예의 전당 | |
NBA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 john-havlicek |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 2006 |
2. 유년 시절 및 대학 경력
존 해블리첵은 오하이오주 마틴스 페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잡화점을 운영했다.[1] 아버지는 체코인, 어머니는 크로아티아인 후손이었다.[2] 그는 오하이오주 브리지포트에 있는 브리지포트 고등학교에서 농구, 야구, 미식축구 세 종목에서 뛰어난 운동선수였고,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 필 니크로와는 어린 시절 친구였다.[3]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도 유명했다.
이후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 진학하여 농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제리 루카스, 바비 나이트 등과 함께 1960년 NCAA 토너먼트 우승을 경험했다. 대학 졸업 후, 미식축구 실력도 인정받아 NFL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로부터 7라운드 지명을 받았고, NBA에서는 보스턴 셀틱스에 1라운드 지명을 받아 1962년 입단했다. 셀틱스는 초기에 해블리첵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벤치 멤버 정도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2. 1.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해블리첵은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대학 농구를 했다. 그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제리 루카스와 룸메이트였으며, 미래의 NBA 1라운드 지명자인 래리 지크프리드, 훗날 유명한 농구 감독이 되는 바비 나이트(당시 후보 선수), 그리고 멜 노웰 등과 함께 팀을 이루었다. 프레드 테일러 감독과 잭 그라프, 프랭크 트루잇 코치가 이끈 1960년 오하이오 주립 버키스는 1960년 NCAA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해블리첵은 오하이오 주립대 재학 중 올-아메리칸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1960년 하계 올림픽 미국 대표팀의 후보 선수로도 뽑혔다.[4]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식축구 선수로도 유명했지만, 대학에서는 농구에 전념했다.
3. 프로 경력
존 해블리첵은 1962년 NBA 드래프트에서 보스턴 셀틱스에 지명되었으며, 같은 해 ABL의 클리블랜드 파이퍼스와 NFL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도 드래프트되었다. 브라운스에서 잠시 와이드 리시버로 활동했으나, 최종적으로 셀틱스에서 농구 선수 경력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셀틱스 입단 초기, 해블리첵은 뛰어난 체력과 다재다능함을 바탕으로 가드와 포워드를 오가는 스윙맨으로 활약했다.[5][6][7][2] 그는 주로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하며 NBA의 식스맨 역할을 새롭게 정의한 선수로 평가받는다.[9][10][11] '혼도'라는 별명으로 불린[1] 그는 식스맨 역할에도 불구하고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셀틱스가 6번의 NBA 챔피언십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5] 특히 1965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 7차전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결정적인 스틸을 성공시키며 팀을 파이널로 이끌었다.[1][12][13]
1969-70 시즌부터는 풀타임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팀의 주장을 맡았다.[18][19] 그는 빌 러셀 시대 이후에도 셀틱스를 강팀으로 유지시키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20] 1974년에는 팀을 다시 한번 NBA 정상으로 이끌고 NBA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21] 1976년에도 피닉스 선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개인 통산 8번째 NBA 챔피언 반지를 획득했다.[22]
해블리첵은 1977–78 NBA 시즌을 끝으로 38세의 나이에 은퇴했다.[49] 은퇴 당시까지도 높은 기량을 유지했으며,[23] 셀틱스에서만 16시즌을 뛰며 기록한 통산 26,395점은 현재까지도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
3. 1. 보스턴 셀틱스 (1962-1978)
존 해블리첵은 1962년 NBA 드래프트에서 보스턴 셀틱스에 지명되었으며, 같은 해 ABL의 클리블랜드 파이퍼스와 NFL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도 드래프트되었다. 브라운스 훈련 캠프에서 와이드 리시버로 잠시 활동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파이퍼스의 NBA 합류 시도도 무산되면서 해블리첵은 셀틱스에서 농구 경력을 쌓는 데 집중했다.가드와 포워드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뛰어난 스윙맨이었던[5][6][7] 그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유명했으며, 상대 팀 선수들은 그를 따라잡기 벅차다고 평가했다.[2] 당시 셀틱스의 감독 레드 아워바흐는 그를 "팀의 핵심"이라고 불렀다.[8] 1953년 존 웨인 주연 영화 혼도에서 따온 "혼도"라는 별명으로 불린[1] 해블리첵은 셀틱스 경력 초기에 주로 벤치에서 출전하며 NBA의 식스맨 역할을 새롭게 정의한 선수로 평가받는다.[9][10][11] 그는 신인 시절부터 팀에 기여하여 1963년 셀틱스의 5년 연속 리그 우승에 힘을 보탰고, 이후에도 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해블리첵의 이름은 1965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 7차전 마지막 순간에 나온 극적인 스틸 플레이로 농구 팬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당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상대로 보스턴 가든에서 펼쳐진 경기에서, 그는 경기 종료 직전 상대의 인바운드 패스를 가로채 팀의 승리를 지켰다.[1][12][13]
1960년대 셀틱스 왕조의 핵심 멤버였던[14] 해블리첵은 그의 첫 7시즌 동안 팀이 6번의 NBA 챔피언십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5] 1968년에는 팀이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1승 3패로 뒤진 상황을 뒤집고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6][17]
1969-70 시즌부터 풀타임 주전 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18] 1969년부터는 팀의 주장을 맡아 1978년 은퇴할 때까지 리더십을 발휘했다.[19] 그는 빌 러셀 시대 이후 셀틱스를 새로운 챔피언십 팀으로 이끄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20] 1974년에는 팀을 다시 한번 NBA 정상으로 이끌며 NBA 파이널 MVP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21] 2년 뒤인 1976년에도 피닉스 선스를 상대로 명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개인 통산 8번째 챔피언 반지를 획득했다.[22]
해블리첵은 38세의 나이로 1977–78 NBA 시즌을 마친 후 은퇴했다.[49] 은퇴 당시 ''The Sporting News''는 "해블리첵은 여전히 NBA 선수들의 80%보다 낫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기량은 마지막까지 높이 평가받았다.[23] 그는 셀틱스에서만 16시즌을 뛰며 총 26,395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보스턴 셀틱스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
3. 1. 1. 식스맨으로서의 활약
존 해블리첵은 1962년 보스턴 셀틱스 (NBA), ABL의 클리블랜드 파이퍼스, 그리고 NFL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 드래프트되었다. 브라운스 훈련 캠프에서 와이드 리시버로 잠시 활동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파이퍼스의 NBA 합류 시도도 실패하면서 해블리첵은 셀틱스에서 뛰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가드와 포워드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스윙맨으로서,[5][6][7] 그는 뛰어난 체력으로 유명했으며, 상대 선수들은 그를 따라가는 것조차 벅차다고 평가했다.[2] 당시 셀틱스의 헤드 코치 레드 아워바흐는 해블리첵을 "팀의 핵심"이라고 불렀다.[8] 1953년 존 웨인 주연의 영화 혼도에서 영감을 받아 "혼도"라는 별명을 얻은[1] 해블리첵은 셀틱스 초창기 시절 주로 벤치에서 출전하며 NBA의 식스맨(Sixth man) 역할을 혁신한 선수로 평가받는다.[9][10][11]당시 셀틱스는 빌 러셀, 빌 셔먼, 밥 쿠지 등 명선수들의 활약으로 이미 리그 4연패를 달성한 강팀이었다. 신인 해블리첵은 벤치 선수로서 팀에 힘을 보탰고, 1963년 셀틱스는 5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몇 시즌 동안 해블리첵은 주로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지만, 팀에 대한 기여도는 매우 높았다. 그는 뛰어난 슛 능력을 바탕으로 중요한 순간에 득점을 올렸고, 리바운드와 패스에서도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다. 가드와 포워드 포지션을 넘나들며 수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올라운더였다. 그의 뛰어난 체력은 특히 유명했는데, 뉴욕 닉스의 레드 홀츠먼 감독은 "이 정도로 체력이 좋은 선수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커리어 초반, 해블리첵은 벤치에서 투입되는 식스맨으로서 팀의 연승 행진을 이끌었다. 벤치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시즌 동안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출전 시간을 기록했으며, 득점에서도 팀 내 1, 2위를 다툴 정도였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그는 식스맨임에도 불구하고 1964년과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연속으로 올 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해블리첵의 식스맨 시절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는 1965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 마지막 순간의 결정적인 스틸이었다. 4월 15일 보스턴 가든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7차전, 셀틱스는 110-109로 앞서고 있었다. 경기 종료 직전, 셀틱스가 인바운드 패스를 성공시키면 승리하고 1965 NBA 파이널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빌 러셀의 패스가 천장에 매달린 지지대 줄에 맞으면서 턴오버가 발생했고, 공은 윌트 체임벌린이 버티는 세븐티식서스에게 넘어갔다.[1] 세븐티식서스의 할 그리어가 인바운드 패스를 준비했고, 해블리첵은 체트 워커를 등지고 수비하고 있었다. 그리어가 패스를 던지는 순간, 해블리첵은 재빨리 몸을 돌려 뛰어올라 공을 쳐냈고, 이를 샘 존스에게 연결했다.[1] 이 플레이는 셀틱스의 승리를 지켜냈고, 베테랑 심판 얼 스트롬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장면을 32년 심판 경력 중 본 가장 위대한 플레이 중 하나로 꼽았다.[12] 당시 아나운서 조니 모스트의 외침, "하블리첵이 공을 훔쳤다!"(Havlicek stole the ball!)는 NBA 역사상 가장 유명한 라디오 중계 멘트로 남았다.[13]
해블리첵은 1960년대 셀틱스 왕조의 핵심 멤버로서,[14] 그의 첫 7번의 NBA 시즌 동안 팀이 6번의 NBA 챔피언십을 우승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5] 1968년 동부 디비전 결승에서는 세븐티식서스를 상대로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뒤지던 상황에서 팀의 반격을 이끌었다. 5차전에서 그는 29득점, 9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탈락을 막았고,[16] 7차전에서는 21득점, 12리바운드, 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00-96 원정 승리를 이끌었다. 이 시리즈 승리로 셀틱스는 NBA 플레이오프 역사상 최초로 1승 3패의 열세를 뒤집고 승리한 팀이 되었다.[17]
해블리첵은 1969-70 시즌부터 풀타임 주전 선수로 활약하게 되면서 그의 식스맨 시대는 막을 내렸다.[18]
3. 1. 2. 1965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의 전설적인 스틸
해블리첵은 1965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 마지막 순간의 결정적인 스틸로 유명해졌다. 1965년 4월 15일 보스턴 가든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7차전 마지막 경기에서, 보스턴 셀틱스는 110-109로 앞서고 있었다. 경기 종료 5초를 남기고 승리를 확정하기 위해 골 밑에서 공을 인바운드하면 되는 상황이었으나, 빌 러셀의 패스가 천장에 매달린 바스켓 지지대 줄에 맞으면서 턴오버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세븐티식서스와 윌트 체임벌린에게 공과 함께 승리할 기회가 주어졌다.[1]세븐티식서스의 할 그리어가 인바운드 패스를 준비했고, 해블리첵은 그리어를 등지고 체트 워커를 수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어가 패스를 던지는 순간, 해블리첵은 재빨리 몸을 돌려 뛰어올라 공을 쳐냈고, 이를 동료 샘 존스에게 연결했다.[1] 이 플레이는 셀틱스의 승리를 지켰고, 1965 NBA 파이널 진출을 결정지었다.
베테랑 심판 얼 스트롬은 자신의 회고록 ''Calling the Shots''에서 해블리첵의 이 플레이를 32년 프로 심판 경력 중 본 가장 위대한 플레이 중 하나로 꼽았다.[12] 또한,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 조니 모스트의 "Havlicek steals it!eng"라는 외침은 NBA 역사상 가장 유명한 라디오 해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3]
NBA 파이널에 진출한 셀틱스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3. 1. 3. 주전 선수로의 도약과 8번의 NBA 챔피언십
존 해블리첵은 보스턴 셀틱스에서의 선수 생활 초창기에 벤치에서 출전하며 NBA의 식스맨(Sixth man) 역할을 새롭게 정의한 선수로 평가받는다.[9][10][11] 그는 가드와 포워드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스윙맨이었으며,[5][6][7] 경쟁자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뛰어난 체력으로 유명했다.[2] 당시 헤드 코치였던 레드 아워바흐는 해블리첵을 "팀의 핵심"이라고 불렀고,[8] 존 웨인 주연의 영화 혼도에서 유래한 '혼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 신인 시절인 1963년부터 팀의 5년 연속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며, 이후 몇 시즌 동안 벤치 선수였음에도 팀 내 최다 출전 시간을 기록하고 득점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팀에 크게 공헌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1964년과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올 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해블리첵은 1965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보여준 결정적인 플레이로 유명하다. 4월 15일 보스턴 가든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7차전, 셀틱스가 110-109로 앞선 경기 종료 직전, 빌 러셀의 인바운드 패스가 턴오버되면서 상대에게 역전 기회가 주어졌다.[1] 그러나 할 그리어가 던진 인바운드 패스를 해블리첵이 극적으로 가로채 샘 존스에게 연결하며 팀의 승리를 지켰다.[1] 이 장면은 아나운서 조니 모스트의 "하블리첵이 공을 훔쳤다!"(Havlicek stole the ball!)라는 유명한 해설과 함께 NBA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회자되며,[13] 베테랑 심판 얼 스트롬은 이를 자신의 32년 심판 경력 중 가장 위대한 플레이 중 하나로 꼽았다.[12]
해블리첵은 1960년대 셀틱스 왕조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14] 그의 첫 7시즌 동안 팀이 6번의 NBA 챔피언십(1963, 1964, 1965, 1966, 1968, 1969)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15] 특히 1968년 동부 디비전 결승에서는 세븐티식서스를 상대로 5차전에서 29득점, 9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탈락 위기를 넘겼고,[16] 7차전에서도 21득점, 12리바운드, 8어시스트로 활약하며 팀의 100-96 승리를 이끌었다. 이 시리즈 승리로 셀틱스는 NBA 플레이오프 역사상 최초로 1승 3패의 열세를 뒤집고 승리한 팀이 되었다.[17]
1969-70 시즌부터 해블리첵은 풀타임 주전 선수로 도약했으며,[18] 1969년에는 팀의 주장을 맡아 1978년 은퇴할 때까지 리더십을 발휘했다.[19] 그는 빌 러셀 시대 이후 셀틱스를 새로운 챔피언십 팀으로 이끄는 가교 역할을 했다.[20] 1970-71 시즌에는 평균 28.9득점, 9.0리바운드, 7.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 내 주요 지표에서 선두를 차지했고, 리그 최장 출전 시간을 기록하며 올-NBA 퍼스트 팀에 처음 선정되었다. 이후 1974년까지 연속으로 퍼스트 팀에, 1972년부터 1976년까지는 올-NBA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도 연속으로 선정되며 공수 양면에서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1974년 NBA 파이널에서 셀틱스는 카림 압둘 자바가 이끄는 밀워키 벅스를 7차전 접전 끝에 꺾고 5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으며, 해블리첵은 NBA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21] 이는 그의 개인 통산 7번째 NBA 챔피언십이었다.
2년 후인 1976년 NBA 파이널에서는 피닉스 선스를 상대로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하며 개인 통산 8번째 챔피언 반지를 획득했다. 특히 보스턴 가든에서 열린 5차전은 3차 연장까지 가는 명승부로 펼쳐졌으며, NBA 역사상 최고의 파이널 경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2]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해블리첵은 데이브 코웬스와 같은 젊은 선수들과 함께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해블리첵은 1977–78 NBA 시즌을 마친 후 38세의 나이로 은퇴했다.[49] 은퇴 당시 그는 NBA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였으며, 그가 기록한 통산 26,395득점은 현재까지도 보스턴 셀틱스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 은퇴 직전인 1978년 4월, ''The Sporting News''는 "해블리첵은 여전히 NBA 선수들의 80%보다 낫다"고 그의 기량을 높이 평가했다.[23]
3. 1. 4. 1976년 NBA 파이널 5차전
1976년 보스턴 셀틱스는 다시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당시 팀에는 데이브 코웬스와 같은 새로운 세대의 선수들이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30대 후반에 접어든 해블리첵의 개인 기록은 전성기에 비해 다소 줄어든 상태였다. 결승 상대는 피닉스 선스였다.특히 시리즈의 5차전은 NBA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로 꼽힌다. 2차 연장전 종료 단 1초를 남기고, 해블리첵은 극적인 뱅크 슛을 성공시키며 셀틱스의 승리를 눈앞에 두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피닉스가 이미 타임아웃을 소진한 상태에서 타임아웃을 요청하는 반칙을 범했고, 이에 따른 테크니컬 파울로 조 조 화이트가 자유투를 성공시켰다. 그럼에도 피닉스에게 마지막 공격 기회가 주어졌고, 가 헤어드가 버저비터 슛을 성공시키며 경기는 다시 동점이 되어 3차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셀틱스는 길었던 3차 연장 승부 끝에 승리했으며, 이 경기는 역대 최고의 NBA 파이널 경기로 평가받는다.[22]
셀틱스는 이어진 6차전에서도 승리하며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우승을 차지했고, 해블리첵은 개인 통산 8번째 NBA 챔피언 반지를 획득했다.
3. 1. 5. 은퇴
빌 러셀이 은퇴하고 톰 헤인손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해블리첵은 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다.[18] 1969-70 시즌에는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에서 팀 내 선두를 차지했으며, 다음 시즌인 1970-71 시즌에는 평균 28.9득점, 7.5어시스트, 9.0리바운드를 기록하고 리그 최장 출장 시간을 소화하며 '''올-NBA 퍼스트 팀'''에 처음 선정되었다. 그는 1974년까지 연속으로 올-NBA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렸고, 1972년부터 1976년까지는 올-NBA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도 연속으로 선정되었다.러셀 은퇴 후 셀틱스는 잠시 우승과 멀어졌으나, 해블리첵의 활약으로 1974년 다시 정상에 도전했다. 카림 압둘 자바가 이끄는 밀워키 벅스와의 파이널 시리즈는 두 번의 연장전을 포함한 치열한 접전 끝에 7차전까지 이어졌고, 셀틱스는 최종전 승리로 5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해블리첵은 이 시리즈에서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21]
2년 뒤인 1976년에도 셀틱스는 파이널에 진출했다. 데이브 코웬스 등 새로운 세대의 선수들이 주축으로 활약하면서 30대 후반이 된 해블리첵의 개인 기록은 다소 감소했지만,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피닉스 선스와의 파이널 시리즈는 6경기로 마무리되었으며, 특히 3차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승리한 5차전은 명경기로 꼽힌다.[22] 셀틱스는 이 시리즈에서 승리하며 해블리첵에게 8번째 우승 반지를 안겼다.
1977-78 시즌, 셀틱스는 32승 50패로 부진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 종료 후, 38세가 된 해블리첵은 은퇴를 선언했다.[49] 당시 ''The Sporting News''는 "해블리첵은 여전히 NBA 선수들의 80%보다 낫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기량은 여전했다.[23] 은퇴 시점에서 그는 NBA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였으며, 통산 26,395득점은 현재까지도 셀틱스 구단 역대 최다 기록으로 남아있다.
은퇴 후에도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았다. 1980년 NBA 35주년을 기념하여 선정된 올타임 팀에 이름을 올렸고, 1996년에는 NBA 50주년을 기념하는 역대 위대한 50인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4. 은퇴 이후의 삶
해블리첵은 선수 시절 재테크에 능숙하여, 초기 웬디스 패스트푸드 체인에 수입의 상당 부분을 투자했다. 이러한 투자 성공 덕분에 은퇴 후에도 경제적으로 여유로웠으며, 생계를 위해 다시 일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코치직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 기업 강사로 활동했다.[49]
또한 해블리첵은 장애와 유전 질환을 앓는 어린이들을 돕는 제네시스 재단의 이사로 활동했다. 그는 아내 베스와 함께 30년 이상 '존 해블리첵 유명인 낚시 대회'를 개최하여 그 수익금을 재단에 기부했다.[27]
5. 개인적인 삶
해블리첵은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재학 중 부인 베스를 만났고, 두 사람은 1967년에 결혼했다. 슬하에 아들 크리스와 딸 질, 두 자녀를 두었다.[1] 아들 크리스 해블리첵은 1990년대 초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농구 장학금을 받으며 선수로 활동했고,[46] 딸 질 해블리첵은 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외야수이자 코치인 브라이언 뷰캐넌과 결혼했다.[47]
선수 시절부터 재테크에 능했던 해블리첵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초기 웬디스 패스트푸드 체인에 투자했다. 이러한 성공적인 투자 덕분에 그는 은퇴 후에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생계를 위해 다시 일할 필요가 없었다. 코치직에는 뜻이 없었으며, 대신 기업 강사로 활동했다.[49]
또한 해블리첵은 사회 공헌 활동에도 힘썼다. 장애와 유전 질환을 앓는 어린이를 돕는 제네시스 재단의 이사로 활동했으며, 아내 베스와 함께 30년 넘게 '존 해블리첵 유명인 낚시 대회'를 개최하여 그 수익금을 재단에 기부했다.[27]
말년에는 파킨슨병을 앓았다.[48] 2019년 4월 25일, 플로리다 주 주피터에서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49][50][51] 그의 사망 후, 보스턴 시청은 그를 기리기 위해 녹색 조명을 밝혔다.[43]
6. 수상 및 업적
해블리첵은 13번의 NBA 올스타로 선정되었으며, 그의 등번호 17번은 셀틱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24] 은퇴 당시 해블리첵은 NBA 통산 최다 출장 경기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이 기록은 1984년 엘빈 헤이즈에 의해 경신되었다), NBA 통산 득점 순위 3위에 올랐다.[26] 그가 사망했을 때, 해블리첵은 26,395점(경기당 20.8점)으로 셀틱스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자였다.[28][29] 그는 또한 16시즌 연속으로 1,000점 이상을 득점한 최초의 선수였으며, 그의 개인 최고 득점 시즌은 1970–71 NBA 시즌으로 경기당 평균 28.9점을 기록했다.[52] 수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쳐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5번,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3번 선정되었다.[30]
해블리첵은 16년의 선수 경력 동안 총 8번의 NBA 챔피언십 우승을 경험했다.[31][21] 2019년 기준으로, 빌 러셀 (11회)과 샘 존스 (10회)만이 해블리첵보다 더 많은 NBA 우승 반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해블리첵의 셀틱스 팀 동료였다.[32] 특히 해블리첵은 자신이 출전한 8번의 NBA 파이널에서 모두 승리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33]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해블리첵은 여러 영예를 안았다. 1980년에는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NBA 35주년 기념 팀에 이름을 올렸고,[34] 1984년에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8] 1996년에는 언론인, 선수, 코치, 임원, 단장 등으로 구성된 패널에 의해 NBA 역사상 50인의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으며,[35] 2021년에는 NBA 75주년 기념 팀에도 포함되어 다시 한번 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37] 또한 빌 시몬스는 그의 저서 ''농구의 책''에서 해블리첵을 역대 14번째 최고의 선수로 평가했고,[36] 스포츠 전문 매체 ''The Athletic''은 NBA 75주년을 기념하여 선정한 역대 최고의 선수 75인 명단에서 해블리첵을 29위에 올렸다.[20]
선수 시절 외에도 해블리첵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었다. 1974년에는 미국 업적 아카데미로부터 골든 플레이트 상을 받았고,[38] 2007년에는 그의 모교인 브릿지포트 고등학교가 체육관의 이름을 "존 J. 해블리첵 체육관"으로 명명했다.[39] 2022년 10월에는 크로아티아계 미국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41] 같은 해 12월, NBA는 NBA 식스맨상 트로피의 명칭을 그의 업적을 기려 "존 해블리첵 트로피"로 변경했다.[42] 동료 NBA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크리스 멀린은 해블리첵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등번호 17번을 사용하기도 했다.[40]
해블리첵은 코트 위에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품[43][44]과 개인의 성과보다 팀을 우선시하는 헌신적인 자세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45] 뉴욕 닉스의 오랜 코치였던 레드 홀츠먼은 해블리첵에 대해 "그의 끈기만으로도 그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신은 그를 훌륭한 득점원, 영리한 볼 핸들러, 그리고 민첩한 정신과 손, 발을 가진 지능적인 수비수로 만듦으로써 이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21] 셀틱스의 전설적인 팀 동료 빌 러셀은 해블리첵을 "자신이 본 최고의 올라운드 선수"라고 묘사했으며,[27] 셀틱스의 오랜 코치였던 레드 아워백은 "만약 내 아들이 있다면, 그가 존 해블리첵 같기를 바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인품을 칭찬했다.[44]
7. NBA 커리어 통계
아래는 존 해블리첵의 NBA 커리어 통계를 이해하는 데 사용되는 약어 설명이다.
약어 설명 | |||||
---|---|---|---|---|---|
GP | 출장 경기 수 | GS | 선발 출장 경기 수 | MPG | 평균 출장 시간 (분) |
FG% | 야투 성공률 | 3P% | 3점슛 성공률 | FT% | 자유투 성공률 |
RPG | 평균 리바운드 수 | APG | 평균 어시스트 수 | SPG | 평균 스틸 수 |
BPG | 평균 블록슛 수 | PPG | 평균 득점 | 굵게 | 커리어 하이 |
우승 시즌 | 리그 1위 |
7. 1. 정규 시즌
보스턴 셀틱스에 입단할 당시 팀은 빌 러셀, 빌 셔먼, 밥 쿠지 등 뛰어난 선수들의 활약으로 NBA 4연패를 달성한 강팀이었다. 신인 해블리첵은 주로 벤치에서 출전하며 팀에 기여했고, 1963년 셀틱스는 5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이후 몇 시즌 동안 해블리첵은 주전이 아닌 벤치 선수로 활약했지만, 팀에 대한 기여는 매우 컸다. 그는 뛰어난 슛 능력을 바탕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득점을 올렸고, 리바운드와 패스에서도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다. 가드와 포워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으며, 수비 능력 또한 매우 뛰어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특히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유명했는데, 당시 뉴욕 닉스의 레드 홀츠먼 감독은 "이 정도로 체력이 좋은 선수는 본 적이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경력 초기에 해블리첵은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안배하거나 경기 흐름을 바꾸기 위해 투입되는 식스맨(''sixth man'')으로서 팀의 연승 행진을 뒷받침했다. 벤치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시즌 동안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출전 시간을 기록했으며, 득점 역시 팀 내 1, 2위를 다툴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러한 '6번째 선수'로서의 역할은 높이 평가받아, 데뷔 2년 차인 1964년과 1966년부터 1970년까지 5년 연속으로 올 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연도 | 팀 | 출장 경기 | 선발 출장 | 경기당 출장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62–63† | 보스턴 | 80* | — | 27.5 | .445 | — | .728 | 6.7 | 2.2 | — | — | 14.3 |
1963–64† | 보스턴 | 80 | — | 32.3 | .417 | — | .746 | 5.4 | 3.0 | — | — | 19.9 |
1964–65† | 보스턴 | 75 | — | 28.9 | .401 | — | .744 | 4.9 | 2.7 | — | — | 18.3 |
1965–66† | 보스턴 | 71 | — | 30.6 | .399 | — | .785 | 6.0 | 3.0 | — | — | 18.8 |
1966–67 | 보스턴 | 81* | — | 32.1 | .444 | — | .828 | 6.6 | 3.4 | — | — | 21.4 |
1967–68† | 보스턴 | 82 | — | 35.6 | .429 | — | .812 | 6.7 | 4.7 | — | — | 20.7 |
1968–69† | 보스턴 | 82 | — | 38.7 | .405 | — | .780 | 7.0 | 5.4 | — | — | 21.6 |
1969–70 | 보스턴 | 81 | — | 41.6 | .464 | — | .844 | 7.8 | 6.8 | — | — | 24.2 |
1970–71 | 보스턴 | 81 | — | 45.4* | .450 | — | .818 | 9.0 | 7.5 | — | — | 28.9 |
1971–72 | 보스턴 | 82 | — | 45.1* | .458 | — | .834 | 8.2 | 7.5 | — | — | 27.5 |
1972–73 | 보스턴 | 80 | — | 42.1 | .450 | — | .858 | 7.1 | 6.6 | — | — | 23.8 |
1973–74† | 보스턴 | 76 | — | 40.7 | .456 | — | .832 | 6.4 | 5.9 | 1.3 | .4 | 22.6 |
1974–75 | 보스턴 | 82 | — | 38.2 | .455 | — | .870 | 5.9 | 5.3 | 1.3 | .2 | 19.2 |
1975–76† | 보스턴 | 76 | — | 34.2 | .450 | — | .844 | 4.1 | 3.7 | 1.3 | .4 | 17.0 |
1976–77 | 보스턴 | 79 | — | 36.9 | .452 | — | .816 | 4.8 | 5.1 | 1.1 | .2 | 17.7 |
1977–78 | 보스턴 | 82 | — | 34.1 | .449 | — | .855 | 4.0 | 4.0 | 1.1 | .3 | 16.1 |
경력 [52] | 1,270 | — | 36.6 | .439 | — | .815 | 6.3 | 4.8 | 1.2 | .3 | 20.8 | |
올스타[52] | 13 | 10 | 23.3 | .481 | — | .756 | 3.5 | 2.6 | .3 | .0 | 13.8 |
'''범례:''' † = NBA 우승 시즌, * = 리그 1위, '''굵은 글씨''' = 커리어 하이, — = 해당 기록 없음 또는 집계 전
7. 2. 플레이오프
당시 보스턴 셀틱스는 빌 러셀, 빌 셔먼, 밥 쿠지 등 명선수들의 활약으로 4연패를 달성하고 있었다. 신인 해블리첵은 벤치 멤버로서 팀에 기여했고, 1963년 셀틱스는 5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이후 몇 시즌 동안 해블리첵은 주로 벤치 선수로 활약했지만, 팀에 대한 기여는 확실했다. 해블리첵은 뛰어난 슛 능력을 바탕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득점을 올렸으며, 리바운드와 패스에서도 좋은 기록을 남겼다. 가드와 포워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고, 수비 능력 또한 뛰어난 올라운더였다. 뛰어난 체력으로도 유명했는데, 뉴욕 닉스의 레드 홀츠먼 감독은 "그처럼 체력이 좋은 선수는 본 적이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커리어 초반 해블리첵은 벤치에서 투입되는 '''식스맨'''(''sixth man'')으로서 팀의 연승 행진에 기여했다. 벤치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시즌 동안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출전 시간을 기록했으며, 득점 부문에서도 팀 내 1, 2위를 다투었다. 이러한 식스맨으로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데뷔 2년 차인 1964년과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연속으로 '''올 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범례'''
style="background:#afe6ba; width:30px;" | | NBA 우승 시즌 |
굵은 글씨 | 커리어 하이 |
'''약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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