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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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류성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 부흥군의 거점 역할을 한 곳이다.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나, 부흥군 내부 분열과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로 663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불분명하며, 두릉윤성, 지라성, 두솔성 등과의 동일성 여부 또한 논쟁의 대상이다. 학성산성, 건지산성, 당산성, 위금암산성 등 여러 지역이 주류성 후보지로 제시되었으나, 각 설마다 근거와 비판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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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왕 - 백강 전투
백강 전투는 663년 백제 부흥군과 일본군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금강 하구에서 벌인 전투로, 백제 부흥 운동의 종말과 동아시아 국제 정세 변화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일본의 국가 체제 개혁과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풍장왕 - 풍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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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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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 | |
개요 | |
위치 |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진저우구 |
축성 시기 | 5세기 초 |
축성 주체 | 고구려 |
별칭 | 지라성 (지로성, 지루성) 소류성 주유성 |
관련 국가 | 고구려 |
역사 | |
주요 사건 | 645년 당나라의 침공 648년 당나라에 의해 함락 |
설명 | 645년 당나라의 당 태종이 직접 이끄는 군대에 의해 공격받음. 고구려-당 전쟁 당시 요충지. 648년에 완전히 당나라에 함락됨. |
2. 주류성의 역사적 배경
660년 신라 · 당의 연합군에게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임존성 등에서는 간솔(杆率) 귀실복신과 승려 도침, 옛 풍달군장(風達郡將) 흑치상지 등이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주류성은 이들 백제 부흥군 지휘부의 거점이자 「임시수도」와도 같은 곳이었다.
사료 부족과 기록의 한계, 백강(白江)의 위치 비정과 주류성 위치 비정의 연관성 때문에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4] 고대 지명의 경우 분명히 같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자를 쓰거나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록에 등장하는 발음과 뜻이 비슷한 한자 지명들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지명을 기록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른다.[4]
기록에 주류성은 「농사짓는 땅과는 거리가 멀고 돌이 많고 척박하여 농사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성이면서, 동시에 「방어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로 기록되어 있다. 왜에 있던 왕자 풍장이 복신의 요청으로 662년 5월에 귀국해 새로운 백제왕으로 옹립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으며, 주류성이 백제 부흥군의 중심 지휘부가 되었다. 안정된 식량 확보가 어렵다는 단점 때문에 자칫 장기전으로 갈 경우 불리할 것을 염려한 부흥군 지휘부는 주류성에서 멀지 않은 피성(避城, 지금의 김제성산/당진면천)으로의 천도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그 직후인 663년 초부터 신라군의 공세에 밀려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흥군 지휘부의 분열이 심화되면서, 앞서 도침을 죽이고 병권을 모두 장악했던 복신이 다시 풍장왕에게 살해되고, 부흥군을 돕기 위해 왜에서 보낸 2만여 명의 수군도 백강(白江)에서 당의 수군에 궤멸되면서(백강 전투) 풍장은 고구려로 달아나 버렸다. 결국 9월,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주류성은 함락되었다.
《일본서기》는 주류성이 함락되던 날, 국인(國人) 곧 백제의 유민들이 "주류성이 항복하였구나. 일을 어찌할 수가 없구나.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은 끊어졌구나. 조상의 무덤을 무슨 수로 오갈 수 있단 말이냐."라고 탄식하는 말을 남긴 채 퇴각하는 왜군을 따라 왜로 망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3. 주류성의 지리적 특징 및 전략적 중요성
4. 주류성의 위치 비정에 대한 문제
== 두릉윤성(豆陵尹城)과의 관계 ==
《삼국사기》에는 두릉윤(豆陵尹) · 두릉이(豆陵伊) · 두량윤(豆良尹)이라는 표기로 등장하는 성이 나타나는데, 이 성은 백제 열이현(悅已縣)의 다른 이름인 두릉윤성, 또는 두곶성, 윤성(尹城)으로 기록되어 있다.[5]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제 열이현이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현에 위치한 계봉산성(鷄鳳山城)으로 비정된다고 기록되어 있다.[5]
《구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본기, 「문무왕보서」의 기록을 비교하면, 나 · 당 연합군이 공격한 두릉윤성이 주류성이고, 두릉윤성과 주류성은 같은 지명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5]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8년(661년)조 기록을 보면, 신라군은 두릉윤성(豆陵尹城) 남쪽에 군영을 설치하려다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했다.[6] 이후 고사비성 바깥에 주둔하며 두량윤성(豆良尹城)을 공격했지만 한 달 넘게 이기지 못하고 철수했다.[6] 《삼국사기》 문무왕 6년(661년)조 기록에는 신라가 병사를 보내 주류성을 포위했지만, 백제군에게 크게 패하고 남방의 여러 성들이 배반하여 복신에게 귀부했다는 내용이 있다.[7]
그러나 《삼국사기》 문무왕 3년(663) 5월조에는 "두릉윤성(豆陵尹城)【두량윤성(豆良尹城)이라고도 한다】과 주류성 등 여러 성을 공격하라"는 기록이 있어, 두량윤성과 주류성이 같은 성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8] 다만, 한문 문장의 특성상 661년의 두릉윤성 전투와 662년 지라성 전투를 663년에 일어난 것처럼 뭉뚱그려 기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8]
== 지라성(支羅城)과의 관계 ==
《구당서》에는 백제 승려 도침과 장군 복신이 주류성을 근거지로 반역하였고, 당이 수군을 보내 신라와 함께 주류성을 평정했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9] 《삼국사기》에서 주류성은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분류되며, 지라성(支羅城)을 설명하는 가운데 "지라성은 일명 주류성"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9]
== 두솔성(豆率城)과의 관계 ==
663년의 기록 안에 660년부터 시작된 백제 부흥운동의 전말과 신라의 백제 부흥군 진압 과정을 압축해서 기록한 《삼국사기》 권42 김유신열전 중(中)에는 백강구 전투 이후 "8월 13일에 두율성(豆率城)에 이르렀다. 백제인과 왜인이 모두 나와서 진을 쳤다. 아군이 힘껏 싸워서 그들을 크게 패배시켰다. 백제와 왜인이 모두 항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등장하는 '두율성'은 발음상 '주류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0]
4. 1. 두릉윤성(豆陵尹城)과의 관계
《삼국사기》에는 두릉윤(豆陵尹) · 두릉이(豆陵伊) · 두량윤(豆良尹)이라는 표기로 등장하는 성이 나타나는데, 이 성은 백제 열이현(悅已縣)의 다른 이름인 두릉윤성, 또는 두곶성, 윤성(尹城)으로 기록되어 있다.[5]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제 열이현이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현에 위치한 계봉산성(鷄鳳山城)으로 비정된다고 기록되어 있다.[5]
《구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본기, 「문무왕보서」의 기록을 비교하면, 나 · 당 연합군이 공격한 두릉윤성이 주류성이고, 두릉윤성과 주류성은 같은 지명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5]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8년(661년)조 기록을 보면, 신라군은 두릉윤성(豆陵尹城) 남쪽에 군영을 설치하려다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했다.[6] 이후 고사비성 바깥에 주둔하며 두량윤성(豆良尹城)을 공격했지만 한 달 넘게 이기지 못하고 철수했다.[6] 《삼국사기》 문무왕 6년(661년)조 기록에는 신라가 병사를 보내 주류성을 포위했지만, 백제군에게 크게 패하고 남방의 여러 성들이 배반하여 복신에게 귀부했다는 내용이 있다.[7]
그러나 《삼국사기》 문무왕 3년(663) 5월조에는 "두릉윤성(豆陵尹城)【두량윤성(豆良尹城)이라고도 한다】과 주류성 등 여러 성을 공격하라"는 기록이 있어, 두량윤성과 주류성이 같은 성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8] 다만, 한문 문장의 특성상 661년의 두릉윤성 전투와 662년 지라성 전투를 663년에 일어난 것처럼 뭉뚱그려 기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8]
4. 2. 지라성(支羅城)과의 관계
《구당서》에는 백제 승려 도침과 장군 복신이 주류성을 근거지로 반역하였고, 당이 수군을 보내 신라와 함께 주류성을 평정했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9] 《삼국사기》에서 주류성은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분류되며, 지라성(支羅城)을 설명하는 가운데 "지라성은 일명 주류성"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9]
4. 3. 두솔성(豆率城)과의 관계
663년의 기록 안에 660년부터 시작된 백제 부흥운동의 전말과 신라의 백제 부흥군 진압 과정을 압축해서 기록한 《삼국사기》 권42 김유신열전 중(中)에는 백강구 전투 이후 "8월 13일에 두율성(豆率城)에 이르렀다. 백제인과 왜인이 모두 나와서 진을 쳤다. 아군이 힘껏 싸워서 그들을 크게 패배시켰다. 백제와 왜인이 모두 항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등장하는 '두율성'은 발음상 '주류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0]
5. 주류성 위치에 대한 주요 학설
충청남도 홍성군의 학성산성(鶴城山城),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唐山城), 전라북도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등이 주류성 후보지로 거론된다.
- 홍성 학성산성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홍성읍성을 주류성으로 비정했다.[11] 박성흥은 학성산성(鶴城山城)과 석성(石城)을 주류성으로 비정하며, '학(鶴)'이 일본어 '쓰루'와 음이 비슷하고, 현지에서 '두루성'으로 불리는 것이 '주류성'의 와음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12] 그러나 '쓰루성'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학성'이 된 것이 아니고, 학성이라는 이름도 구전이므로 일본어를 매개로 연결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13] 학성산성은 백제 성이지만 주류성이 아닌 사시량현(沙尸良縣) 관련 유적으로 확인되었고,[14] 지삼촌이 주류성임이 확인되지 않으면 지심주로 개칭되었다는 주장도 성립될 수 없다.[15] 박성흥은 '홍주목본백제주류성' 기록을 홍주목 주류성으로 보았지만, 주류성은 특정 산성이 아닌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지역과 같은 <산악 지형의 넓은 공간>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 한산 건지산성설: 이병도는 웅진강을 백강(지금의 금강)으로 보고, 복신과 도침이 금강에서 멀지 않은 한산군의 건지산성에 내려와 웅진강 어귀에 두 목책을 세워 유인궤군을 막으려 했다고 설명한다. 이 주장은 심정보, 정효운 등 한국과 일본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16] 그러나 신라가 건지산성을 포위했을 가능성이 낮고, 백제군이 금강 어귀에 목책을 세웠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17] 《일본서기》는 주류성을 "농사짓기 어려운 척박한 땅"으로 묘사하는데, 곡창 지대인 한산은 이에 맞지 않는다.[17] 1998년과 2001년 조사 결과, 건지산성은 고려 시대에 축조되었고, 서천 지역에서 《일본서기》 묘사에 부합하는 대규모 성곽은 찾기 어렵다.[17]
- 연기 당산성설: 신채호는 연기군 남면의 원수산성을 주류성으로 비정했으나, 《일본서기》에서 묘사한 지형과는 차이가 있다. 김재붕은 연기군 전의면 일대 산성군, 남면의 당산성으로 비정했다. 연기는 백제 때 두잉지현(斗仍只縣)으로 주류성의 다른 표기인 두릉윤(두량윤)성과 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산성은 규모가 크지 않고, 넓은 평야지대가 주변에 있으며, 웅진 동북쪽이라 적국 신라 서원경과 가깝다는 점이 지적된다.
- 부안 위금암산성설: 오타 쇼고는 「조선상세사」에서 부안을, 이마니시 류는 위금암산성을 주류성으로 지목했다.[18] 안재홍 등도 이 설을 보강했다.[19] 오타 쇼고는 백강은 금강 하구와 다르다고 주장했고, 전영래는 '기벌포(伎伐浦)'가 동진강 하구 해상 '계화도(界火島)' 및 부안읍 백제 지명 '개화(皆火)'와 통하므로 백강은 동진강이고 주류성은 부안이라고 보았다. 노도양은 두포천(斗浦川)을 백강으로 지목하며, '희다(白)' 관련 지명, 닷쇠 발굴, 왜 구원병 전선 170척 상륙, 전쟁 관련 전설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21] 위금암산성은 첩첩산중 변산 반도에 있고, 성 서남쪽에 울금바위가 있다. 《연재집(淵齋集)》에는 소정방이 신라 문무왕을 만난 곳이라 우금(遇金)이라 불린다고 적혀 있다. 산성은 포곡식 산성이며, 《해동역사》 추정 위치 및 《영조실록》 기록 지리적 특징과 일치한다. 《삼국사기》및 《당서》에는 복신이 동굴에 숨었다는 기술이 있는데, 위금암산성 울금바위에는 원효가 수행했다는 '원효굴(원효방)'과 복신굴이 있다. 《삼국사기》에 신라군이 두솔성(주류성)을 함락시킨 뒤 "남쪽은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려 북쪽을 벌한다(南方旣定, 廻軍北伐)"는 기술과도 합치한다.
5. 1. 홍성 학성산성설 (鶴城山城說)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지금의 홍성읍성을 백제의 주류성으로 비정하였다.[11] 이후 박성흥은 홍성군 장곡면 대현리와 산성리 일대에 걸쳐 있는 학성산성(鶴城山城)과 석성(石城)을 주류성으로 비정하였다. 학성산성의 '학(鶴)'은 일본어로 '쓰루'로 읽히는데, '쓰루'와 '주류'는 서로 음이 비슷하며, 이 성이 현지에서 '두루성'으로도 불리는 것이 '주류성'의 와음으로 추정되었다는 것이다.[12] 학성산성 성문 밖에는 '복신굴'로 비정될 만한 동굴도 존재하고 있다.그러나 '쓰루성'으로 전해지다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학성'이 된 것도 아니고, 학성이라는 이름조차 구전인 만큼 쓰루와 학성을 일본어를 매개로 연결 짓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13] 학성산성은 자연 암반을 이용한 천연의 요충지이지만, 주변에 농지가 있고 남쪽으로는 천수답도 있어 《일본서기》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고고학 조사 결과 홍성은 백제의 성이지만 주류성이 아니라 사시량현(沙尸良縣)과 관련된 유적으로 확인되어 주류성으로 비정하기 어렵게 되었다.[14] 또한 김정호가 주장한, 당에 의해 이곳이 지심주로 개칭되었다는 것도 주류성을 개칭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지삼촌을 개칭한 것으로, 지삼촌이 주류성임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 설은 성립될 수 없다.[15]
박성흥은 '홍주목본백제주류성' 기록을 홍주로 한정하여 특정 산성을 주류성으로 보았지만, 홍주목 주류성은 석축되지 않은 실체가 없는 산악 지형의 넓은 공간에 부흥군과 유민들이 함께 머무른 산악 지역으로, '홍주목본백제주류성' 기록 그대로 홍주목을 주류성으로 보고 있다. 주류성은 특정 산성이 아닌 <산악 지형의 넓은 공간>을 가리키며, 지역을 좁히면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지역이다. 이곳은 홍주목과 공주목 경계 산악 지역으로, 사비성 금강 가림성과도 가까운 험준한 산악 지역이다. 부흥군 지도층은 임존성에서 지원군과 유민들 때문에 머무르기 힘들게 되자, 가까운 산악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임시 수도를 만들어 주둔하고, 외곽 백제 산성을 전진 기지로 삼아 사비, 웅진성과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학성 장곡산성은 외곽 산성이다.
5. 2. 한산 건지산성설 (乾芝山城說)
이병도는 《구당서》와 《자치통감》에 나오는 웅진강을 백강, 즉 지금의 금강으로 보았다. 그는 유인궤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복신과 도침이 임존성에서 남쪽으로 주류성, 금강에서 멀지 않은 한산군의 건지산성에 내려와 있으면서 웅진강 어귀, 즉 금강 연안에 두 목책을 세워 유인궤군이 유인원군과 합세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고 설명한다.《구당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도침 등은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관군을 막았고, 유인궤와 신라 병사가 협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자치통감》에는 신라 김흠(金欽) 등이 유인궤 등을 구원하려다 고사(古泗)에서 복신에게 패배하고 갈령도로 돌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병도의 이러한 주장은 심정보, 정효운 등 대부분의 한국 내 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심정보는 서천 지역에 설치되었던 신라의 군부대인 설리정(舌利停)이 주류성을 함락시킨 뒤 설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6]
그러나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는 주장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백제 부흥군에 포위된 부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신라가 공주와의 직선거리가 약 60km나 떨어진 건지산성을 포위했을 가능성이 낮고, 백제군이 유인궤와 유인원의 합세를 막기 위해 먼 금강 어귀에 목책을 세웠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17]
《일본서기》는 주류성을 "농사짓는 밭과는 거리가 멀고 토지가 척박해서 농사 짓고 누에 칠 땅이 아니라 막아 싸울 땅이다", "산악이 험준하고 높아서 방어하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주류성의 위치를 비정하는 중요한 1차 자료로 꼽히는데, 곡창 지대로 유명한 한산 땅이 주류성이라는 주장은 《일본서기》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17]
1998년과 2001년에 이루어진 건지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이 성은 고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서천 지역에서 조사된 성곽 중 《일본서기》가 묘사한 주류성의 입지 조건에 부합하는 대규모 성곽은 찾기 어렵다.[17]
5. 3. 연기 당산성설 (唐山城說)
신채호가 처음 백제의 주류성으로 비정한 곳은 연기군 남면의 원수산성이었다. 이 성은 금강 본류와 미호청의 두물머리에 위치하여 험준한 구조를 하고 있지만, 주변으로 넓은 들판을 갖춘 평야 지대에 위치해 있어 《일본서기》에서 묘사한 주류성의 지형과는 차이가 있다. 신채호의 설을 계승한 이 설은 이후 황의돈과 김재붕에게 이어졌는데, 김재붕은 연기군 전의면 일대의 산성군으로 비정했다가 다시 남면의 당산성으로 비정하였다. 김재붕에 따르면 연기는 백제 때 두잉지현(斗仍只縣)으로 주류성의 다른 표기로 간주되기도 하는 두릉윤(두량윤)성과도 음이 닮았다고 연결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당산성은 백제 시대의 토성이기는 하지만 지세와 규모가 험준하거나 크지도 않고,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변의 넓은 평야지대가 주변에 펼쳐져 있을 뿐 아니라 원수산성과도 가깝다. 연기 지역은 웅진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어 적국 신라의 서원경과도 가깝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5. 4. 부안 위금암산성설 (位金巖山城說)
오타 쇼고는 「조선상세사」에서 처음으로 부안 지역을 백제 주류성으로 비정하였고, 이마니시 류는 위금암산성을 백제 주류성으로 지목했다.[18] 안재홍 등도 이 설을 보강했다.[19] 오타 쇼고는 《삼국사기》등에 등장하는 백강은 금강 하구와는 다른 별개의 강이라고 주장했고, 전영래는 백강의 다른 이름인 '기벌포(伎伐浦)'가 지금의 동진강 하구 해상의 '계화도(界火島)' 및 부안읍의 백제 지명인 '개화(皆火)'와 음운상 통하므로 백강은 동진강이고 주류성은 부안이라고 파악한 오타 쇼고의 설에 동조하였다.부안현 서부로 흐르는 두포천(斗浦川)을 백강, 즉 백촌강으로 지목한 설도 있다.[20] 노도양은 1980년 「백제 주류성고」에서 두포천을 백강으로 지목하며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했다.
- 두포천 유역부터 동진강 유역까지 '희다(白)'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분포한다.
- 두포천이 지나는 백석리 · 백석교 부근의 고잔리는 과거 선착지로 쓰였던 곳으로, 닷쇠가 발굴되기도 했다.
-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의 구원병을 실은 전선 170척의 상륙 경유지는 주류성에서 가장 가깝고 상륙하기 유리하며 안전한 곳이어야 하는데, 두포천은 입지상 가장 안전하고 편리한 장소다.
- 두포천 유역에는 전쟁 관련 전설이 많이 존재한다.[21]
위금암산성은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변산 반도에 위치해 있고, 성 서남쪽에 높이 329m의 울금바위가 있다. 조선 말기 송병선의 《연재집(淵齋集)》에는 "옛날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고자 이곳에 이르러 신라의 문무왕을 만난 까닭에 우금(遇金)이라는 바위 이름이 생겨났다"고 적고 있다. 산성은 사방은 높고 중간이 넓은 포곡식 산성이며, 《해동역사》에서 추정한 위치 및 《영조실록》에 기록된 지리적 특징과도 일치한다.
《삼국사기》및 《당서》에는 복신이 풍왕을 시해하고자 병을 핑계로 동굴에 숨었다는 기술이 있는데, 위금암산성의 울금바위에는 세 개의 굴이 있고, 원효가 수행했다 해서 '원효굴(원효방)'로도 불리는 동굴이 울금바위 중간에 있으며, 울금바위 바닥에는 복신이 숨었다는 복신굴이 있다. 《삼국사기》에 백제 부흥군의 지휘부였던 두솔성(주류성)을 함락시킨 신라군이 임존성을 치는 것에 대해 "남쪽은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려 북쪽을 벌한다(南方旣定, 廻軍北伐)"고 한 기술과도 합치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6.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주류성
7.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日本書紀III
중앙공론신사
2003
[2]
논문
이케우치가 1933년에 발표한 논문
[3]
문서
만경강, 동진강을 백강으로 비정
[4]
서적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
[5]
논문
백제 주류성고
1980
[6]
문서
八年春二月百濟殘賊來攻 泗沘城 王命伊湌品日 爲大幢將軍 迊湌文王 大阿湌良圖 阿湌忠常等 副之 迊湌文忠 爲上州將軍 阿湌眞王 副之 阿湌義服 爲下州將軍 武欻旭川等爲 南川大監 文品 爲誓幢將軍 義光 爲郞幢將軍往救之 三月五日至中路 品日 分麾下軍先行往 豆良尹 【一作伊】 城 南相營地百濟人望陣不整猝出急擊不意我軍驚駭潰北 '''十二日大軍來屯 古沙比城 外進攻 豆良尹城 一朔有六日不克 夏四月十九日班師''' 大幢誓幢先行 下州 軍殿後至 賓骨壤 遇百濟軍 相鬪敗退 死者雖小先亡 兵械輜重甚多 上州 郞幢遇賊於 角山 而進擊克之遂入百濟屯堡斬獲二千級王聞軍敗大驚遣將軍 金純 眞欽 天存 竹旨 濟師 救援至 加尸兮津 聞軍退至 加召川 乃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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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至六年 福信徒黨漸多 侵取江東之地 熊津漢兵一千 徃打賊徒 被賊摧破 一人不歸 自敗已來 熊津請兵 日夕相繼 新羅多有疫病 不可徵發兵馬 苦請難違 '''遂發兵衆 徃圍周留城''' 賊知兵小 遂即來打 大損兵馬 失利而歸 南方諸城 一時揔叛 並屬福信 福信乗勝 復圍府城 因即熊津 道斷絶於鹽豉 即募律兒 偷道送鹽 救其乏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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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백제 주류성고
1980
[9]
문서
삼국사기에서 지라성을 주류성으로 부른다고 한 기록에 대해
[10]
논문
백제 주류성고
1980
[11]
문서
洪州本百濟周留城, 唐改支尋州.
[12]
논문
홍주 주류성고
홍주향토문화연구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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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도서출판 주류성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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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도서출판 주류성
1996
[15]
서적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
[16]
문서
백강과 주류성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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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백제부흥운동연구
서경문화사
2005
[18]
서적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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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百濟史總考
民友社
1948
[20]
서적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
[21]
논문
백제 주류성고
1980
[22]
논문
백제 주류성고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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