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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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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仲)은 후한 말 원술이 건국한 짧은 기간 존속했던 왕조이다. 197년 원술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중으로 정했으며, 수도는 수춘으로 정했다. 그러나 사치와 부패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조조, 유비, 손책 등 주변 세력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199년 원술이 사망하면서 멸망했다. 원술의 아들 원요와 사촌 원윤은 손책의 보호를 받았으며, 원술의 딸은 손권의 후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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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후한)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현지 이름
다른 표기
존속 기간 시작197년
존속 기간 종료199년
이전 국가후한
다음 국가후한
수도수춘현
종교알 수 없음
공용어상고 한어
민족한족
정부 형태군주제
지도자
지도자 칭호황제
지도자 이름원술 (197년 ~ 199년)
역사
성립197년
멸망199년
기타
국성
현재 국가중화인민공화국

2. 연혁

흥평 2년(195년) 겨울, 회남(淮南) 일대를 장악한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려 하였으나 주부(注簿) 염상이 이에 반대하자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다.

건안 2년(197년) 봄, 하내 사람 장형(張炯)이 부명(符命)[2]을 알리자 전국옥새를 가지고 있던 원술은 오행과 참문에 따라 황제를 자칭하며 국호를 '''중'''(仲)이라 하였다. 구강태수[3]를 회남윤(淮南尹)에, 교유와 장훈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또한 공경과 관직을 설치하고, 봄에는 성의 북쪽 교외에서, 겨울에는 성의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냈다. 한편 후궁 수백 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는 등 사치가 극심하였고, 때문에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97년, 허난성 허난시의 장경의 주장을 받아들여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중', 수도를 수춘으로 정하고 건국하였다.

원술은 197년 봄, 허난성 허난시의 장경이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고 주장하자 이를 받아들여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중(仲)'이라 하였다. 수도는 수춘으로 정했다.[4] 같은 해 9월, 교유, 장훈과 함께 진국을 점령하고 진왕 유총을 죽여 세력을 넓혔으나 조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했다.[4] 옛 부하인 진란과 뇌박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4]

198년, 여포와 동맹을 맺었으나, 여포는 조조에게 패배하여 사망했다.[4]

199년, 원술은 원소에게 제위를 넘기려 청주로 향했으나, 유비에게 저지당했다.[4] 수춘에서 80리 떨어진 강정(江亭)에 이르러 식량을 확인해 보니, 보리 부스러기만 30곡 정도 남아있을 뿐이었다. 날이 몹시 더워 꿀물을 마시려 하였는데, 꿀 또한 없었다. 원술은 난간에 걸터앉아 "나 원술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탄식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4]

원술이 숨을 거둔 후, 종제 원윤은 일족들을 이끌고 환성(皖城)을 지키고 있던 원술의 옛 부하 여강태수 유훈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유훈이 출진하여 성을 비운 사이 손책이 환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원씨 가문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손책에게 끌려갔다. 원술의 아들 원요는 훗날 동오에서 낭중령을 지냈으며, 원술의 딸은 대제 손권의 후궁이 되었다.

199년에 원술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원요와 사촌 원윤유훈의 보호를 받았고, 후에 손책의 보호를 받았다. 원윤은 그 후 사서에 등장하지 않지만, 원요는 손권 밑에서 낭중을 지냈다. 또한, 원술의 딸 중 한 명인 원씨가 손권의 측실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원요의 딸도 손권의 아들 손분에게 시집을 가는 등, 과거 손권의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원술에게 지원을 받았던 점도 있어, 원술의 유족은 후하게 대우받았다.

2. 1. 건국 배경

흥평 2년(195년) 겨울, 회남(淮南) 일대를 장악한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려 하였으나 주부(注簿) 염상이 이에 반대하자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다.

2. 2. 건국

건안 2년(197년) 봄, 하내 사람 장형(張炯)이 부명(符命)[2]을 알리자 전국옥새를 가지고 있던 원술은 오행과 참문에 따라 황제를 자칭하며 국호를 '''중'''(仲)이라 하였다. 구강태수[3]를 회남윤(淮南尹)에, 교유와 장훈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또한 공경과 관직을 설치하고, 봄에는 성의 북쪽 교외에서, 겨울에는 성의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냈다. 한편 후궁 수백 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는 등 사치가 극심하였고, 때문에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97년, 허난성 허난시의 장경의 주장을 받아들여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중', 수도를 수춘으로 정하고 건국하였다.

2. 3. 멸망

원술은 197년 봄, 허난성 허난시의 장경이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고 주장하자 이를 받아들여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중(仲)'이라 하였다. 수도는 수춘으로 정했다.[4] 같은 해 9월, 교유, 장훈과 함께 진국을 점령하고 진왕 유총을 죽여 세력을 넓혔으나 조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했다.[4] 옛 부하인 진란과 뇌박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4]

198년, 여포와 동맹을 맺었으나, 여포는 조조에게 패배하여 사망했다.[4]

199년, 원술은 원소에게 제위를 넘기려 청주로 향했으나, 유비에게 저지당했다.[4] 수춘에서 80리 떨어진 강정(江亭)에 이르러 식량을 확인해 보니, 보리 부스러기만 30곡 정도 남아있을 뿐이었다. 날이 몹시 더워 꿀물을 마시려 하였는데, 꿀 또한 없었다. 원술은 난간에 걸터앉아 "나 원술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탄식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4]

2. 4. 멸망 후

원술이 숨을 거둔 후, 종제 원윤은 일족들을 이끌고 환성(皖城)을 지키고 있던 원술의 옛 부하 여강태수 유훈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유훈이 출진하여 성을 비운 사이 손책이 환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원씨 가문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손책에게 끌려갔다. 원술의 아들 원요는 훗날 동오에서 낭중령을 지냈으며, 원술의 딸은 대제 손권의 후궁이 되었다.

199년에 원술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원요와 사촌 원윤유훈의 보호를 받았고, 후에 손책의 보호를 받았다. 원윤은 그 후 사서에 등장하지 않지만, 원요는 손권 밑에서 낭중을 지냈다. 또한, 원술의 딸 중 한 명인 원씨가 손권의 측실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원요의 딸도 손권의 아들 손분에게 시집을 가는 등, 과거 손권의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원술에게 지원을 받았던 점도 있어, 원술의 유족은 후하게 대우받았다.

3. 정치

중나라는 다른 삼국 시대의 왕조와 비교해도 극히 취약한 왕조였다. 외교적으로는 조조유비, 손책 등의 세력에 압박받아 세력이 날마다 쇠퇴했다. 내정적으로도 악정으로 혼란하여 이반하는 부하도 많아 말기에는 식량마저 부족한 지경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제4의 삼국지"라고도 칭해진다. 《후한서》나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인구는 100만여 명, 병사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징병을 빈번하게 실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4. 군사

삼국지연의에서는 중나라의 병력이 약 7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진수삼국지에는 중나라의 구체적인 병력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교유, 장훈 두 사람을 대장군으로 두고 있었으며, 그 외에 양봉, 한섬 등의 유능한 무관들이 있었다.

조조가 수춘성으로 진격했을 때, 교유, 장훈, 양봉, 한섬 등의 명장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에 파견되어 있었다. 원술은 친위대와 수춘성을 지키는 일부 병력만으로 조조에 맞섰으나 결국 패배하고 후퇴하여 죽게 된다.

5. 인물

6. 역대 황제

wikitable

대수시호재위비고
1-197년 ~ 199년-


참조

[1] 문서 충
[2] 문서 하늘이 임금이 될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
[3] 문서 원술 휘하의 구강태수로 흥평 원년([[194년|194]])경에 임명된 [[진기 (양주)|진기]]가 있는데, 이때까지 구강태수를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4] 문서 경포 (후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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