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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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훈은 재일 한국인 2세로, 1940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겪고 오른손 화상으로 인해 왼손잡이 타자가 되었다. 그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으며, 도에이 플라이어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롯데 오리온스 등에서 활약했다. 7번의 수위 타자를 차지했으며, 통산 3,085안타를 기록하여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다 안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또한 504개의 홈런과 319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통산 타율 3할, 500홈런, 300도루를 모두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은퇴 후에는 KBO 총재 특별 보좌관으로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했으며, TBS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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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장훈 |
출생 이름 | 장훈 |
일본어 이름 | 張本 勲 (はりもと いさお) |
로마자 표기 | Harimoto Isao |
한자 표기 | 張本 勲 |
한국어 이름 | 장훈 |
한글 표기 | 장훈 |
한자 표기 | 張勳 |
출생일 | 1940년 6월 19일 |
출생지 |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
국적 | 대한민국 → 일본 |
본관 | 인동 장씨 |
신장 | 181cm |
체중 | 85kg |
포지션 | 외야수 |
타석 | 좌 |
투구 | 좌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일본 프로 야구 |
데뷔일 | 1959년 4월 10일 |
데뷔 팀 | 도에이 플라이어스 |
최종 리그 | 일본 프로 야구 |
최종일 | 1981년 10월 10일 |
최종 팀 | 롯데 오리온스 |
소속팀 | 도에이 플라이어스/닛타쿠홈 플라이어스/닛폰햄 파이터스 (1959–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79) 롯데 오리온스 (1980–1981) |
코치 경력 | |
코치팀 | 닛타쿠홈 플라이어스 (1973) |
주요 기록 | |
통산 타율 | 0.319 |
홈런 | 504 |
안타 | 3085 |
타점 | 1676 |
득점 | 1523 |
도루 | 319 |
수상 내역 | |
신인왕 | 1959년 퍼시픽 리그 신인왕 |
MVP | 1962년 퍼시픽 리그 MVP |
일본 시리즈 우승 | 1회 (1962년) |
올스타 선정 | 18회 (1960–1964, 1966–1978) |
베스트 나인 | 16회 (1960–1970, 1972–1974, 1976, 1977) |
수위 타자 | 7회 (1961, 1967–1970, 1972, 1974) |
사이클링 히트 | 1961년 5월 7일 |
NPB 기록 | 통산 3085 안타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명예의 전당 | |
명예의 전당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유형 | 일본 |
헌액 년도 | 1990년 |
선정 방법 | 경기자 표창 |
기타 정보 | |
프로 입단 연도 | 1959년 |
첫 출장 | 1959년 4월 10일 |
최종 출장 | 1981년 10월 10일 |
선출 국가 | 일본 |
선출 년도 | 1990년 |
2. 어린 시절과 아마추어 시절
장훈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일본 히로시마로 이주한 재일 한국인 2세이다. 네 살 때 사고로 오른손 중지와 약지, 새끼손가락에 심한 부상을 입어 왼손잡이 투수 겸 타자가 되었다. 특수 장갑을 사용해 공을 잡았고, 흉터 진 손가락 사이로 야구 배트를 잡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오른손만으로 배트 스윙 연습을 하며 다친 팔을 강화하려 했다.[2]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가족의 집은 산 그림자에 가려져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폭심지에 있던 여동생을 잃었다.[2] 그는 히바쿠샤 운동에 참여하여 핵무기 사용 금지와 피해자 보상을 위해 헌신했다.
오사카부 나니와 상업고등학교 시절 1957년 가을 긴키 대회 예선에서 11홈런, 타율 5할 6푼을 기록했으나,[247] 야구부 내 폭력 사고로 고시엔 출전은 좌절되었다.[248] 대신 '재일한국인 고교야구선수단'에 참가, 한국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13승 1무, 홈런상, MVP를 수상했다.[249]
고교 시절 오 사다하루와 함께 ‘동쪽의 오, 서쪽의 하리모토’(東の王、西の張本일본어)[250]로 불리며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았다.[251]
2. 1. 재일 한국인 2세, 히로시마 원폭 피해
장훈은 1940년 6월 19일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났다.[240] 그의 가족은 1940년 봄 히로시마현으로 이주했다.[240] 부모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출신이며,[12][13][14][15] 본관은 인동 장씨이다.[16] 1939년, 어머니는 40세 이전에 임신한 채 형과 두 명의 누나를 데리고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에서 장훈을 낳았다.[17][18] 당시 히로시마는 일본 육군과 해군의 중요 거점인 군사도시였고,[19] 태평양 전쟁으로 돌입해가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 가정은 학대와 차별을 받았으며, 장훈 가족도 판잣집에서 몸을 숨기듯 살았다.[20][21]4살 때, 집 근처 강의 제방에서 모닥불을 피우다가 트럭을 피하려다 모닥불 속에 오른손을 넣어 화상을 입었다.[241] 이 화상으로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는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달라붙었다.[241] 이 때문에 왼손잡이 투수이자 타자가 되었고, 손상된 손에 맞는 특수 장갑을 사용했다.[2] 흉터가 진 손가락들은 야구 배트가 들어갈 정도로 구부러져 있었다. 어린 시절 오른손만으로 배트 스윙 연습을 하며 다친 팔을 강화하려 했다.[2]
5세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해 큰 누나를 잃었다.[240][242]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 지점에서 약 2km 떨어진 히로시마시 단바라 신마치(현재의 히로시마시 남구 단바라)에서 피폭되었다.[26][27] 히지야마(比治山)의 그림자에 가려져 직접적인 열선은 닿지 않았지만, 폭풍에 휘말려 집이 무너졌다.[28] 붉은 섬광을 본 직후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되찾은 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을 감싸 안고 유리 파편에 피를 흘리고 있던 어머니의 붉은 피색이었다. 그 직후 대피소에서 경험한 사람의 살이 타는 강렬한 냄새, 비명을 지르며 원숭이강(猿猴川)에 뛰어들어 죽어가는 사람들, 밤새도록 이어지는 신음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29] 학도 징용으로 히지야마 서쪽에 있던 당시 12세였던 장녀 텐코(点子)는 큰 화상을 입고 사흘 만에 사망했다. 장훈에 따르면, 들것으로 옮겨진 텐코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 ‘뜨거워, 뜨거워.’ 어머니의 품에서 끙끙대는 텐코에게 포도 한 송이를 따서 입가에 짜주었다. ‘고마워.’ 사라질 듯한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라고 한다.[29]
종전 후, 아버지가 조선반도로 돌아가 생활 기반을 갖춘 후 가족을 불러들이기로 했지만, 귀국 후 갈치뼈가 식도를 뚫고 급사했고,[30] 밀항선이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전복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어머니가 세 아이의 안전을 염려하여 귀국을 포기했다. 어머니는 히로시마역 앞 암시장에서 소와 돼지의 내장을 구입하여 집에서 목수나 공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곱창구이집을 시작했다.[30]
그는 일본에서 프로 야구 선수가 된 유일한 원폭 생존자로 알려져 있다.[2] 후에 전 세계 핵무기 사용 금지와 피해자 보상을 위해 헌신하는 일본 히바쿠샤 운동에 참여했다. 프로야구 출신자 중 직접 피폭으로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받은 사람은 장훈과 노토 히토시 두 사람뿐이다.
피폭자임을 오랫동안 숨겼다. 기억하는 것이 두려워 야구에 몰두하고, 방망이를 계속 휘두르는 것으로 당시 기억을 마음 한구석에 억눌러왔다. 그러나 2005년경 “원폭이 떨어진 곳을 모른다”고 말한 젊은이에게 분노를 느껴 피폭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117] 2024년, 일본 원폭 피해자 단체협의회(被団協)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세계적으로 전쟁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인류를 위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외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으로서 마지막 메신저로서 앞으로도 전쟁의 비참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등의 코멘트를 발표했다.[119][120]
2. 2. 야구와의 만남, 그리고 좌절
장훈은 1940년 6월 19일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났다.[240] 그는 4살 때 화상을 입어 오른손 엄지, 검지는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붙어버렸다.[241] 5세 때에는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폭을 당해 큰 누나를 잃었다.[240][242]장훈은 소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처음 접했다.[243] 수영에 자신이 있었지만, 진학한 기타하라 중학교에 수영부가 없어 야구부에 들어갔다.[244] 히로시마 상업고등학교 또는 고료 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폭력성이 있는 학생’으로 여겨져 입학을 거절당하고 야구를 중단했다.[245] 이후 마쓰모토 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거쳐 오사카부 나니와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246] 당시 나니와 상고는 교내 폭력 사고로 2년 동안 경기 출장 금지를 받은 상태였다.
나니와 상고에서 에이스이자 4번 타자였던 장훈은 무리한 변화구 연습으로 어깨를 다쳤다. 야구를 포기하려 했을 때 타자로 전향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타자로 재기했다. 1957년 가을 긴키 대회 예선에서 홈런 11개, 5할 6푼의 타율을 기록했다.[247] 그러나 그와 무관한 야구부 내 폭력 사고로 휴부(休部) 명령을 받아 고시엔에 출전하지 못했다.[248] 대신 ‘재일한국인 고교야구선수단’에 선수로 참가하여 한국 선발팀과 경기에서 13승 1무를 기록, 홈런상과 대회 MVP를 수상했다.[249]
고등학교 시절, 장훈은 오 사다하루와 함께 ‘동쪽의 오, 서쪽의 하리모토’(東の王、西の張本일본어)[250]라고 불리며 초고교급 선수로 평가받았다.[251]
2. 3. 고시엔 좌절, 재일 한국인 고교 야구 선수단 활동
장훈은 나니와 상업고등학교에서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 활약했지만, 무리한 변화구 연습으로 어깨를 다쳐 야구를 포기할 뻔했다. 그러나 타자로 전향하라는 권유를 받고 재기에 성공, 1957년 가을 긴키 대회 예선에서 13경기 동안 5할 6푼의 타율과 11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247]그러나 고시엔(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출전은 좌절되었다. 야구부 내 폭력 사고로 인한 휴부(休部) 명령과, '한 번 휴부를 받은 선수는 복귀 후 3개월간 경기 출전이 불가능하다'는 당시 야구 규약 때문이었다.[248]
고시엔 출전 대신 장훈은 '재일한국인 고교야구선수단'에 참가하여 한국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13승 1무를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 대회에서 장훈은 홈런상과 MVP를 수상했다.[249]
2. 4. 오 사다하루와의 라이벌 관계
장훈은 고등학교 시절 동갑내기인 오 사다하루와 함께 ‘동쪽의 오, 서쪽의 하리모토’(東の王、西の張本일본어)[250]라고 불리며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았다.[251] 프로 선수로서 동기이자 동갑내기이며, 일본인이 아닌 외국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오 사다하루와는 프로 데뷔 초부터 매우 친한 사이였다. 신인 시절에는 장훈의 히로시마 친가에 오 사다하루가 묵은 적도 있다.1963년 올스타 게임 타격 연습에서 오 사다하루가 장훈과는 수준이 다른 타구를 계속 날리는 것을 보고, 장훈은 "내가 무슨 일류 타자 행세를 하며 안주하고 있었던가"라고 반성했다고 한다.[149] 오 사다하루가 오랜 부진을 극복하고 감독으로서 후쿠오카 다이에이 호크스를 첫 우승으로 이끌었을 때, 장훈은 "지금까지 왕정치(오 사다하루)를 바보 취급했던 놈들은 모두 중이 되어 사과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잡지 기획 등에서 "프로 야구 최강 타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항상 오 사다하루를 꼽을 정도로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
1979년 오프 시즌, 장훈은 망막 질환으로 시야가 좁아져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에 롯데로 방출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거인 송년회 자리에서, 그때까지 한 번도 구단 운영진에 의견을 낸 적이 없었던 오 사다하루가 당시 구단주인 쇼리키 도루에게 "장훈 씨에게 거인에서 3000안타를 달성하게 해 주십시오"라며 장훈의 거인 잔류를 간절하게 요청했다. 오 사다하루의 발언에 쇼리키는 "왕 군, 무슨 일이냐? 취했나?"라고 놀랐지만, 오 사다하루는 "아니오, 오너, 저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부탁드립니다"라고 호소했다. 장훈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감격하여 울면서 그만두었다고 하며, "그 이후로 왕정치(오 사다하루)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복종을 맹세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감독은 오 사다하루밖에 없다고 주장했고, 오 사다하루에게도 "(위암 수술을 마친 왕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평생 당신을 돌볼 테니"라고까지 전했다고 한다.
장훈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과 기네스 세계 기록에 대해, 오 사다하루가 친 868개의 홈런 기록을 공식적인 세계 기록으로 인정하도록 텔레비전 출연 시 자주 호소하고 있다.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여 신인왕으로 선정되었다.[3] 강력한 타격과 빠른 발을 겸비한 위협적인 타자로, 통산 3,085안타는 일본프로야구 최다 기록이며, 504홈런(일본 역대 7위), 319도루를 기록했다. 3,000안타, 500홈런, 300도루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윌리 메이스[4]와 알렉스 로드리게스[5]만이 달성한 기록이다.
NPB 유일의 '''통산 3000안타'''[9], 통산 안타 NPB 기록(3085개), 유일한 '''500홈런 300도루'''를 달성했다. 역대 최다 '''16회 시즌 타율 3할''', '''9년 연속 타율 3할'''(NPB 기록), 최다 타격왕 7회(최다 타이), 최고 출루율 9회(퍼시픽리그 최다), 맹타상 최다 기록을 보유했다.[10] 애칭은 「'''ハリさん'''(한자 표기: '''張さん''')」[11], 「'''ハリ'''」, 「'''ハリやん'''」, 「'''해리'''」이다.
1975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요청,[65][72] 다카하시 이치조·후타 타카시와의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했다.[73][74] 오 사다하루와 함께 '''OH포'''로 활약하며 제1기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시대 2번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78년 통산 16번째 시즌 타율 3할을 기록, 같은 해 일본 프로야구 명구회에 입회했다(쇼와[77] 태생, 통산 2000안타 조건 충족).
1979년 왼쪽 눈 질환으로[78] 전력에서 제외, 1980년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하여 5월 28일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3000안타'''를 달성했다.[2] 이 공로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맹호장을 수상했다.[3]
3. 1. 도에이 플라이어스·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59년 ~ 1975년)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한 장훈은 프로 첫 해부터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신인왕을 차지했다.[256]4월 10일 개막전에서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에이스 투수 요네다 데쓰야에게 삼진을 당하고 수비에서도 실수를 범하며 즉시 교체되는 쓴맛을 보았지만,[253] 다음날 경기에서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첫 안타, 이시이 시게오를 상대로 첫 홈런을 기록하며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253] 6월에는 고졸 신인 최초로 4번 타순에 발탁되는 등[254][255] 팀의 중심 타자로 자리 잡았다.
1960년 시즌에는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MVP를 수상했고,[258] 1961년 시즌에는 타율 .336으로 첫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260] 1962년 시즌에는 3할 3푼 3리의 타율, 31홈런, 99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MVP를 수상했다.[261][262]
1963년 시즌에는 타율이 다소 하락했지만,[264] 1964년 시즌에 다시 3할 타율을 회복했다. 1965년 시즌에는 다시 타율이 하락했지만,[265] 1966년 시즌부터 1970년 시즌까지 4년 연속 수위 타자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265] 특히 1970년 시즌에는 3할 8푼 3리의 타율로 일본 프로 야구 최고 타율을 기록했다.[266][267]
1972년 시즌과 1974년 시즌에도 수위 타자에 오르며 통산 7번의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268][269] 1973년 시즌에는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면서도 3할 2푼 4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268] 1975년 시즌에는 타율이 하락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269]
3. 1. 1. 귀화 제안 거절, 재일 한국인 선수들의 길을 열다
당시 일본 프로 야구는 구단별로 외국인 선수를 3명까지 보유할 수 있었고, 그 중 2명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장훈은 대한민국 국적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장훈이 미국인 용병 선수와 출전 경쟁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는 장훈 본인뿐만 아니라 구단에게도 큰 손실이었다. 도에이 구단주는 장훈에게 양자가 되어 귀화할 것을 권유했지만, 장훈의 어머니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도에이 구단주는 장훈을 놓칠 수 없었기에, 퍼시픽 리그 규약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선수는 국적과 관계없이 외국인 선수 제한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삽입할 것을 제안하여 관철시켰다. 이 덕분에 이후 재일 한국인 야구 선수들은 귀화하지 않고도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252]3. 1. 2. 신인왕, 그리고 7번의 수위 타자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한 장훈은 그해 일본 프로 야구 신인왕을 차지했다.[256] 당시 일본 프로 야구는 외국인 선수 보유 및 출전 제한 규정이 있었으나, 장훈은 대한민국 국적임에도 불구하고 도에이 구단주가 리그 규약에 특별 조항을 넣어 이 규정을 적용받지 않게 되었다.[252] 이는 이후 재일 한국인 선수들이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252]데뷔 첫해, 장훈은 팀 내 최다 홈런(13개)과 타점(57개)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256] 1960년에는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MVP를 수상했고,[258] 1961년에는 타율 0.336으로 첫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260]
1962년, 장훈은 3할 3푼 3리의 타율과 31홈런, 99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뛰어난 활약으로 기능상을 받았다.[263] 또한, 리그 MVP를 수상하며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261]
1963년과 1964년에도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으며, 1966년부터 1970년까지는 4년 연속 수위 타자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다.[265] 특히 1970년에는 3할 8푼 3리의 타율로 일본 프로 야구 최고 타율 기록을 경신했다.[266][267]
1972년, 장훈은 다시 한번 수위 타자에 올랐고,[268] 1974년에도 3할 4푼의 타율로 7번째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269] 그는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1960년대와 1970년대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활약했다.
다음은 장훈의 1959년부터 1975년까지의 타격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59년 | 도에이· 닛타쿠· 닛폰햄 | 125 | 454 | 418 | 48 | 115 | 18 | 5 | 13 | 182 | 57 | 10 | 5 | 0 | 2 | 29 | 6 | 5 | 54 | 2 | .275 | .328 | .435 | .765 |
1960년 | 106 | 414 | 384 | 49 | 116 | 25 | 3 | 16 | 195 | 56 | 15 | 4 | 0 | 1 | 26 | 6 | 3 | 56 | 1 | .302 | .351 | .508 | .859 | |
1961년 | 129 | 526 | 473 | 77 | 159 | 31 | 10 | 24 | 282 | 95 | 18 | 2 | 0 | 2 | 46 | 16 | 5 | 42 | 10 | .336 | .401 | .596 | .997 | |
1962년 | 133 | 568 | 472 | 89 | 157 | 24 | 4 | 31 | 282 | 99 | 23 | 8 | 0 | 6 | 86 | 18 | 4 | 46 | 7 | .333 | .440 | .597 | 1.037 | |
1963년 | 150 | 626 | 529 | 90 | 148 | 16 | 7 | 33 | 277 | 96 | 41 | 12 | 0 | 2 | 92 | 22 | 3 | 47 | 6 | .280 | .389 | .524 | .913 | |
1964년 | 129 | 547 | 461 | 85 | 151 | 21 | 6 | 21 | 247 | 72 | 31 | 10 | 0 | 7 | 78 | 13 | 1 | 42 | 4 | .328 | .426 | .536 | .962 | |
1965년 | 132 | 538 | 455 | 61 | 133 | 13 | 3 | 23 | 221 | 88 | 29 | 13 | 0 | 7 | 72 | 10 | 4 | 37 | 7 | .292 | .394 | .486 | .879 | |
1966년 | 122 | 493 | 443 | 67 | 146 | 13 | 2 | 28 | 247 | 90 | 10 | 6 | 0 | 5 | 43 | 12 | 2 | 31 | 4 | .330 | .391 | .558 | .949 | |
1967년 | 120 | 499 | 414 | 72 | 139 | 18 | 3 | 28 | 247 | 88 | 18 | 7 | 0 | 9 | 66 | 15 | 10 | 30 | 5 | .336 | .439 | .597 | 1.035 | |
1968년 | 114 | 432 | 363 | 70 | 122 | 12 | 2 | 24 | 210 | 65 | 13 | 3 | 0 | 3 | 61 | 15 | 4 | 20 | 5 | .336 | .437 | .579 | 1.015 | |
1969년 | 129 | 557 | 480 | 77 | 160 | 27 | 1 | 20 | 249 | 67 | 20 | 1 | 0 | 4 | 71 | 21 | 2 | 33 | 5 | .333 | .421 | .519 | .940 | |
1970년 | 125 | 537 | 459 | 92 | 176 | 16 | 2 | 34 | 298 | 100 | 16 | 4 | 0 | 5 | 64 | 8 | 8 | 36 | 3 | .383 | .467 | .649 | 1.116 | |
1971년 | 128 | 546 | 480 | 73 | 150 | 21 | 3 | 26 | 255 | 78 | 18 | 7 | 0 | 5 | 59 | 6 | 2 | 32 | 14 | .313 | .390 | .531 | .921 | |
1972년 | 127 | 548 | 472 | 93 | 169 | 25 | 4 | 31 | 295 | 89 | 10 | 5 | 0 | 4 | 69 | 12 | 3 | 37 | 4 | .358 | .443 | .625 | 1.068 | |
1973년 | 128 | 550 | 441 | 77 | 143 | 18 | 0 | 33 | 260 | 93 | 12 | 6 | 1 | 5 | 93 | 19 | 6 | 32 | 4 | .324 | .448 | .590 | 1.038 | |
1974년 | 120 | 491 | 406 | 64 | 138 | 20 | 3 | 14 | 206 | 62 | 14 | 6 | 0 | 2 | 82 | 13 | 1 | 28 | 3 | .340 | .452 | .507 | .959 | |
1975년 | 119 | 473 | 410 | 45 | 113 | 12 | 2 | 15 | 174 | 46 | 6 | 6 | 0 | 3 | 58 | 9 | 1 | 26 | 13 | .276 | .367 | .424 | .791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3. 1. 3. 1962년 MVP와 일본 시리즈 우승
1962년 시즌에는 처음으로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했고, 결승 2점 홈런으로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다.[261] 또한 이 해 시즌 MVP도 차지했다.[261] 시즌 기록은 타율 3할 3푼 3리, 31홈런, 99타점이었다.[262]이 해 도에이 플라이어스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지도 아래 무라야마 미노루가 소속된 한신 타이거스를 꺾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장훈은 일본 시리즈에서 26타수 12안타, 타율 4할 6푼 1리를 기록했으며, 시리즈 타격 2위로 기능상을 받았다.[263]
3.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76년 ~ 1979년)
1975년 12월 11일 센트럴 리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닛폰햄 파이터스에 다카하시 가즈미, 도미다 마사루를 보내고, 장훈을 받아들이는 2 대 1 맞트레이드를 단행했다.[270] 이로써 오 사다하루-나가시마의 ‘ON포’에 이은 오 사다하루-하리모토 이사오(장훈)의 ‘OH포’가 탄생했다. 장훈은 요미우리에서 주로 좌익수를 맡았다.1976년 시즌 장훈은 1모 차이(0.3547)로 타격 2위를 기록했고, 30경기 연속 안타로 당시 센트럴 리그 신기록을 수립했다.[271] 1977년 시즌에도 2년 연속 타격 2위(0.348, 1위와 1푼 차이)를 기록했다.[272] 1976~77년 시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나, 1976년과 1977년 일본 시리즈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패해 2년 연속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1978년 시즌에는 3할 9리의 타율을 기록했고, 1979년에는 중심성 각막염으로 인해 77경기에만 출전했다.[273] 시즌이 끝나고 장훈은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하게 된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팬들로부터 “수비해도 안타 제조기”라고 조롱받을 정도로 서투른 수비 플레이가 두드러졌다. 유년기 화상과 고교 시절 왼쪽 어깨 부상으로 인해 현역 시절 내내 원하는 수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3. 3. 롯데 오리온스 시절 (1980년 ~ 1981년)
1979년 시즌이 끝나고 장훈은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했다.[273] 1980년 롯데 오리온스(現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의 첫 시즌, 장훈은 2할 6푼 1리의 타율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5월 28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6회말 1사 2루의 4번째 타석에서 야마구치 다카시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을 기록,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3000안타''' 대기록을 세웠다.[2] 이 기록 달성 후, 장훈은 스포츠 공로에 대한 대한민국 훈장인 국민훈장 맹호장을 수상했다.[3] 1981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이후 롯데 감독 물망 및 한국 프로팀 진출설이 있었으나 무산됐다.[274]4. 은퇴 이후
은퇴 후 장훈은 도쿄방송(TBS)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선데이 모닝'이라는 뉴스 프로그램에서 야구와 기타 스포츠에 대한 해설을 제공했다.[6]
NPB 통산 3085안타(유일한 3000안타[9]), 500홈런 300도루(유일한 달성자), 16회 시즌 타율 3할(최다), 9년 연속 타율 3할(최장), 타격왕 7회(최다 타이), 최고 출루율 9회(퍼시픽리그 최다), 맹타상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0]
애칭은 「'''ハリさん'''(한자 표기: '''張さん''')」[11], 「'''ハリ'''」, 「'''ハリやん'''」, 「'''해리'''」이다. 혈액형은 O형이다.
프로야구 출신 중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받은 사람은 노토 히토시와 장훈뿐이다.
오랫동안 피폭 사실을 숨겼으나, 2005년경 “원폭이 떨어진 곳을 모른다”고 말한 젊은이에게 분노하여 피폭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2006년 8월 15일 텔레비 아사히 ‘테츠코의 방’에 출연하여 피폭 경험, 유년 시절,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고, 이후 여러 미디어에서 피폭 경험을 공유했다.[117]
2024년, 일본 원폭 피해자 단체협의회(被団協)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해 “인류를 위해 정말 좋은 일이며 감사하다”, “전쟁의 비참함을 전하고 싶다”는 코멘트를 발표했다.[119][120]
5. 한국 야구 발전에 대한 기여
장훈은 한국 야구 발전에 여러 방면으로 기여했다.
1975년, 한국 정부는 장훈에게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을 이끌고 한국에서 원정 경기를 열어 한국 야구 팬들에게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줄 것을 제안했다.[165][166] 장훈은 이를 자신의 꿈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추진했다.[166]
- 원정 경기 성사: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양대 리그 회장들을 만나 협조를 얻어내고, 선수단을 구성하여 1975년 10월 한국 원정을 성사시켰다.[166]
- 경기 결과: 10월 24일 경기에서 장훈의 팀은 한국 아마추어 대표팀을 7-2로 승리했다.
- 심판 강습회: 일본 프로야구 심판들을 동행시켜 한국 심판들을 위한 강습회를 개최했다.[166]
1982년 한국프로야구(KBO) 출범을 앞두고, 장훈은 한국 프로야구 커미셔너 특별 보좌관으로서 일본 프로야구 커미셔너에게 일본 구단의 한국 국적 선수들을 한국 프로야구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 측의 협조를 바탕으로 KBO는 미국, 일본과 선수 계약 협상을 진행했고, 1983년 한일 협정을 체결했다.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재일 한국인 선수들을 한국에 많이 소개했다. "반쪽짜리 일본인"이라며 차별받는 재일 선수들을 위해 "같은 한국인인데 한국말을 모른다고 누가 말했는가? ... 당신들은 작은 나라 하나 지키지 못했지 않은가, 게다가 두 동강이 났지 않은가"라고 호통을 치며 그들을 변호했다.[169]
나가시마 시게오는 장훈의 한국 프로야구 실현 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장훈의 주선으로 1982년 1월 서울에서 야구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168] 선동열 또한 장훈에게 깍듯한 존경을 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논란과 비판
장훈은 선수 시절 및 은퇴 이후 여러 논란과 비판에 휩싸였다.
1964년 3월 26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3루 견제구를 받던 중 포수와 충돌했고, 대릴 스펜서(ダリル・スペンサー)를 배트로 때리려다 저지당했다.[138][139] 미즈하라 시게루(水原茂) 감독은 "배트를 쓰지 말고 맨손으로 가라"고 훈계했는데, 장훈은 이를 야구 배트를 무기로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했다.[139]
1976년 4월 16일,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 후, 판정에 불만을 품은 히로시마 팬들에게 폭행당했다는 오해를 받아 경찰 조사를 받았다.[140][141] 당시 장훈은 거인으로 이적한 후 첫 고향 방문 경기였으나, 오히려 민족 차별적인 야유를 받았다. 경기 후 거인 선수단 버스가 포위되었고, 이 과정에서 장훈이 팬을 폭행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실제로는 후배 선수가 팬을 배트로 쳤지만, 장훈은 그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142] 츠치다 마코토(槌田誠)가 팬의 머리를 맞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혐의는 풀렸지만,[143] 민단 간부의 발언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143] 프로야구 선수회와 카시와기 토시오(柏木敏夫) 심판은 이 사건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143]
1974년 5월에는 롯데 오리온스의 시로우치 쿠니오(城之内邦雄)를 발로 차는 사건이 있었다.[144] 장훈은 시로우치의 야유에 격분하여 연습 중인 시로우치를 찾아가 항의했고, "나는 야유 전문가"라는 답변에 스파이크로 허벅지를 찼다. 킨다 마사이치(金田正一) 감독은 이를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비판했고, 장훈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퍼시픽 리그는 장훈에게 10000JPY의 징계금을 부과했다.[144][145]
1965년 7월 9일에는 상해죄로 현행범 체포되었다.[146] 도쿄도 미나토구에서 운전 중 택시와 시비가 붙어 택시 운전사와 중재하던 2명에게 폭행을 가해 1주일간의 부상을 입혔다. 장훈은 모자를 잡아당겼을 뿐이라고 주장했으며, 이 사건으로 올스타 게임 출전을 사퇴했다.[146]
1983년 7월 22일, 일본프로야구 명구회 총회에서 호리우치 쓰네오(堀内恒夫)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47] 기념 촬영 전 호리우치가 사라졌고, 장훈은 호리우치가 선배에게 인사하지 않아 충고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호리우치는 와이셔츠가 찢기고 얼굴을 맞았다고 주장하며, 명구회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귀가했다고 밝혔다.[147]
6. 1. 선데이 모닝 발언 논란
TBS 계열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サンデーモーニング』(선데이 모닝)의 스포츠 코너 “週刊御意見番”(주간 고견번)에서 2021년 말까지 고정 출연했다(2010년 오사와 케이지 사망 전까지는 오자와와 함께 출연). 분노를 느끼는 내용에는 “喝!”(캇!), 훌륭한 내용에는 “あっぱれ”(압파레)를 주는 고견번 역할이었다.[173] 어떤 눈치도 보지 않는 발언으로 항상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발언 내용이 논란을 일으키는 일도 빈번했다.[173] 방송 종료 후 시청자들의 비판이 집중되어 매주처럼 넷 뉴스에 다뤄지는 등 늘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켰다.[173] 젊은층의 평판이 좋지 않았음에도 오랫동안 고견번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령층의 수요가 컸기 때문으로 여겨진다.[173]장훈은 비판적인 발언을 할 때의 기준에 대해 "진심이 부족하고, 필사적이지 않은 플레이는 의미가 없다. 스포츠는 거기에 귀중한 가치가 있다. 몰입할 정도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174]
장훈의 코멘트 중 가장 비판받는 종류는 "달리기 훈련" 등의 근성론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것이다. 2018년 6월 오타니 쇼헤이가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당했을 때도 "달리지 않기 때문"이라며 비판했고, "(오른쪽 팔꿈치 부상과 달리기 훈련은) 관계없다"라는 비판이 쏟아졌다.[175] 장훈 자신은 달리기 훈련을 매우 싫어했지만, 현역 시절에는 생계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달렸다고 한다.[176]
다르빗슈 유는 종종 장훈의 의견에 반발하는 목소리를 내었고, 장훈이 2019년 고시엔 결승전에서 투수의 어깨와 팔꿈치의 소모를 고려하지 않는 발언을 했을 때, "쉐룡이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한다면, 주저 없이 이 코너(동 프로그램의 스포츠 코너)를 없애달라고 할 것이다"라고 트위터에 발언하기도 했다.[177] 이에 장훈은 분슌의 인터뷰에서 "너무 말이 많다"고 반응했고, 다르빗슈는 "일본 야구계의 성장을 막아온 원인"이라고 받아치는 설전이 벌어졌다.[178]
노무라 카츠야는 "아침 방송에서 여러 가지 말하고 있지만, 그에게 선수를 비판할 자격은 없다. 장본은 타격에만 관심이 있다. 수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네가 감히 남을 비판할 수 있나?'라고 TV를 향해 불평하고 있다.[179]" "(장본이) 투수 앞 땅볼을 툭 치고 말죠. 그는 한 발짝도 달리지 않습니다. 벤치로 돌아가 버립니다. 일요일에 '喝' 같은 걸 하고 있잖아요. 네가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있나[180]"라고 통렬하게 비판했지만, 1982년 4월 7일 TBS의 자이언츠-다이요 전에서 함께 해설을 맡았고, 2013년 6월 9일에는 그 선데이 모닝에서 장본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181] 장본도 현역 시절 노무라의 속삭임 전술에 넌더리를 내고 노무라의 머리에 풀스윙을 날렸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182]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노무라가 사망했을 때는 "쓸쓸하다", "유감이다" 등의 추모의 말을 남겼다.[183]
; 에가와 사요코와의 대립
2010년 5월 23일 방송분에서, 도중에 강판한 이와쿠마 히사시에게 "에이스로서 마운드를 지켜야 한다!"라며 "喝!"을 날렸다. 이때 출연자인 에가와 쇼코는 "어머나"라며 놀라 "도중 강판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라고 의견을 말했다. 방송 중에는 논쟁이 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에, 나중에 TBS 측은 여러 차례 두 사람을 포함한 회의를 진행했지만 해결되지 않았고, 에가와는 6월 20일 방송분 출연 자제를 TBS로부터 요구받았다고 트위터에 밝혔다.[184][185] 에가와는 "5월 23일 방송에서의 나의 언행에 대해, 장본 훈 씨가 분노하여, 에가와를 프로그램에 출연시키지 않도록 TBS에 요청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적고, 7월에도 같은 이유로 출연할 수 없다고 했다.
그 후, 에가와는 트위터 사용자로부터 "복귀하지 않을 건가요"라는 질문에 "장본 씨가 출연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의 복귀는 없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공식적으로 통고를 받았습니다"라고 답했다. 프로그램 관계자는 데일리 스포츠의 취재에 "에가와 씨와는 연간 계약 등을 맺고 있지 않다. 코멘테이터로서 출연을 부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186][187] 장본은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에가와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다"고 말했다.[188]
; 미우라 카즈요시에 대한 은퇴 권고
2015년 4월 12일 방송분에서는, J2리그·요코하마 FC의 미우라 카즈요시에게 "카즈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두세요. J2리그는 프로야구로 치면 2군이기 때문에 화제성이 없습니다"라고 은퇴를 종용하는 발언을 했다.[189] 그 직후, 사회자인 세키구치 히로시로부터 "지금 카즈 팬들로부터(TBS 텔레비전에) 와 하고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라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장본은 "(전화가) 와도 괜찮습니다"라며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190] J2를 "야구로 치면 2군"이라고 표현한 점 등에 대해, 인터넷상에서는 장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한편, 이 건을 인터넷에서 알게 된 미우라는 "그런 사람에게 말을 듣는 것은 영광이다. 격려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겠다" "더욱 활약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은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겠다"라고 호의적으로 받아들였고, 소년 시절 장본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독특한 자세로 왕 씨와 함께 굉장히 활약했던 것을 기억합니다"라고 회상했다.[191] 이 반응에 대해, 장본은 다음 주 방송에서 "“あっぱれ!”(압파레!) 해 주세요"라고 외치며 "만난 적도 말한 적도 없지만, 어딘가에서 만나면 식사는 내가 대접하겠다"라고 칭찬했다. 이 발언을 경기 직후 취재진으로부터 전해들은 미우라는 "식사요? 좋죠"라며 웃으며 크게 환영했고, "엄격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선수로서 행복하다. 압박감이 없어지면 현실에 안주하는 일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라고 코멘트했다.[192]
; 아베 신조에 대한 칭찬
2016년 5월 29일 방송분에서, 방송 2일 전의 버락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화제로 했다. 장본은 "좋았네. 안심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원폭 투하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아베 신조 씨가 총리여서 좋았네. 아, 이 나라를 지켜 줄 테니까"라고 말하고, "나쁘지만, 나의 개인적인 문제니까"라고 단서를 붙이면서 "(아베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과) 나란히 있어도 손색이 없네. 좋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칭찬했다.[193]
나중에 보수 논단 잡지인 「WiLL」(2017년 12월호)[194] 및 「Hanada」(2017년 12월호)[195]의 인터뷰를 받아, 다시 한번 아베 총리를 칭찬하고 있다.
; 미즈타니 준의 가츠포즈를 둘러싼 소동
2016년 8월 14일 방송분에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탁구 남자 단식 3위 결정전에서 승리한 미즈타니 준이 경기 직후 가츠포즈를 하고 바닥에 엎드려 대(大)자 포즈로 동메달 획득의 기쁨을 표현하는 영상이 흐른 후, 장본은 엄격한 표정으로 "스포츠 선수 선배로서, 탁구의 미즈타니에게"라고 말을 시작하여 "그런 가츠포즈는 안 돼. 안 돼"라며 "喝!"을 날렸다. "손은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면 안 된다. '이겼다!'는 태도는 취하면 안 된다" "이 나라(일본)는 예의가 시작이고 예의로 끝난다. 역시 가츠포즈는 어깨 아래까지이다"라고 코멘트했다. 그러나, 세키구치가 "하지만, 어디까지가… 기쁠 때는 이렇게(손을 높이 들어 가츠포즈를) 합니다"라고 말하자, 장본은 "왕정치 씨 같은 경우(홈런) 세계 신기록 달성했을 때도, 상대를 생각해서 결코 하지 않았다. 이것은 에티켓이다"라고 예를 들며, "하나 주의해 두겠다"라고 마무리했다.[196] 한편, 미즈타니는 현지에서 "화제가 되고 있고, 물론 알고 있다. 놀랐다" "놀이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있다. 상대도 목숨을 걸고 온다. 전장이다"라고 이해를 구했다.[197]
; 주오대학의 하코네 역전 予選敗退
2016년 10월 16일 방송분에서, 10월 15일 개최된 제93회 하코네 역전 예선회에서 주오대학이 11위에 그쳐, 하코네 역전 본선 연속 출전이 87회에서 끝난 것에 대해, 장본은 "그 역사 있는 추오 대학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역사 있는 명문 학교가, 말이 안 되잖아" 등이라고 '喝'을 날렸다.[198] "정보에 따르면 내분도 있는 것 같으니, 잘 생각해서 재건하는 편이 좋다"고 추오 대학에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이 충고에 대해, 추오 대학 법학 대학원 교수이자 동 대학 육상부 부장을 맡고 있는 노무라 슈야는 "사실무근"이라며 TBS 텔레비전에 정정과 사과를 요구했다는 것을 자신의 트위터에 발표했다. 노무라는 "그것(내분)이 패인인 것처럼 전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 선수와 대학의 명예를 현저히 손상시키는 것으로 결코 묵과할 수 없다" 등이라고 트윗했다. "(장본 씨의) 발언 직후 선데이 모닝에 전화하여 정정을 요구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생방송 중에 항의했지만, 철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99]
; 우라와 레즈 선수의 태도를 비판
2017년 5월 31일 AFC 챔피언스리그(ACL)의 제주 유나이티드 FC 대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전에서, 한국 선수가 일본 선수에 대해, 경기 중부터 경기 후까지에 이르기까지 폭력 행위를 반복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시아 축구 연맹은 폭행을 저지른 3명의 선수(권한진, 조용형, 백동규)에게 자격 정지와 제재금을 부과했고, 제주 유나이티드에 대해서도 4만 달러(약 440만엔)의 제재금이 부과되었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200], 프랑스[201], 영국[202] 등 세계 각국의 스포츠 미디어로부터 제주 유나이티드 FC에 대한 엄격한 비난이 이어졌지만, 장본은 승리한 우라와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한국 측의 주장을 지지하며, 1점 차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라와가 시간 끌기를 한 작전을 "이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태도가 좋지 않다. 역시 한국 선수의 입장에서는, 뭐라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라고 우라와를 비판하며, "일본인은 에티켓, 매너를 가르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예의 바른 민족이라고…. 지금은 그렇지 않네. 예전에는 안 되면 부모가 가르치거나, 안 되면 선배가 가르치거나 했었죠"라고 일본의 젊은 세대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203][204][205] 이 발언은 한국 언론에서도 다뤄져, "일본 야구의 전설이자 재일 동포 출신의 장훈 씨가 우라와 레즈에 엄격한 충고를 했다"고 보도되었다.[206]
; 고교 야구의 등판 회피 비판
2019년 7월 28일 방송분에서, 7월 25일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이와테 대회 결승전에서 최고 속도 163km/h를 기록하고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 지명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이와테 현립 오후나토 고등학교의 사사키 로키 투수가 결승전에서 등판을 회피하여 대패한 경기에 관해 "그것은 안 된다. 일생일대의 승부에서. 여러 가지 변명은 있겠지만, 던지게 해야 한다. 전날(준결승)의 129구? 그게 어쨌다는 건가. 역사적인 대투수들은 모두 던졌다" "부상을 당하는 것은 스포츠 선수의 운명이다. 아파도 던지게 할 정도의 감독이 아니면 안 된다" "그 힘든 상황에서 던지게 하면 장래 본인에게 플러스가 된다. 선수는 그것을 극복하고,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투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투수 사사키와 감독 구니야스 요헤이를 비판했다.[207]
; 여자 복싱에 대한 조롱 발언
2021년 8월 8일 방송분에서, 8월 3일 2020년 도쿄 올림픽 복싱 경기 여자 페더급 결승전에서 이리에 세나가 일본 여자 복싱계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한 것에 대해 "여성도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군요"라고 의아한 표정으로 발언하고, "보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나. 시집가기 전의 아가씨가 얼굴을 때리고 말이야. 이런 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군요"라고 이어 말했다.[208] 2009년 9월 6일에도 비슷한 발언을 했지만, 이때는 세키구치와 당시 생존해 있던 오자와에게 타이른 바 있다.
이 발언을 조롱으로 받아들인 일본 복싱 연맹 회장 우치다 사다노부는 10일, TBS 텔레비전 사장 사사키 다쿠에게 항의문을 보냈다. 우치다는 "좀 더 이해심을 가지고 여성 복서를 봐 주셨으면 한다" "이리에 세이나 선수와 나미키 쓰키미 선수(여자 플라이급 동메달리스트) 모두, 경기의 강함뿐만 아니라, 겸손한 처세술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다" "선데이 모닝에서, 복싱 경기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의 즐거움과 가치를 전달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라고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209][210][211][212]
이에 따라 프로그램 제작 프로듀서 김부륭은 12일, 장본의 반성 코멘트를 덧붙인 사과문을 연맹에 보냈다. 이 사과문에 연명해도 사사키의 이름은 없고, 사사키가 관리 책임을 회피하고, 프로그램 제작 측에 책임을 떠넘긴 것 같은 형태가 되고 있다. 더욱이, 방송 내에서의 코멘트에 대해 "말이 부족했습니다"라고 장본이 해명한 점 등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등에 대해 인터넷상에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연맹 측은 이 사과문에 대해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고, 신속하고 진지한 대응을 해 주셨습니다"라고 이해를 표명하는 코멘트를 했다.[213]
2021년 8월 15일 방송분에서는 스포츠 코너 시작 전에, 사회자 세키구치 히로시가 "프로그램에서 사과가 있다"라고 알리고,[214] 서브 캐스터를 맡고 있는 프리 아나운서 가라하시 유미가 "지난주 스포츠 코너에서 장본 훈 씨의 코멘트 중 여성 및 복싱 경기를 경시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일본 복싱 연맹으로부터 항의문이 접수되었다. 불쾌하게 생각하신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 정말 죄송하다"라고 사과의 코멘트를 읽었다.[215] 세키구치가 장본에게 이야기를 돌리자,[216] 장본은 "이번에는 말투를 잘못해서 반성하고 있다. 앞으로 조심하겠다"라고 말했지만,[217] 구체적인 반성점에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넷상에서는 비판이 잇따랐다.[218]
당일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진 저널리스트 야스다 나쓰키는 방송 종료 후 트위터를 업데이트하고, 장본 본인이 아니라 카라하시가 코멘트를 읽은 것 등에 대해 "프로그램 내에서 발언의 기회가 없었지만, 장본 씨의 발언을 '경시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 그것을 여성 캐스터가 전달하는 형태를 취한 것은 재발 방지로는 이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비판적으로 논평했다.[219][220]
예전에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장본과의 대립이 화제가 된[221] 에가와 사요코도 트위터를 업데이트하고 "가볍네. 프로그램으로서는, 그 장본 씨에게 겨우 '반성'이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잊어주세요, 라는 것이겠죠"라고 프로그램의 태도를 비판했다.[222][223] 에가와는 14일에도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이 분의 폭언과 파워 해러스먼트를 용인하는 프로그램 제작을 하고, 스튜디오 내에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상황을 만들어 온 것은 방송국이기 때문에, 사회자(만)의 책임으로는 할 수 없다"라고 하여, 사회자 세키구치의 책임을 과도하게 추궁한 도쿄 스포츠 기사[224]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25]
같은 날 후지 텔레비전 계열에서 방송된 『와이드 나 쇼』는 12일 문서에 의한 장본의 코멘트에 대해 다뤘다. 코멘테이터 마쓰모토 히토시는 "이것이 용서된다면 무엇이든 말해도 좋다는 것이다. 혹평, 무엇이든 말해도, 그것 때문에 꾸중을 들으면, 그것은 사실은 정반대의 의미로 말하고 있다. 말이 부족했다, 죄송하다, 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만능의 말이다"라고 말했다.[226][227]
6. 2. 폭행 사건
1964년 3월 26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 9회초, 장훈은 3루와 본루 사이에서 견제구에 걸려 포수 야마시타 켄(山下健)에게 몸을 날렸다.[138] 이에 아다치 미츠히로(足立光宏)가 "심하지 않은가"라고 말하자, 장훈은 격분하여 아다치를 몇 차례 밀쳤다. 대릴 스펜서(ダリル・スペンサー)가 "노 푸시(No push)"라고 말하자, 장훈은 이와시타 코이치(岩下光一)에게서 배트를 빼앗아 스펜서를 때리려고 했다. 도에이 선수들이 말려 장훈은 일단 벤치로 돌아갔지만, 다시 배트를 들고 스펜서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139] 이후 감독 미즈하라 시게루(水原茂)는 장훈에게 "배트를 쓰지 말고, 맨손으로 가라"고 말했는데, 장훈은 이를 "야구 선수의 생업 도구인 배트를 무기로 삼지 말라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회고했다.[139]1976년 4월 16일,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 후, 장훈은 히로시마 팬들에게 폭행당했다는 오해를 받아 경찰 조사를 받았다.[140][141] 경기 중 판정에 불만을 품은 히로시마 팬 500명이 거인 선수단 버스를 포위했고, 이 과정에서 "장훈에게 맞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장훈은 세・리그의 거인으로 이적한 후 처음으로 고향 히로시마를 방문한 경기였고, 어머니와 형도 초청했었다.[142] 그러나 장훈은 히로시마 팬들에게 적으로 여겨지며 민족 차별적인 야유를 받았다.[142] 9회초 2사 1, 2루 상황에서 야마모토 코지(山本功児)의 안타 때 2루 주자 도이 마사조(土井正三)가 홈에서 아웃되면서 경기가 종료되었다. 미묘한 판정에 거인 선수단이 심판에게 항의했고, 이에 격분한 히로시마 팬들이 난입하여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 감독을 공격하려 했다. 장훈과 하라다 하루아키(原田治明), 쿠로에 토오루(黒江透修) 코치 등이 이를 저지했지만, 히로시마 팬들은 "장훈 사과해라!"를 외치며 거인팀 버스를 에워쌌다.[142] 장훈이 라이벌 거인으로 이적한 것에 대한 불만과 히로시마의 부진이 겹쳐 장훈이 표적이 되었다. 장훈이 버스에 오르는 순간 한 팬이 장훈을 공격했고, 장훈이 손으로 밀쳤을 때 후배 선수가 배트로 그 팬의 머리를 쳐 피가 났다. 주변 팬들은 "장훈이 했다"고 소란을 피웠다.[142] 장훈은 상해 혐의로 조사를 받았지만, 자신을 감싸준 선수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142] 나중에 츠치다 마코토(槌田誠)가 팬의 머리를 맞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발견되어 장훈의 혐의는 풀렸다.[143] 하지만 장훈은 민단 간부가 "했다면, 수갑을 채워 감옥으로 데려가라"고 발언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43] 프로야구 선수회는 이 사건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마츠바라 마코토(松原誠) 선수회 회장은 "히로시마 구장에 가면 돌과 병을 던지고, 침을 뱉는다. 선수회로서는 더 이상 히로시마 구장에서의 경기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143] 카시와기 토시오(柏木敏夫) 심판도 "히로시마에서는 매년 이런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 구장의 경비는 전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143]
1974년 5월, 장훈은 롯데 오리온스의 시로우치 쿠니오(城之内邦雄)를 발로 찼다는 소동을 일으켰다.[144] 5월 1일 경기에서 롯데 벤치의 야유가 시로우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 장훈은 5월 3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연습 중인 시로우치에게 "추한 야유를 하지 마라"고 주의했다.[144] 그러나 시로우치가 "나는 야유 전문가다"라고 대답하자, 장훈은 스파이크로 시로우치의 허벅지를 찼다. 시로우치는 전치 5일의 가벼운 상처를 입었고, 장훈이 지적한 야유는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킨다 마사이치(金田正一) 감독도 "스포츠맨으로서 있을 수 없는 행위"라고 비난했다.[144] 장훈은 "야유가 아무리 추해도, 거기에 손을 댄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반성하고 있다. 죄송했습니다"라고 사과했다.[144] 4일, 장훈은 퍼시픽 리그 회장으로부터 1만 엔의 징계금을 통보받았다.[145]
1965년 7월 9일, 장훈은 상해죄로 현행범 체포되었다.[146] 도쿄도 미나토구에서 운전 중 택시와 시비가 붙어 택시 운전사와 중재하던 2명에게 폭행을 가해 1주일간의 부상을 입혔다.[146] 장훈은 상대방의 모자를 잡아당겼을 뿐이라고 주장했다.[146] 이 해, 장훈은 올스타 게임을 사퇴했다.[146]
1983년 7월 22일, 일본프로야구 명구회 총회에서 장훈은 호리우치 쓰네오(堀内恒夫)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147] 기념촬영 전 호리우치가 사라졌고, 장훈은 호리우치가 선배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않는다고 충고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호리우치는 와이셔츠가 찢어지고 얼굴을 한 대 맞았다고 주장하며, 명구회에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귀가했다고 밝혔다.[147]
7. 평가와 영향
장훈은 NPB에서 유일하게 '''통산 3000안타'''를 달성한 선수[9]이자, NPB 통산 안타 기록 보유자(3085개)이다. NPB에서 유일하게 '''500홈런 300도루'''를 달성했으며, 역대 최다인 '''16회 시즌 타율 3할''' 기록과 역대 최장인 '''9년 연속 타율 3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최다 타격왕 7회, 최고 출루율(현행 최고 출루율 기준) 9회를 획득했고, 맹타상 최다 기록도 가지고 있다.[10]
애칭은 「'''ハリさん'''(한자 표기: '''張さん''')」[11], 「'''ハリ'''」, 「'''ハリやん'''」, 「'''해리'''」이다.
프로 동기이자 동갑내기이며, 일본 이외의 국가 출신으로 거인 시절 클린업을 함께 했던 오 사다하루와는 절친한 사이이다. 장훈은 오 사다하루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가 감독으로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우승으로 이끌었을 때 "지금까지 왕정치(ワンちゃん)를 바보 취급했던 놈들은 모두 중이 되어 사과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1979년 롯데로 방출될 뻔했으나, 오 사다하루가 정력 헌(正力亨)에게 간청하여 거인에서 3000안타를 달성할 수 있었다. 장훈은 이에 감격하여 오 사다하루에게 절대 복종을 맹세했다고 한다. MLB과 기네스북에 오 사다하루의 868홈런 기록을 세계 기록으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1975년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을 이끌고 한국 원정 경기를 추진, 한국 야구 팬들에게 프로야구의 진수를 선보였다.[165][166] 1982년 KBO 리그 설립 당시에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의 한국 진출을 돕는 등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했다.[168] 한국 야구계에 진출한 재일 한국인들이 병역 문제로 차별받는 것에 대해 "같은 한국인인데 한국말을 모른다고 누가 말했는가? 일본에서 태어나 교육받아서 배울 기회가 어디에 있는가?"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169]
2018년 니혼 대학 아메리칸풋볼부의 악질 태클 문제에 대해 "이 나라(일본), 일본인이 할 짓이 아닙니다"라며 비판했다.[170]
2023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히로시마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방문한 것에 대해 "두 분께 감사할 따름입니다"라며 높이 평가했다.[171] 또한, 문재인 정부의 반일 정책에 대해서는 "부끄럽습니다"라고 비판하며, 한국이 일본과 동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72]
7. 1. 긍정적 평가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하자, 그는 KBO 총재 특별 보좌관을 2005년까지 역임했다.[275] 1980년에는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공로로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체육 훈장 맹호장을 수여받았고,[275] 200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275] 이는 대한민국과 일본의 스포츠계 및 재일 한국인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무궁화장은 일본의 훈장에 해당하며, 일본에서 활동한 스포츠 선수로서 대한민국의 문화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송재박은 그의 소개로 KBO 리그에 입문했으며, 현역 은퇴 후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199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99번째로 헌액되었고, NPB는 올스타전 기간 중 헌액식을 성대하게 치러 주었다.[116]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오 사다하루는 장훈보다 은퇴가 1년 빨랐지만, 명예의 전당 헌액은 더 늦었다.
그는 유년 시절 큰 화상을 입어 오른손에 후유증이 있었지만, 프로 선수로 활동하는 동안 이를 숨겼다. 그러나 NHK 해설자였던 가와카미 테쓰지에게만 은퇴 후 오른손을 보여주었고, 가와카미는 "이런 손으로…"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16]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였던 그는 오랫동안 피폭 사실을 숨겼으나, 2006년 TV 아사히 계열 ‘테츠코의 방’에 출연하여 피폭 경험을 이야기한 것을 계기로, 전쟁과 원폭 피해 경험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117]
2024년, 일본 원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被団協)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세계적으로 전쟁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인류를 위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119][120]
프로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오 사다하루의 실력을 인정하며, 그가 감독으로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우승으로 이끌었을 때 "지금까지 왕정치(ワンちゃん)를 바보 취급했던 놈들은 모두 중이 되어 사과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에이 플라이어스 시절 오스기 가쓰오와 클린업을 함께하며 그를 각별히 아꼈다. 장훈은 대스기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녀석은 3관왕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단언했으며, 대스기 사후에는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회상했다.
주니치 드래건스의 다이호 야스아키에게 한 발 타법을 권유하여 그가 1994년 홈런왕과 타점왕 2관왕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154][155]
1975년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을 이끌고 한국 원정 경기를 추진하여 한국 야구 팬들에게 프로야구의 진수를 선보였다.[165][166]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에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의 한국 진출을 돕는 등 한국 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68] 나가시마 시게오는 "나는 장훈이 한국 프로야구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대해 묵묵히 박수를 보냈다"고 언급했다.[168]
2023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히로시마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방문한 것에 대해 "두 분께 감사할 따름입니다"라며 높이 평가했다.[171] 또한, 문재인 정부의 반일 정책에 대해서는 "부끄럽습니다"라고 비판하며, 한국이 일본과 동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72]
7. 2. 부정적 평가
장훈은 TBS 계열 프로그램 '선데이 모닝'의 스포츠 코너 '주간 고견번'에 고정 출연하며, 논란이 되는 발언으로 자주 비판을 받았다.[173] 특히, 근성론을 중시하는 발언과 특정 선수나 팀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근성론 관련 발언: 오타니 쇼헤이가 팔꿈치 부상을 당했을 때 "달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여 논란이 되었다.[175] 다르빗슈 유는 장훈의 발언에 대해 "일본 야구계의 성장을 막아온 원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178]
- 노무라 카츠야와의 관계: 노무라 카츠야는 장훈이 선수 시절 타격에만 집중하고 수비는 소홀히 했다며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179]
- 에가와 사요코와의 대립: 방송 중 장훈의 발언에 이의를 제기한 에가와 사요코는 이후 프로그램 출연이 중단되었다.[184]
- 미우라 카즈요시에 대한 은퇴 권고: J2리그에서 뛰는 미우라 카즈요시에게 "이제 그만두세요"라고 은퇴를 권고하여 비판을 받았다.[189]
- 아베 신조 칭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당시 아베 신조 총리를 칭찬하는 발언을 했다.[193]
- 미즈타니 준의 가츠포즈 비판: 리우 올림픽 탁구 경기에서 승리 후 가츠포즈를 한 미즈타니 준에게 "예의가 없다"며 비판했다.[196]
- 추오 대학 하코네 역전 예선 탈락 비판: 추오 대학의 하코네 역전 예선 탈락에 대해 "내분이 있는 것 같다"고 발언하여 대학 측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198]
- 우라와 레즈 선수 태도 비판: AFC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해 우라와 레즈의 시간 끌기 작전을 비판하며 한국 선수들의 입장을 옹호했다.[203]
- 고교 야구 등판 회피 비판: 고교 야구 이와테 대회 결승전에서 오후나토 고등학교의 사사키 로키 투수를 등판시키지 않은 감독을 비판했다.[207]
- 여자 복싱 조롱 발언: 도쿄 올림픽 여자 복싱 금메달리스트 이리에 세나에 대해 "시집가기 전의 아가씨가 얼굴을 때린다"는 발언으로 일본 복싱 연맹의 항의를 받았다.[208]
- 웨이트 트레이닝 부정적 입장: 오타니 쇼헤이와 이토이 요시오 등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선수들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228],[230]
- MLB 관련 발언: MLB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면서도,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도전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231],[232]
8. 수상 및 기록
구분 | 횟수 및 달성 내용 | 비고 |
---|---|---|
수위 타자 | 7회 (1961년, 1967년 ~ 1970년, 1972년, 1974년)[276] | 이치로와 함께 최다 타이 기록, 4년 연속은 역대 2위 |
최고 출루율 | 9회 (1962년, 1964년, 1967년 ~ 1970년, 1972년 ~ 1974년)[277] | 퍼시픽리그 최다 기록, 4년 연속은 야나기타 유키와 공동으로 퍼시픽리그 최장 타이 기록 (타이틀 제정은 1962년) |
최다 안타 | 3회 (1970년, 1972년, 1976년) | 당시 연맹 표창 없음 |
최우수 선수(MVP) | 1회 (1962년) | |
신인왕 | 1959년 | |
베스트 나인 | 16회 (1960년 ~ 1970년, 1972년 ~ 1974년, 1976년, 1977년) | |
야구 명예의 전당 | 1990년 (선수 부문) | |
월간 MVP | 1회 (1976년 6월) | |
일본 시리즈 기술상 | 1회 (1962년) | |
일본 시리즈 타격상 | 1회 (1977년) | |
올스타전 MVP | 3회 (1960년 3차전, 1962년 2차전, 1974년 3차전) | |
통산 3085안타 | NPB 기록 | |
통산 500홈런 300도루 | 역대 유일 | |
통산 3할 300홈런 300도루 | NPB 역대 유일, MLB에서는 윌리 메이스만 달성 | |
시즌 타율 .350 이상을 양대 리그에서 기록 | (퍼시픽 리그: 1970년, 1972년, 센트럴 리그: 1976년) | 역대 유일 |
시즌 타율 3할 이상 | 16회 (1960년 ~ 1962년, 1964년, 1966년 ~ 1974년, 1976년 ~ 1978년) | NPB 기록 |
9년 연속 시즌 타율 3할 이상 | (1966년 ~ 1974년) | NPB 기록 |
시즌 타율 .330 이상 | 11회 (1961년, 1962년, 1966년 ~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7년) | NPB 기록 |
시즌 150안타 이상 | 9회 (1961년, 1962년, 1964년, 1969년 ~ 1972년, 1976년, 1977년) | 역대 3위 타이 |
시즌 100안타 이상 | 20회 (1959년 ~ 1978년) | 역대 2위 |
시즌 20홈런 이상 | 16회 (1961년 ~ 1973년, 1976년 ~ 1978년) | 역대 3위 타이 |
타격 베스트 텐 입성 | 17회 (1960년 ~ 1974년, 1976년, 1977년) | NPB 타이 기록 |
15년 연속 타격 베스트 텐 입성 | (1960년 ~ 1974년) | 퍼시픽 리그 기록 |
20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 | (1959년 ~ 1978년)[278] | 20년 이상 연속으로 시즌 100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오 사다하루와 장훈뿐이며,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를 합치면 스즈키 이치로도 포함. 입단 1년차부터라면 장훈만 해당. |
20년 연속 시즌 2자릿수 홈런 | (1959년 ~ 1978년) | 역대 4위 타이 |
13년 연속 시즌 20홈런 이상 | (1961년 ~ 1973년) | 역대 3위 타이 |
16년 연속 시즌 2자릿수 도루 | (1959년 ~ 1974년) | |
9타수 연속 안타 |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 | |
30경기 연속 안타 | (1976년 5월 13일 ~ 6월 20일) | |
13타석 연속 출루 |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 | |
1이닝 2이루타 | (1961년 5월 6일) | NPB 타이 기록 |
시즌 3할 20홈런 20도루 | 3회 (1962년, 1964년, 1969년) | 마쓰이 가즈오, 야마다 데쓰토와 함께 NPB 최다 타이 |
시즌 30홈런 40도루 | (1963년) | 다른 기록자는 아키야마 고지, 이구치 다다히토만 해당 |
양대 리그에서 최다 장타, 최다 득점 | (퍼시픽 리그: 1961년, 1972년, 센트럴 리그: 1976년) | 다른 기록자는 오치아이 히로미쓰만 해당 |
리그 최다 볼넷 | 4회 | 후쿠모토 유타카에 이어 퍼시픽 리그 2위 타이 |
사이클링 히트 | 1961년 5월 7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7차전(고마자와 야구장) | 역대 19번째 |
통산 맹타상 | 251회 | 일본 기록 (일미 통산에서는 이치로가 상회) |
통산 1676타점 | 타점왕을 획득하지 않은 선수 중 역대 최다 | |
통산 1523득점 |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하지 않은 선수 중 역대 최다 | |
통산 72루타 | 리그 최다 3루타를 기록하지 않은 선수 중 역대 최다 | |
통산 타율 3할, 3000안타 이상, 500홈런, 300도루 | 역대 유일 (세계적으로는 윌리 메이스와 장훈 2명뿐) | |
프로 첫 희생번트 | 7669타석째 | 역대 최후 |
올스타 게임 출장 | 18회 (1960년 ~ 1978년) | 1965년에도 선출되었으나, 전술한 문제로 출전을 사퇴함 |
일본 시리즈 통산 타율 | .370 (73타수 27안타) | 7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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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狂気のさた・・・張本 城之内に暴言・キック
日刊スポーツ
1974-05-04
[145]
뉴스
張本に1万円の制裁金
毎日新聞
1974-05-04
[146]
서적
男気万字固め
[147]
간행물
野次馬最前線 張本が堀内を『生意気だ』とぶん殴る!! 野球は格闘技と改めて教えた『名球会』
朝日新聞出版
1983-08-19
[148]
간행물
張本勲の喝!!
2021-01-18
[149]
서적
別冊宝島 1339 プロ野球無頼派選手読本
[150]
간행물
時代の証言者 最多安打 張本勲
2009-02-12
[151]
서적
別冊宝島 珠玉の好敵手
[152]
서적
大杉勝男のバット人生
[153]
간행물
張本勲の喝!!
2021-11-15
[154]
논문
編集長が行く vol.4 大豊追悼編
中日新聞社
2015-02-21
[155]
뉴스
大豊泰昭・八転び七起き
東京スポーツ
2009-01-14
[156]
웹사이트
張本氏、清原「ぶんなぐってやりたい」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16-02-07
[157]
뉴스
張本勲さん、「本当の日本人の男」と認める昭和のスーパースター明かす「ケンカは強いし、背は高いし」
https://hochi.news/a[...]
スポーツ報知
2024-08-27
[158]
웹사이트
在日二世の記憶 001 張本勲
http://shinsho.shuei[...]
集英社新書
[159]
웹사이트
韓国プロ創設に尽力 お互い理解しなきゃ 招待なく「恩も義理も忘れて」と表彰断る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160]
간행물
張本勲の我が道
2008-11-23
[161]
뉴스
張本勲さん、「弟のようにかわいがってくれた」レジェンド明かすも「怖かったですよ。あんな短気な人はいないよ」
https://hochi.news/a[...]
スポーツ報知
2024-08-27
[162]
서적
力道山がいた
朝日新聞社
2000-03
[163]
서적
男気万字固め
[164]
웹사이트
일본 최대 노점상 야쿠자 極東會 지휘하는 在日교포 曺圭化 회장
http://monthly.chosu[...]
2011-09-18
[165]
뉴스
スポーツ短信 ☆訪韓のロッテ勝つ
朝日新聞
1975-10-25
[166]
뉴스
韓国系選抜軍、ふるさと遠征 張本監督さっそく人選 23日に出発ノンプロ選抜と2試合
産業経済新聞社
1975-10-08
[167]
서적
日本プロ野球70年史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4-12-22
[168]
간행물
張本勲がゆく番外篇 聞きにくいことばかり聞いてみた 長嶋茂雄の『わが胸中』 人生はトータル。一年二年がなんだ!
文藝春秋
1982-02-11
[169]
서적
諸士乱想
[170]
웹사이트
張本勲氏、日大悪質タックルに「大和民族がやることじゃない。男らしくない」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18-05-20
[171]
웹사이트
「原爆で姉を亡くした…韓日首脳の慰霊碑訪問決断に感謝」 被爆者で日本球界のレジェンド、張本勲さんインタビュー(上)
https://www.chosunon[...]
2023-05-13
[172]
웹사이트
「私の祖国だから言える…韓国は日本に『謝罪しろ、カネを出せ』といつまで言うのか」 被爆者で日本球界のレジェンド、張本勲さんインタビュー(下)
https://www.chosunon[...]
2023-05-18
[173]
웹사이트
張本勲「批判殺到でもTVから干されない」必然
https://toyokeizai.n[...]
2019-09-15
[174]
뉴스
熱視線 張本さんの「喝!」
読売新聞
2009-02-25
[175]
웹사이트
張本勲氏が強攻に主張する「走り込み至上主義」 野球選手に必要だと思うか聞いてみると…
https://sirabee.com/[...]
2019-04-11
[176]
뉴스
張本勲氏、現役時代は走り込みが「大嫌い!!」これも野球でメシを食っていくため…
https://www.chunichi[...]
中日スポーツ・東京中日スポーツ
2020-03-29
[177]
뉴스
ダルビッシュ、佐々木登板回避で張本氏意見に“喝”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1-08-16
[178]
웹사이트
ダル 張本氏とネット場外舌戦「日本球界の成長止めた原因」インタビュー記事に反論
https://www.daily.co[...]
2019-08-03
[179]
웹사이트
御意見番の舌戦!野村克也VS張本勲 プロ野球「猛毒トーク」バチバチ対決
http://www.excite.co[...]
[180]
웹사이트
ノムさん、巨人・阿部の走塁に「張本になっちゃったな」
https://baseballking[...]
BASEBALL KING
2017-04-17
[181]
웹사이트
ノムさん「大反対」大谷の二刀流に喝!
https://www.nikkansp[...]
2013-06-09
[182]
웹사이트
張本氏、ノムさんへのバット報復を告白「あんまりささやくんで」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16-07-31
[183]
웹사이트
張本勲氏「令和の怪物って…野球界は誰も認めてない」先行報道に苦言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0-02-16
[184]
트윗
2020-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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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張本氏と衝突? 江川紹子氏が出演見合わせ TBS「サンデーモーニング」
https://web.archive.[...]
産経新聞
2010-06-18
[186]
트윗
2020-02-22
[187]
뉴스
デイリースポーツ
2010-08-02
[188]
뉴스
張本vs江川「サンデーモーニング降板騒動」
https://web.archive.[...]
東スポWEB
2010-05-19
[189]
뉴스
張本氏がカズに「もうお辞めなさい」発言 ネットで炎上
https://www.sanspo.c[...]
サンケイスポーツ
2015-04-12
[190]
뉴스
張本氏がカズに“引退勧告” ネットで批判が続出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5-04-12
[191]
뉴스
カズ 張本氏の勧告に「光栄です」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15-04-14
[192]
뉴스
カズ、張本氏との食事「ぜひ」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15-04-19
[193]
뉴스
張本勲氏が番組で安倍晋三首相を称賛するも関口宏はコメントせず
https://news.livedoo[...]
livedoor news
201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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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ttp://web-wac.co.jp[...]
ワック・マガジン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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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윗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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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張本氏 卓球・水谷に喝「あんなガッツポーズはダメ」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16-08-14
[197]
웹사이트
水谷隼、張本氏の喝に「戦場なので」 ガッツポーズに理解求める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16-08-16
[198]
뉴스
張本氏、箱根連続出場途切れた中大に“喝”「話になりません」
https://web.archive.[...]
スポーツ報知
2016-10-16
[199]
뉴스
張本氏「内紛あるらしい」発言に中大陸上部部長が訂正と謝罪求める
https://web.archive.[...]
スポーツ報知
2016-10-16
[200]
뉴스
伊メディアもACL浦和戦の乱闘騒ぎ糾弾 「アンチ・スポーツ的な韓国チームの振る舞い」
http://www.football-[...]
フットボールゾーン
2017-06-01
[201]
뉴스
済州の蛮行、仏メディアも特記事項として批判 「言い訳の余地もない無様なものだった」
http://www.football-[...]
フットボールゾーン
2017-06-03
[202]
뉴스
「正気を失った」 ACL浦和戦で韓国クラブが晒した醜態、英メディアが一刀両断
http://www.football-[...]
フットボールゾーン
2017-06-01
[203]
뉴스
張本氏の“浦和批判”を韓国メディアが紹介! 「日本の球界レジェンドもTV番組で厳しく叱りつけた」
https://www.theworld[...]
ザ・ワールド
2017-06-07
[204]
뉴스
ACLでの浦和と済州の乱闘騒動に、元プロ野球選手の張本氏が“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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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ットボールゾーン
2017-06-07
[205]
뉴스
サンデーモーニングで張本勲氏「(浦和の)態度が良くない」 両チームに「喝」出すも、済州選手の暴行には触れず…ネットで議論沸騰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7-06-04
[206]
뉴스
「浦和に厳しい忠告を与えた」 韓国メディアが張本氏の“済州擁護”発言を紹介
https://www.football[...]
[207]
뉴스
大船渡・佐々木“登板回避”問題で場外乱闘! 張本氏「ケガするのは選手の宿命」 ダル「このコーナー消して」
https://www.zakzak.c[...]
zakzak
2019-07-29
[208]
웹사이트
張本勲氏、女子ボクシング初の金メダルを獲得した入江聖奈に「女性でも殴り合いが好きな人がいるんだね」
https://hochi.news/a[...]
2021-08-08
[209]
웹사이트
日本ボクシング連盟が張本氏の「サンデーモーニング」に抗議文 発言巡り
https://www.nikkansp[...]
2021-08-11
[210]
웹사이트
張本勲、女子ボクシングを「こんな競技」呼ばわり 元プロら怒り「お粗末で耐えられない発言」
https://www.j-cast.c[...]
2021-08-11
[211]
웹사이트
ボクシング連盟の抗議文にTBS「真摯に対応させていただきたい」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21-08-11
[212]
웹사이트
張本勲氏の発言は「女性とボクシング競技を蔑視」。日本ボクシング連盟が抗議(全文)
https://www.huffingt[...]
2021-08-11
[213]
뉴스
これがTBS「サンモニ」と張本氏の謝罪文の全文!…五輪女子ボクシング“蔑視発言”を巡る大御所の反省談話にネットはさらに炎上
https://news.yahoo.c[...]
2021-08-13
[214]
웹사이트
「サンモニ」張本勲氏発言の謝罪文を唐橋ユミアナ読み上げ、SNS上で同情と疑問
https://hochi.news/a[...]
2021-08-15
[215]
웹사이트
「唐橋さん」がトレンド入り 「サンデーモーニング」でおわびコメント - 女子アナ
https://www.nikkansp[...]
2021-08-15
[216]
웹사이트
張本勲氏 「反省しています」 女子ボクシング発言「サンモニ」で謝罪
https://www.daily.co[...]
2021-08-15
[217]
웹사이트
張本勲氏「今回は言い方を間違えて反省」女子ボクシング侮辱発言で謝罪 - 芸能
https://www.nikkansp[...]
2021-08-14
[218]
웹사이트
「サンデーモーニング」の張本勲氏、女子ボクシング蔑視発言に“反省”の一言だけ。視聴者は内容に疑問【全文】
https://www.huffingt[...]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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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2021年8月15日10:09の投稿
https://twitter.com/[...]
[220]
웹사이트
「再発防止につながらない」サンモニ出演の安田菜津紀さんが“謝罪”に異論 - 芸能
https://www.nikkansp[...]
2021-08-15
[221]
웹사이트
張本氏の「喝」で…江川紹子さん“降板” - 芸能ニュース
https://www.nikkansp[...]
201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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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2021年8月15日9:27の投稿
https://twitter.com/[...]
[223]
웹사이트
張本勲氏 ナマ謝罪も批判拡大 それでも「サンモニ」が反省シーン5秒に縮めたワケ
https://www.tokyo-sp[...]
東京スポーツ
2021-08-16
[224]
웹사이트
張本勲氏“謝罪文”に「関口宏限界説」の隠しメッセージ サンモニ終了の序章か
https://www.tokyo-sp[...]
2021-08-14
[225]
웹사이트
2021年8月14日14:11の投稿
https://twitter.com/[...]
[226]
웹사이트
松本人志 張本氏の女子ボクシング謝罪文に「これが許されるなら何言ってもいい」
https://www.daily.co[...]
2021-08-15
[227]
웹사이트
松本人志、張本勲氏の謝罪コメントに疑問「これが許されるなら何を言ってもいい」
https://hochi.news/a[...]
2021-08-15
[228]
웹사이트
張本勲氏 “筋肉隆々”の大谷翔平に「プロレスじゃない」、新井貴浩氏は「選手によって…」
https://www.sponichi[...]
2020-02-23
[229]
웹사이트
バルクアップした大谷は「まるでプロレスラー」張本氏の“喝”に新井貴浩氏は微妙な表情で無言貫く…
https://www.chunichi[...]
2020-02-23
[230]
웹사이트
張本氏、糸井の上半身ムキムキ化に否定的「打撃は下半身。筋肉は良くない」
https://www.daily.co[...]
2018-01-21
[231]
웹사이트
上原浩治氏、MLB嫌いの張本勲氏に「おおらかに見て」 回答は「ダメ」
https://sirabee.com/[...]
2019-12-29
[232]
간행물
張本勲の喝!!
2023-11-13
[233]
웹사이트
張本勲が終生の友、江藤慎一を語る。「慎ちゃんも俺も白いメシを腹いっぱい食べたいと思ってプロを目指した」
https://sportiva.shu[...]
集英社
2022-03-31
[234]
웹사이트
張本勲氏 東映つながりで親交 「広島弁指導させてもらった」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新聞社
2014-12-02
[235]
간행물
必殺の白刃はバットに通ず 張本の扇流剣法
毎日新聞出版
1981-12-06
[236]
웹사이트
【データ】巨人中田翔プロ通算6245打席目で初の犠打 6000打席以上は73年張本勲以来2人目
https://www.nikkansp[...]
2022-05-13
[237]
간행물
張本勲の喝!!
2021-04-16
[238]
간행물
CF撮影余話(サントリー)
中小企業経営管理センター事業部
199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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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일본의 야구 영웅 재일동포 장훈 (KBS 20080828 방송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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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일본을 이긴 한국인
평단문화사
200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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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일본을 이긴 한국인
[242]
문서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장훈과 노닌 와타루(전 롯데 오리온스 감독) 2명뿐이다.
[243]
문서
일본을 이긴 한국인
[244]
문서
일본을 이긴 한국인
[245]
문서
일본을 이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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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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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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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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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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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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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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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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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일본을 이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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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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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일본을 이긴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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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긴 한국인
[274]
뉴스
재일교포 張勳(장훈) 은퇴선언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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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張勳(장훈) 선수에 猛虎章(맹호장)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0-07-25
[276]
문서
[277]
문서
[278]
문서
[279]
문서
[280]
문서
[281]
문서
최다 득점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 선수중에서는 사상 최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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