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식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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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식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자는 중공이며, 영천 진씨의 시조이자 청류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태구현의 현령을 지내 '진태구'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학문에 힘쓰고 정의로운 인물로 백성들에게 존경받았으나, 환관들의 권력 남용에 반대하여 당고의 금으로 인해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둔했다. 하진의 초빙을 거절하고 186년에 사망했으며,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의 일화는 '양상군자' 고사로 유명하며, 그의 후손으로는 진나라의 초대 황제 진패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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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식 (후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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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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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진(陳) |
이름 | 식(寔) |
자 | 중공(仲弓) |
시호 | 문범선생(文範先生) |
생몰 | |
출생 | 104년 |
사망 | 186년 (82세) |
관직 | |
소속 | 후한 |
임관 | 공조 |
최종 관직 | 태구장(太丘長)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진방(陳放) |
아들 | 진기(陳紀) 진충(陳忠) |
기타 | |
시대 | 후한 |
출신지 | 영천군(潁川郡) 허현(許縣) |
2. 생애
진식(陳寔)은 진기의 아버지이자 진군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태구현(太丘縣)의 현령(長)이었기에 '''진태구'''(陳太丘)로도 불렸다. 그는 영천 진씨(陳)의 시조이자 영천 지역 청류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썼다. 그는 정의롭고, 편견이 없으며, 관대했기에 백성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환관들의 권력 남용에 반대했기에, 당고의 금으로 인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자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민사 소송이 발생할 때마다 지역 주민들은 그를 초청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했다. 진식은 자문을 구할 때마다 합리적인 결과를 제시했고, 그의 판결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처벌을 더 받는 한이 있더라도, 진 선생에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3]
160년대,[4] 십 대였던 허소가 영천군(潁川郡; 현재의 허난성 남부 및 중부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는 그 지역의 많은 유명 인사들을 찾아 교류했지만, 진식만은 방문하지 않았다. 이후 진번의 부인이 사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허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질문에 허소는 "태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철저하기 어렵고, 중거(진번의 자)는 쉽게 타협하지 않는 진지한 인물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들을 방문하지 않은 이유입니다."라고 답했다.[5]
금고가 해제된 후, 하진은 사자를 보내 진식을 초빙했지만, 진식은 하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곧 사망했다.
그는 186년 9월에 사망했으며,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상복을 입은 사람만 수백 명에 달했다.[6] 그는 시호 '''문범선생'''(文范先生)이라는 시호를 받았다.[7]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진식(陳寔)은 진기의 아버지이자 진군의 할아버지로, 태구현(太丘縣)의 현령(長)을 지냈기에 '''진태구'''(陳太丘)로도 불렸다. 그는 영천 진씨(陳)의 시조이자 영천 지역 청류파의 핵심 인물이었다.[3]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썼다. 정의롭고 편견이 없으며 관대했기에 백성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3] 160년대, 십 대였던 허소는 영천군을 방문했을 때, 그 지역의 많은 유명 인사들을 찾아 교류했지만, 진식만은 방문하지 않았다. 이후 진번의 부인이 사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허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질문에 허소는 "태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철저하기 어렵고, 중거(진번의 자)는 쉽게 타협하지 않는 진지한 인물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들을 방문하지 않은 이유입니다."라고 답했다.[5]
환관들의 권력 남용에 반대했기에, 당고의 금으로 인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3] 민사 소송이 발생할 때마다 지역 주민들은 그를 초청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했다. 진식은 자문을 구할 때마다 합리적인 결과를 제시했고, 그의 판결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처벌을 더 받는 한이 있더라도, 진 선생에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3]
금고가 해제된 후, 하진은 사자를 보내 진식을 초빙했지만, 진식은 하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6]
2. 2. 당고의 금과 은둔 생활
진식(陳寔)은 진기의 아버지이자 진군의 할아버지로, 태구현(太丘縣)의 현령(長)을 지내 '''진태구'''(陳太丘)로도 불렸다. 영천 진씨(陳)의 시조이자 영천 지역 청류파의 핵심 인물이었다.[3]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써, 정의롭고 편견이 없으며 관대했기에 백성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3] 그러나 환관들의 권력 남용에 반대하여 당고의 금으로 인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3] 민사 소송이 발생할 때마다 지역 주민들은 그를 초청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했는데, 자문을 구할 때마다 합리적인 결과를 제시했고, 그의 판결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 "차라리 처벌을 더 받는 한이 있더라도, 진 선생에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3]
160년대,[4] 십 대였던 허소가 영천군(潁川郡; 현재의 허난성 남부 및 중부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 지역의 많은 유명 인사들을 찾아 교류했지만, 진식만은 방문하지 않았다. 진번의 부인이 사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허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질문에 허소는 "태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철저하기 어렵고, 중거(진번의 자)는 쉽게 타협하지 않는 진지한 인물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들을 방문하지 않은 이유입니다."라고 답했다.[5]
금고가 해제된 후, 하진은 사자를 보내 진식을 초빙했지만, 진식은 이를 거절하고 사망했다.[6] 186년 9월에 사망했으며,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상복을 입은 사람만 수백 명에 달했다.[6] 시호 '''문범선생'''(文范先生)이라는 시호를 받았다.[7]
2. 3. 금고 해제와 죽음
진식은 금고가 해제된 후, 하진이 사자를 보내 초빙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곧 사망했다.[4] 186년 9월에 사망했으며,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상복을 입은 사람만 수백 명에 달했다.[6] 그는 시호 '''문범선생'''(文范先生)이라는 시호를 받았다.[7]어릴적부터 책을 좋아하고 학문에 정진했던 진식은 정의롭고, 편견이 없으며, 관대했기에 백성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환관들의 권력 남용에 반대하여 당고의 금으로 인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3] 민사 소송이 발생할 때마다 지역 주민들은 그를 초청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했는데, 진식은 자문을 구할 때마다 합리적인 결과를 제시했고, 그의 판결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 "차라리 처벌을 더 받는 한이 있더라도, 진 선생에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3]
160년대, 십 대였던 허소가 영천군을 방문했을 때, 그는 그 지역의 많은 유명 인사들을 찾아 교류했지만, 진식만은 방문하지 않았다.[4][5] 이후 진번의 부인이 사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허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질문에 허소는 "태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철저하기 어렵고, 중거(진번의 자)는 쉽게 타협하지 않는 진지한 인물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들을 방문하지 않은 이유입니다."라고 답했다.[5]
3. 일화
어느 날, 진식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 도둑은 보 위에 숨어 있었는데, 진식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일족을 그 방에 모아 이렇게 말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악인도 있지만, 그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배우게 된 것뿐이다. 보 위에 있는 군자도 바로 그 중 한 명이다."
그러자, 도둑은 경악하여, 진식 앞에 나타나 엎드려 사죄했다. 이에 대해 진식은
"그대의 풍모를 보니 악인으로는 보이지 않소. 반성하고 선인이 되시오. 이번은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한 것이겠지요."
라고 말하며 비단을 그 도둑에게 내주었다. 이 일 이후로 진식의 마을에서는 도둑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양상군자(梁上君子)'란 도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세설신어』에는 진식에 관련된 일화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진식의 아들인 진기(원방)와 진심(계방) 형제의 아들인 진군과 진충이 각각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을 논했으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의견을 구하자, 진식은 "원방만한 형은 없고, 계방만한 아우도 없다"라고 말했다.
3. 1. 양상군자(梁上君子)
진식은 어느 날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도둑이 보 위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식은 일족을 모아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악인도 있지만, 그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배우게 된 것뿐이다. 보 위에 있는 군자도 바로 그 중 한 명이다."라고 말하였다.그러자 도둑은 놀라 진식 앞에 나타나 엎드려 사죄했고, 진식은 "그대의 풍모를 보니 악인으로는 보이지 않소. 반성하고 선인이 되시오. 이번은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한 것이겠지요."라며 비단을 주었다. 이 일 이후로 진식의 마을에서는 도둑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고사에서 '양상군자(梁上君子)'는 도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3. 2. 원방난형 계방난제(元方難兄 季方難弟)
진기(원방)와 진심(계방) 형제의 아들인 진군과 진충이 각각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을 논했으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의견을 구하자, 진식은 "원방만한 형은 없고, 계방만한 아우도 없다"라고 말했다. 이는 『세설신어』에 수록된 일화이다.4. 후손
진패선은 진나라의 초대 황제로 진씨를 시조로 한다. 불교 승려인 진회 또는 현장 또한 진씨의 후손이다.
5. 평가
6. 전기 자료
참조
[1]
서적
Inscription of Chen Taiqiu
186-09-16
[2]
서적
Houhanshu
[3]
서적
Houhanshu
[4]
문서
[5]
서적
Houhanshu
[6]
서적
Houhanshu
[7]
서적
Houhanshu
[8]
문서
채옹, 진 태구 비문
[9]
서적
후한서
[10]
서적
세설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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