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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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군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로, 구품관인법을 제정하고 조조, 조비, 조예 삼대에 걸쳐 중용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유비에게 발탁되었으나, 이후 조조에게 등용되어 순욱의 사위가 되었으며, 어사중승, 상서령, 사공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엄격하고 공정한 성품으로 평가받았으며, 법제 정비에 힘썼다. 220년에는 구품관인법을 제정하여 인재 등용의 기준을 마련했으며, 조비의 즉위를 도왔다. 조예 시대에도 중용되어 사공에 이르렀으며, 23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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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6년 사망 - 동소
동소는 후한 말부터 위나라 초까지 활동한 정치가이자 책사로서, 원소 휘하에서 활동하다 조조에게 천거된 후 헌제 천도, 관도대전, 오환 정벌 등 중요한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위나라 건국과 안정에 공헌했다. - 236년 사망 - 장소 (동오)
후한 말부터 오나라의 관료이자 학자인 장소는 손책과 손권을 섬기며 오나라 건국에 기여했고, 강직하고 직설적인 성품, 뛰어난 식견과 충성심으로 손권의 신임을 받았으며 은퇴 후에는 저술 활동을 했다. - 영천 진씨 - 지의
지의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승려이자 천태종의 개조로, 혜사의 문하에서 지관법문과 북방계 교리를 익히고 천태교리를 확립했으며, 사선정 수행 체계를 발전시키고 불교 교리를 체계화하여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영천 진씨 - 진기 (후한)
진기는 후한 말 영천군 허현 출신으로 아버지 진식의 영향으로 청류파로서 명성을 얻어 동탁 정권 하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해 평원국 상, 태복, 상서령, 대홍려 등을 역임한 인물이며, 그의 아들 진군은 조위에서 품관제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 조위의 상서령 - 설제
설제는 후한 말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 장막과 여포의 난 때 세 현을 지켜내고 태산태수를 역임했으며, 조비의 위나라 건국 후 관내후에 봉해지고 상서령에 이른 인물이다. - 조위의 상서령 - 배잠
배잠은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유표의 빈객으로 지내다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 대군 태수를 지내며 오환족을 안정시키는 등 치적을 쌓았고, 조비, 조예 시대를 거치며 요직을 역임, 상서령으로 인사 제도 개혁을 주도했으며 진수는 그를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인재"라고 평했다.
진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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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진군(陳羣) |
원어 이름 | 陳群 |
로마자 표기 | Chen Qun |
자(字) | 창원(長文) |
시호 | 정후(靖侯) |
신상 정보 | |
출생 | 생년 미상 |
출생지 | 허창, 허난 성 |
사망 | 237년 2월 7일 |
사망지 | 뤄양, 허난 성 |
가문 | |
가문 | 영천 진씨 |
아버지 | 진기 (원방) |
배우자 | 순욱의 딸 |
자녀 | 진태 진작 진탄 |
관직 정보 | |
관직 | 녹상서사(錄尚書事) |
임기 시작 | 227년 |
임기 종료 | 237년 2월 7일 |
군주 | 조예 |
관직 (이전) | ? - 226년 |
군주 (이전) | 조비 |
관직 | 사공 |
임기 시작 | 227년 1월 또는 2월 |
임기 종료 | 237년 2월 7일 |
군주 | 조예 |
이전 | 왕랑 |
이후 | 위진 |
관직 |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 |
임기 시작 | ? |
임기 종료 | 227년 1월 또는 2월 |
군주 | 조비 |
관직 | 상서령(尚書令) |
임기 시작 | 220년 |
임기 종료 | ? |
군주 | 조비 |
관직 | 상서복야(尚書僕射) |
임기 시작 | 220년 |
임기 종료 | ? |
군주 | 조비 |
작위 정보 | |
작위 | 영음후(潁陰侯) |
2. 생애
영천 진씨( 潁川郡|영천군zho ) 가문 출신으로, 현재의 허난성 허창시 일대가 본관이다. 할아버지 진식은 어린 진군을 보고 "이 아이는 우리 종족을 번성하게 할 것이다!"[3]라고 기대했으며, 아버지 진기의 친구이자 명사였던 공융과도 교류하며 명성을 얻었다.[4]
초기에는 예주에 주둔하던 유비에게 발탁되어 잠시 벼슬을 지냈다. 194년, 서주 자사 도겸이 사망하자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려 할 때, 원술과 여포의 위협을 이유로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결국 유비는 여포에게 서주를 잃었고, 진군은 아버지와 함께 서주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198년, 조조가 여포를 토벌하고 서주를 장악하자 조조에게 등용되었다. 이후 조조의 핵심 참모였던 순욱의 사위가 되는 등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강직하고 공정한 성품(근엄실직)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덕에 어긋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젊은 시절의 조비도 그를 존경하여 신하가 아닌 친구로 대우했다고 전해진다.
주로 내정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법제 정비에 힘썼다. 조조가 육형(肉刑) 부활을 논의했을 때, 부적절한 사형을 줄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종요와 함께 찬성했으나 왕랑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8] 220년에는 인재 등용의 공정성을 높이고 후한에서 위나라로의 전환 과정에서 관료 재배치를 효율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품관인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는 진군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220년, 조비가 위나라 문제(文帝)로 즉위하자 상서령(尙書令)에 임명되는 등 중용되었다. 이후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을 겸직했으며, 226년 조비가 임종할 때는 조진, 사마의와 함께 조예의 후사를 부탁받았다. 조예(명제) 즉위 후에도 중용되어 사공에 이르렀고, 록상서사로서 국정 운영에 계속 참여했다. 조예의 대규모 토목 공사에 대해서는 백성의 부담을 이유로 여러 차례 간언하기도 했다.
청룡 4년(236년) 12월에 사망했으며, 정후(靖侯)라는 시호를 받았다.[6] 아들 진태가 작위를 계승했다. 생전에 올린 상소의 초고를 대부분 없애버려 그 내용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훗날 『명신주의』(名臣奏議) 편찬 과정에서 그의 충정과 식견이 드러나 재평가받았다.[20] 정시 4년(243년), 조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9]
2. 1. 초기 생애 ( ~ 198년)
진군은 영천 진씨( 潁川郡|영천군zho ) 가문 출신으로, 현재의 허난성 허창시 일대가 본관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진식, 아버지 진기, 그리고 삼촌 진참(陳諶) 모두 후한 왕조의 중앙 정부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진군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진식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진식은 집안 어른들에게 "이 아이는 우리 종족을 번성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 성장하면서 아버지 진기의 절친한 친구이자 공자의 후손인 명사 공융과도 친분을 쌓았고, 공융이 진군의 재능을 인정하고 칭찬하면서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4] 같은 고향 출신인 신비, 두습, 조엄과 함께 명성을 떨쳐 "신진두조"라고 불리기도 했다.[7]흥평 원년(194년), 당시 명목상 예주 자사였던 유비에게 발탁되어 주(州)의 행정을 보좌하는 별가(別駕) 벼슬을 지냈다. 그해 서주 자사 도겸이 사망하자 유비는 서주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진군은 "남쪽에는 원술이 있고 서쪽에는 여포가 있어 서주를 노리고 있으니 위험합니다"라고 간언하며 반대했다. 유비는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주 자사직을 계승했지만,[5]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술과 교전하는 사이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고 말았다. 유비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전해진다.[5] 이후 진군은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착현(柘縣)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아버지 진기와 함께 서주로 피난하여 생활했다.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동 (198년 ~ 220년)
건안 3년(198년), 조조가 서주의 여포를 하비 전투에서 격파하고 서주를 장악했을 때, 여포의 군대에 있던 진군은 아버지 진기와 함께 조조에게 귀순했다[8]. 조조는 진군을 등용하여 사공 서조 연속으로 삼았다. 일설에는 조조의 핵심 참모였던 순욱이 추천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도 한다[9]. 이후 진군은 허창에서 중앙 정부의 관료로 활동하게 되었다.진군은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조조가 왕모와 주규라는 인물을 등용하려 하자 "도덕을 더럽히는 인물들"이라며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고 반납하며 반대했다. 조조는 처음에는 진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임용했으나, 결국 그들이 죄를 지어 처형당하자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진군에게 사과했다. 반대로 진군이 추천한 진교와 대건은 훗날 각각 위나라의 고위 관직에 오르거나 나라를 위해 순국하는 등 능력을 증명해, 사람들은 진군의 사람 보는 눈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진군은 동료인 곽가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도덕적 원칙에 어긋난다고 여겨 여러 차례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조는 곽가의 뛰어난 전략적 조언이 전투 승리에 결정적이었기에 그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진군은 소(蕭), 찬(酇), 장평(長平) 세 곳의 현령을 역임했으나[10], 아버지 진기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상을 치렀다[11]. 이후 사도연으로 복직하여 공적을 세웠고, 치서시어사와 참승상군사를 거쳤다. 건안 18년(213년) 조조가 위공(魏公)에 오르며 위나라가 번국으로 세워지자, 진군은 어사중승으로 승진했다. 이후 시중과 승상 동서조연을 겸임하기도 했다.
216년, 헌제에 의해 조조가 위왕으로 책봉된 후, 조조는 폐지되었던 육형(신체 절단형)의 부활을 논의하게 했다. 조조는 진군의 아버지 진기가 생전에 육형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가졌던 것을 알고 진군에게 의견을 물었다. 진군은 사형을 줄이는 방안으로 육형 부활에 찬성하면서, 사형보다는 가볍고 태형보다는 무거운 신체 절단형이 사법 집행에 있어 더 유연한 처벌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8]. 종요 역시 진군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왕랑을 비롯한 많은 관료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육형 부활은 결국 무산되었다. 같은 시기(216년~220년), 진군은 조조가 이미 한나라의 실질적인 통치자이므로 헌제로부터 황위를 넘겨받아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조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죽을 때까지 명목상 한나라의 신하로 남았다.
건안 22년(217년), 조비가 위나라의 태자로 책봉되자 진군은 사마의, 오질, 주삭과 함께 조비의 중요한 측근 그룹인 사우(四友) 중 한 명으로 불렸다[12]. 조비는 평소 진군의 높은 인품을 깊이 존경하여 그를 공자의 제자인 안회에 비유하며 칭찬했고, 단순한 신하가 아닌 친구처럼 예우했다.
건안 24년(219년), 위풍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익의 동생이 사건에 연루되어 유익 또한 처벌받을 위기에 놓였다. 이때 진군이 나서서 변호한 덕분에 유익은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진군은 이 일에 대해 "국가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개인적인 감정으로 도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공적인 자세를 보였다.
220년에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제정을 주도했다. 이 제도는 당시 관리 임용 과정에서 채용관이나 지방 세력가의 주관적인 판단이 크게 작용했던 문제를 개선하고, 인재 등용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또한, 후한 왕조가 끝나고 위나라가 세워지는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기존 후한의 관료들을 새로운 위나라 체제에 효과적으로 편입시키고 재배치하려는 현실적인 고려도 담겨 있었다.
2. 3. 위나라 건국 이후 (220년 ~ 237년)
연강 원년(220년) 정월,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문제)가 왕위에 오르자, 진군은 창무정후(昌武亭侯)에 봉해지고 상서로 임명되었다.[13] 얼마 후 조비가 후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고 황제가 되는 과정에도 관여했다. 이때 구품관인법을 건의하여 제정했는데, 이는 당시 임용 담당관이나 지방 호족의 자의성이 강했던 인재 등용 방식을 법률로 정비하여 공정성을 확보하고, 후한에서 위나라로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기존 관료들을 효과적으로 재배치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선양 당시 화흠과 함께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 조비의 눈 밖에 날 뻔했으나, 진군이 "한나라 신하로서의 의리가 표정에 나타난 것"이라고 변호하여 화흠은 오히려 존중받게 되었다.[14] 조비는 진군을 상서로 임명하고 문학(文學) 벼슬을 주었다.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조비가 변태후의 죽은 부모에게 작위를 추증하려 하자, 진군은 "여성에게 작위를 주는 것은 고대의 예법에 맞지 않다"며 반대했고, 조비는 이를 칭찬하며 명령을 철회했다.[15] 이 일은 후세 진수가 『삼국지』에서 "모든 왕조의 규범으로 삼아 후세에 전할 만하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모범적인 간언으로 여겨졌다. 진군은 상서복야, 시중을 거쳐 상서령으로 승진하고 영향후(潁鄕侯)가 되었다. 황초 4년(223년), 사마의와 함께 포훈을 어사중승으로 천거했으나, 강직했던 포훈은 여러 차례 조비와 대립했다. 이후 포훈이 유요의 보고를 묵살했다는 이유로 조비의 노여움을 사자 진군이 사면을 간청했지만, 조비는 이를 듣지 않고 황초 7년(226년)에 포훈을 처형했다.[16] 황초 5년(224년), 조비가 오나라의 손권을 치기 위해 광릉군으로 출정하자, 진군은 중령군(中領軍)을 겸임했으며, 돌아올 때는 가절(假節)이 되어 수군을 통솔했다. 허창으로 돌아온 후 황초 6년(225년)에는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 중호군(中護軍), 록상서사로 승진했다.
황초 7년(226년) 5월 16일, 조비가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진, 조휴, 사마의와 함께 진군을 불러 아들이자 태자인 조예의 후사를 부탁하는 유조를 남겼다. 조비가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조예(명제)가 직접 아버지의 상여를 전송하려 하자, 진군은 조진, 왕랑 등과 함께 날씨가 너무 덥다는 이유로 이를 만류했다.[17]
조예가 즉위하자 진군은 영향후(潁陽侯)로 봉작이 올랐고, 식읍 500호가 더해져 총 1,300호가 되었으며, 사마의 등과 함께 개부(開府, 독자적으로 막부를 열고 관리를 둘 수 있는 권한)를 허락받았다. 같은 해 12월에는 사공에 임명되었고,[6] 계속해서 록상서사의 업무도 수행했다. 조예가 정무를 보기 시작할 때, 진군은 파벌을 만들어 서로 다투는 신하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태화 4년(230년), 조진이 촉한을 정벌하려 하자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조진의 군대는 긴 장마로 인해 진군하지 못했고, 진군의 재차 간언에 따라 조예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태화 5년(231년), 명장 장합이 전사하자 조예가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는데, 진군이 이에 동조하자 신비는 군주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며 진군을 비판하기도 했다.[18]
청룡 연간(233년 ~ 237년)에는 조예가 궁궐 건설 등 대규모 토목 공사에 열중하자, 진군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백성의 부담과 재정 낭비를 지적하며 공사 규모를 줄일 것을 간언했고, 조예는 결국 일부 계획을 축소했다. 또한 조예의 어린 공주 중 한 명이 요절했을 때, 황제가 직접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고(최소 8세 이상이어야 함) 비용도 과다하다며 반대했지만, 조예는 이를 듣지 않았다.
진군은 청룡 4년(236년) 12월 24일에 사망했다. 시호는 정후(靖侯)이며, 아들 진태가 작위를 계승했다. 진태 역시 이후 조위에서 중요한 장수로 활약했다. 진군은 생전에 정치의 득실에 대해 여러 차례 비밀리에 상소를 올렸으나, 그 초고를 모두 없애버려 당시 사람들은 내용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오질 등 일부에게는 고위직에 있으면서 하는 일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이로 인해 조예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20] 그러나 진군 사후 정시 연간에 『명신주의』(名臣奏議)가 편찬되면서 그가 올렸던 상소 내용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그의 충정과 식견에 감탄했다. 정시 4년(243년) 7월, 위 황제 조방(제왕)은 조서를 내려 조조의 묘정에 공신 20인을 배향했는데, 진군도 그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19]
3. 평가
진군(陳羣)은 정책의 장단점을 판단할 때 개인적인 선호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생 명예와 정의를 중시했으며, 인물 평가에도 능하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당시에 인상 감정법을 널리 퍼뜨린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진군 자신은 이 방법이 전한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상인(相印)』, 『상홀경(相笏經)』 등의 서적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진군은 위탄에게 이를 전수했고, 이후 다른 인물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22]。
조조 밑에 있을 때, 진군은 참모인 곽가의 부도덕한 행위를 여러 차례 탄핵했다. 조조는 곽가의 재능을 아껴 그의 탄핵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진군의 성실함과 강직함 또한 존중했다[23]。
조예 시대에는 최림과 함께 기주 출신 인물들에 대해 평론하는 자리가 있었다. 이때 최림은 조조에게 처형당한 자신의 사촌 최염을 칭찬하며 기주 인물 중 으뜸으로 꼽았다. 그러나 진군은 최염에 대해 "몸을 보전할 지혜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에 최림은 "대장부에게 중요한 것은 명군을 만나는 것이니, 그대와 같은 사람은 존경할 가치가 없다"고 반박하며 진군을 비판했다[24]。
진군은 조정 내에서 개인적인 호불호에 따라 일을 처리하거나 도의에 어긋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며, 항상 명예와 도의를 중시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삼국지』의 편자인 진수는 위서 「환이진서위로전(桓二陳徐衛盧傳)」의 평에서 진군을 "명예와 덕의에 따라 행동하고, 고결한 인품과 높은 명성을 지녔다"고 칭찬했다. 『원자(袁子)』의 저자 원준 역시 자신의 책에서 "인애의 극치는 군주나 어버이의 잘못에 대해, 주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직언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덕목을 실천한 인물의 으뜸으로 진군을 꼽았다.
동진의 원굉이 지은 「삼국명신서찬」(『문선』에 실림)에서는 위나라의 명신 9명, 촉나라의 명신 4명, 오나라의 명신 7명을 선정하여 칭송했는데, 진군은 진태와 함께 위나라 명신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25][26]。
4. 친족 관계
조부 진식은 태구현령이었다. 아버지 진기는 평원 국상, 시중, 대홍려를 역임했다. 숙부 진담은 사공연이 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부, 아버지, 숙부 모두 명성이 높았다. 진군은 아버지나 조부 이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아들 진태도 사공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나 진태전에 주석으로 달린 『박물기』에 따르면, "공(진군, 진태)은 경(진기)에 미치지 못하고, 경은 장(진식)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진태가 죽자 아들 진순이 뒤를 이었으나, 진순이 후계자 없이 죽자 동생 진온이 뒤를 이었다. 진군전에 주석으로 달린 『진씨보』에 따르면 진군의 자손은 점차 세력이 약해졌지만, 숙부 진담의 손자인 진탄이 정위, 그의 아들 진준이 태위가 되는 등 높은 지위에 올랐다.
아내는 순욱의 딸이다. 진군은 아내의 동생인 순이(서진의 태위)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21]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三国志
[7]
서적
三国志
[8]
서적
三国志
[9]
서적
三国志
[10]
서적
三国志
[11]
간행물
後漢鴻臚陳君碑
199
[12]
서적
晋書
[13]
서적
三国志
[14]
서적
三国志
[15]
서적
三国志
[16]
서적
三国志
[17]
서적
魏氏春秋
[18]
서적
三国志
[19]
서적
三国志
[20]
서적
三国志
[21]
서적
晋陽秋
[22]
서적
三国志
[23]
서적
三国志
[24]
서적
三国志
[25]
문서
명신20선
[26]
문서
長文通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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