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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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질도는 전한 경제 시대의 인물로, 강직한 성품과 엄격한 법 집행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낭, 중랑장을 거쳐 중위, 제남 태수를 역임하며, 멧돼지로부터 경제를 보호하고 제남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외척 숙청 과정에서 임강민왕 유영을 엄하게 다스린 일로 두태후의 미움을 받아 안문 태수로 좌천되었으나, 흉노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결국 두태후의 강요로 사형당했지만, 경제의 배려로 고향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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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도 | |
---|---|
질도 (郅都) | |
기본 정보 | |
성 | 질 (郅) |
이름 | 도 (都) |
생몰년 | 기원전 2세기 경 |
시대 | 전한 |
출생지 | 양나라 읍저구 |
사망지 | 장안 |
관직 | |
주요 관직 | 중랑장 제남상 중위 |
2. 생애
질도는 젊은 시절부터 큰 뜻을 품었고, 문제 때 낭(郞)이 되었다. 경제 때에는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과감히 직간하고, 조정의 대신들을 꺾어 눌렀다.[1]
어느 날, 경제가 측실 가희(賈姬)와 함께 상림원에 갔는데, 질도도 따라 나섰다. 가희가 변소에 갔는데 갑자기 멧돼지가 뛰어들어왔다. 경제는 질도에게 그녀를 구해주도록 눈짓을 주었으나 질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경제가 몸소 무기를 들고 구해주려 하자, 질도는 경제 앞에 엎드려 "측실을 잃는다고 해도 폐하께는 많은 측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단 한 분이십니다. 폐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한나라의 종묘와 생모인 두태후는 어찌 되옵니까?"라고 말하였다.[1] 경제는 물러섰고, 멧돼지 또한 달아나 버렸다. 두태후는 이 일을 듣고 질도에게 금 100근을 내렸고, 경제는 그를 중용하였다.[1]
경제는 질도를 제남태수에 임명하였다. 제나라 제남군의 유력 호족인 간(瞯) 씨는 일문의 수가 300여 명에 달했고, 법률을 어기며 범죄자를 숨겨주었다. 질도는 부임하자마자 간 씨 일문 중 가장 악랄한 집안을 몰살했고, 제남군은 1년 전후로 치안이 안정되었다.[1]
질도는 용맹하고 과감했으며, 공평하고 질박한 인품으로 사심이 없었고 뇌물을 철저히 거부했다.[1] 그는 "나는 부모에게 거역하고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자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며, 처자식 따위는 돌아보지 않는다"고 자신의 신념을 말했다.[1]
경제 7년(前150年중국어) 위관의 뒤를 이어 중위에 임명되었다.[2] 당시 백성은 순박하여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조심하였는데, 질도는 엄하고 가혹한 법을 제일로 여겨 법을 집행할 때에는 귀족이나 외척도 꺼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후와 황족들은 질도를 볼 때마다 곁눈질로 보고 '창응'(蒼鷹)이라고 불렀다.[2]
경제 중3년(前147年중국어), 임강민왕은 법을 어겨 종묘를 세울 땅에 궁궐을 지은 죄로 중위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임강민왕은 경제에게 사죄하는 글을 쓰려 하였으나, 질도는 법에서 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런데 두영이 몰래 사람을 시켜 임강민왕에게 붓을 넣어 주었고, 임강민왕은 사죄하는 글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두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죄를 꾸며 질도를 모함하였다.[2] 결국 질도는 면직되어 집으로 돌아갔으나, 경제는 그를 안문태수에 임명하였다.[2]
흉노는 평소 질도의 지조를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변경에 있었던 병사를 물리고 돌아가 질도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안문에 가까이 오지 않았다.[2]
두태후가 끝내 질도를 법에 걸어 처벌하려 하자, 경제는 "질도는 충신입니다"라고 말하며 만류하였다.[1] 그러나 두태후는 "임강왕은 충신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반문하였다.[1] 결국 경제는 어머니에게 굴복하여 질도를 처형하고 효수하였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젊을 때부터 큰 뜻을 품었고, 문제 때 낭(郞)이 되었다. 경제 때에는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과감히 직간하고, 조정의 대신들을 꺾어 눌렀다.[1]어느날 경제가 가희(賈姬)와 함께 상림원에 갔는데, 질도도 따라 나섰다. 가희가 변소에 갔는데 갑자기 멧돼지가 뛰어들어왔고, 경제는 질도로 하여금 그녀를 구해주도록 눈짓을 주었으나 질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경제가 몸소 무기를 들고 구해주려 하자, 질도는 경제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1]
“희 한 명을 잃으면, 또 다른 희를 얻으면 됩니다. 폐하께서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시면, 종묘와 태후는 어떻게 합니까?”|“희 한 명을 잃으면, 또 다른 희를 얻으면 됩니다. 폐하께서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시면, 종묘와 태후는 어떻게 합니까?”중국어
경제는 물러섰고, 멧돼지 또한 달아나 버렸다. 두태후는 이 일을 듣고 질도에게 금 100근을 내렸고, 경제는 그를 중용하였다.[1] 그는 하동군 양현(『한서』에 따르면 대양현) 사람으로, 젊은 시절부터 포부를 품고 문제 시대에 낭(궁중 시종관)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경제 시대에 중랑장(낭중의 장관)으로 임명된 그는 성격이 격렬하여, 자신이 생각한 것은 조정에서 대신이라도 거리낌 없이 의견과 직언을 하여 그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1]
2. 2. 경제의 신임과 일화
젊을 때부터 큰 뜻을 품었고, 문제 때 낭(郞)이 되었다. 경제 때에는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과감히 직간하고, 조정의 대신들을 꺾어 눌렀다.어느 날, 경제가 가희(賈姬)와 함께 상림원에 갔는데, 질도도 따라 나섰다. 가희가 변소에 갔는데 갑자기 멧돼지가 뛰어들어왔고, 경제는 질도로 하여금 그녀를 구해주도록 눈짓을 주었으나 질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경제가 몸소 무기를 들고 구해주려 하자, 질도는 경제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측실을 잃는다고 해도 폐하께는 많은 측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단 한 분이십니다. 폐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한나라의 종묘와 생모인 두태후는 어찌 되옵니까?"
경제는 물러섰고, 멧돼지 또한 달아나 버렸다. 두태후는 이 일을 듣고 질도에게 금 100근을 내렸고, 경제는 그를 중용하였다.
어느 날, 경제는 총애하는 한단 사람인 가희(조경숙왕 유팽조와 중산정왕 유승의 생모)를 데리고 상림원에 사냥을 나갔는데, 질도도 동행했다. 그 후 가희가 변소에서 용변을 보던 중 갑자기 야생 멧돼지가 그녀가 있는 변소로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경제는 이것을 보고 질도에게 눈짓을 했다. 하지만 질도는 구하러 가려고 하지 않자, 경제는 직접 무기를 들고 구하러 가려고 했다. 그러자 질도는 경제 앞에 엎드려 "측실을 잃는다고 해도 폐하께는 많은 측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단 한 분이십니다. 폐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한나라의 종묘와 생모인 두태후는 어찌 되옵니까?"라고 직언했다. 경제는 가는 것을 멈추었고, 이윽고 멧돼지는 변소에서 나와 숲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다행히 가희는 무사했다. 경제의 생모인 두태후는 이것을 듣고 그에게 금 백 근을 주었다. 이 이후로 질도는 천자와 두태후의 신뢰를 절대적으로 받으며 중용되었다고 한다.
2. 3. 제남 태수 시절
경제는 질도를 제남태수에 임명하였다. 제나라 제남군의 유력 호족인 간(瞯) 씨는 일문의 수가 300여 명에 달했고, 법률을 어기며 범죄자를 숨겨주었다. 세력이 강하고 교활했기에 역대 제남 태수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1] 질도는 부임하자마자 간 씨 일문 중 가장 악랄한 집안을 몰살했고, 다른 자들은 그 조치에 전율했다. 제남군은 1년 전후로 치안이 안정되었고,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을 정도로 질도를 두려워하고 존경했다. 주변 군은 그를 승상처럼 두려워했다고 한다.[1]질도는 용맹하고 과감했으며, 공평하고 질박한 인품으로 사심이 없었다. 또한 그는 뇌물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는 "나는 부모에게 거역하고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자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며, 처자식 따위는 돌아보지 않는다"고 자신의 신념을 말했다고 한다.[1]
남양군 사람인 녕성이 제남 도위로 부임했다. 질도는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기꺼이 맞이하고 교류했다고 한다.[1]
2. 4. 청렴결백한 관리
질도는 용감하고 기개와 힘이 있으며, 공정하고 청렴했다. 사사로이 편지를 받으면 읽지 않았고, 남이 보내온 선물을 받는 법이 없었으며, 청탁이나 의뢰를 들어주는 일도 없었다.[1] 그는 "이미 어버이를 등지고 벼슬살이하는 이상, 이 몸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고 절개를 지키다가 관직에서 죽을 뿐이다. 처자식도 돌보지 않겠다"라고 말하였다.[1] 그는 용맹하고 과감했으며, 공평하고 질박한 인품으로 사심이 없었고 자택에는 재산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또한 뇌물을 철저히 거부했다.[2]2. 5. 중위 시절과 전성기
경제 7년(前150年중국어) 위관의 뒤를 이어 중위에 임명되었다.[2] 당시 주아부는 매우 고귀한 신분이었으나, 질도는 그를 만날 때마다 가볍게 읍할 뿐이었다. 당시 백성은 순박하여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조심하였는데, 질도만은 엄하고 가혹한 법을 제일로 여겨 법을 집행할 때에는 귀족이나 외척도 꺼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후와 황족들은 질도를 볼 때마다 곁눈질로 보고 '창응'(蒼鷹)이라고 불렀다.[2]경제 중3년(前147年중국어), 임강민왕은 법을 어겨 종묘를 세울 땅에 궁궐을 지은 죄로 중위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임강민왕은 경제에게 사죄하는 글을 쓰려 하였으나, 질도는 법에서 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런데 두영이 몰래 사람을 시켜 임강민왕에게 붓을 넣어 주었고, 임강민왕은 사죄하는 글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2. 6. 임강민왕 사건과 두태후의 미움
경제 7년(기원전 150년), 질도는 위관의 뒤를 이어 중위에 임명되었다.[2] 경제 중2년(기원전 148년), 외척을 숙청하기 위하여 질도는 임강민왕의 외가인 율(栗)씨 일족을 모두 주멸하였다.[2]경제 중3년(기원전 147년), 임강민왕은 법을 어겨 종묘를 세울 땅에 궁궐을 지었기 때문에, 조서에 의거하여 중위의 문초를 받게 되었다.[2] 임강민왕은 경제에게 사죄하는 글을 쓰려 하였으나, 질도는 법에서 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2] 그런데 두영이 몰래 사람을 시켜 임강민왕에게 붓을 넣어 주었고, 임강민왕은 사죄하는 글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두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죄를 꾸며 질도를 모함하였다.[2]
2. 7. 안문 태수 부임과 흉노 격퇴
경제 7년(기원전 150년), 질도는 위관의 뒤를 이어 중위에 임명되었다.[2] 경제 중2년(기원전 148년), 외척을 숙청하기 위하여 질도로 하여금 임강민왕의 외가인 율(栗)씨 일족을 모두 주멸하도록 하였다.[2] 질도가 위관 대신 중위가 된 이유는 경제가 위관은 성품이 어질어 일을 처리하기에 알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2] 그 무렵 승상 주아부는 매우 고귀한 신분이었으나, 질도는 그를 만날 때마다 가볍게 읍할 뿐이었다.[2] 당시 백성은 순박하여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조심하였는데, 질도만은 엄하고 가혹한 법을 제일로 여겨 법을 집행할 때에는 귀족이나 외척도 꺼리지 않았다.[2] 그 때문에 제후와 황족들은 질도를 볼 때마다 곁눈질로 보고 '창응'(蒼鷹)이라고 불렀다.[2]경제 중3년(기원전 147년), 임강민왕은 법을 어겨 종묘를 세울 땅에 궁궐을 지었기 때문에, 조서에 의거하여 중위의 문초를 받게 되었다.[2] 임강민왕은 경제에게 사죄하는 글을 쓰려 하였으나, 질도는 법에서 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2] 그런데 두영이 몰래 사람을 시켜 임강민왕에게 붓을 넣어 주었고, 임강민왕은 사죄하는 글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두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죄를 꾸며 질도를 모함하였다.[2] 결국 질도는 면직되어 집으로 돌아갔으나, 경제는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질도에게 보내 그를 안문태수에 임명하였다.[2] 또한 조정에 들러 하직 인사를 할 것 없이 바로 임지로 가게 하고, 임지에서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릴 것 없이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2]
흉노는 평소 질도의 지조를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변경에 있었던 병사를 물리고 돌아가 질도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안문에 가까이 오지 않았다.[2] 그들은 질도의 생김새를 본떠 만든 인형을 놓고,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게 하였으나 아무도 맞히지 못할 정도로 질도를 대단히 두려워하였다.[2] 질도는 흉노의 근심거리였다.[2]
2. 8. 죽음
두태후가 끝내 질도를 법에 걸어 처벌하려 하자, 경제는 "질도는 충신입니다"라고 말하며 만류하였다.[1] 그러나 두태후는 "임강왕은 충신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반문하였다.[1] 결국 경제는 어머니에게 굴복하여 질도를 도성으로 소환, 시장에서 처형하고 효수하였다.[1]후에 경제는 질도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그의 유해를 향리에 정중하게 매장하도록 배려하였다.[1]
참조
[1]
서적
사기정의
[2]
사료
사기 효경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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