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차슬라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차슬라브는 920년대에 세르비아를 재건하고 비잔틴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중세 세르비아의 통치자이다. 그는 불가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탈출하여 세르비아를 재건했으며, 비잔틴 제국의 지원을 받아 영토를 확장했다. 차슬라브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마자르족의 기습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세르비아는 비잔틴 제국과 불가리아의 지배를 받으며 분열되었고, 그의 딸은 라슈카의 티호미르와 결혼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890년 출생 - 키예프의 올가
    키예프의 올가는 10세기 키예프 루스의 통치자이자 이고르 1세의 부인으로, 남편의 암살 후 섭정으로서 드레블랴네인에 대한 잔혹한 복수, 세제 개혁을 통한 중앙 집권화 강화, 그리스 정교로의 개종을 통해 루스의 기독교화에 영향을 미쳐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 890년 출생 - 콘라두스 1세
    콘라두스 1세는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선출되어 슈바벤, 바이에른, 작센 등 지역 공작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마자르족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어려움을 겪다 918년 사망했다.
  • 960년 사망 - 고보융
    고보융은 오대십국시대 형남의 군주로, 아버지 고종회의 뒤를 이어 남평왕에 즉위하여 후한, 후주에 신하를 자처하며 세력을 유지했고, 북송 건국 후에는 송나라에 조공하며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960년 사망 - 풍연사
    풍연사는 오대 십국 시대 남당의 문인이자 정치가로, 두 황제의 신임을 받아 재상을 네 차례 역임했으나 정치적 갈등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았으며, 시에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 세르비아의 군주 - 스테판 라자레비치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아들이자 세르비아의 통치자로,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 참전 후 세르비아 전제공이 되어 독립을 확고히 하고 예술과 문화,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 세르비아의 군주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19세기 초 세르비아의 지도자이자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창시자로, 제2차 세르비아 봉기를 주도하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의 자치권을 획득하고 세르비아 공국의 세습 공작이 되었으며, 전제적 통치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근대화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차슬라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차슬라브
본명차슬라브 클로니미로비치 블라스티미로비치
원어 표기lang-el: Τζεέσθλαβος
lang-sr-cyrl: Часлав Клонимировић
칭호알콘 (ἄρχων)
왕조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
종교칼케돈파
통치
공국셀비아 공
재위 기간기원후 927년 ~ 기원후 960년 (추정)
이전 통치자자하리야
후임 통치자티호미르
출생과 사망
출생896년 이전
출생지프레슬라프,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사망943년/960년 (45~60세 추정)
사망지사바강
가족
아버지클로니미르

2. 배경

세르비아의 공작 블라스티미르/Vlastimir영어가 사망한 후, 공국은 세 아들에 의한 과두제를 채택했다. 즉 무티미르/Mutimir of Serbia영어, 고이니크/Gojnik영어, 스트로이미르/Strojimir영어의 세 사람으로, 장남 무티미르가 가장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880년대, 무티미르가 공작위를 독점하고 동생들을 추방했다. 스트로이미르의 아들 클로니미르/Klonimir영어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보리스 1세의 궁정으로 도망쳤다. 이는 어떤 배신 행위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이니크의 아들 페타르는 정치적 이유로 무티미르에 의해 세르비아에 억류되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크로아티아로 탈출했다.

무티미르의 사후, 그의 아들 프리비스라브/Pribislav of Serbia영어가 공국을 계승했지만, 그의 통치는 1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페타르가 귀국하여 프리비스라브를 격파하고 공작위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프리비스라브는 형제인 브란 무티미로비치/Bran Mutimirović영어와 스테판 무티미로비치/Stefan Mutimirović영어와 함께 크로아티아로 도망쳤다. 브란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눈을 멀게 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군주의 자격을 박탈하는 처치였다. 896년, 크로니미르가 보리스 1세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그는 데스티니콘/Destinikon영어의 중요한 요새를 점령했지만, 전투에서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거쳐, 동남 유럽에서의 사실상 최강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불가르족은 기회를 틈타 침략하는 전략에 능했다. 그들의 침공을 받았을 때,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의 아랍인과의 전쟁에 몰두해 있었고, 발칸 반도에서는 거의 저항할 수 없었다.

2. 1. 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의 내분

880년대에 무티미르는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고 그의 형제들과 스트로이미르의 아들인 클로니미르를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보리스 1세 궁정으로 추방했다. 이것은 배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이닉의 아들 페타르는 정치적인 이유로 무티미르의 세르비아 궁정에 머물렀지만 곧 크로아티아로 도망쳤다.

무티미르가 죽자 그의 아들 프리비슬라브가 통치권을 물려받았지만 1년 동안만 통치했다. 페타르가 돌아와 전투에서 그를 물리치고 왕위를 찬탈했다. 프리비슬라브는 그의 형제 브란과 스테판과 함께 크로아티아 공국으로 도망쳤다. 브란은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눈이 멀었다. 눈을 멀게 하는 것은 비잔틴 전통으로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했다.[14] 896년, 클로니미르는 보리스 1세의 지원을 받아 불가리아에서 돌아와 세르비아의 중요한 요새인 데스티니콘을 점령했다. 클로니미르는 패배하여 죽었다.

비잔틴-불가리아 전쟁으로 불가리아 제국은 남동 유럽에서 사실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되었다. 불가리아인들은 적절한 시기에 침략하여 승리했다. 비잔틴 제국이 아나톨리아에서 아랍인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15]

2. 2. 불가리아의 세르비아 침공

880년대에 무티미르는 왕위를 찬탈하고 그의 형제들과 스트로이미르의 아들인 클로니미르를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보리스 1세 궁정으로 추방했다. 고이닉의 아들 페타르는 정치적인 이유로 무티미르의 세르비아 궁정에 머물렀지만 곧 크로아티아로 도망쳤다.

무티미르가 죽자 그의 아들 프리비슬라브가 통치권을 물려받았지만 1년 동안만 통치했다. 페타르가 돌아와 전투에서 그를 물리치고 왕위를 찬탈했다. 프리비슬라브는 그의 형제 브란과 스테판과 함께 크로아티아 공국으로 도망쳤다. 브란은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눈이 멀었다.[1] 896년, 클로니미르는 보리스 1세의 지원을 받아 불가리아에서 돌아와 세르비아의 중요한 요새인 데스티니콘을 점령했지만, 패배하여 죽었다.

비잔틴-불가리아 전쟁으로 불가리아 제국은 남동 유럽에서 사실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되었다. 불가리아인들은 적절한 시기에 침략하여 승리했으며, 비잔틴 제국이 아나톨리아에서 아랍인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2]

3. 생애

차슬라브는 890년대, 896년 이전에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 프레슬라프에서 태어나 시메온 1세의 궁정에서 자랐다.[3] 그의 아버지는 클로니미르였고, 어머니는 불가리아인 귀족 여성이었다.

924년, 차슬라브는 대규모 불가리아 군대와 함께 세르비아로 보내졌다. 그 군대는 세르비아의 상당 부분을 유린했고, 당시 세르비아 공작이었던 자하리야가 크로아티아로 도망가도록 만들었다. 불가리아의 시메온은 모든 세르비아 주판들을 소환하여 새로운 공작에게 경의를 표하게 했지만, 차슬라브를 즉위시키는 대신 그들을 모두 사로잡아 세르비아를 합병했다. 그 결과, 불가리아는 서쪽으로 국경을 상당히 확장하여 강력한 동맹국인 자훔레의 미하일과 자하리야가 망명하여 곧 사망한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강력한 군주 크로아티아의 토미슬라브가 통치하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지배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많은 이들이 크로아티아와 비잔티움으로 도망갔다. 926년 크로아티아-불가리아 전투 이후 7년 만에 차슬라브는 네 명의 친구와 함께 프레슬라프에서 세르비아로 탈출했다. 그는 거의 황폐해진 땅을 발견했지만 "그 나라를 차지했다". 그의 통치는 933/934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즉시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재정적, 외교적 지원을 얻었다. 비잔틴 황제의 도움으로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인근 국가 및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10세기 중반 세르비아의 추정 경계.


차슬라브는 불가리아 제국의 시메온 1세 사후 세르비아를 재건했다.[4] 927년 시메온 1세가 사망하자, 차슬라브는 4명의 친구와 함께[17] 세르비아로 탈출, 세르비아 공국을 재건하고 많은 망명 세르비아인들이 돌아왔다.[17] 차슬라브는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에게 신종하며 금전적·외교적 지원을 받았으며, 그의 치세 동안 동로마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7] 이로 인해 세르비아에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크게 스며들었으며, 동서 교회 분열 시기에 세르비아가 정교권에 속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7]

차슬라브는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티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비잔틴 문화 (특히 교회)는 불가리아 교회에서 온 정교회의 영향과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에서 크게 증가했다. 그는 불가리아 교회와 긴밀한 정신적 유대감을 가진 채 불가리아에 살면서, 키릴루스와 메토디오스가 구상한 비잔틴-슬라브 문화와 문학이 세르비아에 도입되었다. 이 시기는 세르비아 교회가 채택한 미래의 기독교 데모님(정교회 대 가톨릭)에 매우 중요했는데, 이 시대에 형성된 유대 관계는 1054년 대분열 동안 결국 분열될 때 서로 다른 슬라브 교회가 어떻게 정렬되었는지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로마와 정교회 관할권의 중간에 있는 세르비아인들이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시대와 지역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

차슬라브 국가의 정확한 경계는 불확실하며, 트라부니아,[5] 보스니아 일부를 병합했다는 기록이 있다.[18] 자흐믈리에의 미하일로의 지배 영역마저 병합했다는 기록이 있다.[19] 하지만, 미하일은 930년 이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940년대까지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다.[3] 다른 학자들은 그가 트라부니아,[5] 카날리테스, 파가니아 및 라스키아까지 확장했다고 보지만,[4] 증거는 없으며 《제국에 관하여》(DAI)에서 이 모든 정치체가 세르비아와 별개로 언급되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낮다.[4] 프란시스 드보르니크는 차슬라브가 보스니아로 추정되는 확장을 한 것은 통치 초기에 불가능했을 것이며, "그가 나라를 재건하고 재건한" 이후에만 가능했으며, 가장 적절한 시기는 크로아티아의 힘이 일시적으로 쇠퇴한 949년이라고 주장했다.[4] 렐랴 노바코비치는 차슬라브 국가가 보스니아를 포함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당시 세르비아 국가가 상당한 영토를 확보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10세기 중반의 세르비아 영토 경계를 보여줄 때 주의가 필요하며, "우리는 당시 세르비아의 범위가 지도에 표시된 규모가 아니었다고 거의 확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4] 티보르 지브코비치 또한 "《제국에 관하여》 (DAI) I, 32.141–145는 차슬라브의 추정 군사 원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인정받는 통치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언급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4]

3. 1. 불가리아에서의 유년 시절

차슬라브는 890년대, 896년 이전에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 프레슬라프에서 태어나 시메온 1세의 궁정에서 자랐다.[3] 그의 아버지는 클로니미르였고, 어머니는 불가리아인 귀족 여성이었다.

924년, 차슬라브는 대규모 불가리아 군대와 함께 세르비아로 보내졌다. 그 군대는 세르비아의 상당 부분을 유린했고, 당시 세르비아 공작이었던 자하리야가 크로아티아로 도망가도록 만들었다. 불가리아의 시메온은 모든 세르비아 주판들을 소환하여 새로운 공작에게 경의를 표하게 했지만, 차슬라브를 즉위시키는 대신 그들을 모두 사로잡아 세르비아를 합병했다. 이 결과, 불가리아는 서쪽으로 국경을 상당히 확장하여 강력한 동맹국인 자훔레의 미하일과 자하리야가 망명하여 곧 사망한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강력한 군주 크로아티아의 토미슬라브가 통치하고 있었다.

3. 2. 세르비아의 재건

불가리아의 지배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많은 이들이 크로아티아와 비잔티움으로 도망갔다. 926년 크로아티아-불가리아 전투 이후 7년 만에 차슬라브는 네 명의 친구와 함께 프레슬라프에서 세르비아로 탈출했다. 그는 거의 황폐해진 땅을 발견했지만 "그 나라를 차지했다". 그의 통치는 933/934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즉시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재정적, 외교적 지원을 얻었다. 비잔틴 황제의 도움으로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인근 국가 및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차슬라브는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티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비잔틴 문화 (특히 교회)는 불가리아 교회에서 온 정교회의 영향과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에서 크게 증가했다. 그는 불가리아 교회와 긴밀한 정신적 유대감을 가진 채 불가리아에 살면서, 키릴루스와 메토디오스가 구상한 비잔틴-슬라브 문화와 문학이 세르비아에 도입되었다. 이 시기는 세르비아 교회가 채택한 미래의 기독교 데모님(정교회 대 가톨릭)에 매우 중요했는데, 이 시대에 형성된 유대 관계는 1054년 대분열 동안 결국 분열될 때 서로 다른 슬라브 교회가 어떻게 정렬되었는지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로마와 정교회 관할권의 중간에 있는 세르비아인들이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시대와 지역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

927년 시메온 1세가 사망하자, 차슬라브는 4명의 친구와 함께[17] 세르비아로 탈출했다. 세르비아인들의 지지를 받은 차슬라브가 세르비아 공국을 재건하자, 곧 많은 망명 세르비아인들이 돌아왔다. 차슬라브는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에게 신종하며, 금전적·외교적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차슬라브는 그의 치세 동안 동로마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차슬라브는 세르비아 공국의 확장에 나서, 트라브니아와 보스니아 일부를 병합했다.[18] 다만 그의 공국의 정확한 국경선은 알려져 있지 않다. 더욱이 그는, 925년 이후 역사상에서 사라진 자흐믈리에의 미하일로의 지배 영역마저 병합했다.[19]

3. 3. 비잔티움과의 관계와 문화적 영향

불가리아의 지배는 인기가 없었고,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와 비잔티움으로 도망갔다. 927년 시메온 1세가 사망하자, 차슬라브는 4명의 친구와 함께 세르비아로 탈출했다. 세르비아인들의 지지를 받은 차슬라브가 세르비아 공국을 재건하자, 곧 많은 망명 세르비아인들이 돌아왔다. 그는 즉시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에게 신종하며, 금전적·외교적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차슬라브는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티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크게 스며들었다. 불가리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키릴루스와 메토디오스가 구상한 비잔틴-슬라브 문화와 문학이 세르비아에 도입되었다. 정교에 관해서는 불가리아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이는 훗날 동서 교회 분열 시기에 세르비아가 다른 슬라브족 교회와 달리 가톨릭권이 아닌 정교권에 속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세르비아인들이 가톨릭과 정교 어느 쪽으로든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시대의 종교에 관한 사료는 부족하다.

3. 4. 영토 확장



차슬라브는 불가리아 제국의 시메온 1세 사후 세르비아를 재건했다.[4] 927년 시메온 1세가 사망하자, 차슬라브는 4명의 친구와 함께[17] 세르비아로 탈출, 세르비아 공국을 재건하고 많은 망명 세르비아인들이 돌아왔다.[17] 차슬라브는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에게 신종하며 금전적·외교적 지원을 받았으며, 그의 치세 동안 동로마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7] 이로 인해 세르비아에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크게 스며들었으며, 동서 교회 분열 시기에 세르비아가 정교권에 속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7]

차슬라브 국가의 정확한 경계는 불확실하며, 트라부니아,[5] 보스니아 일부를 병합했다는 기록이 있다.[18] 자흐믈리에의 미하일로의 지배 영역마저 병합했다는 기록이 있다.[19] 하지만, 미하일은 930년 이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940년대까지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다.[3] 다른 학자들은 그가 트라부니아,[5] 카날리테스, 파가니아 및 라스키아까지 확장했다고 보지만,[4] 증거는 없으며 《제국에 관하여》(DAI)에서 이 모든 정치체가 세르비아와 별개로 언급되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낮다.[4] 프란시스 드보르니크는 차슬라브가 보스니아로 추정되는 확장을 한 것은 통치 초기에 불가능했을 것이며, "그가 나라를 재건하고 재건한" 이후에만 가능했으며, 가장 적절한 시기는 크로아티아의 힘이 일시적으로 쇠퇴한 949년이라고 주장했다.[4] 렐랴 노바코비치는 차슬라브 국가가 보스니아를 포함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당시 세르비아 국가가 상당한 영토를 확보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10세기 중반의 세르비아 영토 경계를 보여줄 때 주의가 필요하며, "우리는 당시 세르비아의 범위가 지도에 표시된 규모가 아니었다고 거의 확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4] 티보르 지브코비치 또한 "《제국에 관하여》 (DAI) I, 32.141–145는 차슬라브의 추정 군사 원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인정받는 통치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언급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4]

4. 헝가리(마자르족)와의 전쟁과 죽음

차슬라브로 추정되는 치아슬라부스의 처형.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제국 통치론/Πρὸς τὸν ἴδιον υἱὸν Ῥωμανόνgrc』에 따르면, 키사가 이끄는 마자르족이 보스니아를 침공하자 차슬라브는 급히 맞서 싸우기 위해 드리나강 유역에서 대치했다.[21] 이 전투는 마자르족의 대패로 끝났고, 키사는 차슬라브 휘하의 보이보드인 티호미르에게 살해되었다.[17] 이를 포상하기 위해 차슬라브는 딸을 티호미르에게 시집보냈다.[17] 한편 마자르족 측에서는 키사의 미망인이 복수를 위해 군세를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족장들에게 호소했다.[17] 미망인은 "수많은" 군세를 이끌고 돌아와 스레미아에서 차슬라브를 기습했다.[17] 밤중에 감행된 습격은 성공했고, 차슬라브는 친족 남자 전원과 함께 사로잡혔다.[17] 미망인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모두 손이 묶인 채 사바강에 던져져 죽었다.[17] 이 사건은 콘스탄티노스 7세의 사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제국 통치론』에 기록이 없고, 그 시기는 960년[17] 또는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로 생각된다.

10세기 후반 세르비아에 대한 정보는 없다. 《황제는 국가를 다스린다(DAI)》의 자료에 따르면, 차슬라브의 통치는 943/944년에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말 《두클랴 사제 연대기》는 일부 학자들이 《DAI》의 차슬라브와 동일시하는 특정 "치아슬라부스"/ "세이슬라브"(Časlav)를 언급하지만, 차슬라브는 "연대기의 연대기에 따라 9세기 초"에 통치했다.

키사가 이끄는 마자르족이 보스니아를 침략했고, 차슬라브는 드리나 강둑, 치벨리노라고 불리는 곳에서 그들과 마주쳤다.[6][21] 마자르족은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키사는 차슬라브의 ''보이보드'' 티호미르에게 살해되었다.[6][17] 이에 감사하며 차슬라브는 딸을 티호미르에게 시집보냈다.[6][17] 키사의 미망인은 마자르 지도자들에게 복수를 위한 군대를 요청했다.[6][17] "알 수 없는 수"의 병력을 이끌고 미망인은 돌아와 스렘에서 차슬라브를 기습했다.[6][17] 밤에 마자르족은 세르비아인을 공격하여 차슬라브와 그의 모든 남성 친척을 생포했다.[6][17] 미망인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모두 손과 발이 묶인 채 사바 강에 던져졌다.[6][17]

894년,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6세는 불가리아 제국과 싸우기 위해 마자르족을 고용했다.[20] 그들은 이듬해 895년에 카르파티아 분지를 마자르족의 카르파티아 분지 정복/Hungarian conquest of the Carpathian Basin영어했다.[20] 그 후 한동안 마자르족은 서방 국가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934년과 943년에 발칸 반도로 남하하여 동로마 제국 영토인 트라키아/Thrace (theme)영어까지 약탈했다.[20]

4. 1. 드리나 강 전투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제국 통치론/Πρὸς τὸν ἴδιον υἱὸν Ῥωμανόνgrc』에 따르면, 키사가 이끄는 마자르족이 보스니아를 침공하자 차슬라브는 드리나강 유역에서 전투를 벌였다.[21] 이 전투는 마자르족의 대패로 끝났고, 키사는 차슬라브 휘하의 보이보드인 티호미르에게 살해되었다.[17]

4. 2. 차슬라브의 죽음

10세기 후반 세르비아에 대한 정보는 없다. 《황제는 국가를 다스린다(DAI)》의 자료에 따르면, 차슬라브의 통치는 943/944년에 끝났을 것이다. 13세기 말 《두클랴 사제 연대기》는 차슬라브를 언급하지만, 그는 "연대기의 연대기에 따라 9세기 초"에 통치했다.

키사가 이끄는 마자르족이 보스니아를 침략했고, 차슬라브는 드리나 강둑에서 그들과 마주쳤다.[6][21] 마자르족은 패배했고, 키사는 차슬라브의 ''보이보드'' 티호미르에게 살해되었다.[6][17] 감사함에 차슬라브는 딸을 티호미르에게 시집보냈다.[6][17] 키사의 미망인은 마자르 지도자들에게 복수를 위한 군대를 요청했다.[6][17] "알 수 없는 수"의 병력을 이끌고 미망인은 돌아와 스렘에서 차슬라브를 기습했다.[6][17] 밤에 마자르족은 세르비아인을 공격하여 차슬라브와 그의 모든 남성 친척을 생포했다.[6][17] 미망인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모두 손과 발이 묶인 채 사바 강에 던져졌다.[6][17] 이 사건들은 950-960년경으로 해석된다.[6][17]

894년,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6세는 불가리아 제국과 싸우기 위해 마자르족을 고용했다.[20] 그들은 이듬해 895년에 카르파티아 분지를 마자르족의 카르파티아 분지 정복/Hungarian conquest of the Carpathian Basin영어했다.[20]

5. 사후

차슬라브 사후, 세르비아는 비잔티움 제국과 불가리아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7] 971년부터 976년 사이에는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 황제(재위 969–976) 아래에서 라스 카테파나테가 설치되었다.[22] 이 지역의 총독(스트라테고스) 요한네스 1세 시대의 인장에는, 선대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시대에도 이미 라슈카에 동로마 제국의 지배가 미치고 있었을 가능성이 보인다.[23][24] 라스의 프로토파타리오스와 카테파노의 지위에는 요한네스라는 이름의 동로마 제국 총독이 있었다.[25] 그러나 요한네스 1세 시대의 라스 카테파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9]

1045년경의 동로마 제국. 옛 세르비아 공국 영토는 테마 시르미움(Sirmium)으로 되어 있다.


얼마 후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으로 라슈카를 잃었으나, 1018년경에 일시적으로 회복하여 시르미움 테마를 설치했지만, 그 영역은 옛 라슈카에 미치지 못했다.[9] 한편, 각지의 귀족들이 자립하여 할거했으며, 『제국 통치론』에서도 언급된 차슬라브의 사위 티호미르가 라슈카를 통치했다.

990년대에는 요반 블라디미르가 세르비아 귀족 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바르를 본거지로 하여, 트라브니야와 자훔리에를 포함하는 세르비아 공국 영토였던 포모리에 (해안 지대)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는 이 국가를 「트리마리아 혹은 세르비아」라고 불렀다.[26]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 제국 포위망을 결성하기 위해 블라디미르에게 접근했다. 아나톨리아에서의 전쟁도 겪고 있던 바실리우스 2세는,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불가리아 차르 사무일과 싸우기 위해 블라디미르의 힘을 의지했다. 그러나 사무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997년에 두클랴를 침공하여, 달마티아를 자다르까지 북상하여,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를 불가리아 제국에 병합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를 굴복시키고, 꼭두각시로 이 땅을 다스리게 했다.

6. 유산

스테반 스레마츠(1855–1906)는 1903년에 ''차슬라브''를 저술했다.[12][28]

7. 가족

두클랴 사제의 연대기에 따르면, 차슬라브는 딸이 한 명 있었으며,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딸은 라슈카 영주 티호미르와 결혼했다.

참조

[1] 서적 The making of Eastern Europe: from prehistory to postcommunism https://archive.org/[...] Palgrave Macmillan
[2] 문서
[3] 문서
[4] 서적 Gde se nalazila Srbija od VII do XII veka http://www.rastko.rs[...] Narodna knjiga i Istorijski institut
[5] 서적 The Entry of the Slavs into Christendom: An Introduction to the Medieval History of the Slavs Cambridge University
[6] 문서
[7] 서적 The Routledge Companion to Medieval Warfare Routledge
[8] 문서
[9] 서적 The Legend of Basil the Bulgar-slayer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08-07
[10] 문서 Byzantium in the year 1000 https://books.google[...]
[11] 문서 Byzantinoslavica, Volumes 65–66 https://books.google[...] Academia
[12] 서적 Veliki župan Časlav https://books.google[...] Izd. Matice srpske
[13] 서적 Prince Michael of Zahumlje – a Serbian ally of tsar Symeon https://www.academia[...] St Kliment Ohridski University Press
[14] 서적 The making of Eastern Europe: from prehistory to postcommunism https://archive.org/[...] Palgrave Macmillan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The Entry of the Slavs into Christendom: An Introduction to the Medieval History of the Slavs Cambridge University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서적 The Legend of Basil the Bulgar-slayer https://books.google[...] 2003-08-07
[24] 문서 Byzantium in the year 1000 https://books.google[...]
[25] 문서 Byzantinoslavica, Volumes 65–66 https://books.google[...] Academia
[26] 문서
[27] 문서 Letopis popa Dukqanina i narodna predawa http://ponude.biz/kn[...]
[28] 서적 Veliki župan Časlav https://books.google[...] Izd. Matice srpsk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