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채원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군인이다. 3·1 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었으나 탈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 훈련책으로 활동했다. 이후 임시정부와 중국에서 활동하며, 한국광복군에서 제1지대장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7연대장, 제3여단장, 제2여단장을 역임했으나, 군수품 횡령 의혹에 연루되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평강 채씨 - 채동욱
채동욱은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검사로 임관하여 굵직한 수사를 지휘하고 검찰총장까지 역임했으나 혼외자 논란으로 사퇴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 평강 채씨 - 채만식
채만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그린 소설가이며,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탁류》와 같은 걸작을 남겨 문학사 연구자들에게 꾸준히 연구된다. - 3·1 운동 관련자 - 유관순
유관순은 3·1 운동 당시 서울과 천안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을 이끌었으며, 옥중에서도 독립 만세를 외치다 순국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억되지만, 삶과 업적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 3·1 운동 관련자 - 이상재
이상재는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일제강점기 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독립협회, YMCA, 조선일보, 신간회 등에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이끌고 청년 교육과 계몽에 헌신한 월남 이색의 후손이다.
채원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관 | 평강 |
호 | 거평(巨坪) |
출생일 | 1895년 3월 24일 |
출생지 | 조선평안남도영원군 |
사망일 | 1974년 2월 16일 |
사망지 | 대한민국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41호 |
서명 | 채원개 서명 |
경력 | |
소속 | 국민혁명군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육군 |
최종 계급 | 상교(중국군) 소장(광복군) 준장(한국 육군) |
주요 경력 | 대한독립단 훈련책 통의부 대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대위 중국육군 제59사 작전참모 중국육군 제2사 참모처장 교도단장 중국 제19집단군 총사령부 작전참모 중국육군 제78사 참모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광복군 제1지대장 |
정치 활동 | |
직책 | 임시의정원 평안대의원 |
임기 | 1925년 ~ ? |
직책 2 | 참의부 군무위원 |
취임일 2 | 1926년 |
정당 | 한국독립당 |
학력 | |
학력 | 의명소학교 오성학교 육군사관학교 |
가족 | |
부 | 채병묵(蔡秉默) |
군 복무 | |
참전 | 직봉전쟁 |
서훈 |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
2. 생애 초기
1895년 3월, 평안남도 영원군에서 채병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명소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서울로 가 오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가 폐쇄되자 1915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4년간 근무했다.[1]
1910년 서울로 가서 오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자 1915년에 조선 보병대에 입대하여 4년간 근무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지만, 탈옥하여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에서 활동했다. 보병대 동기였던 강로국으로부터 신흥무관학교 교관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대한독립단에 소속되었다.[1]
3. 독립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6월 박희곤, 최천호와 함께 낙양강무당에 입학했고,[2] 같은 해 9월 봉직전쟁에 참전했다. 1927년 황푸 군관학교에 파견되어 유학생을 지도했으며, 소교 계급으로 제5기 학생대 부관 및 제6기 편집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3] 1939년까지 중국군 군관으로 활동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총사령부 참모처장에 임명되었다.[4] 1941년 11월에는 고급참모,[4] 1943년 7월에는 총무처장[5]을 역임했다. 1944년 11월에는 다시 고급참모가 되었고,[4] 1945년에는 제1지대장을 맡았다.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3. 1. 3·1 운동과 만주 망명
1919년 3·1 운동 당시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만주로 망명, 대한독립단에서 훈련책으로 활동했다.[1]
3. 2. 임시정부와 중국에서의 활동
1921년 통의부 대표로 김창환(金昌煥), 심용준(沈龍俊) 등과 함께 국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뤄양육군강무학교(洛陽陸軍講武學校)에 파견되어 한국 유학생들을 지도했다.[1] 1924년 6월 박희곤, 최천호와 함께 낙양강무당에 입학했고,[2] 같은 해 9월 봉직전쟁에 참전했다. 1925년 임시정부로부터 육군 대위 및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에 임명되었고, 3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 심판위원으로 참여하여 이승만의 파면을 판결했다.
1926년 참의부 군무위원에 임명되었고,[1] 1927년 황푸 군관학교에 파견되어 유학생을 지도했으며, 소교 계급으로 제5기 학생대 부관 및 제6기 편집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3] 1930년 중국군 제59사 작전참모, 1931년 제2사 교도단 단장으로 초공작전 등에 참여했다. 1932년 상하이 사변 이후 중국군 독립 제4사 참모장으로 근무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제19집단군 총사령부 작전참모를 맡았다. 1938년 광저우 제4로군 고급참모 부임 후, 총사령부 작전참모 이준식 상교와 함께 동산백원을 임시정부 임시청사로 제공했다.[1] 1939년까지 중국군 군관으로 활동했다.
3. 3. 한국광복군 활동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에 임명되었다.[4] 1941년 11월에는 고급참모,[4] 1943년 7월에는 총무처장[5]을 역임했다. 1944년 11월에는 다시 고급참모가 되었고,[4] 1945년에는 제1지대장을 맡았다.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4. 광복 이후
광복 후 채원개는 교포들의 재산 보호 및 안전 귀환에 힘썼으며, 1946년 12월에 귀국했다.[1] 1947년 3월 육군사관학교 특별 제3기를 졸업하고, 1947년 6월 20일 제7연대장에 임명되었다.[6] 1948년 2월 5일 제3여단장[7], 1949년 1월 15일 제2여단장[7]을 역임하였다.
군산항에서 물자를 중국으로 횡령한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고급 부관 겸 인사참모였던 김태성 소령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자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8] 채원개는 1950년에 준장으로 예편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1]
5. 비판 및 논란
(이전 출력 결과가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빈칸으로 출력합니다.)
참조
[1]
웹사이트
今月の独立運動家-2009年9月の独立運動家 蔡元凱
https://e-gonghun.mp[...]
功勲電子資料館
2024-10-10
[2]
웹사이트
최천호 (崔天浩)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4-08-30
[3]
서적
黄埔軍校同学録
湖南人民出版社
[4]
웹사이트
한국광복군 조직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2015-11-28
[5]
웹사이트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第78號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2015-11-28
[6]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7]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8]
뉴스
제1話 温故知新<78>육사8기 임관 후 첫 실전경험
http://kookbang.dema[...]
국방일보
2014-07-3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