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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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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관순은 1902년 충청남도에서 태어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이화학당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여 시위를 주도했으며,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었다.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으로 사망했다. 3·1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러나 유관순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는 미화, 정치적·종교적 목적의 악용, 이화학당 출신 인사의 은폐 의혹 등 여러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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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유관순
한글 표기유관순
한자 표기柳寬順
로마자 표기Yu Gwansun
매큔-라이샤워 표기Yu Kwansun
예일 표기Yu Kwanswun
출생일1902년 12월 16일
출생지대한제국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사망일1920년 9월 28일
사망지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본관고흥(高興)
직업독립운동가
종교개신교 ( 감리회)
가족부: 유중권
모: 이소제
오빠: 유우석
동생: 유관석
관련 활동독립운동
활동 기간1919년
주요 활동3.1운동
상훈[[파일:건국훈장1대한민국장.png|x10px]]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2019)
[[파일:건국훈장3독립장.png|x10px]] (건국훈장 독립장, 1962)
사진
1920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기타
관련 인물이소제 (어머니)
유중권 (아버지)
유우석 (오빠)
유관석 (동생)
참고 자료
참고 자료「柳寛順への日本の蛮行、誇張多い」
유관순(柳寬順)
믿음이 왜 돈이되는가?

2. 성명

본관은 고흥 유씨이다. 두음법칙과 관련하여 성명 표기에 대해 과거에 논란이 있었다. 2007년 4월 일부 성씨 사람들이 호적상 이름을 변경해 달라며 낸 신청을 지방법원에서 받아들였고, 표기 문제에 대해 여러 국가기관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39] 2007년 8월 대법원의 호적예규[40]가 개정되어 류씨 성을 가진 사람은 본인 의사에 따라 '류'로 쓸 수 있게 되었다. 2007년 10월 현재 개정된 호적예규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41]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비영리 사단법인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처음에는 ‘유’ 표기를 사용하다가 2001년에 ‘류’로 변경했다. 그러나 두음 법칙에 따라 교과서나 공식 행사에서 오랜 기간 '유관순'으로 표기해왔고, '류'로 고쳐서 생긴 사회적 혼선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2014년부터 '''유관순'''으로 표기하고 있다.[42]

3. 업적

유관순은 "대한민국의 잔 다르크"로 알려졌다.[18] 3·1 운동은 즉각적인 독립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일본 식민 정부는 더 관대한 정치적 통제를 시행했다. 유관순은 체포 후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아 끊임없는 항의와 저항을 통해 한국 독립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19] 한국 독립 후, 충청남도천안시는 협력하여 유관순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했다.[20][21] 충청남도에서는 유관순을 기리는 상을 수여한다.[22]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18] 2018년 ''뉴욕 타임스''는 뒤늦은 부고 기사를 게재했다.[2]

유관순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비난을 위해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28] 국정 교과서에서는 유관순이 1심에서 징역 3년, 항소심에서 법정모독죄로 7년 형을 받았다고 가르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며 실제로는 3년형을 선고받았다.[28] 일본 형법에는 법정모독죄가 없으며, 내란죄는 고등법원 특별 재판 대상이고 징역형이 아닌 금고형이다.[28] 실제로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고 징역 3년형을 받았으며, 감형되어 최종 징역 2년 6개월이 되었다.[30]

1945년 독립 이전에는 무명이었던 유관순이 한국인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친일파 용의자로 지목된 박인덕신봉조 두 명의 이화학당 출신 여성의 대화가 계기였다.[27][31] 이들은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유관순의 무용담을 홍보했으며, 이는 이승만과 이화학당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32] 유관순은 3·1 운동에서 많은 체포자 중 한 명이었지만, 지도자들과 달리 친일파로 전향한 경력이 없어 미화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32]

1947년 이승만은 이화학당 관계자들과 함께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1948년에는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서문을 기재한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32] 이후 유관순은 한국 국내 프로테스탄트 선교 전략에 유용하게 활용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는 지적이 있다.[27]

1962년 한국 정부는 유관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수여했다.[33]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유족과 연구자들은 유관순의 생애에 대한 창작 의혹을 제기했고,[27][28] 2000년에는 유관순의 생년, 사망 월일, 최종 형량, 시신 상황 등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점이 지적되었다.[28][31] 이에 따라 국정 교과서 내용도 사실에 맞게 수정되었고, 3·1 운동에서 유관순의 역할이 크지 않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역사 교과서에서 이름이 사라지기도 했다.[31]

3. 1. 초기 활동

생가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3000&code=kc_age_40 이복언니가 있음]) 본관은 고흥이다. 1905년 집을 근처 탑원리로 이사했다가 1907년 무렵 다시 가족을 따라 지령리(현 용두리)로 돌아왔다. 이후 공주영명여학교에서 2년간 교육을 받았다.[43]

유관순의 가족은 할아버지 류윤기와 삼촌 류중무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유관순 또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3] 총명한 아이였던 그녀는 성경 구절을 한 번만 들어도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졸업 후 교사로 일하는 조건의 장학금을 받아 이화학당(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대학에 진학하는 여성은 매우 드물었다.[2] 1919년 이화학당 재학 중, 3·1 운동의 시작을 목격했다. 그녀의 스승인 김란사는 유관순에게 학생 주도 단체인 이화 문학회(E-mun-hai)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고, 이 단체는 여러 차례의 평화적인 시위를 조직했다.[4] 유관순은 5명의 학생들과 함께 서울에서 여러 차례의 시위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10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화학당을 포함한 모든 학교가 일시적으로 폐쇄되자, 유관순은 천안으로 귀가했다.[6]

3. 2. 이화학당 재학과 만세 운동

유관순은 총명하여 성경 구절을 한 번만 들어도 암송할 수 있었으며, 졸업 후 교사로 일하는 조건으로 장학금을 받아 이화학당(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대학에 진학하는 여성은 매우 드물었다.[2] 1919년 이화학당 재학 중, 3·1 운동의 시작을 목격했다. 김란사 선생의 권유로 학생 주도 단체인 이화 문학회(E-mun-hai)에 가입하여 여러 차례의 평화적인 시위에 참여했다.[4]

1919년 3월 1일, 서울은 일본의 한국 강점에 항의하는 시위 행렬로 가득 찼다. 시위 주최자들은 이화학당에 유관순과 친구들에게 3월 5일에 있을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2] 유관순은 급우들과 함께 서울 중심부의 남대문으로 행진하여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학교 선교사들의 협상으로 곧 석방되었다.[2] 조선총독부는 1919년 3월 10일, 이화학당을 포함한[5] 모든 학교를 일시적으로 폐쇄했고, 유관순은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갔다.[6]

3. 2. 1. 이화학당

1916년 미국인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엘리스 샤프, Alice Sharp, 사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고, 1919년 이화학당 고등부로 진학하였다.[44] 교비생은 학비를 면제받고 졸업 후에 교사로 일하는 학생이었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고, 김장, 빨래 등 여럿이 함께 해야 하는 일들을 했다고 한다.[44] 학생들은 밥과 몇 가지 반찬으로 식사를 해결했으며, 주일에는 정동제일교회에서 감리교회 신앙생활을 하였다.[44]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이었던 유관순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3월 5일 서울 만세시위에도 참가하였다.[44] 이후 총독부 학무국의 임시휴교령으로 이화학당이 폐교되자 3월 8일 천안으로 돌아왔다.[44]

당시 대학에 진학하는 여성은 매우 드물었으나, 유관순은 졸업 후 교사로 일하는 조건의 장학금을 받아 이화학당(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했다.[2] 유관순의 스승인 김란사는 유관순에게 학생 주도 단체인 이화 문학회(E-mun-hai)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고, 이 단체는 여러 차례의 평화적인 시위를 조직했다.[4]

3. 2. 2. 만세 운동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은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44] 3월 5일 서울 만세시위에도 참가하였다.[2] 이후 총독부의 임시휴교령으로 이화학당이 폐교되자 3월 8일 열차편으로 천안으로 돌아왔다.[44]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천안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44] 조인원, 김구응(金球應, 성공회 병천교회 진명학교 교사) 등은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개신교 교회유림계를 규합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並川)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군중을 모았다. 당일 수천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맹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44]

일본 헌병 경찰은 군중에게 발포했고, 이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도 사망했다는 기록이 한국 국정 교과서에 있었으나,[28] 이는 2000년대에 수정되었다.[28]

3. 3. 아우내 만세 운동 가담과 체포

1919년 3월, 천안군 목천면에서 3.1 만세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 시위운동이 계획되었으나, 주동자들이 사전에 구금되어 실행되지 못했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교회 예배 후 마을 속장 조인원, 지역 유지 이백하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경성의 상황을 설명했다.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인근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는 연락원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11][12]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힌 유관순은 미성년자임을 감안한 일제의 선처 제안을 거절하고,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다.[5] 일본군 경찰은 유관순에게 자백하고 다른 시위 가담자를 찾는 데 협조하면 감형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거부했고 심한 고문에도 침묵을 지켰다.[13]

3. 4. 투옥과 사인

유관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유관순은 체포 후 처음에는 천안 일본군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공주경찰서로 이감되었다. 재판에서 유관순은 재판 절차가 일제 강점기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법에 의해 통제되었고, 일본인 판사가 배정되어 감독했다고 주장했다. 공정한 재판을 받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관순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에도 유관순은 독립운동을 계속 지지하여 감옥에서 심한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5]

1920년 3월 1일, 유관순은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고, 이로 인해 독방에 격리 수감되었다.[5]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감옥에서의 고문과 구타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다.[14] 2011년 11월에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된 4만 5천 명 중 7,500명이 일본 당국의 손에 사망했다.[8][15]

감옥에 있는 동안 유관순은 다음과 같이 썼다.

손톱이 빠지고 코와 귀가 찢어지고 다리와 팔이 부서져도 이러한 육체의 고통은 나라를 잃은 고통과 비교할 수 없다. [...] 내가 후회하는 것은 단지 나라에 몸 바친 것 외에 더 많은 것을 하지 못한 것뿐이다.|한국어[2]

사망 시각과 확실한 사망 장소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이화학당 시절 동급생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 사망 후 시신을 받았을 때 사지가 절단되지 않았다고 한다.

3. 4. 1. 재판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28]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 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하였다.[28]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 점령을 규탄·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였다.[28]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비난하기 위해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28] 국정 교과서에서는 유관순이 1심에서 폭력 시위를 주도한 죄(내란죄)로 징역 3년이 선고되었고, 항소심 재판에서 재판장과 말다툼을 하고 재판장에게 재판정 의자를 던져 법정모독죄로 7년 형을 받았다고 가르쳐 왔으나,[28] 2000년에 경성복심재판소(항소심)의 판결문과 수형자 기록표에서 이는 오류이며 3년형을 받았을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28] 일본 형법에는 법정모독죄가 없으며, 내란죄의 경우 고등법원에서 특별 재판이 되고 징역형이 아니라 금고형이 된다.[28] 실제로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고 징역 3년이 되었지만,[28] 감형되어 최종적으로 징역 2년 6개월이 되었다.[30] 재판소의 공식 기록인 판결문(다이쇼 8년 6월 30일 선고)과 유관순의 수인 식별표 자료에 따르면, 내란죄 적용은 없었고 징역 2년 6개월로 되어 있다.[28] 죄명도 주요 선도자였다는 것, 연설을 했다는 등은 자료상으로 확인할 수 없다.[28]

3. 4. 2. 징역형 선고와 옥사

유관순은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45]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으로 인한 특사로 형이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에도 옥중에서 독립만세를 외쳐 고문을 당했고, 1920년 9월 28일 출소를 하루 앞두고 방광 파열로 옥사하였다.[14]

체포 후 유관순은 천안 일본군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공주경찰서로 이감되었다. 재판 과정은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법에 의해 통제되었고, 일본인 판사가 배정되었다. 유관순은 공정한 재판을 받으려 노력했으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하여 감옥에서 심한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5]

1920년 3월 1일, 유관순은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여 독방에 격리 수감되었다.[5] 결국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감옥에서의 고문과 구타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다.[14]

3. 4. 3. 유관순 부모의 사인

1987년에 작성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열아홉 명이 아우내 만세 운동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자료에는 유중권 바로 옆에 "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하는데, 유중권과 같다는 기호(〃)로 표기되어 있어 이소제로 추정된다. 해당 자료에 유중권과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 날짜, 상황에서 순국했다는 내용은 공훈록 기록과 일치한다.[28]

4. 사후

유관순이 사망한 이틀 뒤,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신 인도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이화학당의 외국인 교직원들이 유관순의 옥중 사망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서대문형무소는 마지못해 월터 교장에게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감리교회에서 김종우 목사가 장례예배를 집례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46]

1936년 택지 조성 등을 목적으로 이태원 공동묘지를 망우 역사 문화공원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무연고묘로 처리되어 화장된 것으로 추정된다.[46] 현재 망우 역사 문화공원 내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묘역에 유관순을 추모하고 있다.

1945년 광복 후 충청남도천안시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1946년부터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봉조박인덕이화학당 출신 인사들에 의해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 즈음,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유관순의 관을 인수한 이들이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든 시체가 토막으로 참살되었다는 소문 등이 퍼졌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후일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유관순의 유해가 망실된 관계로 1989년 10월 12일 그녀의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매봉산 중턱에 가묘인 초혼묘(招魂墓)를 세웠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열사기념관(柳寬順烈士記念館)을 개관하여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2003년 문을 열었다.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전후 친일파 비판을 우려한 이화여자대학교에 의해 미화되었다.[32]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3등급 "독립장"을 수여하면서 독립열사로 불리게 되었다.

5. 연보


  • 1902년 12월 16일 : 충청남도 천안 병천면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이복 언니가 있음)
  • 아버지 유중권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흥호학교 설립에 참여했고, 작은아버지는 감리교회에서 일요일에만 교회에 올 수 있는 선교사들을 도와서 평일에 교회 일을 맡았다.
  • 1916년 : 공주에서 전도하던 감리교 선교사 사 부인(미국 이름 엘리스 샤프)의 권유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샤프 부인은 집안 사정이 어려운 유관순이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 1918년 : 보통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 1919년 3월 1일 :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여했다. 학생들이 다칠 것을 걱정한 프라이 교장이 만류했으나, 학교 담을 넘어 3·1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 1919년 3월 8일 : 일제가 3월 10일부로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리자, 같이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갔다.
  • 1919년 4월 1일 : 천안 아우내(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지휘했다. 이 때 부모가 목숨을 잃었고, 본인은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 1919년 5월 9일 : 공주 지방법원의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 1919년 6월 30일 : 경성 복심법원의 2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었다.
  • 1920년 9월 28일 :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 1920년 10월 12일 :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당시 서대문 감옥에서는 고문 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시신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화학당 교직원들의 강한 항의로 시신을 내주었다.
  • 1920년 10월 14일 :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1937년 이태원 공동묘지가 택지로 조성되면서 이장하는 과정에서 묘를 잃어버려, 유관순 기념사업회(1947년에 조직)에서 1989년 10월 12일에 생가 뒷산인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하였다.[47]

6. 논란과 의혹

유관순에 대한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여러 의혹과 논란이 존재한다.


  • 생애 관련 기록 불일치: 유관순의 출생 및 사망 연월일, 이름의 한자 표기, 형제 수, 이화학당 입학 연도 등이 기록마다 다르다.[27][28] 2000년에는 유관순의 생년, 사망 월일, 최종 형량, 시신 상태가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점이 지적되었다.[28][31] 예를 들어 출생 연도는 1904년이 아닌 1902년이고, 징역 7년이 아닌 3년 형을 받았으며, 외동딸이 아니었다.[28]
  • 과장된 항일 행적: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비난하기 위해 유관순의 항일 행적이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있다.[28] 국정 교과서에서는 유관순이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져 법정모독죄로 7년형을 받았다고 가르쳤지만,[28] 2000년 경성복심재판소(항소심) 판결문과 수형자 기록표에 따르면 이는 오류이며, 실제로는 3년형을 받았다.[28] 일본 형법에는 법정모독죄가 없으며, 내란죄는 고등법원에서 특별재판을 받고 징역형이 아닌 금고형이 된다.[28]
  • 정치적, 종교적 이용: 유관순 사후 그의 행적이 정치적, 종교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특히, 일부 개신교 인사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덮거나, 개신교 선교 전략에 유관순을 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8][49] 1945년 광복 이전에는 무명이었던 유관순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친일파로 지목된 박인덕신봉조의 대화 때문이었다.[27][31] 이승만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경쟁에서 3·1운동의 계승자라는 명분을 얻기 위해 유관순 이야기를 이용했고, 이화학당 역시 일제강점기 협력자로 비난받는 것을 우려하여 유관순을 학교 출신 애국자로 만들었다고 한다.[32]

6. 1. 형량에 대한 중언부언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은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 제도였으며, 유관순의 판결문은 징역 3년을 선고한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만 남아있어 1심 형량은 논란이 있었다.[45] 유관순과 1년 가까이 함께 복역한 어윤희는 '유관순이 6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고, 조병옥의 동생 조병호는 '부친(조인원)이 유관순과 함께 7년형을 받았다'고 회고(실제로는 그의 숙부 유중무와 같은 5년형)하는 등 관련자들의 증언도 일치하지 않았다.[45] 2000년대 중반에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가 발견되어 공개됨으로써 유관순의 1심 선고형은 '징역 5년'임이 확인되었다.[45]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비난하기 위해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28] 국정 교과서에서는 유관순이 1심에서 폭력 시위를 주도한 죄(내란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져 법정모독죄로 7년형을 받았다고 가르쳐왔다.[28]

그러나 2000년에 경성복심재판소(항소심) 판결문과 수형자 기록표에서 이는 오류이며 3년형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졌다.[28] 일본 형법에는 법정모독죄가 없으며, 내란죄는 고등법원에서 특별재판을 받고 징역형이 아닌 금고형이 된다. 실제로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고 징역 3년이 되었지만,[28] 감형되어 최종적으로 징역 2년 6개월이 되었다.[30] 재판소의 공식 기록인 판결문(다이쇼 8년 6월 30일 선고), 유관순의 수인 식별표 자료에는 내란죄 적용 등이 없고, 징역 2년 6개월로 되어 있다.[32]

6. 2. 정치적, 종교적 목적의 악용 논란

유관순 사후, 그의 행적이 정치적 또는 종교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특히, 일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덮거나, 개신교 선교 전략에 유관순을 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8][49]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인 김상구는 박인덕, 전영택 등 일부 기독교인들이 유관순을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관순이 박인덕과 같은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이후 자신들의 과거를 숨기고 개신교 선교를 위해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비판했다.[48]

1945년 독립 이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관순은, 친일파로 지목된 박인덕신봉조의 대화를 계기로 알려지게 되었다.[27][31]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학당의 후신) 교장이었던 신봉조박인덕에게 이화 출신으로 국가에 공헌한 인물이 있는지 물었고, 박인덕은 자신의 제자였던 유관순을 언급했다. 이후 박인덕전영택은 『순국소녀 유관순전』이라는 전기를 통해 유관순을 소개했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그의 무용담을 홍보했다.[27][31]

뉴스위크 일본어판(2014)에 따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경쟁에서 3·1운동의 계승자라는 명분을 얻기 위해 유관순 이야기를 이용했고, 이화학당 역시 일제강점기 협력자로 비난받는 것을 우려하여 유관순을 학교 출신 애국자로 만들었다고 한다.[32] 유관순은 3·1운동 당시 많은 체포자 중 한 명이었지만, 친일파로 전향한 경력이 없어 미화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32]

2000년대 이후 유관순의 생애와 관련된 여러 기록에서 오류가 발견되었고, 그의 역할이 과장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28][31] 이에 따라 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의 이름이 삭제되기도 했다.[31][34]

6. 3. 이화학당 출신 인사의 은폐 의혹

1945년 일제강점기로부터 독립한 이후, 유관순이 한국인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학당의 후신) 출신 인사인 박인덕신봉조의 대화였다.[27][31] 당시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신봉조는 박인덕에게 "이화 출신으로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고, 박인덕은 자신의 제자였던 유관순을 언급했다. 이후 박인덕과 전영택이 『순국소녀 유관순전』이라는 전기를 통해 유관순을 소개하면서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27][31]

박인덕과 신봉조는 광복 후 친일파로 지목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27] 이들은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유관순의 무용담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31] 이를 통해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덮고,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내세워 학교의 명성을 유지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32]

이승만 전 대통령 또한 유관순을 3·1 운동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데 적극적이었다.[32] 당시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으로 알려진 김일성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3·1 운동의 계승자라는 명분이 필요했다. 이승만과 이화학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유관순은 한국 건국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존재로 부각되었다.[32]

6. 4. 유관순 우상화 배경 관련 의혹

1945년 독립 이전에는 무명이었던 유관순이 한국인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 행위로 인해 독립 후 친일파로 지목된 박인덕신봉조라는 두 명의 이화학당 출신 여성의 대화가 계기였다.[27][31]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학당의 후신) 교장이었던 신봉조는 1946년 박인덕에게 "이화 출신으로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박인덕은 자신의 제자이자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유관순을 언급했다. 이후 박인덕과 전영택은 『순국소녀 유관순전』이라는 전기를 통해 유관순을 소개하면서 유관순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27][31]

박인덕과 전영택은 유관순을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를 구한 영웅인 잔 다르크에 비유하며 유관순을 신화적인 존재로 묘사했다.[51] 그러나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으로 사망한 사람은 대략 7천500명으로, 당시 사람들이 유독 유관순만을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가 없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51]

뉴스위크 일본어판(2014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광복 후 귀국한 이승만은 항일 활동을 했다고 알려진 김일성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3·1 운동의 계승자라는 명분이 필요했다. 이승만은 유관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모교인 이화학당의 입장과 뜻이 맞아떨어져 유관순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이화학당은 일제강점기에도 우수한 인재를 배출한 명문 학교였으나, "일제의 협력자"라는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유관순을 학교 출신의 애국자이자 한국 건국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존재로 만들었다.[32] 유관순은 3·1 운동 당시 많은 체포자 중 한 명이었지만,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리 친일파로 전향한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미화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32]

1947년 이승만은 이화학당 관계자들과 함께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1948년에는 "3·1 운동 정신을 계승했다"는 서문을 담은 헌법을 공포하며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2000년대 이후 유족과 연구자들로부터 유관순 이야기가 창작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었지만, 1948년에 제작된 영화 속 이미지가 그대로 굳어져 유관순의 이미지가 되었다. 헌법 서문은 여러 차례 개정에도 살아남았고, 그 후에도 한국인의 유관순 이미지는 1948년 제작된 영화와 국정 교과서에서 비롯되었으며, 공공기관의 훈장 수여와 생가 복원 등 신화화는 계속되었다.[32]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유관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수여했다.[33] 2019년에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1등급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유관순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에 따르면, 각종 기록에서 유관순의 출생·사망 연월일, 이름의 한자 표기, 형제 수, 이화학당 입학 연도 등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27][28] 2000년 이후에는 유관순의 생년, 사망 월일, 최종 형량, 시신 상태 등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점이 지적되었다.[28][31] 출생 연도는 1904년이 아닌 1902년이고, 징역 7년이 아닌 3년 형을 받았으며, 외동딸이 아니었다는 사실 등이 수정되었다.[28]

7. 가족 관계

관계이름
양증조부유영직(1821년 ~ 1921년)
증조부유영일
조부유윤기(1845년 3월 28일 ~ 1919년 6월 16일)
유중권(1863년 12월 12일 ~ 1919년 4월 1일)
이소제(1875년 12월 4일 ~ 1919년 4월 1일)
오빠유우석(1899년 6월 14일 ~ 1968년 5월 28일)
올케?(? ~ 1913년 5월 27일)
올케조화벽(1895년 12월 3일 ~ 1975년 9월 3일)
동생유인석(1905년 1월 12일 ~ 1977년 6월 24일)
동생유관석(1911년 1월 10일 ~ 1943년 3월 19일)
숙부유중무
사촌오빠유경석
사촌올케노마리아
5촌 조카유제경
사촌언니유예도
사촌동생유정석
사촌동생유인석
친척유빈기


8. 유관순상/유관순 횃불상

충청남도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그 얼을 오늘에 되살려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고로 국가와 지역사회발전에 이바지한 여성(여학생) 또는 단체를 전국에서 선발한다. 유관순 횃불상은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에게 수상한다.[52]

9. 유관순이 등장한 작품

유관순은 여러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다뤄졌다.

9. 1. 영화


9. 2. 애니메이션

10. 기타

수원 출신 이선경은 3.1 운동 이후 구국민단을 조직해 활동하다 1920년 8월 체포돼 1921년 4월 12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으나 같은 달 21일 수원면 매산리(현 매산동)에서 사망했다.[53] 8개월여 옥고를 치르며 심한 고문으로 법정에 나가지 못해 궐석재판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석방 9일 만에 사망했다. 그의 별명은 '수원의 유관순'이었다.[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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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웹사이트 한국 銅像が立った殉国少女「柳寛順」虚像と実像 進む歴史書き換え https://www.koreawor[...] 2022-01-27
[34] 웹사이트 친일파가 만든 영웅? 교과서에 '유관순 누락' 논란 https://news.nate.co[...] 2022-01-27
[35] 뉴스 「柳寛順への日本の蛮行、誇張多い」 https://japanese.joi[...] 2002-02-26
[36] 뉴스 柳寛順 殉国100年の記念切手 https://jp.yna.co.kr[...] 2020-09-28
[37] 뉴스 『3・1運動的英雄不是柳寛順,而是金日成的父親金亨稷?』 http://www.dailynk.c[...] Daily NK 2008-03-01
[38] 웹사이트 현재 한국 남자 프로배구 구단인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가 홈 구장으로 쓰고 있다.
[39] 뉴스인용 헌재·대법 ‘호적성씨 표기’ 올 상반기 결론 http://www.seoul.co.[...] 2007-05-04
[40] 간행물 호적에 성명을 기재하는 방법 (대법원호적예규 제722호)
[41] 법률 2003헌마95 http://www.law.go.kr[...]
[42] 뉴스인용 “류관순→유관순 열사로 바꿉니다” http://www.donga.com[...] 2014-03-14
[43] 웹인용 디지털 천안문화대전 유관순 http://cheonan.grand[...]
[44] 웹인용 우리 역사넷 http://contents.hist[...]
[45] 뉴스 유관순 열사 1심형량은 징역 5년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7-02-26
[46] 뉴스 이태원공동묘지 이장공사 착수 / 이태원무연묘 망우리에 합장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6-04-09
[47] 웹사이트 유관순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www.yugwansun[...]
[48] 뉴스 "종교법인법 제정만이 종교계 투명해지는 길"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11-06-27
[49] 뉴스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http://www.bulkyo21.[...] 불교닷컴 2011-06-24
[50] 간행물 3·1운동, 숨겨진 여성 독립운동가 많았다 http://theme.archive[...] 국가기록원 2016-03
[51] 뉴스 3.1절을 보내며…유관순 열사가 과대평가되었다는데 http://rki.kbs.co.kr[...] KBS 2012-03-04
[52] 보도자료 '유관순상' 후보자 추천하세요 http://210.95.181.39[...] 충청남도 여성정책가족관 2018-10-23
[53] 뉴스 경기도의 유관순 `이선경` 독립유공자 신청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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