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천관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천관우는 언론인, 역사 연구가, 저술가로, 충청북도 제천 출신이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한국일보, 조선일보, 세계일보, 동아일보 등 여러 언론사에서 편집국장과 주필을 역임했다. 4.19 혁명 이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나,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관직을 맡아 변절 논란에 휩싸였다. 저서로는 《썰물 밀물》, 《언관사관》, 《한국사의 재발견》 등이 있으며, 금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서예가 - 김종필
    5·16 군사정변 주역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 기여와 '김-오히라 메모' 논란, 9선 국회의원, DJP 연합을 통한 총리 재임 등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위주의 시대의 어두운 면과 지역주의 정치의 상징으로도 평가받는 정치인이다.
  • 대한민국의 서예가 - 김영삼
    김영삼은 1929년 거제 출생으로, 제14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군사 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금융실명제 실시 등의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나 IMF 외환 위기를 겪고 2015년 서거했다.
  • 영양 천씨 - 천성관
    천성관은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검사 시절 주요 사건 수사를 지휘하고 검찰 주요 보직을 역임했으나, 검찰총장 후보자 시절 각종 비리 의혹으로 도덕성 논란을 겪으며 사퇴하였다.
  • 영양 천씨 - 천경자
    천경자는 전라남도 고흥 출신의 대한민국 화가이자 수필가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여 '길례언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등 다수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미인도' 위작 사건 이후 절필 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했다.
  • 제천시 출신 - 이원종 (1942년)
    이원종은 1942년 출생하여 체신부, 서울특별시청 등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해 용산구청장, 성동구청장, 서울특별시장,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하고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지낸 자유한국당 소속의 정치인이다.
  • 제천시 출신 - 유인태
    유인태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 후 국회의원,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국회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천관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천관우
원어 이름千寬宇
출생일1925년 8월 10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제천
사망일1991년 1월 15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
국적대한민국
직업역사가, 저술가, 대학 교수
필명호(號)는 후석(後石)
장르역사학, 서예, 수필, 저술
언어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소속前 건국대학교 초빙교수
활동 기간1933년 ~ 1991년
학력서울대학교 사학과 학사
종교유교(성리학)
수상

2. 생애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천관우는 1951년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한국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여러 언론사를 거치며 기자,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등으로 활동했다. 1968년에는 『신동아』 필화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0년 언론계를 떠난 후에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나, 1981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 회장을 맡으면서 변절 논란에 휩싸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회 위원, 국정 자문위원 등의 관직을 맡아 민주화 진영 및 언론계와 멀어졌고, 1991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썰물 밀물》, 《언관사관》, 《한국사의 재발견》, 《가야사연구》 등이 있다.[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에서 태어난 천관우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동네에 소문이 났으며, 아홉 살 때는 쓴 서예 작품이 「동아일보」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사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51년 1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천관우는 "세 끼 밥을 먹기 위해 친구의 연줄로 대한통신 기자가 되었다."고 회고했다.[2] 이듬해 9월까지 기자 생활을 이어갔다. 유네스코 기금으로 같은 해 9월부터 6개월 동안 미국 미네소타 대학 신문학과에서 연수했는데, 이때 쓴 '그랜드 캐년'은 한때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필력이 뛰어났다.

2. 2. 언론인 활동

천관우는 1951년 1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세 끼 밥을 먹기 위해 친구의 연줄로 대한통신 기자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유네스코 기금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 신문학과에서 연수할 때 쓴 '그랜드 캐년'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2]

195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조사부 차장으로서 칼럼 '지평선'을 맡았다. 2년 뒤 조선일보로 옮겨 1958년 33세의 나이로 편집국장이 되었다. 「조선일보」에서 '만물상' 칼럼을 만들었는데, 당시 자유당 정권의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비판하기도 했다.[2]

1959년 한국일보로 돌아갔다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세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제호를 「민국일보」로 바꾸고 '샘물'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이혜복 전 대한언론인협회 회장은 천관우에 대해 "역사학자로서의 해박한 지식과 언론인으로서의 예리한 판단력, 섬세하고 치밀한 문장력을 구사했다"고 회고했다. 천관우는 잦은 언론사 이직에 대해 "열악한 언론사 환경에서 젊은 언론인들 사이에 유행 같았던, 독립불기(獨立不羈) 정신의 표출"이라고 설명했다.[2]

1961년 3월 서울신문 주필, 1963년 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1964년 9월 「신동아」 주간, 1965년 12월 「동아일보」 주필 겸 이사를 역임했다. 1966년 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이 되었다. 1968년 『신동아』 필화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2]

1970년 「동아일보」 상근이사로 복직했지만 이듬해 퇴임하며 언론계를 떠났다. 1981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나, 송건호는 이를 변절이라 비판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관직을 맡아 민주화 진영과 언론계에서 멀어졌다.[2]

2. 3. 민주화 운동 참여와 변절 논란

1970년 「동아일보」 상근이사로 복직했지만 이듬해 12월에 퇴임하면서 다시는 언론 관련 직업을 갖지 않았다. 1971년 4월 19일에 김재준·안병무·이병린 등과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였고, 1972년 서울대생 4명의 내란 예비음모사건과 관련해 서울형사지법은 공판에서 함석헌, 김재준 등과 함께 37명의 증인 중 한 명으로 천관우를 채택하였다. 1973년 11월 5일 김재준·함석헌·지학순·법정·이호철 등 10명과 함께 민주적 제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듬해 1월 13일 함석헌, 안병무, 문동환, 김동길, 고은, 법정, 계훈제 등과 함께 연행되어 조사받기도 했다. 1974년 11월에는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하였다.

1981년 5월 14일 민족통일중앙협의회가 발족하여 천관우가 그 회장을 맡게 되는데, 한때 그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송건호는 이를 변절이라 혹평하였다.[2] 전두환 정권 아래서 국토통일원 고문,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회 위원, 국정 자문위원 등의 관직을 맡았던 경력으로 민주화 진영은 물론 언론인들까지 그와 발길을 끊었고, 학계와 언론계에서 거의 매장당하다시피 한 천관우는 1991년 세상을 떠났다.

2. 4. 역사 연구와 저술 활동

천관우는 해방 이후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사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1년 1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세 끼 밥을 먹기 위해 친구의 연줄로 대한통신 기자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유네스코 기금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 신문학과에서 연수하며 쓴 '그랜드 캐년'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95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논설위원이 되었고, 조사부 차장으로서 칼럼 '지평선'을 맡았다. 2년 뒤 조선일보로 이직하여 1958년 33세의 나이로 편집국장이 되었다. 조선일보에서 '만물상' 칼럼을 만들었고, 자유당 정권의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9년 한국일보로 돌아갔다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세계일보로 옮겨 편집국장이 되었다. 세계일보의 제호를 민국일보로 바꾸고 '샘물'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이혜복 전 대한언론인협회 회장은 천관우가 "역사학자로서의 해박한 지식과 언론인으로서의 예리한 판단력, 섬세하고 치밀한 문장력을 구사"했다고 회고했다.

1961년 3월 서울신문 주필, 1963년 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1964년 9월 신동아 주간, 1965년 12월 동아일보 주필 겸 이사를 역임했다. 1966년 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이 되었다.(~1970년) 1968년 '차관' 문제 관련 기사로 신동아 10월호가 문제가 되어 동아일보 기자들이 연행되었고, 천관우도 구속되었다.

1970년 동아일보 상근이사로 복직했지만 이듬해 12월 퇴임하며 언론계를 떠났다. 1972년 서울대생 4명의 내란 예비음모사건과 관련해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1973년 11월 5일 민주적 제질서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1974년 1월 13일 연행되어 조사받았다. 11월에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하였다.

1981년 5월 14일 민족통일중앙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나, 송건호는 이를 변절이라 비판했다.[2] 전두환 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회 위원, 국정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여 민주화 진영과 언론계에서 멀어졌다. 1991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썰물 밀물》, 《언관사관》, 《한국사의 재발견》,《가야사연구》 등이 있다.

3. 학력

4. 상훈과 추모

천관우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한국출판문화상(저작상)과 외솔상을 수상하였다.

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 서적 학문의 길 인생의 길 역사비평사 2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