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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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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동길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맹산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고려대학교 강사를 겸임했고, 유신정권 시절 사회 풍자를 통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정치 활동을 시작,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보수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언론 기고 및 강연 활동을 이어갔으며, 2022년 10월 4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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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정치인)
기본 정보
김동길
이름김동길
원어 이름金東吉
출생일1928년 10월 2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맹산군
사망일2022년 10월 4일 (94세)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신동
국적대한민국
직업영문학자
대학 교수
정치인
사회운동가
정치학자
정치평론가
시사평론가
작가
형제누나 김옥길(前 이화여대 총장)
누이동생 2명 (모두 기혼)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장로)
학력
학력연세대학교
보스턴 대학교
경력
경력연세대학교 부총장
제14대 국회의원
정치 경력
정당통일국민당
자유민주연합
의원 선수1
의원 대수14
지역구서울 강남구 갑(14)
기타 정보
배우자없음 (독신)
수상2005년 올해의 연세대 연문인상
2017년 우남 이승만 학술상
웹사이트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Freedom Watch
山南 김동길 哲學博士의 링컨 사상연구소
국회 정보
소속 정당통일국민당
자유민주연합
임기 시작1992년 5월 30일
임기 종료1996년 5월 29일
이전
이후

2. 생애

김동길은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관련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연세대학교 교수, 교무처장, 부총장을 역임하고, 조선일보사 논설고문, 제14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을 지냈다. 1988년부터 방송에 출연하여 강연가나 사회자로 활동했으며, "이게 뭡니까?"라는 발언은 희극배우 최병서가 풍자하여 화제가 되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고,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979년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복직했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에 복직했다. 1985년 신문 칼럼에서 "3김은 이제 정계를 은퇴하고 낚시나 해야 한다"는 "3김 퇴진론"을 제기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1991년 강경대 사망 사건에 대해 "강경대를 열사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발언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 교직을 사임했다.

1992년 정주영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련 공천에서 탈락하여 탈당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 한민족원로회 공동의장을 지냈다.

2011년부터 TV조선에서 코멘테이터로 활동했다.[4]

2022년 2월 코로나19에 감염되어 회복되었으나, 3월부터 호흡기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했고, 2022년 10월 4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4]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28년 10월 2일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1남 4녀 중 장남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풍천(豊川)이며 아호(雅號)는 산남(山南)이다. 아버지는 장을 지냈다. 김옥길이화여대 총장은 그의 친누나이다. 1946년 6월 월남했다.[14]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잠시 북한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나, 김일성의 정권 장악 이후 월남했다.

1951년에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54년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15] 에반스빌 대학교 사학과,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4][5][6]

2. 2. 교육 활동 및 민주화 운동

1928년 10월 2일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났다.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후 1954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15]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60년부터 연세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 1961년부터 연세대학교 교수를 지내며 1962년까지 고려대학교 강사도 겸직하였다. 그는 신랄한 풍자와 해학으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교수였다.

연세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승진하였다. 연세대 교수로 재임하며 사회 풍자를 통해 부패를 비판하다가 조사를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2년에는 연세대 교무처 처장을 지냈다.

유신정권 시절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에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수필을 발표, 대통령이 된다면 부모도 섬기지도 않던 놈들이 청와대에 가서 아부하며 각하 각하 하는 것들을 차라리 모두 잡아다가 서해의 무인도에 보내 아첨도라 하겠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기도 했다. 출감 후 소학교 접장하던 사람도 18년째 대통령을 하는데 대학 교수가 대통령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어찌 죄냐며 항변하였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혐의는 제자인 김영준·김학민 두 학생에게 "긴급조치 1호로써 박정희 씨는 스스로 묘혈을 판 것이다."라고 말하여 긴급조치를 비방하고, "학생 시위를 치밀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여 박 정권을 타도하라."고 격려하여, 내란을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16] 변호사 한승헌을 선임했으나 최종 심문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가톨릭주교, 박형규 목사, 김찬국 박사 등과 함께 배후지원 혐의로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전부 구속되었으며 일본인 관련자 2명 등은 20년의 중형에 처해졌으나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모두 석방되었다.

법원은 김동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였다. 김동길 교수는 1심 선고 당일에 항소를 포기하며 "법이 법 같아야지..."라는 언급을 하였다.[16] 1975년 3월 1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동길·김찬국 교수의 석방을 환영하는 모임이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17]

1975년 9월에는 양일동, 백기완과 함께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그 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소위 ‘정치 교수’로 불리며 학원 자유화 관련 투쟁에 앞장섰다.

1987년 학생운동권이 동료와 후배들의 분신 자살을 강조하며 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자 그는 학생운동가들이 동료들을 이용한다며 비판하였다. 또한 민족 해방 계열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학생운동가들을 비판, 이후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2. 3. 3김 퇴진론과 학생운동 비판

1985년 신문 칼럼에서 "3김은 이제 정계를 은퇴하고 낚시나 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40대가 기수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른바 "3김 퇴진론"을 제기하여 세간에 파문을 일으켰다.[4] 1987년 학생운동권이 동료와 후배들의 분신 자살을 강조하며 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자 그는 학생운동가들이 동료들을 이용한다며 비판하였다. 또한 민족 해방 계열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학생운동가들을 비판, 이후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언론과 방송에 강사로 초빙되어 강연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91년 시위에 참여한 강경대가 경찰의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에 대해, 강의 중 "강경대를 열사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부정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받아 교직을 사임하고, 자신이 창립한 태평양시대위원회의 이사장을 지냈다.[4][5][6]

2. 4. 정치 활동

1991년 정치 참여를 선언하고 새한당을 창당한 뒤 정주영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기 위하여 만든 보수 성향의 야당인 통일국민당에 합류했고 1993년에는 대표에 추대되었다.[14]

제14대 총선에서 원내진입에 성공했으나, 14대 대선에서 정주영이 패배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통일국민당의 대표로 추대됐으며, 이 과정에서 당사 자금 마련을 놓고 정주영과 심한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1993년 통일국민당 대표에 재선출되고 이후 박찬종신정치개혁당과의 합당으로 신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고 1995년신민당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면서 자유민주연합 소속이 되었다.

1994년 신민당 총재 자리를 놓고 벌어진 각목 전당대회 파동과 이어진 각서 파동을 계기로 정치 인생에 최대 위기를 겪었다.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에 위촉되지만 자민련 전국구 공천헌금설으로 인해 박찬종, 김종필과 잇달아 갈라지며 그 해 1994년 5월, 차기 총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2년 후 1996년 3월 5일 자유민주연합 탈당을 선언했다.

1992년 정주영과 접촉하여 정계에 입문, 같은 해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에서 통일국민당 공천으로 당선되었으며, 국민당 대표 최고위원, 신민당 대표 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고문 및 선대위원을 역임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련의 공천 탈락으로 탈당하고 정계에서도 은퇴했다.

2020년 1월에 국민혁명정치학교장으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고취하며, 전광훈 목사와 함께 이승만광장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연설하였다.[26]

2. 5. 정계 은퇴 이후

1990년대 후반 국민행동본부,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 보수주의 단체에서 반공 시민단체 원로로 활동하면서 반 김대중 활동과 강연에 활발하게 참여하였으며, 김정일북한 정권과 조선로동당, 조선인민군, 김대중노무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햇볕정책》 등을 비판하는 강연과 활동을 하였다.[14]

2001년 2월 10일 서울YMCA 신관 대강당에서 조만식을 추모하는 고당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고당기념회 창립 25주년 기념 대강연회에 참석, 인도 지도자 간디와 한국 지도자 고당 조만식의 민족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2009년 4월 검찰 수사에서 뇌물 수수설을 부인하는 노무현을 비판하며 대국민 사과 차원에서 자살하거나 재판받고 복역하라고 주장했다. 그는 '노무현 씨가 남의 돈을 한 푼도 먹지 않았다고 끝까지 우기기는 어렵게 되어 가는 듯하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기의 과오를 시인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는 자가 그토록 비겁하게 굴어서야 되겠느냐[18]'며 노무현의 부도덕성을 질타했다. 또 '인류의 역사의 어느 때에나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인데 진실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 못하게 마련이며 그런 자가 공직의 높은 자리에 앉으면 많은 백성이 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씨는 정말 딜레마에 빠졌다'고 했다. 이어 '그가 5년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정권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과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차라리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는 없겠다'고 노무현을 비판했다.[18][19]

2009년 5월 노무현경남 김해 사저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하자, 그의 노무현 비판 발언은 결국 문제가 되었다.[19][20] 친노 성향의 네티즌은 그의 비판을 막말이라며 역비판을 하였다.[19][20][21] 2009년 6월 초 김동길은 노무현국민장에 대해 차라리 가족장을 권했어야 했다며 국민장을 한 이명박 정부를 질타하였다.[22] 방송 3사가 노무현을 순교자로 만들었다고도 비판하였다.[23]

2009년 7월 조갑제와 함께 대구에서 공동강연회를 열었는데 2천 명의 인파가 몰렸다.[24]

2009년 8월 당시 김영삼김대중을 찾아가 화해를 하자 그는 "이번에 벌어졌다는 '화해'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며 김영삼을 비난하였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김대중 씨를 찾아가서 그가 죽기 전에 사과할 일이 과연 있느냐"며 김영삼을 비판하였다.[25] 이어 "사과를 하기 전에는, 사과를 받기 전에는 '화해'가 성립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한 뒤, "나라의 큰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면 도대체 국민은 무슨 꼴이 되냐"며 강하게 비판하였다.[25]

2020년 1월 국민혁명정치학교장으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고취하며, 전광훈 목사와 함께 이승만광장에서 여러 차례 연설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연설하였다.[26]

2022년 2월 코로나19에 확진된 후 회복했지만, 같은 해 3월 건강 이상으로 호흡기가 나빠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오랜 투병 끝에 2022년 10월 4일 사망하였다.

2. 6.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논란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후, 김동길이 4월 1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을 해야죠》라는 글과, 월간조선 2009년 5월호에 기고한 〈링컨을 존경한다더니, 이게 뭡니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실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부각되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27][28]

김동길 측에서는 오해라 주장하였고 차라리 당당하게 하라는 의미였다면서 하루 이틀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사안 또한 크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으며 해당 관련 논란에 관한 것도 김동길은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29]

그는 5월 25일 다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는 노무현정신 계승 주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2009년 6월 당시 그는 "우리 국민은 눈을 의심하고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국민이란 잘 잊어버리고 어리석기만 한 존재로 오해하지 말라"고 질타했다.[32] 이어 지난 2006년 당시 상황을 언급하며, 당내에서 극명하게 갈리었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곱씹었다. "2006년 지방선거에 참패하고 민주당과 그 전신인 열린 우리당은 노 씨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하자 되도록 노 씨와 인연을 멀리하고자 노력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그런 민주당에서 정세균 대표가 돌연 태도를 바꿔 '노무현 정신 계승'을 부르짖고 나온다면 이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인에 대한 당의 태도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의 소리가 당내 일각에서도 일어났다고 들었다."라고 하였다.[32]

노무현에 대해서는 노무현이 사망 직전인 2009년 5월호 『월간조선』의 기고문에서 "유서 한 장 남기고 장자연처럼 목을 맨다거나, 일본 사무라이처럼 배를 가르는 용기도 없을 것이다"라는 글을 썼으며, 자신의 홈페이지 글에도 "국민에 대한 사죄로 자살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가서 복역해야 한다"라고 썼는데, 그 후에 노무현은 정말로 자살했다.[9][10] 8년 후 2017년 대선 직후, 김동길은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노무현에 대해 "나는 그런 식으로 끝난 노무현에게 항상 죄송했다"라고 쓴 한편, 당선된 문재인에 대해서는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하나, '임기가 끝나도 자살하지 마라', 이 한마디뿐"이라고 썼다.[9]

2. 7. 사망

2022년 2월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잠시 회복되었으나, 3월부터 호흡기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했다. 2022년 10월 4일 지병으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94세였다.[4]

3. 기타 활동

김동길은 연희대 영어영문학과학사 학위한 이후, 미국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관련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 귀국 이후 시민사회단체 운동과 언론, 방송을 통한 강연 활동과 아울러 연세대학교 교수, 연세대 교무처 처장, 연세대 부총장을 역임하였고 조선일보사 논설고문,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14]

1988년 이후부터는 방송에 출연하여 강연가 혹은 사회자로 진행하였으며, 사석에서 비평을 하던 중 우발적으로 발언한 "이게 뭡니까?"라는 이 발언을 훗날 희극배우 최병서가 풍자하여 한때 세간에서 화제가 되었다. 코미디언 최병서와는 친구 사이로, 제14대 총선에서의 당선을 자신의 성대모사를 많이 선보인 최병서 덕분에 선거 운동을 하기 쉬웠다고 하여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11]

노무현에 대해서는 노무현이 사망 직전인 2009년 5월호 『월간조선』의 기고문에서 "유서 한 장 남기고 장자연처럼 목을 맨다거나, 일본 사무라이처럼 배를 가르는 용기도 없을 것이다"라는 글을 썼으며, 자신의 홈페이지 글에도 "국민에 대한 사죄로 자살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가서 복역해야 한다"라고 썼는데, 그 후에 노무현은 정말로 자살했다.[9][10] 8년 후 2017년 대선 직후, 김동길은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노무현에 대해 "나는 그런 식으로 끝난 노무현에게 항상 죄송했다"라고 쓴 한편, 당선된 문재인에 대해서는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하나, '임기가 끝나도 자살하지 마라', 이 한마디뿐"이라고 썼다.[9]

2019년 92세에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이로 인해 한국 최고령 유튜버가 되었다.[12]

2020년에 누나 김옥길의 기념관을 포함한 자택 건물을 이화여자대학교에 기증했다. 또한, 유해는 본인의 뜻에 따라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되었다.[8]

4. 저서

출판 연도제목
2012젊은이여 어디로 가는가
2009MB 이게 뭡니까
2008자유여 너를 위해 목숨 바치게 하라
2007북한자유선언
2003대통령 각하, 이게 뭡니까
2002어떤 사람이기에
2000밝은세상 좋은나라
1999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998링컨의 일생
1998한 시대의 증언 3
1997한 시대의 증언 2
1997한 시대의 증언 1
1997김동길 칼럼집
1996정치 이대로는 안됩니다
1995떠날 때와 죽을 때
1994석양에 홀로 서서
1992해서는 안 될 사람 없다
1992말버릇이 그게 뭔가
1992길을 묻는 여성을 위한 인생론
1992대통령의 웃음
1992행복의 파랑새는 그대 마음 속에
1992젊은 그대에게
1992결혼과 성
1992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2
1992이래도 됩니까
1991이게 뭡니까
1991패배의 자유 성공의 의무
1991추억은 아름답다
1991그대와 내가 하나 될 때
1991잊을 수 없는 말 한 마디
1991사랑으로 승리하리라
1991사랑은
1990정치인의 폭력
1990그대가 아름다울 때
1990바람처럼 햇빛처럼
1989사는 멋 죽는 멋
1989길을 묻는 젊은이들에게
1989생각하며 산다
1989서산 정석해
1989세상이 왜 이모양인가
1989내가 부르다 죽을 노래여
1989어떤 사람이기에
1988너와 나의 사랑을 위하여
1988믿음, 소망, 사랑
1988자유의 이름으로 살리라
1988그대 영혼에 불을 밝히고
1988젊은 날엔 사랑이
1988여성학 강의 이브
1988이브, 너의 이름으로 묻는다
1988꽃은 무슨 일로
1988자유여 통일이여 민주주의여
1988할 말이 없다면서
1988이 어둠을 사르리 사르리
1988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1987한국 딸들에게 고함
1987한국 청년에게 고함
1987미국이라는 나라
1987한 점 부끄럼 없기를
1987가르치며 사랑하며
1987뜻을 찾아서 길을 찾아서
1987김동길 인생론
1987사랑하는 그대에게
1987인생의 길 사랑의 길
1987떠날 때와 죽을 때
1987서서 말하는 까닭
1987고독한 영혼과의 대화
1987역사 에세이
1987할 말은 하고 살자
1987큰 혁명 작은 혁명
1987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86젊음의 대화를 찾아서
1986사람으로 태어나서
1986새벽에 부는 나의 나팔소리
1986그 때 그 사람
1986영원한 자유인
1986열린 대문으로
1986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
1986새벽빛이 우리 앞에 있다
1986그래도 그리운 그 시절
1985어머니와 아들들
1985역사의 발자취
1985사랑이여, 영원한 그 생명이여
1984동창을 열고
1984나의 인생, 나의 명상
1984새야 새야 파랑새야
1983겨울이 오기 전에
1983죽어서 흙이 될지라도
1983생각하며 산다
1983하느님 나의 하느님
1982그래도 길은 있다
1979영원히 남는 것
1977끝이 없는 이 길을
1977하늘을 우러러
1977불어라 봄바람
1977역사의 언덕
1977가노라 삼각산아
1963American Attempts to Open Korea / 〈인문과학〉 제10집 기념호


5. 학력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비고
제13대 총선국회의원13대국민당낙선
제14대 총선국회의원14대통일국민당낙선
제15대 총선국회의원15대자민련낙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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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이게 뭡니까" 보수 원로 김동길 교수 별세…향년 94세 https://www.yna.co.k[...] 2022-10-05
[3] 뉴스 "이게 뭡니까" 보수 정치 원로…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별세 https://www.joongang[...] 2022-10-05
[4] 웹사이트 나비넥타이 매고 “이게 뭡니까”…김동길 명예교수 별세 https://www.donga.co[...] 2022-10-05
[5]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rokps.or.kr/[...] 2022-10-05
[6] 웹사이트 “불의에 침묵은 용기 없는 것”... 김동길, 논리·유머로 자유민주주의 전도 https://www.chosun.c[...] 2022-10-04
[7] 웹사이트 金東吉・延世大名誉教授が死去 保守派の重鎮 https://jp.yna.co.kr[...] 2022-10-05
[8] 웹사이트 시신은 연세대, 살던 집은 이대에... 김동길, 다 기증하고 떠났다 https://www.chosun.c[...] 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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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뉴스 길을 찾아서 유신에 소신으로 맞선 두 교수 / 한승헌 http://www.hani.co.k[...] 한겨레
[17] 뉴스 길을찾아서 김지하의 ‘오적’ 민중신학 재촉 / 문동환 http://www.hani.co.k[...]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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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뉴스 "노무현 자살하라" 김동길 교수에 네티즌 비난 봇물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9-05-23
[21] 웹인용 노컷뉴스 http://www.cbs.co.kr[...] 2010-06-06
[22] 뉴스 김동길 명예교수 노사모-언론 맹비난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9-06-01
[23] 뉴스 김동길 "방송3사, 노무현씨 순교자로 부각시켜"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9-05-30
[24] 뉴스 김동길·조갑제 대구강연회 시민들 2천여명 몰려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09-07-23
[25] 뉴스 김동길, YS에 강한 배신감 표출 http://www.viewsnnew[...] 뷰스앤뉴스 2009-08-12
[26] 웹인용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버리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http://www.christian[...] 2019-11-15
[27] 웹인용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을 해야죠 http://www.kimdonggi[...] 김동길 교수의 Freedom Watch 2009-05-23
[28] 웹인용 링컨을 존경한다더니, 이게 뭡니까?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09-05-26
[29] 뉴스 김동길 측, '자살해라 = 당당하게 해라' 의미였다. 논란 일축!? http://www.consumern[...]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2009-05-23
[30] 웹인용 지금은 할 말이 없습니다 http://www.kimdonggi[...] 김동길 교수의 Freedom Watch 2009-05-25
[31] 뉴스 김동길, "노무현, 모든 영화 누리고 저승길 선택" http://www.newshanku[...] 뉴스한국
[32] 뉴스 김동길의 쓴소리, "노무현 정신 계승? 이러지 말라" http://www.newshanku[...] 뉴스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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