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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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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일각은 명나라 가정 연간에 범흠이 자신의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개인 서재이다. 화재를 막는다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7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소장했다. 청나라 시기에는 황종희 등 학자들에게 개방되었고,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귀중한 고서를 제공하여 학술 발전에 기여했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을 거치며 훼손되었으나 중화민국 시기에 복구되었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며 보존되었다. 현재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고서 복원 및 디지털화 사업이 진행 중이며, 건축 및 소장 자료, 문화적 가치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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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각
개요
위치중국 저장성 닝보시 하이수구
좌표29°51′51″N 121°32′53″E
유형개인 서재, 도서관
건축 시기1561년 ~ 1566년
소장 도서30만 권
개방 시간8:30~17:00 (4월 1일 ~ 10월 31일); 8:30~16:30 (11월 1일 ~ 3월 31일)
명칭
중국어 간체天一阁
병음Tiān Yī Gé
한국어천일각
역사
건립명나라 병부 우시랑을 지낸 범흠
건립 시기1561년 ~ 1566년
목적장서 보관
이름 유래역경의 "천일생수(天一生水)"에서 유래
보호 노력화재 예방을 위해 연못 건설, '천일'이라는 이름은 물이 화재를 억제한다는 의미를 담음
엄격한 관리 규칙 시행, 도서관 관리인 선정 및 기록 유지
도서 보존개인이 수집한 장서를 3대에 걸쳐 보존
도서 약탈 시도 방지
구조
건축 양식2층 누각 형태
주요 시설장서루: 도서 보관 핵심 공간
동명초당: 범흠의 서재
존경각: 범흠의 조상 제사 공간
명주원: 정원
범씨 사당: 범씨 일족을 기리는 사당
중요성
중국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개인 도서관 중 하나
세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3대 개인 도서관 중 하나
문화적 가치중국 고대 장서 문화의 상징
귀중한 문헌 자료 보관
전통 건축 양식 보존
국가 중요 문화재지정됨

2. 역사

가정 11년(1532년) 진사이자 병부 우시랑까지 오른 범흠은 강남 최고의 장서가였다. 그는 자신의 서고를 역경 계사전 정현 주석의 "'''천일'''생수어북"[22]에서 따와 천일각(天一閣)이라 이름 지었다. 이는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물과 관련된 길한 의미를 담은 것이다. 서고 2층에는 이십팔수를 본뜬 28개 책장을 놓고, 아래에는 흡습재를 두었다.

범흠은 엄격한 가훈을 세워 야간 출입, 흡연, 음주 후 출입, 집안 부녀자 출입, 서적 반출을 금지했다. 범씨 일족 허가 없이는 자물쇠도 열 수 없었지만, 황종희, 전조망 등은 방문하여 서적을 열람했다.

청나라 때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천일각에서 602종을 빌려갔고, 473종이 기록되었다. 그 공으로 『고금도서집성』이 하사되었으나, 빌려 간 책 대부분은 반환되지 않았다.

천일각의 특징은 방화용 연못인 천일지(天一池)이다. 월호를 수원으로 하여 수량이 풍부하며, 문연각, 문란각 등 사고전서 보관 건물들도 유사한 연못을 갖췄다. 건륭제는 『문연각기』에서 "각의 제도는 범씨 천일각과 같다"라고 언급했다. 청나라 때는 늘어난 장서를 수용하기 위해 가산에 장서각을 추가했다.

1808년 완원의 『천일각 서목』에는 4,094종이 기록되었고, 최성기에는 7만 권을 자랑했다. 그러나 전란으로 1889년 설복성의 『천일각 현존 서목』에는 2,056종, 1944년 조만리 조사 시에는 2,500여 종이었다. 명나라 지방지나 닝보(宁波) 과거 관련 자료가 발견되기도 했다.

2. 1. 창건과 발전 (명나라 시기)

천일각을 처음으로 세웠던 범흠의 초상화.


천일각의 현판. 천일각의 이름에는 화재를 막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천일각은 명나라 가정 40년(1561년)에서 45년(1566년)에 걸쳐 당시의 병부우시랑 범흠이 자신의 개인 장서루로써 처음 지었다. 원래 이름은 동명초당(東明草堂)이었는데, 후한의 정현이 쓴 《역경주》(易经注)의 "천일생수"(天一生水)라는 이름에서 따서 화재를 막는다는 의미로 이름을 바꾸었고, 건축 구도 역시 역경과 비슷하게 따 왔다.[22]

범흠은 가정 11년(1532년) 진사로, 관직은 병부 우시랑에까지 올랐다. 독서와 장서를 좋아하여 관직 생활을 하며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귀한 도서들을 두루 수집하였다.[2] 그의 장서는 지방지, 정치 서적, 과거시험 급제자 명단, 시문집이 주를 이루는 것이 특색이며, 그 양은 7만 권에 달했다. 범흠은 병부우시랑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장서 중 일부는 관공서 내부 자료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일반 장서가는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범흠은 평생 모은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천일각을 짓고, 책에 좀이 슬거나 쥐가 쏠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술을 마시고 출입하거나 책을 외부로 유출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범흠은 만력(萬曆) 13년(1585년) 사망하였는데, 전조망이 쓴 《천일각장서기》(天一閣藏書記)에 따르면 그는 사망 전에 자신의 재산을 장서와 나머지 재산(은 1만 냥가량)으로 나누어 자녀들에게 은 1만 냥과 장서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24] 범흠의 맏아들 범대중(范大冲)은 재산 상속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장서 7만여 권을 물려받았으며, "대대로 책을 흩어 놓지 말 것이며, 책을 천일각 바깥으로 반출시키지 말 것이라"(代不分書,書不出閣)라는 조훈(祖訓)을 남겼다.

범대중은 천일각 장서를 유지, 보완하고 이를 자손에게 넘겨줄 때 각 문과 서고의 열쇠를 나누어 관리하게 하여 가족 구성원 누구도 개인적으로 서고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닫힌 문에 봉인을 붙여 도둑을 방지하는 규칙을 세웠으며, 이를 어기는 자는 집안 제사에 참여할 수 없도록 했다.[24]

2. 2. 청나라 시기의 번영과 시련

강희 4년(1665년) 범흠의 증손자 범문광(范文光)은 천일각 앞에 정원을 조성하고 '구사일상'(九獅一象, 아홉 마리의 사자와 한 마리 코끼리) 조각을 설치하는 등 주변 환경을 개선했다. 이 시기 천일각의 장서는 5천여 부 7만여 권에 달했는데, 이는 1949년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25]

1676년 범광섭(范光燮)은 이례적으로 천일각을 개방하여 백 종의 서적을 학자들에게 제공했다. 황종희는 범씨 후손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천일각 장서를 열람한 학자로, 천일각 장서 목록을 만들고 《천일각장서기》를 저술하여 범씨 집안을 칭송했다. 이후 전조망 등 재야 학자들도 천일각에서 서적을 연구하고 강의했으나, 천일각 장서 열람의 기회를 얻은 학자는 많지 않았다.[25]

건륭제 시기인 1773년,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범흠의 8세 손 범주(懋柱)는 천일각의 진본 641종을 바쳤다.[26] 이는 당시 중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양이었고, 질적 수준도 매우 높았다. 바쳐진 책의 5/7는 《사고전서총목》에 수록되었고, 1/6은 전본이 초록되었으나, 북경으로 보내진 장서들은 천일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청 황실 도서관에 수장되어 천일각의 장서는 4819부로 줄었다.[27] 그 대신 1774년 청 조정은 천일각에 《고금도서집성》 1부를 하사하고, 항주직조(杭州织造) 인저(寅著)를 보내 천일각의 건축 구조를 참고하여 자금성과 열하에 '내정사각'(内廷四阁)이라 불리는 황실도서관을 건설했다.[28][29] 이는 천일각처럼 《사고전서》를 오래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1779년에는 예수회 선교사 카스틸리오네(중국명 낭세녕)이 제작한 《평정회부득승도》 16폭, 1787년에는 《평정양금천전도》 12폭을 하사받았다.

1808년 완원이 편찬한 《천일각 서목》에는 4,094종의 전적이 기록되어 있다. 최성기에는 7만 권의 장서량을 자랑했으나, 이후 전란으로 인해 1889년 설복성이 편찬한 《천일각 현존 서목》에는 2,056종으로 줄었다. 1944년 조만리 등의 조사 시에는 2,500여 종을 헤아리고 있었다.

2. 3. 중화민국 시기의 위기와 복구

1914년, 쑤어지웨이(薛继渭)라는 사람이 천일각에 몰래 들어가 바깥에 있던 도둑들과 함께 천일각의 책들을 훔쳐 상하이의 서점에 팔았다. 이 책들은 나중에 상무인서관(商务印书馆)의 주인 장유안지(张元济)가 많은 돈을 주고 일부를 되찾았지만, 이 사건으로 천일각은 1천 부의 책을 잃었다.[30]

1933년 9월 18일, 태풍으로 천일각이 파손되었다. 인 현(鄞县)의 현장 천바오린(陈宝麟)의 지원으로 펑밍주안(冯孟颛), 량주팅(杨菊庭) 등 지역 인사들과 범씨 후손들이 중수천일각위원회(重修天一阁委员会)를 만들어 닝보부 부립학교에 있던 존경각을 천일각으로 옮겼다. 또한, 80여 편의 비각을 천일각 뒤뜰로 옮겨 밍저우 비림(明州碑林)을 만들었다. 존경각 서쪽에는 천진재(千晋齎)를 세워 닝보 학자 바랸(马廉)이 모은 오래된 벽돌과 닝보 성벽의 옛 성돌을 전시했다.

1933년 천일각 재건 당시의 사진. 장서는 외부로 옮겨졌으며,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수비하였다.

2. 4.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의 보존 노력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천일각의 장서들은 안전한 보존을 위해 외부로 옮겨졌다. 이는 천일각이 세워진 지 370년 만의 일이었다. 1937년 8월 17일 세 상자의 책이 처음으로 반출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1월 5일에는 명대 이전의 판각본 여덟 상자가 추가로 옮겨졌다. 1939년 4월 12일에는 나머지 장서 28상자 9080책이 현청에 의해 봉인되어 룽취안 현 후방으로 반출되었고, 다시 향(跶石乡)에 임시 보관되었다. 이곳에는 저장 성 도서관의 장서도 함께 보관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장서는 항저우(杭州)로 옮겨졌다가 1946년 12월 16일에야 천일각으로 돌아왔으며, 1947년 3월 1일부터 3일까지 일반에 공개 전시되었다.[30]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앞두고 저우언라이는 천일각 보호를 지시했다. 닝보 점령 후 해방군은 천일각을 보호하였고, 이후 문화대혁명의 광풍도 피해갈 수 있었다. 1949년 6월 9일 닝보군사관제위원회는 천일각을 접수 관리하고 비영리 기관으로 지정하였으며, 범흠의 후손인 판인싱(范盈性), 판루구이(范鹿其)가 관리를 맡았다. 닝보 지역의 장서가들은 자신들의 개인 장서를 천일각에 기증하여 장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2. 5.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의 발전

1949년 6월 9일 닝보군사관제위원회(宁波军事管制委员会)가 천일각을 접수 관리하였고, 비영리 기관으로 지정하여 범흠의 후손인 판인싱(范盈性), 판루구이(范鹿其)가 관리를 맡았다.[30] 닝보 지역 장서가들은 자신들의 개인 장서를 천일각에 기증하여 천일각의 장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1982년 천일각은 전국 중점문화재보호단위 2급으로 지정되었다.[30]

천일각은 현재 3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고서적 복구 전담 부서를 두고 있다. 2010년 말에는 천일각 고서적 디지털화 플랫폼이 구축되어, 보존 상태가 좋은 판본 위주로 고서적 3만 권이 디지털화되어 온라인으로도 천일각의 장서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30]

3. 건축 및 구조

천일각은 책을 화재와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실용성과 미적 고려를 모두 반영하여 설계되었다. 방화 재료를 사용하고 안전을 고려한 전략적 배치를 했으며, 정원과 같은 예술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실용성과 예술성의 결합은 천일각을 기능성과 문화적 상징성을 통합한 중국 건축 디자인의 훌륭한 예로 만든다.

범흠은 가정 11년(1532년) 진사로, 병부 우시랑까지 지냈다. 그는 『역경』 계사전 정현 주 "'''천일'''생수어북"[22]에서 서고 이름을 따와 천일각(天一閣)이라 지었다. 이는 물이 불을 이긴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서고 앞에 방화용으로 만든 천일지(天一池)는 동쪽 월호를 수원으로 하여 수량이 풍부하다. 청나라 건륭제는 『문연각기』에서 "각의 제도는 범씨 천일각과 같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문연각, 문란각도 앞에 소화용 연못을 갖추고 있다. 청대에는 늘어난 장서를 수용하기 위해 남쪽 뒤편 가산에 장서각을 만들었다.

3. 1. 건물 구조

천일각은 남북 방향으로 배치된 경사진 지붕의 2층 목조 건물로, 청색 기와로 덮여 있다. 건물 높이는 8.5m이다. 1층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고, 2층은 계단을 제외하고 서가로 구획된 트인 공간이다.[7] 도서관 앞에는 "천일 연못"이 있으며, "복, 재물, 장수"를 상징하는 요소로 디자인된 정원과 "구룡일상(九獅一象)"과 같은 명승지가 있다.[7] 천일각과 주변 정원은 전통적인 강남 안뜰 정원의 양식을 보여준다.[7]

3. 2. 방화 및 방습 시설

천일각 설계에는 화재와 습기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이 반영되었다. 나무 구조물을 점토로 감싸고, 인접 건물 사이에 불연성 벽돌로 칸막이를 만들었으며, 주요 위치에 방화문을 설치하여 화재 확산을 막았다.[18]

도서관 앞에 있는 '천일 연못(天一池)'은 화재 발생 시 소방수로 사용될 수 있었다.[18] 전설에 따르면 이 연못은 월호와 연결되어 물이 끊임없이 흐른다고 한다.[19]

3. 3. 주변 환경

천일각 정원


천일각 역사 지구는 닝보 구시가지의 위에후 서가 역사 거리 중서부에 있다. 1989년 이후, 친지탕, 문씨 가묘, 진씨 박물관 등 길을 따라 위치한 조상 사당들이 천일각에 통합되어 전통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되었다.[7]

명나라(1368-1644년) 시대 중국 봉건 사회의 문화 사업에서, 문원의 "천궁 화단"이 천일각에 통합되어 정원의 일부인 "동원"으로 변모했다. 천일각은 범씨 가문의 주거 지역 일부이며, 서원, 남원, 동원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7]

도서관 앞에는 "천일 연못"이 있으며, "복, 재물, 장수"를 상징하는 요소로 디자인된 정원과 돌을 쌓아 만든 "구룡일상(九獅一象)"과 같은 명승지가 있다. 천일각과 주변 정원은 전통적인 강남 안뜰 정원의 양식을 보여준다.[7]

4. 소장 자료

천일각은 현재 3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고서적 복구 전담 부서를 두고 있으며, 2010년에는 고서적 디지털화 플랫폼을 구축하여 보존 상태가 좋은 판본 위주로 3만 권을 디지털화해 온라인으로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24]

1808년 완원이 편찬한 《천일각 서목》에는 4,094종의 전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최성기에는 7만 권의 장서를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전란 등으로 흩어져 1889년 설복성이 편찬한 《천일각 현존 서목》에는 2,056종으로 줄어들었다. 1944년 조만리 등의 조사 시에는 2,500여 종이었다.[24]

4. 1. 명나라 시대 희귀본

천일각에 현존하는 고서의 선본은 대부분 명나라 시대의 각본이나 초본이며, 어떤 것은 이미 중국 전체를 통틀어 이곳에만 존재하는 고본이 되었다. 소장품 중 가장 희귀한 것은 명나라 시대의 지방지와 과거 기록으로 각각 271종과 370종이다. 과거 기록은 진사(進士)·회시(會試)와 향시(鄕試)의 세 종류로 나뉘는데, 소장량은 보존 문헌의 8할 이상을 차지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명나라 홍무 4년(1371년)의 수과(首科)부터 만력 11년(1583년)까지 512과에 대해 온전하게 보존된 《진사등과록(進士登科錄)》이다.[24]

천일각 소장 고서 중 한국사 관련 서적으로는 한치윤의 《해동역사》에서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을 인용하여, 송대 서긍의 《고려도경》 기록을 초록한 《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와 명대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가 언급되었다. 또한 명대 군부를 총괄했던 군문(軍門) 형개(邢玠)가 만력 25년(1597년)부터 28년(1600년)까지 전란과 관련된 중대한 군무를 담은 주본(奏本)을 명 조정에 보고한 《경략어왜주의》(經略御倭奏議)는 명 조정이 그 주본의 내용을 검토하고 신종 황제가 재가 내용을 기술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 형개 본인이 정유재란(1597년)에도 참전한 적이 있어서 정유재란 초기 명 군부가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군량이나 운송 경로 등에 대해 기술해 놓아 한국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이다. 이 《경략어왜주의》는 천일각 유일본이며, 원래 10권본이나 5권(권2, 4, 6, 9, 10)만 남아 있다.[24]

1999년에는 상하이사범대학(上海師範大学) 교수 다이지안구오(戴建国)가 천일각 소장 명대 사본 가운데 북송 인종 때 제정되었으나 이후 산일된 것으로 알려졌던 천성령(天聖令)의 일부(10권) 사본이 존재함을 확인하고 학계에 발표하였다.[24]

4. 2. 한국 관련 자료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송대 서긍의 《고려도경》의 기록을 초록한 《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 명대 동월의 《조선부》(朝鮮賦)가 언급되었다.[24] 또한 명대 군부를 총괄했던 군문 형개만력 25년(1597년)부터 28년(1600년)까지 전란과 관련된 중대한 군무를 담은 주본을 명 조정에 보고한 《경략어왜주의》(經略御倭奏議)는 명 조정이 그 주본의 내용을 검토하고 신종 황제가 재가 내용을 기술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고, 형개 본인이 정유재란에도 참전한 적이 있어서 정유재란 초기 명 군부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량이나 그 운송 루트에 대해 기술해 놓아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가 된다.[24] 이 《경략어왜주의》는 천일각 유일본이며, 원래 10권본이나 5권(권2, 4, 6, 9, 10)만 남아 있다.[24]

1999년에는 상하이사범대학 교수 다이지안구오가 천일각 소장 명대 사본 가운데 북송 인종 때에 제정되었으나 이후 산일된 것으로 알려졌던 천성령의 일부(10권)의 사본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학계에 발표하였다.[24]

5. 문화적 영향 및 가치

천일각은 중국 및 한국의 문화, 역사, 학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황종희 같은 유명한 학자들이 천일각을 방문하여 책을 읽고, 전조망 등의 재야 학자들도 이곳에서 연구하며 강의를 하여 천일각의 명성을 높였다.[22] 황종희는 천일각 장서 목록을 만들고 《천일각장서기》를 써서 범씨 집안을 칭송하기도 했다.

청나라 때 『사고전서』 편찬에 천일각이 602종의 책을 제공하여 473종이 기록되었고, 그 대가로 『고금도서집성』 10,000권을 받았다. 그러나 빌려 간 책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았다.[22]

1808년 완원은 『천일각 서목』을 편찬하여 4,094종의 전적을 기록했다. 천일각은 한때 7만 권의 장서를 자랑했으나, 전란 등으로 1889년 설복성의 『천일각 현존 서목』에는 2,056종으로 줄었다. 1944년 조만리 등의 조사에서는 2,500여 종으로 확인되었으며, 명나라 지방지나 닝보(宁波)의 과거 관련 자료가 발견되어 가치를 더했다.[22]

5. 1. 건축적 영향

청나라 건륭제는 천일각을 방문하여 관리들에게 천일각의 건물 평면도와 서가 도면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 도면은 자금성의 문연각, 승덕산장의 문진각을 포함한 여러 황실 도서관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곳에는 백과사전인 ''사고전서''가 소장되었다.[28][29]

천일각은 특히 저장성 지역의 사립 도서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천일각의 설계 및 장서 관리 방식은 이 지역의 다른 도서관 건축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청나라 시대에 천일각은 황제의 "사고전서" 편찬 사업을 통해 더욱 인정을 받았으며, 장서 보존 및 관리에 대한 모델로 자리 잡았다. 원요(袁耀)와 같은 천일각을 방문한 학자들은 도서관 목록을 편찬하는 데 기여하여, 그 학문적 중요성이 후대에 전해지도록 했다.[16]

5. 2. 학술적 기여

황종희는 범흠의 후손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천일각에 들어가 장서를 열람할 기회를 얻은 학자였다. 그는 천일각 장서 목록을 만들고 《천일각장서기》를 써서 범씨 집안을 칭송했다.[25] 이 일로 천일각은 폐쇄된 개인 서고에서 벗어나 저명한 학자들에게 개방되기 시작했으며, 전조망 등의 재야 학자들도 천일각에서 서적을 연구하고 강의를 했다.

1773년 건륭제가 《사고전서》를 편찬할 때, 범흠의 8세 손인 범주는 천일각의 진본 641종을 바쳤다.[26] 이 책들은 수적으로는 당시 중국 2위였고, 질적 수준도 일류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진본(珍本)과 선본(善本)을 포함하고 있었다. 바쳐진 책 가운데 5/7이 《사고전서총목》에 수록되었고, 1/6은 전본(全本)이 초록(抄錄)되었으나, 이 책들은 천일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27] 대신 청 조정은 1774년 천일각에 《고금도서집성》 1부를 하사하고, 항주직조(杭州织造) 인저(寅著)를 보내 천일각의 건축 구조를 참고하여 문연각 등 이른바 '내정사각'(内廷四阁)이라 불리는 황실도서관을 짓게 했다.[28][29]

1808년 완원은 천일각 장서 구성에 관한 『천일각 서목』을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4,094종의 전적이 기록되어 있다.

5. 3. 문화 보존 및 전승

2010년 말, 천일각 고서적 디지털화 플랫폼이 구축되어 보존 상태가 좋은 판본 위주로 고서적 3만 권이 디지털화되었고, 온라인으로도 천일각의 장서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16]

천일각의 고서 복원 기술은 잘 보존되고 널리 알려졌다. 2009년 "국가급 고서 복원 센터"로 인정받았으며, 2021년에는 천일각의 고서 복원 기술이 국가 무형 문화 유산 프로젝트 목록에 포함되었다. 현재 천일각은 매년 1만 장 이상의 훼손된 책 잎을 복원하고 있으며, 전국에서 온 100명 이상의 복원 인력을 훈련시켰다.[17]

천일각은 저장성의 문화적, 지적 유산의 상징이다. 이곳은 중요한 역사적 문서와 학술 저작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국 문화 유산이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지도록 했다. 이 도서관은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소장품은 중국 문화, 역사, 정치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가 되었다. 그 지속적인 영향력은 전 세계의 학자와 서지 애호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문화 지식 보존이 미래 세대의 우선순위로 유지되도록 하고 있다.[17]

5. 4. 사회문화적 의의

명나라 시대(1368-1644)는 도시화, 상업화, 자본주의의 발전이 시작된 시기였다.[11] 이와 함께 문맹률 감소와 교육 발전도 이루어졌다.[11] 책의 가용성과 가격 인하는 문맹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원나라 시대(1271-1368)에 폐지되었던 과거 시험이 명나라 시대에 다시 확대되면서, 시험 응시자를 위한 팸플릿 출판이 증가했다.[12] 모의시험 문제집이 인기를 얻었고, 값싼 대중 소설부터 고전의 재판본까지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출판되었다.[13] 중국 4대 기서 중 3개가 명나라 시대에 완성되어 널리 유통된 것은 당시 문화와 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13]

책을 소유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경향을 보였다. 장서 또한 출판의 발달로 크게 증가했다.[14] 책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1644-1912)에 개인 도서관의 수와 규모가 증가했다. 수천 권의 장서는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었고, 10,000권(1,000권에 해당)은 상당한 규모였다. 30,000권 규모의 도서관도 드물지 않았다. 범흠이 사망했을 때 천일각에는 7만 권이 넘는 장서와 수천 종의 서적이 있었다.[14]

황종희와 같은 유명한 문인들이 천일각을 방문하여 서적을 열람했고, 전조망 등의 재야 학자들은 천일각에서 서적을 연구하고 강의를 했다. 청나라에서 『사고전서』가 편찬될 때 천일각은 602종을 대여하여 473종의 전적이 기록되었으며, 그 대가로 『고금도서집성』 10,000권이 하사될 정도였다.

6. 민간 전설

청나라 때의 희곡 작가 사곤(謝堃)의 《춘초당집》(春草堂集)에는 천일각을 배경으로 하는 사랑 비극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가정 연간에 닝보의 지부(知府)를 맡고 있던 구철경(丘铁卿)의 조카딸인 전수운(钱绣芸)은 책을 좋아했는데, 오랫동안 천일각에 책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책을 읽고 싶어 했다. 그래서 범씨 가문에 시집가고 싶다며 중매를 부탁했고, 범흠의 후손인 범방주(范邦柱)와 혼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범방주는 천일각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집안의 규칙으로 여성은 천일각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결국 전수운은 죽을 때까지 천일각의 책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전수운은 임종 직전에 남편에게 자신은 죽어서 운초(芸草)로 태어나 책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 운초는 책 사이에 끼우거나 책상자에 책과 함께 넣어두어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는 데 사용되었다.[1]

한국의 작가 김이경은 2018년 전수운의 전설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 〈봄꿈〉을 썼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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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Tianyige Library in Ningbo https://oversea.cnki[...] 202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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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Records of the collection in Tianyi Pavilion http://www.360doc.co[...]
[5] 웹사이트 Taking a closer look at Chinese oldest library Tianyi Ge https://en.antaranew[...] 2024-11-14
[6] 웹사이트 书藏古今:从天一阁看中华民间藏书文化 https://news.cctv.co[...] 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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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학위논문 A History of Reading in Late Imperial China, 1000–1800 ProQuest Dissertations and Theses 2003
[13] 서적 Four Masterworks of the Ming Novel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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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독서인간 - 책과 독서에 관한 25가지 이야기 도서출판 알마 2016
[24] 잡지 중국의 문화유산답사기, 《문화고려(文化苦旅)》 https://www.posri.re[...] 포스코경영연구소 2012-08
[25] 문서 황종희 《천일각장서기》(天一阁藏书记)
[26] 문서
[27] 논문 天一阁与《四库全书》——论天一阁进呈本之文献价值 2008-01
[28] 문서 王先谦《东华续录》乾隆卷七九
[29] 문서 乾隆《文渊阁记》
[30] 논문 1939·天一阁之痛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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