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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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경환은 1805년 충청도 홍주 다래골에서 태어난 경주 최씨 가문의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기해박해 시기 교리 교사로 활동하며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1839년 9월 12일 35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그의 아내 이성례 또한 순교했으며, 장남 최양업은 사제가 되어 조선에서 활동했다. 최경환은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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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종교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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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최경환 프란치스코 |
출생일 | 1805년 |
사망일 | 1839년 9월 12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홍주목 다래골 (현 대한민국 충청남도 홍주군)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소의문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 소의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매장지 | 절두산 순교성지 |
2. 생애
최경환은 1805년 충청도 홍주목 다래골의 부유한 경주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최한일은 이존창 루도비코에게 교리를 배워 1787년에 세례를 받은, 가문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다.
조선 교회에 천주교 사제가 없어 신자들이 어려움을 겪자, 최경환은 한양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지배 계급의 탄압을 피해 강원도 금성과 경기도 부천을 거쳐 경기도 과천 수리산에 정착했다.
최경환은 수리산에서 밭을 일구고 이주해 온 교인들을 도우며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십계명을 지키고 교리를 공부하며 묵상과 기도에 힘썼다. 처음에는 몇몇 가구에 불과했지만, 점차 스무 세대가 넘는 큰 공동체가 되었다. 최경환은 밤마다 교리를 가르쳤고, 그의 가르침은 멀리까지 알려졌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모은 돈으로 투옥되거나 가난한 교우들을 돕고 순교자들의 장례를 치렀다.[1]
1839년 7월 31일 밤, 포도대가 수리산의 최경환 집을 포위하고 체포했다.[1] 최경환은 포졸들을 환영하며 막걸리를 대접했고, 새벽에 다른 교인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1] 그는 지친 교우들에게 천사가 황금 자로 그들의 보폭을 재고 있다고 격려하며 예수를 상기시켰다.[1]
최경환은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1] 그는 팔과 다리의 뼈가 탈구될 정도로 심하게 매를 맞았지만, "당신들이 나를 먹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절대로 내가 하느님을 부인토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1] 그는 태형 340대와 곤장 110대를 맞고도 기도와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1]
1839년 9월 12일, 최경환은 3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했다.[1]
2. 1. 출생과 가문
최경환은 1805년 충청도 홍주목 다래골의 한 부유한 경주 최씨 집안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최한일은 가문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이존창 루도비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1787년에 세례를 받았다.2. 2. 수리산 정착과 신앙생활
최경환은 조선 교회에 천주교 사제가 없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한양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지배 계급의 탄압을 피해 강원도 금성과 경기도 부천을 거쳐 경기도 과천 수리산에 정착했다.최경환은 수리산에서 밭을 일구고 이주해 온 교인들을 도우며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십계명을 지키고 교리를 공부하며 묵상과 기도에 힘썼다. 처음에는 몇몇 가구에 불과했지만, 점차 스무 세대가 넘는 큰 공동체가 되었다. 최경환은 밤마다 교리를 가르쳤고, 그의 가르침은 멀리까지 알려졌다.
그는 묵상과 신심서적 공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교회 진리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1839년 기해년 박해 때는 모은 돈으로 투옥되거나 가난한 교우들을 돕고 순교자들의 장례를 치렀다.[1]
2. 2. 1. 정착 과정
오랜 시간 동안 조선 교회에서는 천주교 사제가 없어, 그 지역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름만 천주교 신자일 뿐이었다. 천주교 사제가 없었으므로, 신자들은 십계명을 따르는 등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어려웠다. 최경환은 이러한 상황을 묵과할 수 없어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지배 계급의 탄압을 피해 강원도 금성과 경기도 부천을 거쳐 경기도 과천의 수리산 산속 마을에 정착했다.2. 2. 2. 공동체 생활
그는 새로 발견한 마을에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는 산 중턱을 개간하여 담배를 심고 새로 이주해 온 천주교 교인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데 일손을 거들었다. 그들은 혼심을 다해 십계명을 지켰으며 밤에는 교리를 공부했고 묵상과 기도에 몰두했다.2. 2. 3. 신앙 지도
처음에는 서너 집안만이 그 마을에 정착했는데, 점차 그 수가 늘어 스무 세대가 넘었다. 밤이 되면 최경환은 그들을 모두 자신의 집에 불러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강의는 진지하고 간명했으며 설득력 있었다. 그의 언변이 널리 알려져, 멀리서도 천주교 교인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 왔다.2. 2. 4. 신심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묵상과 신심서적 공부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불타올랐으며, 교회의 심오한 진리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일할 때나 집에 있을 때, 밭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했으며, 하느님의 사랑과 헌신에 관련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2. 2. 5. 박해와 각오
1839년에 그는 교리 교사로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년에 박해가 발발하여 한양 곳곳의 많은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어 굶주림을 비롯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최경환은 돈을 모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투옥된 교우들과 가난한 교우들을 위하여 그 돈을 썼다. 그는 또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일을 도왔다.[1]2. 3. 아들의 유학
1836년, 최경환이 31세가 되었을 때,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 사제 피에르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모방 신부는 외국인 사제가 조선에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조선인들을 해외로 보내 천주교 사제 수업을 받게 하기로 결심했다.모방 신부는 최경환의 장남 최양업이 비범한 총명함을 지닌 젊은 교우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의 부모를 만나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형제님, 이성례 마리아 자매님. 저는 오늘 매우 중요한 일에 대하여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자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제 최양업 토마스가 매우 똑똑하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를 마카오로 보내 천주교 신부 수업을 받도록 하고 싶습니다. 승낙해 주시겠습니까?" 최경환과 이성례 부부는 "신부님, 고맙습니다. 이것은 저희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겠지요. 저희는 저희집에 그러한 은총과 행복이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또 한번 감사드립니다."라며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유교의 영향으로 조선인들은 형제의 집으로도 아들을 쉽게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최경환과 이성례 부부는 아들을 멀리 외국으로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깨달았다.
2. 4. 체포
1839년 7월 31일 밤, 포도대가 한양에서부터 수리산에 있는 그 마을로 최경환의 집을 포위하고는 고함을 지르며 욕을 하며 대문을 부수고 들어갔다.[1] 그러나 최경환은 그들을 반가운 손님을 대하듯 환영했다.[1] "어서오십시오. 여러분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습니까? 저희는 오래도록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준비가 되었습니다. 들어오셔서 동틀 때까지 쉬시지요. 우리 모두 새벽에 떠납시다." 라며 막걸리를 대접했다.[1] 포졸들은 그의 태도에 놀라 "이 사람들은 참으로 진실된 신자들이다. 그들이 도망갈 염려는 없겠으니 여기서 쉬다 가자."라고 서로에게 말했다.[1]포졸들이 쉬는 동안, 최경환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말했다.[1] "이 박해는 전국적이며 조정의 의도가 교회를 완전히 뿌리 뽑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새벽에 우리 같이 포졸들과 함께 갑시다. 가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고 순교자가 됩시다."[1] 천주교인들은 모두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1] 그는 그의 자식들에게 "네가 여기에 남는다 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집에서 죽기를 갈망하느니 차라리 한양에 있는 감옥에서 죽는 것이 낫다. 감옥에서 증언하며 죽는 것이 진정한 순교이다."라고 말했다.[1]
새벽이 되자 그는 일어나 포도대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했다.[1] 그는 낡은 옷을 입고 있는 한 포졸에게 깨끗한 옷 한 벌을 입으라고 주었다.[1] 마을 사람들이 전부 검거되어 차례차례 그들이 천주교인인지를 질문 받았다.[1] 배교한 사람들은 석방되었다.[1]
이른 아침에 최경환 외 어린이들이 포함된 40 여명이 모여 한양으로 향했다.[1] 그 수가 총 100 여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1] 최경환이 앞장서 가고 남성들이 뒤를 따랐으며 여성과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1] 포도대가 맨 뒤에서 그들을 몰아갔다.[1] 최경환은 지친 교우들에게 한 천사가 황금 자로 그들의 보폭을 재고 있다고 말하며 그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상기토록 격려했다.[1] 그 때는 한여름이었으므로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1] 그들의 기이한 행렬을 본 사람들 중에는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1]
그들이 서대문에 당도했을 때, 사람들이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1] "이 사악한 년놈들아. 너희들이 죽기를 바란다면 죽어라. 그런데 어쩌자고 죄 없는 아이들 마저 함께 죽게 만드느냐?" 죄수들은 밤이 되어 감옥에 도착하였다.[1]
2. 5. 투옥과 고문
다음날 심문이 시작되었다. 포장은 "믿고 싶으면 혼자 믿어라.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지 말아라."라고 훈계했지만, 최경환은 천주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며,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권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이라고 답했다. 화가 난 포장은 최경환이 배교할 때까지 고문하라고 명했지만,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용감하게 견뎠다.[1]최경환은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뼈가 드러났지만 신앙은 확고했다. 다른 천주교인들이 심문을 받았지만,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최경환과 그의 아내 이성례, 친척 이 에메렌시아를 제외하고 모두 종교를 부인했다. 교리 교사였던 최경환은 수리산 공동체에 세 명만 남았다며 슬퍼했다.[1]
포장이 최경환의 아들 최양업이 신학을 공부하러 마카오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 형리들은 그가 하느님을 부인하도록 더욱 압박했다. 그들은 최경환을 심하게 때려 팔과 다리의 뼈를 탈구시켰다. 최경환은 "당신들이 나를 먹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절대로 내가 하느님을 부인토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어떻게 감히 당신들이 저더러 교회를 배신하라 명령하신단 말입니까? ... 하느님을 배신해야겠습니까?"라고 항변했다.[1]
증언에 따르면, 최경환은 두 달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고문을 받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1]
그는 태형 340대와 곤장 110대를 맞았다. 그럼에도 그는 기도와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포장이 최경환의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해 강도범과 함께 묶어 놓자, 죄수는 최경환을 비웃고 상처를 발로 찼다. 그러나 최경환은 말없이 견뎠고, 죄수는 그의 인내에 압도되어 폭행을 멈추고 "만일 누가 천주교를 믿고 있다면, 그들은 이 사람과 같을 것이다."라고 감탄했다.[1]
최경환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앙으로 극심한 고문과 고난을 견딜 수 있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교리 설명을 부탁받고 기꺼이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파했다. 어느 날 형졸이 앵베르 주교의 주교관과 제의를 입히려 하자 물리쳤는데, 형졸이 그것을 다른 죄수에게 입히자 최경환은 공손히 엎드려 십자가에 절한다고 말했다.[1]
9월 11일, 최경환은 다시 법정에 불려 나가 치도곤 25대를 맞았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고문이었다.[1]
2. 6. 순교
그는 옥방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고 교우들에게 말하였다. "저는 칼 아래서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언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제가 감옥에서 죽는 것이군요." 몇 시간 후 그는 1839년 9월 12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의 죽음이 참수형과 같이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진정한 신앙의 영웅적인 기적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2. 7. 아내의 순교
그의 아내 이성례는 어린 자식들에 대한 모성애를 이기지 못하고 배교한다고 말했지만, 즉시 그 결정을 후회하고 철회하였다. 그녀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서 1839년 12월 27일에 39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3. 시복 · 시성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2]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3]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4. 아들 최양업
최양업 토마스(1821-1861)는 최경환의 장남으로, 1849년 상하이에서 천주교 사제로 서품받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는 12년 동안 조선에서 외국인 천주교 사제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또한 순교자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 라틴어로 번역하여 로마로 보냈다. 달래의 《조선 교회사》의 많은 부분은 최양업 신부의 업적에 기반한다. 최양업은 《조선 교회사》 외에도 조선의 문화, 전통, 지리, 문학, 예술에 대해 많은 글을 써서 서양인들에게 널리 소개했다.
그는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을 위한 교리서도 저술하였다. 그의 시 중 한 구절은 그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참조
[1]
웹인용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유해실
http://www.jeoldusan[...]
2014-10-26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0-26
[3]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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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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