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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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지몽은 낭주 최씨의 시조이며, 고려 초기 영암 출신의 관료이다. 고려 태조부터 성종 대에 걸쳐 왕권 안정에 기여했으며, 천문과 복서에 능통했다. 태조의 후삼국 통일을 예견하고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혜종 시해 음모를 막는 등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했다. 광종 말년에 잠시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복직하여 동래군후에 봉해졌다. 987년에 사망했으며, 태자태부로 증직되고 민휴의 시호를 받았다. 고려 시대 관련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며, 《고려사》에 그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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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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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최지몽 |
원어명 | 崔知夢 |
별명 | 신동 |
직책 | 고려의 태묘 배향 공신 |
군주 | 고려 태조 |
군주 칭호 | 국왕 |
출생일 | 907년 |
출생지 | 고려 전라도 영암군 |
사망일 | 987년 4월 2일 |
사망지 | 미상 |
매장지 | 미상 |
국적 | 고려 |
성별 | 남성 |
부모 | 최성흔(최흔) |
봉호 | 경종헌화대왕 |
시호 | 민휴(敏休) |
본관 | 낭주 최씨 |
경력 | |
서훈 | 경종헌화대왕 |
계급 | 미상 |
복무 | 미상 |
참전 | 미상 |
2. 생애
최지몽은 낭주 최씨[2]의 시조[3]이자, 고려 초기 영암 출신 관료로 태조~성종 대 왕권 안정에 공을 세웠다.
대광(大匡) 현일(玄一)에게서 경서와 사서를 배웠고,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했다.[13] 아버지 최상흔(최흔)은 왕건이 궁예 휘하에 서해장군으로 있을 때 인연을 맺었다.[4]
고려 건국 이전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것을 예견했다.[13][5][6] 원래 이름은 총진(聰進)이었으나, 18세에 태조에게 불려가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게 될 징조라고 꿈을 해석해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왕건이 한반도를 통일하면서 개국공신이 되었다.
태조 이후에도 고려 왕조를 섬겼으며, 왕규의 혜종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혜종을 암살 위기에서 구했다.[7][8]
광종 말년 왕권 강화책에 따라 잠시 벼슬에서 퇴출되었다가 980년(경종 5년) 왕승의 반역을 예측하여 대비하게 했다. 이 사건으로 광종에게 어의와 금제 허리띠를 하사받고, 대광내의령 동래군후 식읍일천호 주국(大匡內議令東萊郡侯食邑一千戶柱國)에 봉해지고 복직되었다.[9]
987년(성종 6년) 81세로 사망하여, 태자태부로 증직되고 민휴(敏休)의 시호를 받았다.[13] 고향에는 사당이 남아 그를 모시고 있다.[10][11]
고려 개국공신이자 천문학자로서 고려 및 왕건 관련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12]
2. 1. 초기 생애와 가계
낭주 최씨[2]의 시조[3]이자, 고려 초기 영암 출신 관료로 태조~성종 대 왕권 안정에 공을 세웠다. 아버지는 최상흔(崔相昕)이다.[13]대광(大匡) 현일(玄一)에게서 경서와 사서를 배웠으며,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했다.[13] 아버지 원보 최상흔(최흔)은 왕건이 궁예 휘하에서 서해장군으로 있을 때 인연을 맺었다.[4]
원래 이름은 총진(聰進)이었으나, 18세에 태조에게 불려가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징조라고 꿈을 해석하여 태조에게 칭찬을 받고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 2. 고려 건국과 공헌
낭주 최씨[2]의 시조[3]이자, 고려 초기 영암 출신 관료로 태조~성종 대 왕권 안정에 공을 세웠다.고려 건국 이전에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것을 예지했다.[13][5][6] 원래 이름은 총진(聰進)이었으나 열여덟의 젊은 나이에 태조에게 불려가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게 될 징조라고 꿈을 해석해서 태조에게 칭찬을 받고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왕건이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면서 개국공신이 되었다.
태조 이후에도 고려 왕조를 지속적으로 섬겼으며, 고려 왕조의 충신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왕규의 혜종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혜종을 암살 위기에서 구했다.[7][8]
광종 말년 왕권 강화책에 따라 잠시 벼슬에서 퇴출되었다가 980년(경종 5년)에 임금에게 왕승이 반역을 꾀할 것을 대비하도록 했다. 이 사건 이후 광종은 최지몽에게 어의와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사했다. 또한 대광내의령 동래군후 식읍일천호 주국(大匡內議令東萊郡侯食邑一千戶柱國)에 봉해지고 복직되었다.[9]
2. 3. 관직 생활과 말년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것을 예지했다.[13][5][6] 원래 이름은 총진(聰進)이었으나 열여덟의 젊은 나이에 태조에게 불려가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게 될 징조라고 꿈을 해석해서 태조에게 칭찬을 받고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왕건이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면서 개국공신이 되었다.태조 이후에도 고려 왕조를 지속적으로 섬겼으며, 고려 왕조의 충신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왕규의 혜종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혜종을 암살의 위기에서 구했다.[7][8]
광종 말년에 왕권 강화책에 따라 잠시 벼슬에서 퇴출되었다가 980년(경종 5년)에 임금에게 왕승이 반역을 꾀할 것을 대비하도록 했다. 이 사건 이후 광종은 최지몽에게 어의와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사했다. 또한 대광내의령 동래군후 식읍일천호 주국(大匡內議令東萊郡侯食邑一千戶柱國)에 봉해지고 복직되었다.[9]
987년(성종 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태자태부로 증직되고 민휴(敏休)의 시호를 받았다.[13] 그의 고향에는 지금도 사당이 남아 있어 그를 모시고 있다.[10][11]
3. 최지몽이 등장하는 작품
4. 전기 자료
최지몽에 대한 전기는 《고려사》 권92, 〈열전〉5, 최지몽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조
[1]
문서
《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6년(987년) 3월 2일(갑자)
[2]
문서
낭주(朗州)는 영암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사》 권57, 〈지리지〉2, 전라도 영암군.
[3]
문서
송환기, 《성담집》 권29, 知中樞崔公行狀, “朗州人。高麗太師敏休公知夢爲上祖。”
[4]
저널
신라말ㆍ고려초 海上勢力의 대두와 그 역사적 의미 - 왕건의 海上勢力 장악을 중심으로 -
https://www.dbpia.co[...]
2015-08
[5]
웹인용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 천문점성술로 고려 초기 왕실 지켜낸 최지몽 - 전남일보
https://jnilbo.com/6[...]
2024-06-09
[6]
저널
역사속 과학인물-왕건의 꿈 해석해준 한국의 프로이드 최지몽(907~987)
https://www.dbpia.co[...]
1998
[7]
저널
왕건과 전남 세력의 동향 – 나총례, 오다련, 최지몽을 중심으로 -
https://www.dbpia.co[...]
2018-12
[8]
웹인용
광주일보
http://www.kwangju.c[...]
2024-06-09
[9]
웹인용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024-06-09
[10]
서적
인물과학사
도서출판 책과함께
2011-11-30
[11]
웹인용
63년 동안 여섯 임금을 섬긴 ‘최지몽’
http://www.yasinmoon[...]
2024-06-09
[12]
웹인용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 넷플릭스
https://www.netflix.[...]
2024-06-09
[13]
문서
《고려사》 권92, 〈열전〉5, 최지몽
[14]
문서
송환기, 《성담집》 권29, 知中樞崔公行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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