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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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 시대는 9세기 말 신라 말기에 왕권 약화와 호족의 성장으로 시작되어, 892년부터 936년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의미한다. 신라의 쇠퇴와 농민 반란, 호족 세력의 성장 속에서 견훤이 후백제를, 궁예가 태봉을 건국하면서 신라와 함께 삼국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 신라를 병합하고 후백제를 멸망시키면서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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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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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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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889년 ~ 936년 |
주요 국가 | |
기타 | 후사벌국 (919년 ~ 927년) 동단국 (926년 ~ 936년) 후발해 (927년 ~ 935년) 정안국 (938년 ~ 986년) |
주요 전투 |
2. 역사적 배경
통일 이후 한동안 안정기를 누렸던 신라는 8세기 들어 소수의 진골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속된 왕위 계승 분쟁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떨어뜨렸고, 이는 곧 지방에 대한 통제력 상실로 이어졌다.[1]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각지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지방 세력가들이 성장하여 점차 신라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스로 성주(城主)나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1][2] 또한, 귀족들의 수탈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면서 신라의 통치 기반은 뿌리부터 흔들렸다.[2]
결국 이러한 혼란 속에서 892년 견훤(甄萱)이 무진주(현재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훗날 후백제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弓裔) 역시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901년 후고구려(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국호 변경)를 세웠다. 이로써 약화된 신라와 함께 한반도는 다시 세 개의 나라로 나뉘는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시기는 936년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가 신라를 병합하고 후백제를 멸망시켜 한반도를 재통일하기까지 이어졌다.
신라 말기의 극심한 혼란과 지방 호족 세력의 성장은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2. 1. 신라의 쇠퇴
신라는 통일 이후 한동안 안정된 사회를 이루었으나, 8세기부터 소수의 진골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간의 분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780년에는 혜공왕과 왕비가 반란으로 살해당하며 무열왕 계열의 혈통이 단절되는 등[1]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중앙 정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김헌창이나 해상 세력가 장보고처럼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중앙 정치에 개입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비록 이들의 세력은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은 점차 약화되었다.지방에서는 성주(城主)나 호족들이 실질적인 지배자로 성장하며 중앙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국가의 세금 수취 체계가 무너졌고, 중앙 정부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반면, 중앙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날로 심해져 재정 부담을 가중시켰다.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신라 정부는 889년 지방의 주(州)와 군(郡)에 무리하게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는 이미 과중한 부담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주었다.[2]
신라의 전성기부터 무거운 세금과 노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계속되는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살던 곳을 떠나 떠돌거나(유민) 도적이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는 경주(金城)를 중심으로 한 기존 신라의 사회 질서를 뿌리부터 흔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가혹한 조세 독촉은 농민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농민 반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성여왕 3년(889년), 사벌주(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했다. 신라 조정은 나마(奈麻) 영기(令奇)를 보내 진압하게 했으나, 영기는 반란군의 기세에 겁을 먹고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반면 촌주(村主) 우련(祐連)은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이에 진성여왕은 영기를 처형하고 어린 우련의 아들에게 촌주 자리를 잇게 하여 겨우 반란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지방 호족들은 혼란을 틈타 더욱 세력을 키웠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져 도적으로 변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9세기 중반 이후 이러한 반란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각지에서 힘을 키운 호족들은 스스로 장군이나 성주를 칭하며 신라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891년에는 북원(北原, 현재의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의 양길(梁吉)이 봉기하였고, 여기에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弓裔)가 합류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 또한 상주 농민 출신으로 서남해안에서 군공을 세운 견훤(甄萱)도 892년 완산주(完山州, 현재의 전라북도 전주시)를 거점으로 삼아 자립하는 등, 신라의 통치 기반은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 상실과 지방 세력의 성장은 결국 후삼국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는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지방 호족을 견제하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펼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2. 2. 민란의 발생
신라 말기에 이르러 지방 성주(城主)와 호족 세력이 성장하면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국가의 세금 징수 체계(수취체제) 또한 느슨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더욱 심해졌고, 필요한 비용은 늘어났지만 이를 충당할 재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라 정부는 889년(진성여왕 3년) 지방의 주(州)와 군(郡)에 세금을 강하게 독촉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농민들에게 이중의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낳았다.[1][2]이미 신라의 전성기 때부터 무거운 세금과 부역(力役)에 시달리던 농민들은[3] 계속되는 압박 속에서 살던 곳을 떠나 떠돌아다니거나(유민, 流民) 도적이 되어 사회 질서를 어지럽혔다. 이러한 현상은 금성(金城, 현재의 경주)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기존 신라의 질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가혹한 세금 독촉은 가난한 농민들을 더욱 자극하여 결국 전국적인 농민 반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2]
대표적인 농민 반란으로는 889년 사벌주(沙伐州,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일어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이 있다.[1][4] 진성여왕은 나마(奈麻) 벼슬의 영기(令奇)에게 반란 진압을 명했으나, 영기는 반란군의 기세를 보고 두려워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반면, 그 지역의 촌주(村主)였던 우련(祐連)은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이에 진성여왕은 영기를 처형하고, 10여 세에 불과했던 우련의 아들에게 촌주 자리를 잇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1] 이 반란은 가까스로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혼란은 더욱 가중되어 호족들은 세력을 더욱 키우고, 많은 백성들이 생계를 위해 도적 무리에 합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2]
이후에도 농민들의 봉기는 계속되었다. 891년 10월에는 북원(北原, 현재의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의 도적 우두머리 양길(梁吉)이 봉기하였다.[1][5] 당시 죽주(竹州)의 세력가 기훤(箕萱)에게 의탁하려다 거절당했던 궁예(弓裔)는 양길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양길은 궁예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병력을 주어 활동하게 했는데, 궁예는 1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북원 동쪽 마을과 명주(溟州, 현재의 강릉시) 관할의 주천(酒泉) 등 10여 곳의 군현을 습격하며 세력을 넓혀나갔다.[1] 이러한 농민 반란과 봉기는 신라의 통치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고, 이후 후삼국 시대가 열리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3. 호족 세력의 성장
신라는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을 통제하며 안정을 꾀했으나, 8세기부터 소수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간 분열이 심화되었다. 거듭된 왕위 다툼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 상실로 이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지방의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1]지방 성주(城主)와 호족의 성장은 신라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약화시켰고, 조세 제도 역시 문란해졌다. 신라 말기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늘어났지만, 재정 수입은 오히려 줄어드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했다.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889년 지방 주·군에 과도한 세금을 독촉했고, 이는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켜 결국 이중 수탈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무거운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유민(流民)이 되거나 도적 무리에 합류하며 기존 질서를 흔들었다. 이는 금성(金城) 중심의 신라 구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정부의 가혹한 조세 독촉은 영세 농민층을 자극하여 곳곳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게 만들었다.[2]
진성대왕 3년(889년)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현재의 상주시)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나마 영기(令奇)에게 진압을 명했다. 그러나 영기는 적의 기세를 보고 두려워하며 제대로 싸우지 못했고, 오히려 촌주(村主) 우련(祐連)이 힘껏 싸우다 전사했다. 진성대왕은 영기를 처형하고, 10여 세 된 우련의 아들에게 촌주 직을 잇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이 반란은 겨우 진압되었지만, 사회 혼란은 더욱 깊어졌고 호족들은 이 틈을 타 세력을 확장했으며 백성들은 생계를 위해 도적이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러한 혼란기에 각지에서 강력한 호족 세력들이 등장하며 후삼국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 견훤(甄萱): 상주의 농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라의 서남해안 방어 군인으로 복무하며 공을 세웠다.[1] 892년 신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완산(完山, 현재의 전주시)을 근거지로 삼아 거병하고, 무진주(武珍州, 현재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여 자립했다.[1][2] 그는 주변 호족들을 규합하며 세력을 빠르게 확장했고, 900년에는 스스로 왕을 칭하며 옛 백제의 부활을 내세운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하고 전주를 수도로 삼았다.[1][2] 견훤은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서남부 지역을 공략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5,000여 명의 무리가 모였다고 전해진다.
- 궁예(弓裔): 신라 왕족 출신이라는 설이 있는 승려였다.[1][2] 891년 죽주(竹州, 현재의 안성시 죽산면)의 호족 기훤(箕萱) 밑에 들어갔으나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자, 892년 북원의 양길 휘하로 옮겼다. 양길의 신임을 얻은 궁예는 군사를 이끌고 주천(酒泉), 내성(奈城), 어진(於珍) 등 10여 군현을 공략하여 항복시켰다. 894년에는 명주(溟州, 현재의 강릉시)를 점령하고 화천, 철원 등 강원도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패서(浿西, 예성강 이북) 지역 호족들이 연이어 투항했다. 896년에는 송악(松嶽, 현재의 개성시)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의 아들 왕건(王建)의 투항을 받아들여 이들의 도움으로 경기 북부와 서해안 일대를 장악했다. 898년 송악을 도읍으로 삼고, 899년에는 청주 지역까지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을 확보했다. 세력이 강성해진 궁예는 899년 7월, 자신을 경계하던 양길마저 비뇌성(非惱城) 전투에서 격파하고 그의 세력을 흡수했다.[2] 901년에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했으며, 이후 국호를 마진(摩震, 904년), 태봉(泰封, 911년)으로 바꾸었다.[2]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고 관심법을 내세우는 등 기행을 보이며 폭정을 행하다가[1][2] 918년 부하였던 왕건에게 축출되었다.[1][2]
이처럼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성장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태봉)는 쇠락한 신라와 함께 한반도를 다시 삼국 시대로 분열시켰다. 이는 후삼국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이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의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고려 태조가 지방 호족을 경계하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펼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3. 후삼국의 성립
신라 말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각지에서 호족 세력이 성장하는 혼란 속에서, 견훤과 궁예가 각각 새로운 나라를 세워 신라와 함께 경쟁하는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892년 무진주(현재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며 세력을 일으킨 견훤은 900년 완산주(현재의 전주시)를 도읍으로 삼아 공식적으로 후백제 건국을 선포했다. 그는 스스로 백제 왕을 칭하며 '정개(政開)'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관직 제도를 정비했으며 중국의 오월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1][2] 이는 옛 백제 지역 유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901년에는 신라 왕족 출신의 승려였던 궁예가 송악(현재의 개성)을 도읍으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1][2] 처음에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국호를 '고려'라 하였으나, 역사적으로는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도 불린다.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했으며,[2] 905년에는 철원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911년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변경했다.[2]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태봉 건국으로 신라의 통일 질서는 무너지고, 한반도는 다시 세 나라가 경쟁하는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들 외에도 여러 호족들이 신라 조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난립하였다.
3. 1. 견훤의 후백제 건국
신라 말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에서 호족 세력이 성장하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견훤(867년~936년)이 등장했다. 상주의 농민 출신으로 알려진 견훤은 신라의 군인으로 복무하며 서남해안 지역에서 군사적 공을 세워 기반을 다졌다.[1][2]892년, 견훤은 완산주(현재의 전주)를 근거지로 삼아 거병하여 무진주(현재의 광주)를 점령하고 신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스스로 후백제(後百濟)의 왕임을 칭하였고,[1][2] 무진주 동남쪽의 여러 군현이 그에게 항복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후 서라벌(현재의 경주) 서남쪽의 주현들을 공격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견훤은 자신을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이라는 긴 칭호로 부르며 위세를 과시했고, 특히 "백제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옛 백제 지역 유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군대는 한 달여 만에 5,000여 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백제 유민들이 여전히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900년에는 완산주를 직접 순행하며 민심을 얻고 국가 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했다. 이때 견훤은 공식적으로 백제왕을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로 '정개(政開)'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관직 제도를 마련했다. 또한,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국제적 위상도 확보하고자 했다. 나라 이름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았으나, 역사적으로는 삼국 시대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후백제로 불린다.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이후 궁예의 태봉 건국과 함께 신라의 통일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후삼국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3. 2. 궁예의 태봉 건국
신라 왕족 출신으로 알려진[1][2] 궁예는 891년 죽주(竹州)의 호족 기훤 휘하에 들어갔으나, 멸시를 받자 892년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양길에게 의탁했다. 궁예는 양길의 신임을 얻어 군사를 이끌고 주천(酒泉, 지금의 예천), 내성(奈城, 지금의 영월), 어진(지금의 울진) 등을 공략하여 항복시켰다. 894년에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를 점령하며 세력을 크게 확장했고, 여세를 몰아 화천, 철원 등 강원도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궁예의 세력이 커지자 패서(浿西, 예성강 이북) 지역 호족들이 연이어 투항했다. 이에 궁예는 더 이상 양길의 휘하에 머무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896년에는 임진강을 따라 북상하여 당시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의 유력 호족이었던 왕륭의 투항을 받았다. 궁예는 왕륭의 아들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삼았으며, 왕씨 부자의 도움으로 경기 북부와 서해안 일대를 손쉽게 장악했다. 또한 경기 지역 호족들의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충주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
898년 궁예는 송악을 기반으로 세력을 다졌고, 왕건에게 명하여 양주와 청주(淸州, 지금의 온양) 등 30여 성을 정벌하게 했다. 899년에는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대부분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왕건에게 신라의 아찬 벼슬을 내렸다. 같은 해 7월, 궁예의 급격한 성장을 경계한 양길이 국원(國原) 등 10여 성주와 연합하여 궁예를 공격했으나, 비뇌성(非惱城)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흩어졌다. 궁예는 양길의 남은 세력까지 흡수하여 더욱 강성해졌다. 900년 10월에는 국원, 청주, 괴양(槐壤) 지역의 호족 청길(淸吉)과 신훤(莘萱) 등이 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이러한 기반 위에 궁예는 901년 신라 효공왕 재위 시기에 송악을 도읍으로 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1][2] 초기 국호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고려(高麗)'라고 정했다. 역사 기록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후대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측면이 있다.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했으며, 여러 관직을 설치하며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이 시기 패강도(浿江道)의 10여 주현이 마진에 귀순했다. 905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고, 911년에는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변경했다.[2] 이처럼 궁예는 여러 차례 국호와 연호를 바꾸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3. 3. 신라의 대응과 한계
신라는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 즉위 이후 왕도 내에서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 780년에는 혜공왕과 왕비 등이 살해되어 무열왕 계열의 혈통이 단절되었다. 이후 왕위 찬탈이 계속되었고, 궁정 내분 속에서 왕위 쟁탈전에 패배한 왕족 중 일부는 지방에서 세력을 키웠다. 웅천주에서 독립을 시도한 김헌창이나 해상 세력이었던 장보고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중앙의 왕위 쟁탈에도 개입하려 했으나 진압되었다. 이러한 중앙 정부의 혼란은 신라 왕조의 통치 능력을 점차 약화시켰다.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혼란은 더욱 심화되어 지방으로까지 파급되었다. 힘을 키운 지방의 호족들은 스스로 장군이나 성주를 칭하며 신라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치원이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당나라 유학 후 884년 음력 10월 귀국하여 885년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 등의 관직을 맡았으나, 문란한 국정을 비판하며 외직을 자청하여 태산(太山, 지금의 정읍시 태인) 등지의 태수를 지냈다.
나라의 혼란이 극심해지자 진성여왕은 인재들에게 개혁안을 올리도록 독촉했다. 이에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한 시무(時務) 10여 조를 상소하였고, 그 공로로 아찬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결국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난세를 비관하며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의 개혁 시도가 좌절되면서 신라의 국운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개혁 시도가 실패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상황은 적고적(赤袴賊)의 난으로 이어졌다. 천년 왕국의 수도 금성의 서남쪽에서 일어난 이 도적들은 붉은 바지를 입어 스스로를 구별했기에 적고적이라 불렸다. 이들은 여러 고을을 습격하고 수도 서쪽의 모량리(牟梁里)까지 침입하여 민가를 약탈했다. 이는 신라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수도 인근까지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신라의 자체적인 개혁 노력은 한계에 부딪혔고, 통치 기반의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견훤이나 궁예와 같은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하여 후삼국 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다.
4. 후삼국의 쟁패
신라 말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들 중 견훤은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중심으로 900년 후백제를 건국했고, 궁예는 송악(지금의 개성)을 기반으로 후고구려(이후 마진, 태봉으로 국호 변경)를 세웠다. 이로써 신라, 후백제, 태봉이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후삼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태봉의 궁예는 점차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고, 결국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이후 고려는 후백제와 삼한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여러 차례의 큰 전투 끝에 고려는 점차 우위를 점했고, 후백제는 내부 분열까지 겪으며 쇠퇴했다. 935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고, 936년 고려가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하며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마침내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4]
4. 1. 후백제와 태봉의 초기 경쟁
901년 8월,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으나 성이 견고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고, 대신 금성(현재의 나주) 남쪽 지역을 약탈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903년에는 태봉(당시 후고구려)의 왕건이 이끄는 수군에게 금성 일대의 10여 군현을 기습적으로 빼앗기면서 서남부 해상 활동에 타격을 입었다.궁예는 904년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며 세력을 키웠다. 905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신라의 변경 지역을 공격하여 죽령 동북쪽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신라 조정은 점차 영토를 잃어가는 상황을 우려했지만, 직접 군사적으로 대응할 힘이 부족하여 각 성주들에게 수성(守城)을 명하는 데 그쳤다.
후백제와 태봉의 직접적인 충돌은 계속되었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견훤이 왕건에게 패배하였다. 이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견훤은 907년 일선군(현재의 구미시) 이남의 1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며 반격을 시도했다. 또한, 견훤은 직접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나주성을 10일간 포위하며 서해 해상권 회복을 노렸으나, 궁예가 보낸 수군의 공격을 받고 결국 물러나야 했다. 이처럼 초기 경쟁에서는 왕건을 앞세운 태봉이 후백제에 대해 군사적으로 다소 우위를 점하는 양상을 보였다.
4. 2. 태봉의 발전과 내부 갈등
궁예는 양길의 세력을 흡수하고 903년에는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금성(현재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점령하는 등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1][2] 898년 송악(후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901년 양길을 꺾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1][2], 904년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했으며, 신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여러 관직을 설치했다. 같은 해, 패강도(浿江道)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항복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905년 궁예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변경 지역을 공격하고 죽령(竹嶺) 동북쪽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신라 조정은 날로 강성해지는 궁예의 세력에 위협을 느꼈지만, 직접적인 대응보다는 각 성주들에게 성을 굳게 지키도록 명하는 소극적인 방어에 그쳤다.
911년 궁예는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변경했다.[2] 그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하며[1]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이른바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우는 등,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신격화하고 전제 정치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가 외출할 때는 200명의 승려가 뒤따르며 경전을 외웠다는 기록도 전해진다.[2] 그러나 이러한 통치 방식은 점차 폭정으로 변질되어, 농민뿐만 아니라 지배층에게도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궁예의 폭정이 심화되면서 민심은 점차 이반되었고, 이는 태봉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송악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자 수군 장수로서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명망을 높인 왕건이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결국 918년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 주요 장수들이 왕건을 추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궁예는 권력에서 축출되었고, 왕건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수도를 다시 송악으로 옮기면서 태봉은 막을 내렸다.[1][2]
4. 3.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전쟁

911년 궁예는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로 고쳤다. 그는 미륵 신앙을 내세워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으나, 점차 폭정을 일삼으며 호족들의 반발을 샀다.[1]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고,[1] 관심법이라는 텔레파시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을 숙청했다.[2] 그는 패서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수도를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기고, 청주 호족을 중용했으며, 심지어 왕비 강씨와 두 아들까지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 이러한 폭정으로 신하들의 불만이 커지자, 결국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주요 장수들이 왕건을 추대하여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궁예는 축출되어 도망치던 중 성난 백성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918년 새로운 나라 '''고려'''(高麗)를 건국하고 송악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으며,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궁예를 따르던 세력의 반발과 반란 시도가 있었으나, 왕건은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내부를 안정시켰다. 이후 고려는 후백제와 삼한일통의 패권을 두고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처음 왕건은 후백제와 인질을 교환하며 휴전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와 있던 후백제 진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양국 관계는 파탄났고, 다시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 이미 지방 통제력을 상실한 신라의 호족들은 각자 고려나 후백제와 손을 잡았고, 이는 양국 간의 세력 다툼을 더욱 가속화했다.
고려와 후백제는 삼한의 주도권을 놓고 여러 차례 큰 전투를 벌였다. 927년 견훤이 신라 수도 경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왕위에 앉히자,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해 출정했으나 공산(현재 대구)에서 후백제군에게 크게 패배했다.[1][2] 이 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 김락 등 충성스러운 장수들을 잃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후 전세는 점차 고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고창(현재 안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왕건이 견훤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934년 운주(현재 홍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고려가 후백제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2] 고려는 전쟁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게 되었다. 이 시기 북방 발해의 유민들이 정세 안정을 보고 고려로 귀순해오기도 했다.[2]
후백제는 연이은 패배와 더불어 내부 분열로 급격히 약화되었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장남 신검이 935년 동생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했다. 같은 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고려에 평화적으로 항복했다.[2] 왕건은 경순왕을 우대하며 신라의 유민들을 포용했다.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은 놀랍게도 자신의 오랜 숙적이던 왕건에게 귀순하여 아들 신검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했다. 936년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를 공격했고,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군대를 격파했다. 결국 신검은 항복했고,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했다.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한반도를 재통일하여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4]
5. 후삼국의 통일
후백제 말기,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부 혼란이 발생하여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폐위되고 금산사에 유폐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명맥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 역시 935년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었다. 왕건은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을 상보(上父)로 예우하고,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들여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였다.
이후 936년, 왕건은 견훤 등을 앞세워 대군을 이끌고 일리천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완수하였다.[5]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 왕조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거란을 경계하고 서경(평양) 개발에 힘썼으며, 장군 유금필 등을 통해 동북 지역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왕건은 통일 과정에서 신라의 전통적 권위를 존중하고 구 지배층을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으며(경순왕의 사심관 임명 등), 전국의 유력 호족들과 결혼 정책을 통해 연합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호족 세력은 왕건 사후 정치적 불안정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왕건이 남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 그리고 특히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이러한 호족 세력에 대한 경계와 후대 왕들에 대한 당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5]
5. 1. 후백제의 내분과 멸망
후백제 말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장남 신검이 935년 동생 양검, 용검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신검 세력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살해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1]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분노하여 935년 6월,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 의사를 밝혔다. 견훤은 고려의 영역이던 나주를 거쳐 개성으로 가서 왕건에게 투항했다. 왕건은 후백제의 건국자인 견훤을 상보(上父)로 예우하며 극진히 대접했다. 같은 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역시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었다.[2]
936년, 왕건은 견훤을 앞세우고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왕건의 고려군은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에서 벌어진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신검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했으나, 결국 황산에서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견훤이 세운 후백제는 건국 45년 만에 멸망하고,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 시대를 끝내고 한반도를 재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5]
5. 2. 신라의 항복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이 발생했다. 견훤은 아들 신검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금산사에 갇히는 등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다. 이에 분노한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할 뜻을 전하고 나주를 거쳐 고려로 귀순하였다.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마저 고려에 항복하자, 사실상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신라의 경순왕은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935년, 경순왕은 고려에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기로 결정하고 항복하였다.[2] 왕건은 귀순한 견훤을 상보(上父)로 예우하는 한편,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들여 신라가 가진 천년의 역사와 전통, 권위를 계승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왕건은 항복한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는 등 신라의 지배층을 포용하여 새로운 통일 국가의 안정을 꾀했다.[5] 이로써 신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5. 3.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로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금산사에 유폐되는 등 내부 혼란이 극심했다. 이에 분노한 견훤은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때마침 935년에는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왕건은 후백제의 건국자인 견훤을 상보(上父)로 대우하고, 경순왕으로부터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이후 936년, 왕건은 왕순식과 귀순한 견훤 등을 앞세우고 말갈 기병 및 여러 호족들의 병력까지 총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리천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격파하였다. 결국 황산(현재의 논산)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내며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완수하였다.[1]
후삼국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통일 왕조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영토 확장에 힘썼으며, 거란을 경계하고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장군 유금필을 보내 동북 지역 영토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왕건은 신라의 전통적 권위를 활용하여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려 했다.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는 등 신라 지배층을 포용하고 회유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전국의 유력 호족들과 결혼 정책을 통해 연합을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왕건의 시대에는 큰 혼란이 없었으나, 강력한 호족 세력은 이후 광종 대까지 왕권 강화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왕건이 남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와 특히 후대 왕들에게 정치의 귀감으로 삼도록 한 〈훈요십조〉(訓要十條)에는 이러한 호족 세력에 대한 경계심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5]
6. 후삼국 시대의 의의
892년 농민 출신 견훤의 봉기와 신라 왕족 출신 궁예의 태봉 건국으로 신라가 분열된 후, 936년 고려가 한반도를 재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 부른다. 이 시기는 단순히 국가의 분열과 재통일 과정을 넘어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정치적으로는 골품제를 기반으로 한 신라의 중앙 집권 체제가 붕괴하고, 호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지방 세력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견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과 같은 인물들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새로운 국가 건설을 시도했고, 이는 고대 사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최종적으로 고려가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여 이룩한 통일은 단순한 영토 통합을 넘어, 다양한 세력을 아우르는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으로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의 골품제가 사실상 해체되고, 개인의 능력과 실력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민 출신의 견훤이나 상인 가문 출신의 왕건이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회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를 거치며 형성된 지방 세력과의 연합 및 통합 경험은 이후 고려 사회의 운영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후삼국 시대는 고대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고 해체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중세 사회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준 시기이다. 이 시기의 혼란과 경쟁은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재통일을 이끌었고, 이후 고려라는 새로운 통일 왕조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6. 1. 정치적 변화
신라에서는 혜공왕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780년에는 반란으로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되면서 무열왕계 혈통마저 단절되었다. 이후 왕위 찬탈이 반복되고 중앙 귀족 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신라의 통치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김헌창이나 해상 세력으로 성장한 장보고처럼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중앙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으나, 이들은 곧 진압되었다. 하지만 중앙 정부의 권위 약화와 함께 지방에서는 농민 봉기가 잇따르며 신라 사회의 동요는 더욱 심화되었다.9세기 중반에 이르러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각지에서 성장한 호족들이 스스로 '장군'이나 '성주'를 칭하며 신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 중 견훤과 궁예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며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견훤은 본래 상주 지역의 농민 출신이었으나, 서남해안 지역에서 군사적 공을 세우며 세력을 키웠다. 그는 892년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근거지로 삼아 봉기하였고,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며 독립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주변 호족들을 통합하여 세력을 확장한 견훤은 900년 마침내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백제'라 칭하고, 옛 백제 땅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891년 죽주에서 기훤의 부하로 있다가 이후 북원경의 양길 휘하에서 활동하며 강원도 일대에서 세력을 넓혔다. 898년에는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하였으며, 901년에는 양길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독자적인 연호와 관제를 제정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후고구려는 이후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다시 신라, 후백제, 태봉(후고구려)의 세 나라가 경쟁하는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태봉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새로운 리더로 부상했다. 송악의 호족 출신으로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왕건은 수군 장수로서 많은 군공을 세우며 신망을 얻었다. 결국 918년, 왕건은 궁예를 축출하고 개성을 도읍으로 삼아 '고려'를 건국하고 태조로 즉위했다. 왕건은 뛰어난 정치력으로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며 세력을 안정적으로 확장해 나갔고, 마침내 935년에는 신라의 항복을 받아 평화적으로 병합했으며, 이듬해인 936년에는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여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재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6. 2. 사회·문화적 변화
신라 말기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780년 혜공왕과 왕비가 반란으로 살해되면서 무열왕계 혈통이 단절되었고, 이후 왕위 찬탈과 궁정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왕족이나 지방 세력이 독자적인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웅천주에서 독립을 시도한 김헌창이나 강력한 해상 세력을 구축했던 장보고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의 움직임은 중앙 정부에 의해 진압되기도 했지만, 연이은 지방에서의 농민 봉기는 신라 왕조의 통치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9세기 중반 이후, 이러한 반란은 더욱 빈번해지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지방에서 실력을 쌓아온 호족들은 스스로 장군이나 성주를 칭하며 신라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의 골품제 중심의 신분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사회 구조가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견훤, 양길(북원경을 거점으로 한), 그리고 그의 부하였던 궁예 같은 새로운 세력가들이 등장하여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견훤은 본래 상주 지역의 농민 출신이었으나, 서남해안 지역에서 군사적 공을 세우며 점차 세력을 키웠다. 그는 892년 완산주(현재의 전주)를 거점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고, 무진주(현재의 광주)를 점령하며 독립적인 세력 기반을 마련했다. 주변 호족들을 규합하여 힘을 키운 견훤은 마침내 900년 스스로 '후백제왕'을 칭하며 한반도 서남부에 후백제를 건국했다. 농민 출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신분 질서의 큰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891년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양길의 휘하에서 강원도 등지에서 군공을 세우며 세력을 확장했다. 898년에는 송악(현재의 개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후고구려 건국을 선포했으며, 901년에는 양길을 물리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독자적인 연호와 관제를 사용하는 등 신라와는 다른 새로운 국가 체제를 모색했다. 후고구려는 이후 국호를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변경하며 독자 노선을 강화했다.
이처럼 신라의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 후백제와 태봉이 건국되면서 한반도는 다시 한번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격변기 속에서 송악의 상인 가문 출신이자 궁예 휘하의 장수였던 왕건은 점차 세력을 키워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은 이후 적극적으로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고 국력을 신장시켜 935년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하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키며 마침내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이 과정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가 해체되고 능력과 실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 질서가 형성되는 중요한 전환기였음을 보여준다.
7.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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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주요 사건 |
---|---|
892년 | 견훤, 무진주(현 광주)를 점령하며 반란을 일으킴. 궁예, 양길의 휘하에 들어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함. |
900년 | 견훤, 완산주(현 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 건국을 선포함. |
901년 | 궁예, 송악(현 개성)을 도읍으로 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함. |
904년 | 궁예, 국호를 마진으로 변경하고 철원(궁예도성)으로 수도를 옮김. |
911년 | 궁예,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변경함. |
917년 | 신라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 박언창, 밀양 일대에서 후사벌을 건국함. |
918년 | 왕건, 궁예를 축출하고 송악(현 개성)에서 고려를 건국함. |
926년 | 거란이 발해를 침략하여 멸망시킴. 발해의 태자 대광현 등이 고려로 망명함. |
928년 | 견훤, 신라의 수도 서라벌(현 경주)를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경애왕을 살해함. |
929년 | 견훤, 후사벌을 공격하여 멸망시킴. |
930년 | 고창 전투: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함. 이 전투의 승리로 안동 지역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게 됨. |
934년 | 운주 전투: 고려군이 운주(현 홍성)에서 후백제군에 승리하여 후백제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킴. 후백제는 이 전투에서 8천여 명의 군사를 잃음. |
935년 | 견훤이 막내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장남 신검 등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함.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함. |
936년 3월 | 견훤,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함. |
936년 8월 | 일리천 전투: 고려군(왕건, 견훤 연합)이 일리천(현 선산)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격파함. 후백제가 멸망하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함. |
참조
[1]
Encyclopedia
후삼국시대 (後三國時代)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14
[2]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0-10-16
[3]
문서
궁예, 양길, 견훤 등
[4]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5]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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