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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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진립은 1566년 경주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무신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왜군을 격멸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좌수사, 경기수사,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으며, 병자호란 때 공주 영장으로 출전하여 용인 험천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시호는 정무이다. 저서로 《정무공기실》이 있고, 드라마 《명가》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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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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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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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최진립 |
한자 표기 | 崔震立 |
출생일 | 1566년 (명종 21) |
사망지 | 용인 험천 |
사망일 | 1637년 (능양군 13) |
사망 원인 | 전사 |
자 | 사건(士建) |
호 | 잠와(潛窩) |
시호 | 정무(貞武) |
학력 | 1594년 무과 |
직업 | 무신, 군인 |
자녀 | 최동량 |
2. 생애
1566년 경주에서 최신보의 아들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1] 1594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에서 왜군을 격멸하였다. 이어 권율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되었고,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제수받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 여도만호(呂島萬戶) 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 마량첨사(馬梁僉使), 경상우후(慶尙虞侯)에 제수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기를 정돈하였다. 1607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를 지내고, 1614년에 경원부사(慶源府使)가 되었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청하나 응하지 않았다 갑산에 유배되었다.
1623년 반정 이후 사면되어 가덕진 첨절제사(僉節制使)에 복직하였고, 1626년에는 경흥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1630년 전라좌수사를 거쳐 경기수사에 올랐으며,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1632년에는 교동부사가 되었고, 1633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를 거쳐 덕원부사에 제수되었다. 1634년에는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공주 영장으로 감사 정세규의 좌영장으로 출진하여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2. 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1] 1594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에서 왜군을 격멸하였다. 이어 권율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되었고,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제수받았다.[1]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 여도만호(呂島萬戶) 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 마량첨사(馬梁僉使), 경상우후(慶尙虞侯)에 제수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기를 정돈하였다.[1]
2. 2. 관직 생활과 병자호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1] 1594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에서 왜군을 격멸하였다. 이어 권율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되었고,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제수받았다.[1]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 여도만호(呂島萬戶) 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 마량첨사(馬梁僉使), 경상우후(慶尙虞侯)에 제수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기를 정돈하였다. 1607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를 지내고, 1614년에 경원부사(慶源府使)가 되었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청하나 응하지 않았다 갑산에 유배되었다.[1]
1623년 반정 이후 사면되어 가덕진 첨절제사(僉節制使)에 복직하였고, 1626년에는 경흥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1630년 전라좌수사를 거쳐 경기수사에 올랐으며,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1632년에는 교동부사가 되었고, 1633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를 거쳐 덕원부사에 제수되었다. 1634년에는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1]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공주 영장으로 감사 정세규의 좌영장으로 출진하여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1]
3. 사후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경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4. 저서
《정무공기실》 2권이 있다.
5. 가족 관계
증조부는 최득정, 조부는 최삼빙, 부친은 최신보(崔臣輔)이다. 형은 최진흥(崔震興)과 최진망(崔震望)이며, 아들은 최동량(崔東亮)이고, 손자는 최국선이다.
6. 최진립이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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