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 프랜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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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니 프랜시스는 1950년대 후반 "Who's Sorry Now?"의 히트로 데뷔하여 "Stupid Cupid", "Where the Boys Are" 등 다양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미국의 가수이다. 15개 국어로 음반을 녹음하고,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다. 1974년 강간 피해를 입고 1977년 성대 수술로 목소리를 잃는 등 불운을 겪었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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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 프랜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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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카니 프랜시스는 11세 때부터 쇼에 출연했으며, 1955년 "Freddy"로 가수 데뷔를 했으나 한동안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 1958년 "Who's Sorry Now?"가 크게 히트하면서 1960년대 초반까지 인기를 얻었다. 1961년 "Together"로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에서 여성 가수 최초로 1위를 기록했다.
프랜시스는 여성 최초의 로큰롤 가수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렀다. 특히 일본어, 독일어, 유대어 등 15개 외국어로 음반을 녹음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4년 11월 8일, 뉴욕 웨스트버리 음악 박람회 공연 후 호텔에서 강간 피해를 입었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지만, 프랜시스는 호텔 체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약 300만달러의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프랜시스는 4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1985년부터 1986년까지 TV 프로듀서 밥 파킨슨과 결혼 생활을 했다.
그녀의 노래는 세계 각국에서 커버되었는데, 일본에서는 히로타 미에코, 나카오 미에 등이 부른 버전이 인기를 끌었다. 프랜시스는 민족 무용을 의식한 "Misirlou(미자루)"를 부르기도 했다. 이 곡은 딕 데일의 기타 연주 버전이 펄프 픽션, 택시 시리즈에 사용되면서 유명해졌지만, 가사는 없다.
2. 1. 1937–1957: 초기 생애 및 활동
프랜시스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중 한 명은 1905년 레조 디 칼라브리아에서 이민을 왔다.[7] 뉴저지주 뉴어크의 아이언바운드 지역에서 조지 프란코네로(1911–1996)와 이다(Ferrari-di Vito|페라리-디 비토it; 1911–2000)의 첫째 아이였다. 가족이 뉴저지로 이사하기 전까지 브루클린의 크라운 하이츠 지역 (유티카 애비뉴/세인트 마크스 애비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8] 이탈리아계와 유대인이 섞여 사는 동네에서 자라면서 이디시어에 유창하게 되었고, 이후 이디시어와 히브리어로 노래를 녹음하게 되었다.[8][9]1984년에 출판된 자서전 ''누가 미안하다고 말할까?''에서 프랜시스는 네 살 때부터 아버지의 권유로 재능 경연 대회, 미인 대회 및 기타 동네 축제에 가수 겸 아코디언 연주자로 정기적으로 출연했다고 회상한다.
1951년과 1952년에 뉴어크 예술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녀와 가족은 뉴저지주 벨빌로 이사했고, 1955년 벨빌 고등학교에서 차석 졸업자로 졸업했다.[10][11]
동네 축제와 재능 쇼에서 계속 공연했으며(일부는 텔레비전으로 방송됨) 콘체타 프란코네로와 코니 프란코네로라는 이름으로 번갈아 출연했다. 후자의 이름으로 1953년에서 1955년 사이에 NBC의 버라이어티 쇼 ''스타타임 키즈''에 출연했다.[8]
1950년 12월 ''아서 고프리의 탤런트 스카우트'' 출연을 위한 리허설 동안 고프리로부터 발음을 쉽게 하기 위해 예명을 코니 프랜시스로 바꾸라는 조언을 받았다. 고프리는 또한 그녀에게 아코디언을 버리라고 말했다. 크고 무거운 악기를 싫어하기 시작했기에 이 조언을 기꺼이 따랐다.[8]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랜시스는 발표되지 않은 노래를 기존의 가수 및/또는 그들의 매니지먼트에게 알리기 위해 데모 레코드의 가수로 일했는데, 그들은 이를 전문적인 상업용 레코드로 녹음할 수도 있었다.[12]
1955년, 《스타임 키즈》가 방송을 종료했다. 그 해 5월, 조지 프랑코네로 시니어와 프랜시스의 매니저 조지 셰크는 프랜시스 본인의 이름으로 주요 음반 회사에 판매할 목적으로 4곡의 녹음 세션을 위한 자금을 모금했다. MGM 레코드가 그녀와 계약을 맺기로 결정한 것은 그녀가 녹음한 "Freddy"라는 트랙이 회사 임원인 해리 A. 메이어슨의 아들 이름과 같았고, 그가 이 노래를 좋은 생일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Freddy"는 프랜시스의 첫 번째 싱글로 발매되었지만, 이후 8개의 솔로 싱글처럼 상업적으로 실패했다.[8]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1956년 영화 《록, 록, 록》에서 튜즈데이 웰드의 "노래하는" 장면과 1957년 워너 브라더스의 로큰롤 영화 《잼보리》에서 프레다 할로웨이의 보컬을 녹음하는 데 고용되었다.[43]
1957년 가을, 마빈 레인워터와 함께 녹음한 듀엣 싱글 "The Majesty of Love"로 첫 번째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B-사이드 곡은 "You, My Darlin' You"였으며, ''빌보드'' 핫 100에서 93위에 올랐다.[14] 이 싱글은 백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12]
2. 2. 1957–1959: "Who's Sorry Now?"와 성공

하지만 그녀의 차트에서의 작은 성공은 음반 회사에게 너무 늦게 찾아왔다. 프랜시스의 음반 계약은 솔로 싱글 10곡과 듀엣 싱글 1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The Majesty of Love"로 성공이 찾아오는 듯했지만, 프랜시스는 마지막 솔로 싱글 이후 MGM 레코드와 계약이 갱신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프랜시스는 의학 분야의 경력을 고려하여 뉴욕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4년 장학금을 받으려 했다. 1957년 10월 2일, 조 립먼과 그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MGM에서의 마지막 녹음 세션이 될 뻔한 자리에서[13] 그녀는 1923년 노래 "Who's Sorry Now?"의 커버 버전을 녹음했는데, 이 곡은 버트 칼마와 해리 루비가 작곡했다. 프랜시스는 아버지가 이 노래가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가 고집해서 녹음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 곡이 이미 어른들이 알고 있는 노래였고, 현대적인 편곡을 하면 십대들이 춤을 출 것이라고 생각했다.[15]
프랜시스는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세션 동안 다른 두 곡의 녹음을 너무 지연시켜 녹음 테이프에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27]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계속 고집했고, "Who's Sorry Now?"의 녹음이 끝나자 테이프에는 몇 초만 남았다.[8]
이 싱글은 프랜시스가 예상했던 대로 이전의 모든 발매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듯했지만, 1958년 1월 1일, 딕 클라크의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에서 데뷔했다. 그리고 그해 2월 15일, 프랜시스는 클라크가 진행하는 ''토요일 밤 비치넛 쇼''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 곡을 불렀다. 연말까지 백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고, 프랜시스는 갑자기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1958년 4월, "Who's Sorry Now?"는 영국 싱글 차트에서 1위, 미국에서 4위에 올랐다.[31] 그 후 4년 동안 프랜시스는 ''아메리칸 밴드스탠드'' 시청자들로부터 "최고 여성 보컬리스트"로 선정되었다.[8]

"Who's Sorry Now?"의 성공 직후 MGM 레코드와 계약이 갱신되면서, 코니 프랜시스는 새로운 히트곡을 찾기 시작했다. "I'm Sorry I Made You Cry"가 36위에서 멈추고, 차트에 전혀 진입하지 못한 "Heartaches"가 실패한 후, 프랜시스는 닐 세다카와 하워드 그린필드를 만났다. 그들은 그녀를 위해 작곡한 여러 발라드를 불렀다. 몇 시간 후, 프랜시스는 작곡가들이 마지막 발라드를 연주하는 동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프랜시스는 그들에게 발라드가 너무 지적이고 젊은 세대에게는 세련되었다고 생각하며, 더 활기찬 노래를 요청했다. 그린필드는 세다카에게 그날 아침 셰퍼드 자매들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노래를 부르라고 권했다. 세다카는 프랜시스가 모욕감을 느낄 것이라고 항의했지만, 그린필드는 그녀가 그들이 연주한 다른 모든 노래를 싫어했으니 잃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세다카는 "Stupid Cupid"를 연주했고, 연주를 마치자 프랜시스는 그가 그녀의 새로운 히트곡을 방금 연주했다고 발표했다. 이 노래는 ''빌보드'' 차트에서 14위에 올랐고, 영국에서 그녀의 두 번째 1위 곡이 되었다.[31]
"Stupid Cupid"의 성공으로 프랜시스의 차트 경력에 다시 활력이 돌았고, 1950년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미국 톱 40에 8번 더 진입했다.[31] 그녀는 "My Happiness" (핫 100에서 2위)와 "Among My Souvenirs" (7위)와 같은 여러 오래된 노래를 커버하고, 자신의 오리지널 곡을 연주하면서 더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1959년, 그녀는 더블 사이드 히트로 2개의 골드 레코드를 얻었다. A면은 "Lipstick on Your Collar" (5위), B면은 "Frankie" (9위)였다.
2. 3. 1959–1973: 국제적인 스타
1959년 8월, 프랜시스는 아버지의 제안으로 런던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EMI를 통해 이탈리아 앨범 ''코니 프랜시스 이탈리아 곡을 부르다(Connie Francis Sings Italian Favorites)''를 녹음했다.[12] 1959년 11월에 발매된 이 앨범은 앨범 차트에서 81주 동안 머물렀고 최고 4위까지 오르며 프랜시스의 가장 성공적인 앨범이 되었다. 이 앨범에서 싱글로 발매된 "마마"는 미국에서 8위, 영국에서 2위에 올랐다.[16]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프랜시스는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유대인, 독일, 아일랜드 곡 등 7개의 "즐겨 부르는 곡" 앨범을 추가로 녹음했다. 이러한 앨범들은 프랜시스가 로큰롤에서 성인 컨템포러리 음악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아버지 조지 프란코네로 시니어가 딸의 성공적인 음악 경력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프랜시스는 젊은 층을 위한 싱글도 계속 녹음했다. 그녀의 핫 100 10위권 히트곡으로는 "새로 망가진 가슴을 부수며(Breakin' in a Brand New Broken Heart)"(1961, 7위), "네 팔 안의 소년이 네 마음속의 소년일 때]"(1961, 10위), "
2. 4. 1974–1981: 비극과 복귀
1974년 11월 8일, 뉴욕주 웨스트버리 뮤직 페어에서 공연하던 프랜시스는 뉴욕주 제리코의 제리코 턴파이크 하워드 존슨'스 로지에서 강간을 당했고, 범인이 던진 무거운 매트리스에 깔려 질식할 뻔했다.[8] 그녀는 이후 모텔 체인에 적절한 보안을 제공하지 못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그 결과 역사상 가장 큰 판결 중 하나인 2500000USD의 판결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호텔 보안 개혁으로 이어졌다.[25] 그녀의 강간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25] 이 사건 이후, 프랜시스는 우울증에 빠져 하루 50알의 다르본을 복용하며 뉴저지주 에섹스 펠스에 있는 자택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26]1977년, 프랜시스는 코 수술을 받았으나 목소리를 완전히 잃었다. 이후 세 번의 추가 수술을 받았지만, 4년 동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27][28]
1978년, 프랜시스는 앨범 ''Who's Happy Now?''를 녹음하기 위해 녹음실로 복귀했다.[29] 이 앨범의 리드 녹음은 "Where the Boys Are"의 디스코 버전이었다.
1981년, 프랜시스는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와 "''Comme ci, comme ça''"와 "I'm Me Again"을 녹음했는데, "I'm Me Again"은 새로운 곡들이 수록된 앨범의 타이틀곡이 되었다.[30] 이 곡은 프랜시스가 AC 차트에 오른 마지막 싱글이 되었다.[31]
2. 5. 1981–1988: 또 다른 비극
1981년, 카니 프랜시스는 그녀와 매우 가까웠던 오빠 조지 프란코네로 주니어가 마피아 청부 살인업자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8][32]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라이브 공연을 시작했고, ''아메리칸 밴드스탠드'' 30주년 기념 특별 방송에도 출연했으며, 강간당했던 도시에도 나타났다. 하지만 프랜시스의 새롭게 얻은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조울증 진단을 받았고, 이로 인해 다시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녀는 여러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33][34][35] 1984년에는 자살을 시도했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4년에 프랜시스는 자서전 ''누가 지금 미안해?''(Who's Sorry Now?)를 쓰고 출판했으며, 이 책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 6. 1989–2018: 이후 활동
1989년, 프랜시스는 말라코 레코드에서 그녀의 히트곡 18곡을 다시 녹음하고, 향수의 명곡 6곡과 "Where the Boys Are"|외로운 밤에영어, Breakin' in a Brand New Broken Heart|두 연인 사이에서영어를 포함한 더블 앨범 ''Where the Hits Are''를 발매하며 활동을 재개했다.[36]1992년, 독일에서 그녀의 히트곡 리믹스 메들리가 차트에 올랐고, "Jive, Connie" 싱글은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싱글 10위 안에 들었다. 프랜시스는 R.SH(Radio Schleswig-Holstein)로부터 "올해의 최고의 컴백"으로 R.SH-Gold 상을 받았다.[37] 그녀의 독일 히트곡 오리지널 버전을 담은 컴필레이션 앨범도 성공했다. 페터 크라우스와 함께 독일 헤르츠클랑 레이블에서 2곡의 듀엣을 녹음했지만, 독일어 솔로 앨범은 발매되지 않았다.
1996년, 라이브 앨범 ''The Return Concert: Live at Trump's Castle''[38]과 버디 홀리 헌정 앨범 ''With Love to Buddy''를 발매했다.
2004년 12월, 프랜시스는 라스베이거스 밸리에서 공연했고,[28] 2007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카스트로 극장에서 매진 공연을 했다.[39] 2008년 발렌타인 데이에는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에서 콘서트를 열었다.[40]
2010년, 라스베이거스 힐튼에서 디온 워윅과 함께 "에릭 플로이드의 그랜드 디바스 오브 스테이지"에 출연했다.[41]
2017년 12월, 자서전 ''Among My Souvenirs''를 발매했다.[42]
3. 사생활
카니 프랜시스는 11세 때부터 쇼에 출연했으며, 1955년 "Freddy"로 가수 데뷔를 했지만, 한동안 히트곡은 없었다. 1958년 "Who's Sorry Now?"가 대히트를 하면서 1960년대 초반까지 히트곡을 연발했다. 1961년 "Together"는 빌보드지의 어덜트 컨템포러리 싱글 차트에서 여성 최초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여성 최초의 로큰롤 가수로 여겨지며,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렀고, 일본어, 독일어, 유대어 등 15개 외국어로 레코드를 녹음했다.
1974년 11월 8일, 웨스트버리 음악 박람회에 맞춰 뉴욕 시내 호텔에 묵던 중, 객실에 불법 침입한 흑인 남성에게 강간 피해를 입었지만,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프랜시스는 안전성을 확보하지 않았다며 모텔 체인을 제소하여 약 300만달러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세계 각국에서 히트곡이 커버되었으며, 일본에서는 히로타 미에코나 나카오 미에 등의 커버가 히트하여 알려져 있다. 민족 무용을 의식한 "Misirlou(미자루)"를 불렀는데, 이후 "펄프 픽션"과 "택시" 시리즈로 유명한 딕 데일의 기타 연주곡이 만들어지지만, 가사는 없다.
프랜시스는 리처드 닉슨의 1968년 대통령 선거 운동을 지지하며 그를 위한 선거 캠페인 송을 녹음했다.[57]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은 그녀를 폭력 범죄 태스크 포스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또한 정신 건강 미국(Mental Health America)의 트라우마 캠페인 대변인이었으며, USO 및 유니세프에서 활동했다. 2011년 인터뷰에서 프랜시스는 자신을 "열렬한 자유주의자"라고 묘사했다.[58]
3. 1. 결혼
프랜시스는 네 번 결혼했다. 1964년에 알라딘 호텔의 홍보 담당자이자 엔터테인먼트 디렉터였던 딕 카넬리스와 짧게 결혼했다.[47] 1971년 1월, 헤어 살롱 소유주인 이지 마리온과 결혼했지만, 10개월 후에 이혼했다.[48][49] 1973년에는 레스토랑 경영자이자 여행사 소유주인 조셉 가르질리와 세 번째 결혼을 했고, 1977년에 이혼했다.[50] 프랜시스가 아들 조이를 입양한 것도 세 번째 결혼 중이었다.[51] 1985년 6월 27일, TV 프로듀서 밥 파킨슨과 결혼했지만, 그 해 말에 이혼했다.[50]3. 2. 바비 다린과의 관계
경력 초기에 프랜시스는 당시 떠오르는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바비 다린을 소개받았다. 다린의 매니저는 그가 그녀를 위해 여러 곡을 쓰는 것을 돕도록 주선했다. 소재에 대한 약간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린과 프랜시스는 몇 주 후 연애 관계를 발전시켰다. 프랜시스의 엄격한 이탈리아인 아버지는 가능한 한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린이 그녀의 쇼 중 하나가 끝난 후 두 사람이 도망가자고 제안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총을 들이대며 다린을 건물에서 쫓아냈다.[52][53]프랜시스는 다린을 두 번 더 만났다. 한 번은 두 사람이 텔레비전 쇼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을 때였고, 또 한 번은 TV 시리즈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에서 그녀가 조명을 받았을 때였다. 후자의 녹화 시점에는 다린이 배우 샌드라 디와 결혼한 상태였다. 프랜시스는 자서전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가 링컨 터널로 차를 몰고 가고 있을 때 라디오 DJ가 디와 다린의 결혼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린이 마침내 그들의 삶에서 사라졌다는 부정적인 언급을 했다. 분노한 프랜시스는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모두를 죽이도록 허드슨 강이 링컨 터널을 채우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녀는 나중에 다린과 결혼하지 않은 것이 그녀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썼다.[8]
3. 3. 정치 및 사회 활동
프랜시스는 리처드 닉슨의 1968년 대통령 선거 운동을 지지하며 그를 위한 선거 캠페인 송을 녹음했다.[57]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은 그녀를 폭력 범죄 태스크 포스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또한 정신 건강 미국(Mental Health America)의 트라우마 캠페인 대변인이었으며, USO 및 유니세프에서 활동했다.
2011년 인터뷰에서 프랜시스는 자신을 "열렬한 자유주의자"라고 묘사했다.[58]
4. 대표곡
제목 | 발매일 | 빌보드 최고 순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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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케이션 (Vacation) | 1962년7월 | 9위 | 스테레오 녹음. 아오야마 미치, 이토 유카리, 카나이 카츠코, 히로타 미에코, 야스무라 마사코 등이 렌 켄지의 동일한 일본어 가사로 커버. 히로타 미에코 음반 20만 장, 아오야마 미치 음반 3만 장 히트. Mi-Ke, 미즈키 아리사 커버. 코니 프랜시스도 렌 켄지의 일본어 가사로 녹음. |
후즈 쏘리 나우 (Who's Sorry Now?) | 1958년2월 | 4위 | 모노럴 녹음. 첫 밀리언셀러. 계약 해지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곡. 자신의 창법을 발견한 전환점. |
보이 헌트 (Where The Boys Are) | 1961년1월 | 4위 | 스테레오 녹음. 타케우치 마리야 등이 커버. |
컬러에 립스틱 (Lipstick On Your Collar) | 1959년5월 | 5위 | 스테레오 녹음. 모리야마 카요코, 코이즈미 쿄코, 이토 유카리 등이 커버. |
울지 마 (Don't Break The Heart That Loves You) | 1962년1월 | 1위 | 스테레오 녹음. |
얼간이 큐피드 (Stupid Cupid) | 1958년7월 | 14위 | 모노럴 녹음. Days 삽입곡. |
아몽 마이 수베니어 (Among My Souvenirs) | 1959년11월 | 7위 | 모노럴 녹음. |
마이 해피니스 (My Happiness) | 1958년11월 | 2위 | 스테레오 녹음. |
아이엠 쏘리 아이 메이드 유 크라이 (I'm Sorry I Made You Cry) | 1958년4월 | 36위 | 모노럴 녹음. |
예쁜 베이비 (Pretty Little Baby) | 미국 미발매, 일본 독자적 히트곡. 스테레오 녹음. 나카오 미에, 모리야마 카요코, 사와 리리코, 고토 쿠미코 등이 커버. | ||
꿈의 데이트 (Someone Else's Boy) | 일본 독자적 히트곡. | ||
롤리팝 립스 (Lollipop Lips) | 미국 미발매, 일본 독자적 히트곡. 와타나베 토모코, 쿠죠 유미코와 대니 이이다와 파라다이스 킹 등이 커버. | ||
어른이 되고 싶어 (Too Many Rules) | 1961년 | 72위 | 일본에서 이토 유카리, 고토 쿠미코 등의 노래로 대히트. |
5. 출연 영화
(노래 목소리만)
(노래 목소리만)
(노래 목소리만)
(《밥 호프 프레젠트 더 크라이슬러 극장》 에피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