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마누스 (카롤루스의 아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를로마누스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자이자 카롤루스 2세의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수도원에 보내졌으며, 사제 서품을 받고 여러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아버지 카롤루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투옥과 탈출을 반복했다. 동프랑크 왕국으로 도망쳐 숙부 루트비히 2세의 보호를 받으며 히터나흐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876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876년 사망 -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건설하고 바이에른을 통치했으며, 형제들과의 분쟁과 서프랑크 왕국과의 갈등 속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기반을 다졌다. - 876년 사망 - 도마고이
도마고이는 864년 즈데슬라브를 폐위시키고 크로아티아 공작으로 즉위하여 베네치아와 평화를 맺고 아라비아 해적을 소탕했으나, 동프랑크 왕국과의 관계에서 프랑크인 반란이 있었고, 사망 후 즈데슬라브가 복귀했다. - 서프랑크의 군주 - 카롤루스 파르불루스
카롤루스 파르불루스는 샤를 2세 대머리왕의 아들이자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의 형으로, 855년 아키텐의 명목상 왕으로 임명되었으나 실권은 미미했고 866년 사고로 사망했다. - 서프랑크의 군주 - 절름발이 로테르
샤를 3세 드 부르봉 생플은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방돔을 어머니로 둔 사생아이며 앙리 드 로렌, 클로드 드 로렌 등의 형제와 조르주 드 부르봉, 샤를 드 부르봉, 루이 드 부르봉 등의 이복 형제를 두었다. - 847년 출생 - 왕건 (전촉)
왕건은 당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서천을 장악하고 전촉을 건국한 황제로, 재위 기간 동안 민생 안정과 문화 융성에 기여했지만 심사단을 통해 정적을 숙청하는 폭압적인 통치를 펼치기도 했다. - 847년 출생 - 절름발이 로테르
샤를 3세 드 부르봉 생플은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방돔을 어머니로 둔 사생아이며 앙리 드 로렌, 클로드 드 로렌 등의 형제와 조르주 드 부르봉, 샤를 드 부르봉, 루이 드 부르봉 등의 이복 형제를 두었다.
카를로마누스 (카롤루스의 아들)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830년대 |
사망 | 880년 11월 29일 (50세) |
매장지 | 알퇴팅 |
아버지 | 대머리 카를 |
어머니 | 에르멘트루데 오를레앙 |
배우자 | 리트빈다 |
자녀 | 사생아 아들 아르눌프 |
경력 | |
직함 | 프랑크 왕국의 왕 (877년 ~ 879년) 바이에른의 왕 (876년 ~ 880년) 이탈리아의 왕 (877년 ~ 879년) |
통치 시작 | 876년 |
통치 종료 | 880년 |
프랑크 왕국 왕조 | |
왕조 | 카롤링거 왕조 |
2. 생애
카를로만은 아버지 대머리 카를 2세에 의해 어린 시절 수도원으로 보내져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1] 854년 삭발하고 사제 교육을 받아 860년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여러 수도원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865년에는 형제 무위자 로타르의 사망 후 오세르의 생 제르멩 성당을 물려받기도 했다.
성직자의 신분이었음에도 세속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카를로만은 자신이 원치 않게 성직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869년부터 아버지 카를 2세에게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으나 반란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투옥과 수도원장직 박탈을 겪었다. 교황 하드리안 2세의 개입으로 잠시 석방되기도 했으나, 부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 도주하는 등 갈등은 계속되었다.
871년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투옥된 카를로만은 873년 부왕이 상속권을 박탈하기 위해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려 하자 감옥을 탈출하여 동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숙부인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았으며, 독일인 루트비히에 의해 히터나흐 수도원(에히터나흐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카를로만은 876년 망명지인 히터나흐(현 룩셈부르크령 에히터나흐)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877년 또는 878년까지 생존했다는 설도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성직 임명
카를로만은 어린 나이에 수도원으로 보내졌는데,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1] 854년 그는 삭발을 하고, 훗날 대주교가 되는 사제 불파드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다. 860년에는 사제로 서품을 받고 수아송에 위치한 생 메다르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약 10년 동안 수도원장의 자격을 얻기 위해 생 아만드 델론 수도원, 성 리퀘어 수도원, 로베스 수도원, 성 아르눌프 드 메츠 성당 등 여러 곳을 거치며 사제로서 교육을 이어갔다. 865년에는 형제인 무위자 로타르가 사망하자, 오세르의 생 제르멩 성당을 물려받았다. 그는 어느 시점에 베네딕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카를로만은 가톨릭 성직자의 신분이었지만 세속 정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2. 2. 부왕과의 갈등과 반란
868년 무렵 로비슈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나, 자신이 성직자가 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카를로마누스는 869년 자신을 상리스에 머물게 한 부왕 대머리 카를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1]870년 카를로마누스는 로타링기아와 플랑드르 출신의 일부 귀족들을 모아 다시 부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카를로마누스는 제라르 드 루시용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수도원장직도 박탈당했다. 교황 하드리안 2세가 그의 석방을 위해 개입했으나 처음에는 실패했고, 이후 교황의 거듭된 요청으로 카를 2세는 카를로마누스를 석방했다.
같은 해 870년, 카를 2세는 자신에게 충성을 거부하던 기르하르트 드 루시용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대에 카를로마누스를 동행시켰다. 하지만 카를로마누스는 부왕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 인근으로 도주했다. 이에 카를 2세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랭스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를 통해 그의 파문을 요청했으며, 이는 여러 주교들의 승인을 받았다.
카를로마누스는 플랑드르의 감옥에 잠시 갇혔다가 탈출하여, 소수의 군사와 꽁피뉴, 랭스의 성직자들을 모아 871년 랭스와 벨기에 일대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부왕 카를 2세는 그를 꽁피에뉴 감옥에 투옥시켰다가 이후 코흐비 감옥으로 이송했다.
2. 3. 투옥과 탈출, 죽음
870년 카를로마누스는 일부 귀족들을 모아 아버지 카를 2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상리스의 수도원에 갇혔다가 곧 탈출했다. 그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로타링기아와 플랑드르 출신의 일부 귀족들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반란은 다시 실패했고, 카를로마누스는 제라르 드 루시용에게 사로잡혀 투옥되었으며 수도원장직도 박탈당했다. 교황 하드리안 2세가 그의 석방을 위해 개입했으나 실패했고, 교황의 거듭된 요청 끝에 카를 2세는 일단 그를 석방했다.이후 카를 2세는 메르센 조약으로 얻은 리옹과 비엔나 중,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비엔나 백작 기르하르트 드 루시용(Girhart de Roussillon)을 토벌하는 원정에 카를로마누스를 동행시켰다. 그러나 카를로마누스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 인근으로 도망쳤다. 카를 2세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체포했으며, 랭스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를 통해 파문을 요청하여 다수 주교들의 동의를 얻었다.
카를로마누스는 플랑드르의 감옥에 갇혔으나 다시 탈출하여, 소규모 군대와 꽁피뉴, 랭스의 성직자들을 모아 871년 랭스와 벨기에 일대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아버지 카를 2세는 카를로마누스를 꽁피에뉴 감옥에 가두었다가 코흐비(Corbie) 감옥으로 옮겼다. 873년 카를 2세는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기 위해 두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을 내리려 했다. 카를로마누스는 이를 피하기 위해 코흐비 감옥을 탈출하여 동프랑크 왕국으로 도망쳤다. 그는 숙부인 동프랑크 왕국의 왕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았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카를로마누스를 히터나흐 수도원(에히터나흐 수도원, Abbaye d'Echternach)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카를로마누스는 876년 히터나흐(현재의 룩셈부르크령 에히터나흐)에서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는 877년 또는 878년까지 생존했다는 설도 있다.
3. 가족 관계
(내용 없음)
3. 1. 부모
- 아버지: 대머리왕 샤를르 르 쇼브 (823년 ~ 877년)
- 어머니: 오를레앙의 이르멘가르트, 오를레앙 백작 오도의 딸
3. 2. 형제
- 무위자 로테르 (843년 ~ 877년)
- 말더듬이왕 루이 2세 (846년 ~ 879년)
- 아키텐의 유아왕 샤를 (846년? / 843년? ~ 866년)
3. 3. 계모와 이복 형제
- 계모: 프로방스의 리첼다
- 이복 여동생: 로틸드
- 이복 매제: 우르수스의 시즈베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