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빌헬름 폰 슐리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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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빌헬름 폰 슐리벤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군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부상과 진급을 거듭하며 복무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라이히스베어에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709보병사단에서 프랑스 주둔 임무를 수행했으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셰르부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미군에 항복했다. 종전 후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64년 사망했다. 그는 철십자 훈장, 독일 십자 훈장 금장, 기사 철십자 훈장 등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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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빌헬름 폰 슐리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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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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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4년 10월 30일 |
출생지 | 아이제나흐 |
사망일 | 1964년 6월 18일 |
사망지 | 기센 |
소속 국가 |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
군 종류 | 육군 |
복무 기간 | 1914년–1945년 |
최종 계급 | 육군 중장 |
지휘 | |
지휘한 부대 | 제18기갑사단 제208보병사단 제709보병사단 |
주요 전투 | |
참전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
서훈 | |
훈장 | 기사 철십자 훈장 |
2. 제1차 세계 대전
아버지 빌헬름 폰 슐리벤 소령은 프로이센 육군 제83예비 보병 연대 연대장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전사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카를-빌헬름 폰 슐리벤은 1914년 8월 프로이센 육군에 지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19년 1월 1일, 패전 후 예비 대대(Reservebataillonde)로 소속을 옮겼다. 같은 해 10월 1일, 바이마르 공화국군의 제29 연대(Reichswehrregiment 29de)에 배속되었다. 1921년 10월 1일, 제9 (프로이센) 보병 연대 제2 대대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24년, 브레슬라우에 주둔하고 있던 제7 (프로이센) 경보병 연대(7. (Preußisches) Reiter-Regimentde)에 배속되었다[2]. 1925년 4월 1일, 중위로 진급했다. 1929년 4월 1일, 그림마에 주둔하고 있던 제12 (작센) 경보병 연대(12. (Sächsisches) Reiter-Regimentsde)의 제3 기병 중대(3. Eskadronde) 지휘관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 기병 대위(Rittmeisterde)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카를빌헬름 폰 슐리벤은 여러 연대에서 참모 부관 등의 직책을 역임했으며, 1938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전쟁이 시작될 당시에는 제13군단(XIII Armeekorps)의 부사령관 부관을 맡고 있었다.
1914년 8월 11일, 그는 후보생(Fahnenjunkerde)으로 3. Garde-Regiment zu Fuß|제3 근위 보병 연대de에 배속되었다. 같은 해 9월, 야전에서 복무를 시작한 지 13일 만에 첫 부상을 당했다. 1915년 1월 9일에는 사관 후보생(Fähnrichde)으로, 같은 해 3월 3일에는 소위로 진급했다.
1915년 가을부터는 중대장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대대 부관(Adjutantde)이나 장관 부관(Ordonnanzoffizierde) 등의 직책을 거쳤다. 1916년 봄에는 보병 여단 내에서 군대 사령관을 맡았고, 같은 해 부관참모직을 역임했다. 1916년 11월, 두 번째 부상을 입었다.
1917년 1월 27일, 제3 근위 보병 연대의 대대 부관으로 임명되어 종전 때까지 복무했다. 1918년 봄에는 제60군단(Generalkommando 60de)의 사령관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쟁 중 총 두 차례(1914년, 1916년) 부상을 입었다.
3. 바이마르 공화국
4. 나치 독일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는 제1 기갑사단 소속 연대장으로 참전했다. 같은 해 8월 15일에는 제108방호연대(Schützenregiments 108) 연대장이 되었고, 1941년 8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1942년 7월 20일부터 제4 기갑사단 예하 제4방호여단(4. Schützen-Brigade)의 여단장으로 복무했다.
1943년 2월 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여파 속에서 잠시 제208 보병사단의 지휘를 맡았다. 같은 해 3월 17일에는 동부 전선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1943년 4월 1일에는 제18 기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5월 1일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제18 기갑사단을 지휘했으나, 전투 이후 사단은 큰 손실을 입고 해체되었다.
1943년 12월 12일, 슐리벤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주둔하던 제709 고정 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1944년 5월 1일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4. 1.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항복
쿠르스크 전투 이후 그가 지휘하던 제18 기갑사단이 큰 손실을 입고 해체되자, 1943년 12월 폰 슐리벤은 프랑스 노르망디에 주둔하고 있던 제709 고정 보병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단은 주로 프랑스 점령 임무와 함께 연합군의 공습 및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한 해안 방어 및 순찰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제709사단은 상륙 지점 중 하나인 유타 해변을 포함한 노르망디 해안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르망디 전역 초기부터 격렬한 전투에 휘말렸다. 연합군의 공세 속에 사단은 코탕탱 반도 북쪽으로 밀려나 고립되었다. 미군이 반도를 남쪽에서부터 차단하자, 폰 슐리벤 휘하 사단의 남은 병력은 항구 도시 셰르부르로 후퇴하여 방어 거점을 마련했다.
1944년 6월 23일, 히틀러는 셰르부르를 요새(Festung)로 선포하고 사수를 명령했으며, 폰 슐리벤은 셰르부르 요새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세를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불과 3일 뒤인 1944년 6월 26일, 폰 슐리벤 장군은 800여 명의 남은 병사들과 함께 미국 제9 보병사단 사단장 만톤 S. 에디 소장에게 항복했다.[1]
항복 후 폰 슐리벤은 다른 독일 고위 장교들과 함께 영국의 트렌트 파크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1945년 8월 9일에는 아일랜드 팜 특별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전후 처리 과정을 거쳐 1947년 10월 7일에 석방되었다. 폰 슐리벤은 1964년 6월 18일 서독의 기센에서 사망했다.
5. 전후
1944년 6월 26일, 셰르부르 전투에서 미국 제9 보병사단 사령관 만톤 S. 에디 소장에게 800명 이상의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1] 항복 후 처음에는 미군 관리 하에 있었으나, 1944년 7월 1일 영국의 장교 포로 수용소인 트렌트 공원으로 이송되었다.
1945년 8월 9일에는 웨일스에 위치한 또 다른 포로 수용소인 아일랜드 팜(Island Farm)으로 다시 옮겨졌다. 그는 이곳에서 전쟁 포로 생활을 이어갔다.
1947년 10월 7일, 슐리벤은 포로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왔다. 전후 그는 서독에서 생활했으며, 1964년 6월 18일 기센에서 사망했다.
6. 서훈 내역
- 1급·2급 철십자 훈장 (1914년판)[3]
- 브라운슈바이크 1급 전공 십자 훈장[3]
- 흑색 전상장 (1918년판)[3]
- 1급·2급 철십자 훈장 약장 (1939년판)
- 독일 십자 훈장 금장 - 1942년 7월 2일 수훈[4]
- 기사 철십자 훈장 - 1943년 3월 17일 수훈[4]
참조
[1]
서적
The Germans in Normandy
Pen and Sword Military
2006
[2]
문서
Rudolph-Christoph Freiherr von Gersdorff
Ullstein
1979
[3]
간행물
Rangliste des Deutschen Reichsheeres
Reichswehrministerium, Mittler & Sohn Verlag
1930
[4]
서적
Die Ritterkreuzträger 1939–1945
Scherzers Militaer-Verlag, Ranis/Jena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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