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에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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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에센은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러일 전쟁에서 활약했다.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흑해 함대 등에서 복무했으며, 1898년에는 순양함 그로모보이의 함장으로 극동에 부임했다. 러일 전쟁 발발 직전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태평양 함대 부사령관 및 순양함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통상 파괴전을 지휘했다. 울산 해전에서 일본 해군과 교전하여 류리크를 잃었으나, 1906년 패전 책임을 지고 좌천되었다가 명예를 회복하여 발트해 함대 부사령관을 지냈다. 이후 퇴역하여 조선소 감독을 맡았으며, 191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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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에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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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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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 예센 |
원어 이름 | Карл Петрович Иессен |
로마자 표기 | Karl Petrovich Iessen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52년 6월 30일 |
출생지 | 도르파트, 도르파트 군, 리보니아 현, 러시아 제국 (현재의 타르투 주, 에스토니아, 타르투) |
사망일 | 1918년 11월 30일 |
사망지 | 페트로그라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현재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군사 정보 | |
소속 | 러시아 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879년–1916년 |
최종 계급 | 해군 소장 |
참전 전투 | 러일 전쟁 |
2. 생애
러일 전쟁이 끝난 후, 카를 에센은 제2태평양 함대와 반대 항로로 태평양에서 발트해로 회항했다.[1] 1906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좌천되었지만, 해군 장관의 교체에 의해 1908년에 명예를 회복하고 발트해 함대 부사령관에 임관했다. 그러나 1909년에 니콜라이 폰 에센이 발트해 함대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해군 중장으로 퇴역했다. 그후 리가에서 독일계 투자 기업의 조선소 감독을 맡았고, 1913년에는 노비크급 구축함 건조를 도급받았다.
1918년 11월 3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카를 에센은 러시아 제국 지배하의 라트비아에서 태어났다. 1869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어뢰와 포술 교육을 받았다.[1] 1890년 흑해 함대의 수뢰정 ‘아들레르’(Adler) 함장을 시작으로, 증기선 ‘네바’, 2등 순양함 ‘아시아’ 함장을 역임했다.[1] 1897년 1등 대령으로 승진했다.[1] 1898년 새로 건조되어 태평양에 회항하는 1등 순양함 ‘그루모보이’ 함장으로 극동에 부임했다.[1]

러일 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2월, 해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여순에 있는 제1태평양 함대 부사령관 및 순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 개전 후 스테판 마카로프 사령관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4척의 1등 순양함을 핵심으로 하는 순양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기함 ‘로시아’에 부임했다.[1]
3월 말, 쇄빙함을 사용하여 출항이 가능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한반도 연안의 동해에서 태평양 방면에 걸친 넓은 해역에서 적극적인 통상 파괴전을 펼쳤다.[2] 일본 육군의 수송선과 상선을 차례로 격침하고 대마도까지 출격하여 일본의 포함 2척을 격침시켰다. 3월 말 우리오 소토키치 소장이 이끄는 순양함대와 교전을 벌여 쌍방 손실을 기록했고, 승패는 나지 않았다. 이 전공으로 4등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극동 총독 에브게니 알렉세예프에 의해 하루에 일정 범위 밖으로 출격은 금지되었다.

2. 2. 러일 전쟁 활약
러일 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2월, 카를 에센은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뤼순 항에 있는 제1태평양 함대 부사령관과 순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개전 후 스테판 마카로프 사령관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4척의 1등 순양함을 핵심으로 하는 순양함대 사령관에 에센을 임명했고, 에센은 기함 ‘로시아’에 부임했다.[1]
3월말 쇄빙함을 사용하여 출항이 가능하게 되면서, 에센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한반도 연안의 동해에서 태평양 방면에 걸친 넓은 해역에서 적극적인 통상 파괴전을 펼쳤다.[2] 일본 육군의 수송선과 상선을 차례로 격침하고 대마도까지 출격하여 일본의 포함 2척을 격침시켰다. 3월 말 우류 소토키치 소장이 이끄는 순양함대와 교전을 벌여 쌍방 손실을 기록했고, 승패는 나지 않았다. 이 전공으로 4등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극동 총독 예브게니 알렉세예프에 의해 하루에 일정 범위 밖으로 출격은 금지되었다.
여순 함대가 황해 해전에서 패한 4일 후 1904년 8월 14일 울산 해전에서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이끄는 일본 제국 해군 제2함대와 교전을 벌여, 1등 순양함 ‘류리크’를 잃었다. 그러나 ‘류리크’ 구출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장과 자군에서 칭찬을 받았다.[1] 이 전투에서 함대 주력이었던 1등함이 모두 큰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반년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여순 함락 후 이듬해 1월 2일에 괴멸 상태의 제1태평양 함대 순양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6월에는 우수리강 함대에 전속되었다.
2. 3. 러일 전쟁 이후
카를 에센은 러시아 제국 지배 하의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1869년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수뢰 및 포술 교육을 받았다.[1] 1890년 흑해 함대의 수뢰정 아들레르 함장을 시작으로 여러 함정의 함장을 역임했다.[1] 1897년 1등 대령으로 승진, 1898년에는 1등 순양함 그로모보이 함장으로 극동에 부임했다.[1]러일 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2월, 해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여순 항에 있는 제1태평양 함대 부사령관 및 순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 개전 후 스테판 마카로프 사령관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4척의 1등 순양함을 주력으로 하는 순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기함 로시야에 부임했다.[1]
1904년 3월 말, 쇄빙함을 사용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한반도 연안의 동해와 태평양 방면의 넓은 해역에서 통상 파괴전을 펼쳤다.[2] 일본 육군의 수송선과 상선을 격침하고 대마도까지 출격하여 일본 포함 2척을 격침하기도 했다.[1] 우리오 소토키치 소장이 이끄는 순양함대와 교전하여 양측 모두 피해를 보았으나 승패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 전공으로 4등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으나, 극동 총독 에브게니 알렉세예프에 의해 항해 범위 밖으로의 출격은 금지되었다.
여순 함대가 황해 해전에서 패한 4일 후인 1904년 8월 14일, 울산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 제2함대(사령관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와 교전하여 1등 순양함 류리크를 잃었다.[1] 그러나 "류리크" 구출을 포기하지 않아 적군과 아군 모두에게서 칭찬을 받았다. 이 전투로 주력 1등 순양함들이 큰 손상을 입어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반년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1905년 1월 2일 여순 함락 후, 괴멸 상태의 제1태평양 함대 순양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6월에는 우스리 하천 함대로 전속되었다.[1]
러일 전쟁 종전 후, 제2태평양 함대와 반대 경로로 태평양에서 발트 해로 회항했다.[1] 1906년 패전 책임을 지고 좌천되었으나, 해군 장관 교체로 1908년 명예를 회복하여 발트해 함대 부사령관에 임관했다. 1909년 니콜라이 폰 에센이 발트해 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하면서 해군 중장으로 퇴역했다. 이후 리가에서 독일계 기업의 조선소 감독을 맡았고, 1913년에는 노비크급 구축함 건조를 수주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3. 수상 내역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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