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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베르투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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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리베르투스 1세는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520년경에 태어나 567년 혹은 568년에 사망했다. 클로타르 1세의 아들로, 561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면서 누스트리아, 아키텐, 노벰포풀라나를 상속받아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그는 잉고베르가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딸 베르타는 켄트의 왕 에설버트와 결혼하여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선교의 성공에 기여했다. 카리베르투스 1세는 방탕한 생활로 파문당하기도 했으며, 사후 그의 왕국은 형제들에게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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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베르투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카리베르트의 초상화
이름카리베르트 1세
프랑스어 이름카리베르
라틴어 이름카리베르투스
재위561년 - 567년
이전 통치자클로타르 1세
후임분할 통치
출생일기원후 517년경
사망일567년 12월 (약 50세)
매장지블라비아 카스텔룸, 트락타투스 아르모리카니
왕가메로빙거 왕조
아버지클로타르 1세
어머니잉군트
배우자잉고베르가, 테우데칠데 (566년 결혼)
자녀쾰른의 블리트힐데, 켄트의 베르타
종교칼케돈 기독교 (파문)

2. 가계


  • '''부왕''' : 클로타르 1세
  • '''모후''' : 인군트
  • * '''동생''' : 군트람
  • * '''동생''' : 지게베르트 1세
  • '''계모''' : 아레군트[4]
  • * '''이복동생''' : 힐페리히 1세
  • '''서모''' : 쿤시아
  • * '''이복동생''' : 군도발트 (프랑크)


카리베르투스 1세가 테우데킬데에게 왕실 반지를 헌상하는 모습 (J. D. 라쿠르, 장앙투안 로랑의 그림 기반)


카리베르투스는 잉고베르가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 '''왕후''' : 잉고베르가
  • * '''자녀'''
  • ** 딸 : 쾰른의 블리테 (538–603), 갈로-로마 상원 의원 안스베르투스 (6세기)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
  • ** 아들 : 에스베의 샤리베르 (636년 사망)
  • ** 딸 : 클리토리스 (541–569)
  • ** 딸 : 켄트의 베르타, 켄트의 에설버트와 결혼
  • ** 아들 : 젊은 클로타르 (542년 사망) (542)


카리베르투스의 딸 베르타는 당시 이교도였던 켄트의 에설버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개인 고해 신부로서 리우드하르트 주교를 데려갔다. 켄트 궁정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가 성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최초의 앵글로색슨족 통치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기여했다.

3. 혼인과 자녀



카리베르투스 1세는 잉고베르가와 혼인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 블리테 (538년 ~ 603년): 갈로-로마 상원 의원이었던 안스베르투스와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 샤리베르 (636년 사망)
  • 클리토리스 (541년 ~ 569년)
  • 베르타: 에설버트와 혼인하였다.
  • 클로타르 (542년 사망)


딸 베르타는 당시 이교도였던 켄트의 왕 에설버트와 혼인하였다. 베르타는 개인적인 고해 신부로 리우드하르트 주교를 켄트로 데려갔다. 그녀가 켄트 궁정에서 행사한 영향력은 597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 활동이 성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최초의 앵글로색슨 통치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생애와 통치

카리베르투스 1세는 메로빙거 왕조 출신의 프랑크 왕으로, 561년 아버지 클로타르 1세의 사망 후 왕국을 분할 상속받아 파리를 중심으로 통치했다.[1] 그는 웅변술과 법률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투르의 그레고리는 그를 메로빙거 왕조 초기 왕들 중 가장 방탕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동시에 네 명의 아내를 둔 일로 파리의 게르마누스 주교에게 파문당했는데, 이는 메로빙거 왕조 군주 최초의 파문 사례였다.[2][3][1] 567년경 사망 후 그의 왕국은 형제들에게 분할되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요 기록은 투르의 그레고리의 《프랑크족의 역사》와 비드의 《잉글랜드 민족 교회 역사》 등에 남아 있다.

4. 1. 초기 생애

카리베르투스 1세는 520년경에 태어났으며, 클로타르 1세의 아들이다.[1] 그의 형제자매는 다음과 같다.[1]

순서이름
장남군타르
차남킬데리크
삼남카리베르투스 1세
사남군트람
오남시지베르트 1세
장녀클로토진드
육남킬페리크 1세
칠남클람


4. 2. 프랑크 왕국의 분할 상속

561년 클로타르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의 분할. 카리베르투스가 상속받은 파리 왕국은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556년, 클로타르 1세는 아들 카리베르투스와 군트람을 보내 반란을 일으킨 이복동생 크람을 진압하게 했다. 크람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리무쟁 지역에 숨어 있었고, 협상이 결렬되자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폭풍우로 전투가 무산되었고, 크람은 클로타르 1세가 사망했다는 거짓 편지를 보내 카리베르투스와 군트람을 속였다. 이에 속은 두 형제는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부르군디로 급히 돌아갔다.

561년 클로타르 1세가 실제로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그의 네 아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각 아들은 지리적으로 반드시 연속되지 않는 영토를 포함하는 별개의 왕국을 다스렸으며, 왕국의 이름은 수도로 삼은 도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 3. 통치와 말년

카리베르투스 1세는 웅변술에 능하고 법률 지식도 풍부했지만, 투르의 그레고리는 그를 초기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 가운데 가장 방탕한 인물 중 하나로 기록했다. 그는 동시에 네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그중 두 명은 자매 사이였다.[2] 이로 인해 파리의 게르마누스 주교에게 파문당했다.[3] 이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이 파문당한 첫 번째 사례였다.[1]

결국 그는 트락투스 아르모리카누스의 요새인 ''블라비아 카스텔룸''에 묻혔다. 그의 사후, 형제들은 그의 왕국을 나누어 가졌으며, 수도 파리는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살아남은 왕비 중 한 명인 테우데힐트는 군트람에게 결혼을 제안했으나, 557년 파리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이러한 결합을 근친상간으로 규정하며 금지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군트람은 그녀를 아를의 수녀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의 사생아인 에스바예의 카리베르투스는 아무런 영지도 상속받지 못했다.

카리베르투스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는 투르의 그레고리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4권, 3, 16, 22, 26, 9권, 26)이며, 영어권 기록으로는 비드의 《잉글랜드 민족 교회 역사》가 있다.

5. 유산

카리베르투스 1세는 웅변술에 능하고 법률에 정통했지만, 투르의 그레고리는 그를 초기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 중 가장 방탕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했다. 그는 동시에 네 명의 아내를 거느렸는데, 그중 두 명은 자매 사이였다.[2] 이로 인해 파리의 게르마누스 주교에게 파문당했다.[3] 이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이 파문당한 첫 번째 사례였다.[1] 그 결과, 그는 트락투스 아르모리카누스의 요새인 ''블라비아 카스텔룸''에 다소 불명예스럽게 묻혔다.

그가 죽자, 그의 형제들은 그의 왕국 영토를 나누어 가졌고, 수도 파리는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처음에는 합의했다. 그의 네 왕비 중 살아남은 테우데힐트는 군트람과의 결혼을 제안했으나, 557년 파리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이러한 결합을 근친상간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군트람은 그녀를 아를의 수녀원에 보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카리베르투스의 사생아로 알려진 에스바예의 카리베르투스는 아무런 유산도 받지 못했다.

카리베르투스 1세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는 투르의 그레고리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제4권 3, 16, 22, 26장 및 제9권 26장)이며, 영어권에서는 비드의 《잉글랜드 민족 교회 역사》가 있다.

참조

[1] 서적 Merovingian military organization, 481-751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72
[2] 간행물 A Companion to Gregory of Tours
[3] 기타 Hist.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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