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마가사키 일고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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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마가사키 일고노동조합은 1976년 결성된 일본 오사카의 일용직 노동자 권익 보호 단체이다. 가마가사키 일고노동조합은 1970년대 악덕 업주와 저임금 착취에 맞서 투쟁하고, 전국적인 노동 운동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1980년대에는 임금 인상 투쟁을 벌여 가마가사키 지역의 구인 단가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대량 실업에 대응하여 반실업 투쟁을 전개하며, NPO 설립을 주도했다. 2012년에는 명예훼손 재판에서 패소하여 배상 판결을 받았으며, 언론 대응 활동을 펼쳤다. 현재까지도 산리츠카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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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본건설운수연대노동조합은 1965년 간사이 지역 생콘 지부 노동조합에서 출발하여 건설 및 운수 노동자 권익 보호를 목표로 활동하는 일본의 노동조합으로, 과거 총평에 가맹했으나 현재는 독립 노조이며, 2017년 간사이 지역 생콘 지부 파업과 사회 운동 참여로 논란이 있었다.
카마가사키 일고노동조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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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명칭 | 가마가사키 일용 노동조합 |
약칭 | 가마니치로 |
원어 명칭 (일본어) | 釜ヶ崎日雇労働組合 |
원어 명칭 (로마자) | Kamagasaki Hiyatoi Rōdō Kumiai |
설립일 | 1976년 7월 1일 |
조직 형태 | 합동 노동조합 |
조직 | |
조합원 수 | 비공개 |
가맹 조직 | 비공개 |
지지 정당 | 비공개 |
위치 정보 | |
우편 번호 | 557-0004 |
본부 소재지 | 일본오사카부오사카시니시나리구하기노차야 1초메 9번 7호 |
웹사이트 | 비공개 |
기타 | |
상징 | 비공개 |
2. 역사
1976년 제6회 가마가사키 월동 투쟁 이후, "가마가사키 일자리 보상 투쟁 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일자리 내놔"를 슬로건으로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6월 14일, 오사카시에 의한 하나조노 공원 텐트촌 강제 철거를 받아, 항구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 조직의 필요성에서 7월 1일에 결성되었다. 가마가사키의 일용 노동자의 권리를 획득하는 활동과 전국 노동자와 함께 "안심하고 일하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반 타코·케타오치전"을 내걸고, 타코베야와 같은 밥집, 저임금·열악한 조건 (케타오치) 밥집과의 투쟁을 여러 차례 전개했으며, 1977년의 폭행·감금 밥집인 나카지마조 투쟁에서는, 오사카부 경찰의 방해에 1개월의 지구전을 벌여, 화염병으로 밥집을 불태워 최종적인 결착을 시도했다. 이 일련의 대 악질 업자 투쟁에서, 폭력 수배업자 추방 가마가사키 공투 회의(가마 공투 1972년)가 개척한 일용 노동자의 실력에 의한 폭력단 "인부 내보내기"(불법 파견) 업자와의 관계를 더욱 전진시켰다. 한편, 4대 "요세바"의 운동 세력의 재결집을 목표로, 전국 일용 공투에서 요세바 교류회 그리고 1982년의 전국 일용 노동 조합 협의회(일용전협)를 결성하고, 반동적 국책 사업과의 대결을 내걸고, 노동 운동과 정치 투쟁을 결합해왔다.
1978년에, 가마가사키 해방 회관을 구입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1980년대에는, "요세바 춘투"를 내걸고, 매년 임금 인상을 요구, 노동 센터에서의 노동자의 대중적 투쟁으로 최저 임금 이하의 케타오치 업체의 구인을 막고, 전국에서 가장 낮았던 가마가사키의 구인 단가를 80년대 후반에는 "전국의 건설 노동자의 임금은 가마가사키가 결정한다"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1980년에는 초대 위원장 이나가키 히로시가, 해방 회관의 운영 위원회를 조합 회의를 거치지 않고 조직하고 소유 명의를 아내 명의로 한 것, 전항만의 강제 캄파를 "100엔 소송"으로, 법원에 소송하여 "국가 권력 기관에 노동자 조직 간의 문제 해결을 위임했다"고 하여 다른 집행 위원으로부터 파면되었다. 그 후, 이나가키는 1981년에 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을 만들었지만, 가마일노는 이후 20년 이상, 해방 회관의 2층을 사무실로 차지했다.
1983년에는, 배외주의·민족주의를 내걸고 요세바 노동자를 지배하려던 야마타니에 등장한 폭력단을, 폭동으로 격파하여 2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요세바 지배를 물리쳤다. 그 투쟁의 초기에 파견단을 보내고, 야마타니 노동자와 함께 중심적으로 담당했다.
1990년대에는, 버블 경제의 붕괴와 함께 대 불황에 시달리고, 대량의 노숙자를 낸 가마가사키에서, 1993년 가마가사키 반 실업 연락회(가마가사키 취로·생활 보장 제도를 실현을 목표로 하는 연락회)를 지역의 노동자 지원 단체를 모아 결성하고, "일자리 내놔"와 "잠자리 내놔"를 축으로 한 반 실업 투쟁을 전개. 기동대의 포위망 속에서, 노동 센터의 "야간 개방 투쟁", 오사카부 청사, 오사카 시청 앞에서 거대한 텐트를 쳐서 "야영 투쟁"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행정 측에서, 야간 개방 투쟁의 대체 조치로서 쉘터, 윤번 등록제에 의한 일급 5,700엔의 특별 청소 사업을 쟁취했다. 많은 노숙자 지원 단체가 "하우징 퍼스트"와 잠자리 우선인 것에 대해, 일관되게 "일해서 밥을 먹여라"고, 취업을 축으로 한 실업·노숙 문제 대책을 주장하고 있다.
1999년 반실련과 함께 NPO 법인 가마가사키 지원 기구 설립의 주역이 되었다.
산리츠카 투쟁(나리타 공항 문제)에 대해, 현재도 산리츠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 (구 아쓰타파[1])의 활동에 참가하고 있다[2]。
2012년 9월 5일의 명예 훼손 재판에서 소송을 당해 "권력 기관의 판단을 거부하고 가마가사키 노동자의 판단에 위임한다"며 재판을 거부한 탓에, 이나가키 히로시와 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에 대해 각각 330만 엔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사카 니시나리 여의 의문사 사건과 관련하여 2012년 11월 1일에 주간 금요일 편집장 앞으로 항의문을 보냈다[3]。2013년 2월 3일에는 Twitter에서 주간 금요일 편집부에 대한 반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선언했다[4]。
위자료 및 변호사 비용의 손해 배상과 기관지 및 블로그에 사과 광고 게재를 요구하는 소송을 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이 2022년 10월에 진행했다(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 사이트 2022년 10월 31일 기사 "재판소의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가마일노를 재소").
피고 가마가사키 일용 노동 조합은 원고 이나가키 히로시와 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에 대해 각각 330만 엔(총 660만 엔)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확정되었다(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 사이트 2023년 2월 13일 기사 "명예 훼손의 재판 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 『피고 가마일노는 원고 이나가키 히로시와 가마합노에 대해 각각 330만 엔(총 660만 엔) 지불하라』").
2. 1. 결성 배경 (1970년대)
1976년 제6회 가마가사키 월동 투쟁 이후, "가마가사키 일자리 보상 투쟁 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일자리 내놔"를 슬로건으로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 '반 타코·케타오치전'을 내걸고 타코베야와 같은 악덕 밥집, 저임금·열악한 조건 (케타오치) 밥집과의 투쟁을 전개했다. 1977년 나카지마조 투쟁에서는 오사카부 경찰의 방해에 1개월의 지구전을 벌여, 화염병으로 밥집을 불태워 최종적인 결착을 시도했다.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폭력 수배업자 추방 가마가사키 공동투쟁회의(가마 공투, 1972년)의 활동을 계승하여 일용 노동자들의 실력 행사를 통해 폭력단의 불법 파견을 근절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전국 일용 공동투쟁회의, 요세바(일용직 노동 시장) 교류회, 1982년 전국 일용 노동조합 협의회(일용전협) 결성을 주도하며 전국적인 노동 운동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2. 2. 1980년대: 요세바 춘투와 임금 인상 투쟁
카마가사키 일고노동조합은 1980년대에 "요세바 춘투"를 내걸고 매년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노동 센터에서의 대중 투쟁을 통해 최저 임금 이하의 저임금 업체 구인을 막았으며, 가마가사키의 구인 단가를 전국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1980년에는 초대 위원장 이나가키 히로시가 해방 회관 운영 문제와 관련하여 파면되었다. 이나가키는 이후 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을 결성했지만, 가마일노는 20년 이상 해방 회관 2층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1983년에는 야마타니에서 배외주의·민족주의를 내세운 폭력단을 격파하는 투쟁에 참여하여 요세바 지배를 막는 데 기여했다.
2. 3. 1990년대 이후: 버블 붕괴와 반실업 투쟁
1990년대 일본에서는 버블 경제의 붕괴로 인해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1993년 가마가사키 일고노동조합은 가마가사키 반실업 연락회(가마가사키 취로·생활 보장 제도를 실현을 목표로 하는 연락회)를 결성하여 "일자리 내놔", "잠자리 내놔"를 요구하며 반실업 투쟁을 전개했다. 기동대의 포위 속에서도 노동 센터 야간 개방 투쟁, 오사카 부청, 오사카 시청 앞 야영 투쟁 등을 통해 쉘터, 특별 청소 사업 등의 성과를 얻어냈다.이들은 '하우징 퍼스트'와 같은 주거 우선 정책보다는 취업을 통한 실업·노숙 문제 해결을 강조해 왔다. 1999년에는 NPO 법인 가마가사키 지원 기구 설립을 주도했다.
2. 4. 2000년대 이후
카마가사키 일고노동조합(가마일노)은 산리츠카 투쟁(나리타 공항 문제)과 관련하여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 (구 아쓰타파)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1][2]2012년에는 오사카 니시나리 여의 의문사 사건과 관련하여 주간 금요일 편집장에게 항의문을 보내고,[3] 트위터에서 주간 금요일 편집부에 대한 반격을 선언하는 등 언론 대응 활동을 전개했다.[4]
같은 해, 명예훼손 재판에서 패소하여 이나가키 히로시와 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에 각각 330만 엔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가마가사키 일고노동조합은 "권력 기관의 판단을 거부하고 가마가사키 노동자의 판단에 위임한다"며 재판을 거부했다. 이후 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은 위자료, 변호사 비용, 기관지 및 블로그 사과 광고 게재를 요구하는 소송을 2022년 10월에 제기했고, 2023년 2월에는 가마가사키 일용 노동 조합이 이나가키 히로시와 가마가사키 지역 합동 노동 조합에 각각 330만 엔(총 660만 엔)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확정되었다.
3. 조직
3. 1. 역대 위원장
- 초대 위원장 이나카키 히로시/稲垣 博일본어(1976년~1980년)
- 2대 위원장 야마다 미노루/山田 實일본어(1980년~2010년)
- 현재 위원장은 3대째인 야마나카 히데토시/山中 英俊일본어이다.
3. 2. 사무실
참조
[1]
문서
反対同盟は「北原派」「旧熱田派」「小川派」などに分裂している
[2]
웹사이트
報告:三里塚芝山連合空港反対同盟2017旗開き&1.15東峰現地行動
http://blog.livedoor[...]
2017-10-14
[3]
웹사이트
抗議文
https://web.archive.[...]
2018-09
[4]
Twitter
釜ヶ崎日雇労働組合ツイッター
https://twit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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