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카트레브라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트레브라 전투는 1815년 6월 16일,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웰링턴 공작 휘하의 앵글로-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나폴레옹은 웰링턴의 군대와 프로이센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하려는 전략을 세웠고, 카트레브라 교차로를 점령하여 웰링턴의 지원을 막으려 했다. 전투는 프랑스군의 공세로 시작되었지만, 양측 모두 팽팽하게 맞서며 전술적으로는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웰링턴은 워털루 전투를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워털루 전역 - 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는 1815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에게 벨기에 워털루에서 패배하며 나폴레옹의 몰락을 결정짓고 유럽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온 전투이다.
  • 워털루 전역 - 리니 전투
    리니 전투는 1815년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역 중 벌어진 전투로,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프로이센군의 후퇴를 막지 못하여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의 패배에 영향을 미쳤다.
  • 1815년 프랑스 - 제7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 전쟁 중 나폴레옹의 복귀에 대항하여 결성된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몰락시키고 프랑스 왕정 복고를 이끌었으며, 파리 조약으로 해체되고 프랑스는 국경 축소와 배상금 지불 조건으로 종전되었다.
  • 1815년 프랑스 - 파리 조약 (1815년)
    파리 조약(1815년)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간에 체결되어 프랑스에 가혹한 조건을 부과하고 빈 체제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신성 동맹과 사국 동맹 체결의 계기가 되었다.
  • 1815년 6월 - 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는 1815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에게 벨기에 워털루에서 패배하며 나폴레옹의 몰락을 결정짓고 유럽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온 전투이다.
  • 1815년 6월 - 제2차 바르바리 전쟁
    1815년 미국이 알제리 등 바르바리 해안 국가를 상대로 벌인 제2차 바르바리 전쟁은 미영 전쟁 중 재개된 해적 활동을 제압하고 미국의 항해 권리를 확보한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나, 바르바리 해적 문제는 완전히 근절되지 못했다.
카트레브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카트르브라 전투
관련 전쟁나폴레옹 전쟁
날짜1815년 6월 16일
장소벨기에 중부 카트르브라
결과영-네덜란드 연합군의 전술적 승리, 프랑스군의 전략적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제1제국
교전국 2제7차 대프랑스 동맹
영국
네덜란드
하노버 왕국
나사우 공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지휘관
프랑스미셸 네, 제롬 보나파르트
연합군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오라녜 공 윌리엄, 브라운슈바이크 공 프리드리히 빌헬름 (전사)
병력 규모
프랑스군보병 18,000명, 기병 2,000명, 야포 32문
연합군전투 시작 시: 보병 8,000명, 야포 16문, 전투 종료 시: 보병 36,000명, 야포 70문
사상자
프랑스군4,140 ~ 4,400명 사망 또는 부상
연합군4,800 ~ 5,600명 사망 또는 부상
기타 정보
윌리엄 반즈 월렌, 카트르브라 전투
윌리엄 반즈 월렌의 그림, 카트르브라 전투 (블랙 워치 연대)

2. 배경

1815년 2월, 엘바 섬에서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이 탈출하여 3월 파리로 귀환, 프랑스 황제로 복위했다. 이에 유럽 열강들은 즉각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국경 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벨기에 방면에는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블뤼허 원수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연합 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통해 기선을 제압하고자 했다. 6월 11일, 그는 약 1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를 출발하여 벨기에 방면의 웰링턴과 블뤼허 군대를 먼저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6월 14일, 프랑스군은 브뤼셀 남쪽 약 30km 지점인 샤를루아 부근에 집결했다. 이곳은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의 주둔지 중간에 위치하여, 양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를 시도하기에 유리한 지점이었다.

나폴레옹의 계획에 따라, 프랑스군 좌익을 이끄는 네 원수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카트르브라의 교차로를 신속히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카트르브라를 점령하면 웰링턴 군대의 남하를 저지하고, 상황에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리니 방면에서 프로이센군과 교전할 나폴레옹 본대를 지원하여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자신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리니의 프로이센군을 직접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카트르브라 교차로의 통제권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2. 1. 나폴레옹의 귀환과 제7차 대프랑스 동맹

1815년 2월, 엘바 섬에서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은 섬을 탈출하여 3월 파리로 돌아와 프랑스 황제로 복위했다. 나폴레옹의 복귀 소식에 유럽 열강들은 즉각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 국경 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벨기에 방면에는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블뤼허 원수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이 배치되었다. 그 남쪽에는 또 다른 프로이센군 주력의 북독일 군단, 라인 강 전선에는 오스트리아군 중심의 라인 방면군, 북부 이탈리아에는 오스트리아군이 각각 포진했다. 또한, 러시아군도 동쪽에서 라인 강 전선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워털루 전역 지도.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분산된 틈을 타 벨기에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완전히 연합하여 작전을 개시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하고, 그 전에 동맹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선제공격을 결정했다. 6월 11일, 나폴레옹은 벨기에 방면의 웰링턴과 블뤼허 군대를 먼저 격파하기 위해 약 1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를 출발했다.

6월 14일, 프랑스군은 브뤼셀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샤를루아 부근에 집결했다. 샤를루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의 주둔지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양쪽 군대 중 어느 쪽으로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연합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군 좌익을 이끄는 네 원수에게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카트르브라의 중요한 교차로를 신속히 점령하고, 상황에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리니 방면에 있는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폴레옹 자신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리니의 프로이센군을 직접 공격하기로 계획했다. 나폴레옹은 현재의 벨기에(당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일부) 국경을 넘어 연합군 사이에 쐐기를 박아 분리시키려 했다. 그의 계획은 먼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여 동쪽으로 후퇴시킨 다음, 웰링턴의 군대와 교전하여 영국 해협 쪽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2. 2. 워털루 전역 초기 전략

1815년 2월, 엘바 섬에서 감시를 받던 나폴레옹은 섬을 탈출하여 3월에 파리로 돌아와 프랑스 황제로 복위했다. 이에 유럽 열강들은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벨기에 방면에는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블뤼허 원수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완전히 준비되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고자 했다. 6월 11일, 그는 약 1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를 출발하여 벨기에 방면의 연합군을 먼저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6월 14일, 프랑스군은 브뤼셀 남쪽 약 30km 지점인 샤를루아 부근에 집결했다. 이곳은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의 주둔지 중간에 위치하여 양쪽 모두에 대응하기 유리한 지점이었다. 나폴레옹의 전반적인 전략은 두 연합군이 합류하기 전에 그들 사이에 쐐기를 박아 분리시킨 뒤,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그는 프로이센군을 먼저 격파하여 동쪽으로 몰아낸 다음, 웰링턴의 군대를 영국 해협 쪽으로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나폴레옹은 웰링턴군과 프로이센군이 합류하면 자신의 군대보다 병력이 우세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카트르브라의 교차로였다. 이곳은 니벨과 나뮈르를 잇는 도로 상에 위치하여, 웰링턴군이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리니에서 프로이센군과 합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약 프랑스군이 카트르브라를 점령한다면, 연합군의 연결을 차단하고 각개격파 전략을 성공시킬 가능성이 높아졌다. 나폴레옹은 좌익을 네 원수에게 맡겨 카트르브라를 신속히 확보하도록 지시했고, 확보 후 상황에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리니 방면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나폴레옹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리니의 프로이센군을 직접 공격할 계획이었다.

동맹군 사령관들도 어느 정도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기습적인 움직임은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다. 웰링턴 공작은 나중에 "나폴레옹이 나를 속였다. 그는 나보다 24시간 먼저 행군했다."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전역 초기 웰링턴의 주된 임무는 프랑스군으로부터 브뤼셀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나폴레옹군이 어떤 경로로 공격해올지 확신하지 못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몽스를 통해 서쪽에서 우회 공격할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까지 받았다.

웰링턴은 6월 15일 오후 3시경 오라녜 공으로부터 첫 교전 보고를 받았고, 몇 시간 뒤 프랑스군이 샤를루아 근처에서 지에텐 백작 휘하의 프로이센 제1군단과 교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 보고들을 받고 웰링턴은 군대 집결을 위한 초기 명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프로이센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어디로 집중시켜야 할지 망설였다. 몽스 방면의 위협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것은 자정이 되어서였고, 그제야 프로이센군 방향으로 군대를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 빅토르 드 콩스탕 레베크 소장. 그의 독자적 판단이 카트레브라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9시간의 지연은 웰링턴이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싸우는 블뤼허 원수를 제때 지원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웰링턴은 6월 16일에도 여전히 측면 공격 가능성을 우려하여 자신의 전 병력을 카트르브라로 보내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나 웰링턴의 명령과는 별개로, 연합군 제1군단을 지휘하던 오라녜 공의 참모장 장 빅토르 드 콩스탕 레베크 소장은 독자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는 웰링턴의 명령대로 니벨에 집결할 경우 카트르브라가 프랑스군에게 넘어갈 위험이 크다고 보고, 휘하의 제2 네덜란드 사단(헨드릭 조지 드 페르퐁셰르 세들니츠키 중장 지휘)에게 카트르브라를 방어하도록 지시했다.

작센바이마르 공이 카트레브라에서 부하 장교들에게 위치를 사수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작센바이마르 공이 이끄는 제2여단(2개 나소 연대)은 6월 15일 오후 2시경 카트르브라에 도착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르페브르-데누에트가 이끄는 프랑스 선발 기병대가 나타나 교전이 벌어졌고, 네덜란드군은 인근 보 드 보쑤 숲으로 물러났다. 르페브르-데누에트는 네 원수에게 보병 지원을 요청했으나, 네는 밤이 다가오고 보병 부대가 후방에 흩어져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다음 날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프랑스군은 손쉽게 카트르브라를 점령할 기회를 놓쳤다. 그 사이 콩스탕 레베크 소장은 제1여단(반 빌란트 여단)에게도 카트르브라로 이동하여 작센바이마르 공의 부대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콩스탕 레베크의 이러한 주도적인 조치는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이 연합군을 분리시키려는 계획을 방해하고 다음 날 카트르브라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5][6][7][8]

한편, 나폴레옹은 6월 16일 아침 샤를루아에서 카트르브라에 적군(웰링턴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즉시 네 원수에게 이들을 격파하라고 재차 명령하고 자신은 플뢰뤼로 이동하여 리니에서의 프로이센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네 원수는 정오까지도 카트르브라를 점령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연합군에게 방어 준비 시간을 벌어주게 되었다.

2. 3. 프랑스군의 초기 진격과 연합군의 대응



1815년 2월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3월 파리로 돌아와 황제 자리에 복귀했다. 이에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동맹국들은 프랑스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벨기에 방면에는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블뤼허 원수 휘하의 프로이센군이 주둔했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의 준비가 완료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 6월 11일 1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를 출발했다.[5]

나폴레옹의 전반적인 전략은 웰링턴의 군대와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차례로 격파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6월 14일, 두 군대의 주둔지 중간 지점인 샤를루아 부근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6월 15일, 프랑스군은 네덜란드 연합 왕국(현재의 벨기에) 국경을 넘어 진격을 시작하며 동맹군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 했다. 나폴레옹은 먼저 프로이센 군대를 격파하여 동쪽으로 퇴각시킨 후, 웰링턴의 군대를 영국 해협 쪽으로 몰아낼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서 카트르브라의 교차로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프랑스군이 이곳을 점령하면 웰링턴 군대가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리니에서 프로이센군과 합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맹군 사령관들도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기습적인 움직임은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다. 웰링턴 공작은 "나폴레옹이 나를 속였다. 그는 나보다 24시간 먼저 행군했다."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웰링턴은 전역 초기 프랑스군으로부터 브뤼셀을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나폴레옹 군대의 정확한 진격로를 파악하지 못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몽스를 통해 측면 기동을 할 것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받기도 했다. 6월 15일 오후 3시경, 웰링턴은 오라녜공으로부터 첫 교전 보고를 받았고, 몇 시간 뒤 프랑스군이 샤를루아 인근에서 지에텐 백작 휘하의 프로이센 제1군단과 교전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이 보고들을 받고 웰링턴은 초기에 내렸던 명령을 일부 수정했지만, 프로이센군을 즉각 지원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결국 웰링턴이 몽스 방면의 위협이 없음을 확인하고 프로이센군을 향해 부대를 이동시키라는 최종 명령을 내린 것은 자정이 되어서였다. 이 9시간의 지연으로 인해 영국군은 리니 전투에서 싸우는 블뤼허를 제때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웰링턴은 6월 16일에도 여전히 측면 위협을 우려하여 자신의 전 부대를 카트르브라로 즉시 투입하는 것을 망설였다.

하지만 현장의 연합군 지휘관들은 다르게 움직였다. 웰링턴의 명령은 니벨에 집결하라는 것이었지만, 오라녜공 휘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제1군단 사령부는 독자적으로 카트르브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제1군단 참모장인 장 빅토르 드 콩스탕 레베크 소장은 6월 15일, 프로이센 제1군단이 리니 방면으로 후퇴하자 카트르브라가 무방비 상태에 놓일 위험을 감지했다. 그는 즉시 제2 네덜란드 사단장 헨드릭 조지 드 페르퐁셰르 세들니츠키 중장에게 작센바이마르 공이 이끄는 제2여단을 카트르브라에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이 여단(2개 나소 연대)은 6월 15일 오후 2시경 카트르브라에 도착하여, 샤를 르페브르-데누에트가 이끄는 프랑스 근위 경기병 사단의 첫 정찰대가 도착하기 전에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프랑스 기병대와의 짧은 교전 후, 나소 연대는 카트르브라 인근의 보 드 보쑤 숲으로 물러났다. 르페브르-데누에트는 보병 지원을 요청했으나, 좌익을 지휘하던 네 원수는 날이 저물고 보병 부대가 분산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다음 날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저녁 늦게, 레베크는 제1여단(반 빌란트 여단)에게도 카트르브라로 이동하여 작센바이마르 공의 여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웰링턴의 직접적인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한 레베크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이 두 동맹군을 분리시키려는 계획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나폴레옹은 6월 16일 작전을 위해 네 원수에게 카트르브라를 신속히 점령하고, 약 10km 북쪽까지 전위 부대를 진격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네 원수는 6월 16일 아침 카트르브라의 적군을 정찰했는데, 그는 증원군을 받았다는 정보를 받았다. 그러나 정오까지 그는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던 교차로를 점령하기 위한 심각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편, 그루시는 플뢰뤼에서 프로이센 군이 나뮈르에서 오고 있다고 보고했지만, 나폴레옹은 이 보고서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전히 샤를루아에 있었고,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적군이 카트르브라에 집중했다는 추가 소식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즉시 네 원수에게 이들은 웰링턴의 군대일 뿐이며, 네 원수는 자신의 군대를 집중시켜 앞에 있는 군대를 격파하고 모든 보고서를 플뢰뤼로 보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로보의 군대를 잠정적으로 샤를루아에 남겨둔 채 나폴레옹은 플뢰뤼로 급히 갔고, 오전 11시경에 도착했다.

3. 전투

1815년 2월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은 3월 파리로 돌아와 황제로 복위했다. 이에 유럽 열강들은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전열을 갖추기 전에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 벨기에 방면에 주둔한 웰링턴 공작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블뤼허 장군의 프로이센군을 먼저 격파하고자 했다. 6월 11일, 나폴레옹은 1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를 출발했다.

6월 14일, 프랑스군은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의 중간 지점인 샤를루아 부근에 집결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두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각개 격파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군 좌익을 이끄는 네 원수는 북쪽의 중요한 교차로인 카트르브라를 신속히 점령하고, 상황에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리니 방면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폴레옹 자신은 리니에서 프로이센군 주력을 상대하기로 했다.

6월 16일, 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 좌익과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사이에 카트르브라 전투가 벌어졌다.[5] 초기에는 프랑스군이 우세하여 연합군을 몰아붙였으나, 엘론 백작의 증원군 도착이 늦어지고[6] 웰링턴의 연합군에 증원 부대가 속속 도착하면서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7] 프랑스군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고,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은 채 날이 저물었다.

다음 날인 6월 17일, 전날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웰링턴은 카트르브라를 포기하고 북쪽의 워털루로 군대를 철수시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나폴레옹은 그루시 원수에게 프로이센군 추격을 맡기고 네의 부대와 합류했다.

카트르브라 전투는 양측 모두 전략적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 무승부로 평가된다. 네는 웰링턴의 연합군을 카트르브라에 묶어둠으로써 리니 전투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지만, 정작 자신도 리니의 프로이센군 측면을 공격할 기회를 놓쳤다. 웰링턴은 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프로이센군의 패배로 인해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후퇴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할 결정적인 기회를 상실했으며,[8] 이는 이틀 뒤 벌어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3. 1. 전력

전투 초기에는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북부군' 좌익이 약 1만 8천 명(기병 2천 명, 포 32문 포함)의 병력으로, 윌리엄 오렌지 공 휘하의 연합군(보병 8천 명, 포 16문)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당시 네덜란드군은 카트르 브라 교차로 남쪽에 얇게 포진하고 있었다.[1]

그러나 전투 시작 약 2시간 후 웰링턴 공작이 새로운 연합군 부대와 함께 도착하여 지휘권을 인수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후 네덜란드, 영국, 브라운슈바이크 등 연합군 증원 부대가 계속 도착했으며, 이들의 증원 속도는 프랑스군보다 빨랐다.[1][2]

3. 1. 1. 프랑스군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북부군'의 좌익이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 초반, 프랑스군의 병력은 1만 8천 명이었으며, 이 중에는 기병 2천 명과 포 32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윌리엄 오렌지 공이 지휘하는 8천 명의 보병과 16문의 포를 갖춘 네덜란드군과 대치했다. 전투가 진행되면서 프랑스군 병력은 증원되어 최종적으로 약 2만 4천 명에 달했지만, 연합군의 증원 속도가 더 빨랐다.

3. 1. 2. 연합군

브라운슈바이크 부대가 카트르 브라 전투 중 전투를 벌이는 모습


전투 초반, 윌리엄 오렌지 공이 지휘하는 연합군은 보병 8천 명과 포 16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북부군 좌익(1만 8천 명, 기병 2천 명, 포 32문 포함)과 맞섰다. 네덜란드군(제2여단의 나소군 포함)은 카트르 브라 교차로 남쪽에 얇게 배치되어 있었다.

전투 시작 2시간 후, 웰링턴 공작이 새로운 연합군 부대와 함께 도착하여 연합군 전체 지휘권을 인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네덜란드군, 영국군, 브라운슈바이크군 등 새로운 연합군 부대가 계속 도착했다. 이 증원 속도는 프랑스군(최종 약 2만 4천 명)의 증원보다 빨랐다.

3. 2. 전투 경과

1815년 2월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3월 파리로 돌아와 황제로 복위했다. 이에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 국경으로 군대를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전열을 갖추기 전에 벨기에 방면에 주둔한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을 먼저 격파하기로 결정, 6월 11일 1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를 나섰다.

6월 14일, 프랑스군은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의 중간 지점인 샤를루아 부근에 집결했다. 나폴레옹은 양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 격파를 목표로 삼았다. 프랑스군 좌익을 맡은 네 원수는 북쪽의 요충지 카트르브라 교차로를 신속히 확보하고, 상황에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리니 방면 프로이센군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폴레옹 본인은 리니의 프로이센군을 직접 상대하기로 했다.

6월 16일, 카트르브라에 도착한 네는[5] 초기 공격에서 소규모 네덜란드 부대를 격파하고 영국군 진지 근처까지 빠르게 진격했다.

그러나 네에게는 승기를 굳힐 병력이 부족했고, 엘론 백작의 증원군 2만 명은 나폴레옹의 상반된 명령으로 혼란에 빠져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그 사이 영국군은 증원되어 전력을 강화했다. 켈레르만의 기병 여단이 지원에 나섰으나 영국군 병력은 이미 2만 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네의 명령으로 켈레르만은 돌격하여[7] 카트르브라 진지를 일시 점령했지만[6], 후속 부대의 부재로 고립되어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네는 포격과 추가 공격을 시도했지만, 증원된 영국군은 견고하게 방어했고,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은 채 날이 저물었다.

다음 날인 17일에도 전투가 이어졌으나, 3만 6천 명까지 증강된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의 반격에 프랑스군은 결국 밀려났다. 웰링턴은 공세를 취했으나 네의 저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리니 전투에서 나폴레옹 본대가 프로이센군에 우세를 점했으나, 카트르브라에 묶인 네는 측면 공격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카트르브라 점령에 실패했다. 웰링턴은 네를 격퇴했지만, 리니의 프로이센군 패배 소식에 카트르브라를 포기하고 북쪽 워털루로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나폴레옹은 그루시에게 프로이센군 추격을 맡기고 네와 합류했다.

카트르브라 전투는 양측 모두 목표 달성에 실패한 무승부였다. 영국군은 리니의 프로이센군을 돕지 못했고, 프랑스군은 네가 묶이는 바람에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완전히 격멸할 기회를 놓쳤다.[8] 이 결정적인 기회 상실은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패배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3. 2. 1. 초기 교전 (6월 15일 ~ 16일 오전)

1815년 6월 16일 카트르브라 전투 상세 지도 (''유럽사 앨리슨의 역사 지도집'')


1815년 6월 15일 오후 늦게, 엘바 섬에서 온 나폴레옹을 따르는 소규모 폴란드 경기병 부대(109명의 병력과 장교)가 프라스네(Frasnes) 방향에서 연합군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제2 나소(Nassau) 연대 2대대와 비옐레펠트(Bijleveld)의 기마 포병대와 마주쳤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나소 지휘관들은 미리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고, 폴란드 경기병들은 산탄과 일제사격을 받고 일부 병력과 말을 잃은 채 프라스네로 후퇴했다. 이후 연합군은 정찰대를 파견하여 다음 날 아침까지 진지를 유지했다.

카트르브라에서 네덜란드 군대를 지휘하는 오라녜 공 빌럼


6월 16일 오전 5시부터 연합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끊임없는 소규모 교전이 벌어졌으나, 어느 쪽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일부 프로이센 경기병이 주력 부대에서 떨어져 나와 프랑스 적색 창기병과 충돌했지만, 비옐레펠트의 포병대가 다시 이들을 몰아내면서 교전은 금방 끝났다. 나소 보병 2개 중대가 프라스네를 향해 진격했지만, 이번에는 프랑스군에게 밀려났다. 이러한 소규모 전투는 오전 6시 이후 오라녜 공이 도착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

3. 2. 2. 프랑스군의 공세 (6월 16일 오후)



본격적인 전투는 6월 16일 오후 2시경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2] 원수는 22문의 포로 포격을 개시하며 연합군 진지를 공격했다. 프랑스 대열이 공격해오자 소규모 전투병들이 앞장섰다. 제2 사단(세들니츠키)의 네덜란드 경계선은 머스킷 일제 사격으로 맞섰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고 브뤼셀 고속도로 동쪽의 병력은 프랑스군에게 즉시 밀려났다.[2] 제2 여단(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 공) 소속 나소군은 그랑-피에르퐁 농장으로, 제1 여단(빌란트) 소속 네덜란드군은 제미옹코르 농장으로 후퇴했지만, 연합군은 보수 숲을 지켜낼 수 있었다. 3개 보병 사단과 1개 기병 여단을 상대로 한 네덜란드 제2 사단의 상황은 매우 불리했다.

오후 3시경, 제5 영국 보병 사단(픽턴)과 제3 네덜란드 경기병 여단(판 메를렌 남작)이 도착했다. 웰링턴 공작은 프로이센의 블뤼허와의 회동에서 돌아와 지휘권을 인수했다. 그는 픽턴 사단을 연합군 좌익에 배치하여 도로 동쪽으로의 프랑스군 진격을 막도록 했다. 때마침 제6 사단(제롬 보나파르트 공)도 전장에 도착했다. 이제 전선 전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픽턴은 용감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켰고,[3] 프랑스 제6 사단은 그랑-피에르퐁으로 투입되었다. 나소군은 농장을 포기하고 보수 숲으로 밀려났으며, 그곳에서 나무를 엄폐물 삼아 싸우며 프랑스군의 진격을 늦추었다. 제미옹코르에서는 네덜란드군이 프랑스군에게 끈질기게 저항했다.

제5 국가 민병대를 이끄는 오렌지 공


제미옹코르 농장을 방어하던 제5 국가 민병대는 이날 원래 병력의 62%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4] 프랑스 제4 경보병 연대와 제100 연대에 의해 밀려났지만, 제28 영국 연대가 지원 오는 것을 보고 농장 북쪽에서 재집결했다. 그러나 영국 연대는 농가가 함락되었다고 판단하고 후퇴했다. 제5 민병대는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농가를 공격하여 프랑스 연대를 농장 주변에서 몰아냈으나, 농장 자체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제5 민병대는 농장 남쪽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 오렌지 공이 합류했다. 포병 지원을 받으며 그들은 제6 샤쇠르-아-슈발 연대와 경기병 연대를 격퇴했다. 네덜란드군은 농장을 잃었다가 되찾기를 반복했지만 결국에는 빼앗겼다.

''카트르브라 (블랙 워치의 방어)'' (윌리엄 반스 월렌) 작, 블랙 워치 박물관 소장


오후 3시경, 프랑스군은 피에르퐁에서 제미옹코르를 거쳐 피라몽까지 전선을 형성했다. 3시 30분, 오렌지 공이 이끄는 네덜란드 제2 경 기병 여단(판 메를렌)이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그들은 프랑스 기병대와 마주쳐 밀려났지만, 이 공격 덕분에 피해를 입었던 네덜란드 보병이 재집결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네덜란드 기병 여단이 교전을 중단하고 아군 진영으로 후퇴할 때, 그들의 군복이 프랑스 샤쇠르 아 슈발과 비슷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보병에게 오인 사격을 받기도 했다.[5] 브라운슈바이크 군단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지휘 아래 도착했지만, 공작이 돌격을 지휘하다 치명상을 입으면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후 4시 15분, 네는 오후 2시에 발송된 나폴레옹의 공격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제2 군단(르일)에게 더 많은 병력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네의 좌익에서는 제롬 공이 연합군을 보수 숲에서 몰아냈다.[3] 프랑스 혼성 부대는 거의 카트르브라 교차로까지 진격했다. 팩이 지휘하는 영국 제9 여단 – 제42 연대("블랙 워치", 마카라), 제44 연대("이스트 에섹스", 해머턴), 제92 연대("고든 하이랜더스", 존 캐머런) – 는 프랑스 보병에 맞서 버텼다. 피레가 지휘하는 제2 기병 사단 제2 여단의 프랑스군은 반격을 가하여 제42 연대와 제44 연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후 격퇴되었다.[6]

''카트르브라의 제28 연대'' (엘리자베스 톰슨) 작, 1875


오후 5시, 니벨에서 온 영국 제3 사단(알텐)이 시기적절하게 도착하면서 수적 균형이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15분 뒤, 네는 제1 군단(에를롱)이 자신의 직접적인 명령이나 지시 없이 린이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15분 후인 오후 5시 30분,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카트르브라를 점령한 다음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린이에서 교전 중인 블뤼허를 격파하라는 모호한 명령을 받았다. 연합군 증원군의 도착으로 네는 제1 군단의 지원 없이는 카트르브라를 점령하고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에를롱에게 즉시 돌아오라는 긴급 명령을 보냈다. 에를롱을 소환한 직후 웰링턴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네는 켈레르만에게 지휘 가능한 흉갑기병 여단을 이끌고 웰링턴의 전선을 돌파하라고 명령했다.[3]

켈레르만의 흉갑기병은 영국 제5 여단(할켓) – 제33 보병 연대, 제69 연대("사우스 링컨셔", 모리스), 제73 보병 연대(해리스) – 을 공격했다. 제69 연대는 웰링턴이 직접 지휘하던 유일한 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기를 빼앗기고 큰 피해를 입었다. 제33 연대와 제73 연대는 보수 숲으로 달려가 안전을 확보하여 비슷한 운명을 피했고, 그곳에서 빠르게 재집결했다. 흉갑기병은 교차로까지 도달했지만, 근거리 포병 사격과 머스킷 사격에 의해 격퇴되었다.

영국 제1 보병 사단(근위 사단, 쿡)의 도착으로 웰링턴은 반격할 충분한 힘을 얻었다. 카트르브라 서쪽에 있던 제롬의 부대는 후퇴하여 보수 숲의 소유권을 영국 근위대에 넘겨주어야 했다. 근위대와 다른 연합군 부대가 숲에서 나오자, 프랑스 보병의 맹렬한 사격과 제2 기병 사단(피레) 소속 제6 경기병 연대(그리고 아마도 제1 샤쇠르 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근위대는 일렬로 늘어선 상태에서 공격받아 숲으로 다시 후퇴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1][7] 이후 연합군 경보병대와 프랑스 볼티저 및 기병대 사이에 추가적인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지만,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 전투가 중단된 오후 9시경, 프랑스군은 그날 얻었던 모든 영토적 이득을 포기해야 했다.

3. 2. 3. 연합군의 반격과 전투의 교착

15시 30분경, 오렌지 공이 이끄는 네덜란드 제2 경기병 여단(판 메를렌)이 프랑스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들은 프랑스 기병대와 정면으로 부딪혀 밀려났지만, 이 공격 덕분에 혼란에 빠졌던 네덜란드 보병 부대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기병 여단이 아군 진영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유니폼 색상이 프랑스 샤쇠르 아 슈발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스코틀랜드 보병 부대로부터 오인 사격을 받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군단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지휘 아래 전장에 도착했지만, 공작이 직접 돌격을 이끌던 중 치명상을 입고 전사하면서 군단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16시 15분, 원수는 14시에 나폴레옹이 보낸 공격 명령을 뒤늦게 받았다. 그는 즉시 르일의 제2 군단에게 더 강력한 공세를 펼치라고 지시했다.

한편, 네의 좌익에서는 제롬 공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연합군을 보수 숲에서 몰아내고 교차로 근처까지 진격했다. 팩이 지휘하는 영국 제9 여단 소속의 블랙 워치, 이스트 에섹스, 고든 하이랜더스 연대는 프랑스 보병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냈다. 그러나 피레가 이끄는 프랑스 제2 기병 사단 소속 제2 여단의 반격으로 제42연대와 제44연대는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17시경, 니벨에서 알텐이 지휘하는 영국 제3 사단이 도착하면서 전장의 수적 균형은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15분 뒤, 네는 에를롱의 프랑스 제1 군단이 자신의 명령 없이 린이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당혹스러운 소식을 접했다. 설상가상으로 17시 30분에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카트르브라를 점령한 뒤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린이에서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라는 모호한 명령을 받았다. 연합군 증원 부대가 속속 도착하는 상황에서 에를롱 군단의 지원 없이는 카트르브라 점령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네는 에를롱에게 즉시 회군하라는 긴급 명령을 보냈다. 동시에 웰링턴 공작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해 켈레르만에게 흉갑기병 여단을 이끌고 영국군 전열을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켈레르만의 흉갑기병대는 할켓의 영국 제5 여단(제33 보병 연대, 제69 (사우스 링컨셔) 보병 연대, 제73 연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제69연대는 웰링턴이 직접 지휘하던 유일한 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연대기를 빼앗기고 큰 피해를 입었다. 제33연대와 제73연대는 재빨리 보수 숲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흉갑기병대는 교차로까지 돌파했지만, 영국군의 근거리 포격과 머스킷 사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결국 격퇴되었다.

이후 쿡이 이끄는 영국 제1 보병 사단(근위 사단)이 도착하자 웰링턴은 반격을 위한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웰링턴의 반격으로 제롬의 부대는 후퇴했고, 보수 숲은 영국 근위대가 차지했다. 그러나 근위대가 숲 밖으로 나오자마자 프랑스 보병의 맹렬한 사격과 제2 기병 사단(피레) 소속 제6 경기병 연대 등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방어 대형을 갖추지 못한 근위대는 큰 사상자를 내고 다시 숲으로 후퇴해야 했다.[1] 이후에도 양측 경보병과 프랑스 볼티저, 기병대 사이에 소규모 교전이 이어졌으나, 21시경이 되자 전투는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날 프랑스군은 전투 초반에 확보했던 영토적 이득을 모두 상실한 채 밤을 맞이했다.

3. 3. 뷔시 풍차 회담

6월 16일 오전 11시 직후,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카트레브라 남쪽 프라스네에 소규모 병력만 배치한 것을 확인했다. 동시에 프로이센군이 리니에서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과 교전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웰링턴은 참모들과 소규모 기병 호위를 데리고 리니와 브리 사이에 위치한 뷔시 풍차(종종 브리 풍차로 불림)로 이동하여 폰 블뤼허와 회담을 가졌다. 이 풍차는 프로이센군 진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두 사령관은 공격 직전 프랑스군의 배치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관찰 결과, 웰링턴은 나폴레옹이 주력 부대를 프로이센군에게 집중시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이 충분한 병력을 모으는 대로 프라스네와 고슬리에 방향으로 직접 진격하여 프랑스군의 좌익과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폰 블뤼허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당시 가장 취약하고 노출되어 공격 가능성이 높았던 폰 블뤼허의 우익을 지원하는 효과적인 견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회담에서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1차 사료들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모든 기록은 웰링턴이 블뤼허에게 지원을 약속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 약속이 조건 없는 명확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군대가 공격받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만 제때 지원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프로이센 측 기록에는 조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웰링턴 사령부에 파견된 프로이센 연락 장교였던 폰 뮈플링은 웰링턴이 "나 자신은 공격받지 않는다는 전제하에"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기록했다. 영국군 소속의 프로이센 장군 폰 뢴베르크 역시 웰링턴이 "내게 대항하는 세력이 무엇인지, 내 군대의 얼마나 많은 병력이 도착했는지 보고 그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일부 프로이센 기록은 웰링턴이 지원 약속뿐만 아니라 도착 예정 시간(오후 2시, 3시, 또는 4시 - 클라우제비츠는 회담 자리에 없었음에도 4시로 기록)까지 언급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웰링턴은 이미 카트레브라에서 프랑스군의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반론도 있다. 그나이제나우는 리니 전투 패배의 책임을 웰링턴에게 돌리며 "그로 인해 우리가 겪은 패배"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시본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러나 공작이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병력을 모으는 데 걸리는 시간과 블뤼허가 실행하기 전에 패배할 가능성을 계산한 결과, 웰링턴이 가능하다면 나뮈르 길을 통해 프로이센 우익을 지원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지원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공작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후자는 원하는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고, 곧 공격을 감행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집결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며 콰트르 브라로 돌아갔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이 전투로 는 4,000명의 병력을, 웰링턴은 4,8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전술적으로는 연합군이 전장을 지켜냈지만, 프랑스군은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지원하려는 연합군의 움직임을 막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카트르브라 교차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카트르브라에서의 교전은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연시켰고, 이는 웰링턴이 워털루 전장에 방어 진지를 구축할 시간을 벌어주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만약 네가 카트르브라를 신속히 점령했다면 연합군의 패배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은 와브르 방향으로 후퇴하는 프로이센군과 멀어지는 브뤼셀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후퇴하여 워털루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엘론 백작 휘하의 제1군단이 리니나 카트르브라 어느 쪽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점이 큰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만약 제1군단이 어느 한쪽에 집중되었다면 전황이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웰링턴을 주력 부대로 추격하게 되었고, 이틀 뒤 워털루에서 그와 격돌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카트르브라 전투는 양측 모두 본래의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 무승부로 평가받는다. 웰링턴은 네에게 발목이 잡혀 리니에서 고전하던 프로이센군을 구원하러 갈 수 없었고, 프로이센군의 패배로 결국 카트르브라를 포기해야 했다. 반대로 네는 웰링턴 군을 묶어두느라 리니의 나폴레옹을 지원하지 못했고, 이는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군을 완전히 격멸할 기회를 놓치는 결과로 이어졌다.[8] 퇴각했지만 전력을 보존한 프로이센군은 이틀 뒤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워털루 전역 이후, 웰링턴은 네덜란드 국왕 빌럼 1세로부터 워털루 공작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와 함께 카트르브라 전장의 넓은 지역을 포함하는 토지가 주어졌다. 토지 소유자로서 공작과 그의 후계자는 보수 숲의 상당 부분을 벌목하여 목재로 사용했다.

5. 기타

브라운슈바이크 공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 전투에서 총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 전투는 보병에 대한 창기병의 우위, 기병에 대한 보병 방진의 우위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로 언급된다.

참조

[1] 문서 GdD Pire's letter to GdD Reille, June 25th 1815, in Arch. Serv. Hist.
[2] 서적 Waterloo 1815: Quatre Bras and Ligny Leo Cooper 2005
[3] 간행물 Waterloo Campaign https://en.wikisourc[...]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1
[4] 서적 Waterloo 1815: Quatre Bras and Ligny Leo Cooper 2005
[5] 문서 半島戦争でウェリントンは「本隊を隠して敵を誘き寄せる」という戦術をよく用いた。その為ネイはカトル・ブラに駐屯する8,000の部隊を囮として捉え、よく警戒して行軍した。
[6] 문서 ネイの手勢だけでは陣地防御は疎か、敵に包囲される可能性が高かった。
[7] 문서 「敵の槍騎兵と胸甲騎兵は、いままでに出会った最高の男たちだ。彼らは数度の勇猛な突撃を行い、われわれの歩兵を物ともせずに前進してきた。」 フレイザー大佐
[8] 서적 ナポレオン戦争全史 原書房 20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