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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흐타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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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캬흐타 조약은 1728년 러시아와 청나라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양국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조약은 몽골 북쪽 국경을 확정하고, 캬흐타에서 카라반 무역을 시작하는 등 외교 관계와 무역 관계를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도망자 상호 인도, 국경선 설정, 상업 관계, 러시아 정교회 설립 허용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후 1768년과 1792년에 조약의 일부 내용이 수정되었다. 캬흐타 조약은 19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영향을 미쳤으며,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중러 국경이 거의 확정되기 전까지 양국 관계의 기본 틀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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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흐타 조약
조약 정보
이름캬흐타 조약
원어 이름 (러시아어)Кяхтинский договор (캬흐틴스키 도고보르)
원어 이름 (중국어)布連斯奇條約/恰克圖條約 (Bùliánsīqí/Qiàkètú tiáoyuē)
원어 이름 (몽골어)Хиагтын гэрээ (Hiagtiin geree)
유형국경 획정 조약
위치캬흐타
서명 날짜1728년 6월 25일
캬흐타의 모습 (현재 러시아 연방 브리야트 공화국)
캬흐타의 모습 (현재 러시아 연방 브리야트 공화국)
교섭 및 서명
교섭 당사자투리셴
백작
서명 당사자대청제국
러시아 제국
언어
사용 언어만주어
러시아어
라틴어

2. 역사적 배경

17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 제국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통일하며 세력을 공고히 했다. 1689년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 북쪽의 국경을 처음으로 정했지만, 몽골 지역의 경계는 불분명하게 남아 있었다.[6] 이 조약 이후 러시아는 베이징과의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고, 청나라는 북방 국경의 안정, 특히 준가르 칸국과 관련된 몽골 지역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6]

그러나 18세기 초, 러시아 상인들의 활동과 모피 무역의 문제, 청·준가르 전쟁과 관련된 몽골 지역의 긴장 고조 등으로 양국 간의 갈등이 발생했다.[6] 청나라는 러시아가 준가르를 지원하거나 청에 반하는 세력에게 도피처를 제공할 가능성을 경계했으며, 러시아 대상(隊商)의 활동을 제한하기 시작했다.[6] 러시아는 중단된 베이징 무역의 재개를 원했고, 청나라는 몽골 지역의 국경을 명확히 하여 안정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시했다.[6] 이러한 양국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조약 체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는 캬흐타 조약으로 이어지는 외교적 협상의 배경이 되었다.[6]

2. 1. 네르친스크 조약과 그 이후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은 현재의 러시아-중국 국경 북쪽 지역, 즉 만주의 북쪽 경계를 설정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바이칼 호 동쪽과 아르군강 서쪽 사이의 자바이칼 지방을 확보했다. 당시 현재의 몽골 지역은 오이라트 계열의 준가르 칸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는 표트르 1세의 주도로 베이징으로 대상(隊商)을 보내 무역을 시작했으며(베이징 무역), 이는 러시아의 주요 목적 중 하나였다.[6] 러시아는 이 무역을 통해 얻는 이익을 국고로 흡수하고자 했다.[6] 초기 동방 무역은 16세기 시베리아 진출과 함께 활발해졌고, 17세기에는 토볼스크를 거점으로 동투르키스탄 및 서투르키스탄과 통상 관계를 구축했다.[6]

그러나 171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측의 주요 상품인 모피가 공급 과잉 상태가 되어 무역이 부진해졌다.[6] 또한, 청나라는 청·준가르 전쟁으로 인해 몽골 지역(할하부)을 통과하는 러시아 대상의 존재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6] 당시 할하부는 준가르의 공격을 피해 청나라의 보호 아래 들어간 상태였기에, 청 조정은 대규모 러시아 대상이 이 지역을 자유롭게 통과하는 것을 경계했다.[6] 청나라는 준가르에 대한 러시아의 잠재적 지원 가능성을 우려했으며, 청에 불복하는 신하들이 러시아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로운 국경 협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측의 요새 건설 역시 청나라를 자극하여, 결국 러시아 대상의 베이징 입성이 금지되었다.[6]

이러한 상황에서 베이징 무역 재개를 최우선 과제로 삼은 러시아와, 몽골 지역의 국경 확정을 통해 지배 안정을 원했던 청나라 옹정제 사이에 새로운 교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6]

한편, 준가르는 러시아와 청나라 양측에 사절을 보내며 외교적 줄타기를 시도했다. 1721년,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준가르 사절 보로크르간은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협력을 요청하는 대가로 준가르 내 광산 개발권을 제안했다.[6] 표트르 1세는 이에 응하여 1722년 이반 운코프스키를 사절단장으로 파견, 준가르 군주 체왕 랍탄(策妄阿拉布坦zho)에게 러시아 차르에 대한 신속(臣屬)을 요구하는 조약 체결을 시도했다.[6][7] 이는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유지되던 러시아-청나라 간 우호 관계를 뒤흔들 수 있는 대담한 외교적 움직임이었다.[7]

그러나 운코프스키가 준가르에 체류하는 동안 청나라 사절도 도착했고, 체왕 랍탄은 러시아의 신속 요구를 사실상 거부하고 청나라와의 평화 교섭을 선택했다.[6] 이후 청나라와 준가르 간에 국경 확정 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준가르가 할하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완전한 지배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결렬되었다.[6]

청-준가르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직접적인 국경 확정 교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6] 초기 청나라는 국경 부근에서의 교섭을 원했으나, 러시아 전권 대사 사바 블라디슬라비치(Sava Vladislavicheng) 백작은 '옹정제 즉위 축하'를 명분으로 베이징에서의 회담을 성사시켰다.[6] 베이징 회담에서는 베이징 무역 재개, 국경 교역소 개설, 월경 도망자 처리, 외교 서신 형식 등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후 구체적인 국경 확정 논의는 몽골 지역의 국경 지대에서 진행되었다.[6]

1727년 10월 21일, 국경 확정에 관한 부라 조약이 먼저 체결되었고, 이를 포함하여 베이징 합의 내용을 종합한 총 11개 조항의 초안이 마련되었다.[6] 이후 청나라 대신 투리센과 러시아 대사 간의 추가적인 조정을 거쳐 1728년 6월 25일, 캬흐타에서 최종적으로 캬흐타 조약이 체결되었다.[6] 이 조약은 러시아어, 만주어, 라틴어 3개 언어로 작성되었으며, 공식적인 한문판은 작성되지 않았다.[6] 조약 체결 과정의 복잡성과 여러 언어 간 번역의 어려움으로 인해 조문 해석상의 차이가 발생했으며, 이는 1768년 캬흐타 조약 추가 조약을 통해 일부 해소되었다.[6]

2. 2. 몽골 문제와 통상 갈등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사이에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어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을 경계로 양국의 지배 영역이 확인되었다.[6]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후 러시아는 대상(隊商)을 본격적으로 편성하여 베이징으로 보내 무역을 시작했다(베이징 무역).[6] 러시아가 조약을 체결한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청나라와의 무역에 있었다.[6] 러시아 제국의 동방 무역은 시베리아 진출 초기인 16세기 이후 활발해졌으며, 17세기에는 시베리아의 중심지였던 토볼스크를 거점으로 동투르키스탄 및 서투르키스탄과 통상 관계를 구축했다.[6] 표트르 1세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베이징 무역을 중시하고, 관영 대상 파견을 통해 무역 이익을 국고로 흡수하고자 했다.[6]

그러나 순조롭게 발전하는 듯했던 이 무역은 171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측의 주력 상품인 모피가 공급 과잉으로 부진에 빠지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6] 또한 청·준가르 전쟁으로 인해 외몽골 할하부에서 몽골 병사가 동원되자, 청나라는 할하의 영역(몽골 고원)을 통과하는 러시아 대상의 존재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6] 칭기스 칸의 후예가 지배층을 이루던 할하부는 17세기 말 준가르의 공격을 받아 청나라의 보호 아래 들어간 상태였고, 청나라 조정은 대규모 러시아 대상이 이곳을 통과하는 것을 경계했다.[6] 러시아 측이 국경 지대에 요새를 건설한 것 역시 청나라를 자극했으며, 결국 러시아 대상은 베이징 입성이 금지되었다.[6] 베이징 무역 재개를 원했던 러시아와 몽골 방면의 국경 확정을 통해 몽골 지배 안정을 원했던 청나라 옹정제 사이에 교섭이 필요해졌다.[6]

한편, 준가르는 러시아와 청나라 양측에 사절을 파견하며 독자적인 외교를 펼쳤다. 1721년,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준가르 사절 보로크르간은 러시아가 원했던 준가르 영토 내 광산 자원 개발을 허가하는 대신, 적대 관계인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협력을 요청했다.[6] 표트르 1세는 1722년 이에 호응하여 포병대 대위였던 이반 운코프스키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준가르에 파견했다.[6][7] 표트르 1세는 준가르의 군주인 체왕랍탄에게 러시아 차르에 대한 신속(臣屬)을 인정하는 조약 체결을 요구했는데,[6] 이는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의 노청 우호 관계를 뒤엎을 수 있는 시도였다.[7]

그러나 러시아 사절 운코프스키가 준가르에 체류하는 동안 청나라에서 온 사절이 체왕랍탄에게 도착하여 옹정제의 평화 메시지를 전달했다.[6] 양측 사절을 맞이한 체왕랍탄은 사실상 운코프스키의 신속 요구를 거부하고 청나라와의 교섭을 선택했다.[6] 이로써 청나라와 준가르 간의 국경 확정 교섭이 시작되었으나,[6] 준가르가 할하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완전한 지배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결렬되었다.[6] 이후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국경 확정 교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3. 협상의 시작

1689년 청나라러시아 제국 사이에는 이미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어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을 경계로 양국의 지배 영역을 확인하고 있었다.[6]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후 러시아에서는 대상(隊商)을 편성하여 베이징으로 보내 무역을 진행했다(베이징 무역).[6] 표트르 1세는 베이징 무역을 중요하게 여겨, 관영 대상 파견을 통해 무역 이익을 국가 재정으로 확보하고자 했다.[6]

그러나 171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측 주력 상품인 모피 공급 과잉으로 무역이 부진해졌다.[6] 또한 청·준가르 전쟁으로 외몽골 할하부에서 몽골 병사가 동원되자, 청나라는 할하 지역(몽골 고원)을 통과하는 러시아 대상의 존재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6] 칭기스 칸의 후예가 지배하던 할하부는 17세기 말 준가르의 공격을 받고 청나라의 보호 아래 들어간 상태였기에, 만주족 왕조는 이 지역을 대규모 러시아 대상이 통과하는 것을 경계했다.[6] 러시아 측의 요새 건설 역시 청나라를 자극했고, 결국 러시아 대상의 베이징 출입이 금지되었다.[6] 1719년과 1722년 레프 이즈마일로프의 베이징 파견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베이징 무역 재개를 원했던 러시아와 달리, 청나라 옹정제는 몽골 방면의 국경 확정을 우선 요구했다.[6] 이처럼 베이징 무역 부활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러시아와 국경 확정을 통한 몽골 지배 안정을 원했던 청나라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양국 간 교섭이 시작되었다.[6]

한편, 준가르는 러시아와 청나라 양측에 사절을 보내고 있었으며, 양국 역시 준가르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복잡한 외교 관계가 얽혀 있었다.[6] 1722년 표트르 1세는 이반 운코프스키를 준가르에 파견하여 동맹을 시도했으나,[6][7] 준가르의 군주 策妄阿拉布坦|체왕 랍탄중국어은 청나라와의 교섭을 선택했다.[6] 청나라와 준가르 간의 국경 협상은 결렬되었고, 이는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직접적인 국경 협상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6]

표트르 대제가 사망하기 직전 국경 문제 해결을 결정하면서, 1725년 10월 23일 세르비아 출신의 사바 블라디슬라비치 백작이 전권 대사로 임명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3] 그는 지도 제작자, 사제 등 120명의 수행원과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726년 11월 베이징에 도착했다.[3] 도착 전 로렌츠 랑게와 이반 부홀츠가 합류했으며, 국경 측량을 위해 지도 제작자들이 파견되었다.[3] 만주 측 협상 대표는 투리선과 도미니크 파르네닌이었다.[3]

청나라 측은 국경 부근에서의 교섭을 원했으나, 블라디슬라비치 대사는 "옹정제 즉위 축하"를 명분으로 베이징에서의 회담을 관철시켰다.[6] 베이징 회담에서는 베이징 무역 재개, 국경 교역소 설치, 월경자 처리, 외교 문서 형식 등에 대한 기본 합의가 이루어졌다.[6] 이후 구체적인 국경 확정 논의를 위해 교섭 장소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몽골 지역으로 옮겨졌다.[6] 청나라는 할하 지역 국경 문제는 현지에서 확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6]

3. 협상 과정

청나라 강희제는 1710년대부터 러시아 제국과의 대상 무역을 제한하며 국경 및 무역 협정 체결을 압박했다. 초기 레프 이즈마일로프의 사절단 파견(1719년, 1722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표트르 대제 사후, 러시아는 국경 문제 해결을 위해 1725년 사바 블라디슬라비치를 특사로 임명하여 대규모 사절단을 베이징으로 파견했다. 청나라 측에서는 투리선 등이 협상에 나섰다. 베이징에서의 초기 협상 이후, 정확한 국경 획정을 위한 지도가 필요해지자 양측 대표단은 1727년 바이칼호 인근 셀렌긴스크로 이동하여 현지 조사를 병행하며 협상을 이어갔다.

셀렌긴스크에서 국경선에 대한 잠정 합의(부라 조약 초안)가 이루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캬흐타를 중심으로 동서 구간에 걸쳐 국경 표지 설치 작업이 진행되었다.[3] 이 합의안은 다시 베이징으로 보내져 최종 검토 및 조율을 거쳤으며, 그 결과 1728년 6월 25일 국경 지역인 캬흐타에서 공식적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러시아어, 라틴어, 만주어로 작성되었으며, 공식적인 중국어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3. 1. 베이징 협상

1710년대부터 청나라강희제러시아 제국과의 대상 무역을 제한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협정 체결을 압박했다. 1719년과 1722년, 레프 이즈마일로프가 베이징에 파견되었으나 협상에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표트르 대제는 사망 직전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725년 10월 23일,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세르비아 출신 사바 블라디슬라비치가 특사로 임명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그는 지도 제작자와 사제를 포함한 120명의 수행원과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동했다. 1726년 11월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 로렌츠 랑게와 이반 부홀츠가 사절단에 합류했으며, 국경 측량을 위해 지도 제작자들이 먼저 파견되었다. 청나라 측 협상 대표는 투리선과 예수회 선교사 도미니크 파르네닌이었다.

베이징에서 약 6개월간의 협상이 진행되어 조약 초안이 마련되었지만, 양측 모두 정확한 국경 정보가 담긴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27년 5월, 블라디슬라비치와 투리선은 지도를 확보하고자 바이칼호 근처의 셀렌긴스크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8월 31일, 인근 강의 이름을 딴 '부라 조약' 초안이 작성되었다. 이후 셀렝가강캬흐타를 기점으로 국경 표지 설치 작업이 신속하게 시작되었다.[3] '아바가이투 서한'에는 캬흐타 동쪽 아르군강까지 63개의 표지가, '셀렌긴스크 서한'에는 캬흐타 서쪽 "알타이 산맥 북서쪽 경사면의 샤빈도바가 강"까지 24개의 표지가 명시되었다. 셀렌긴스크에서 작성된 부라 조약 초안은 베이징으로 보내져 기존 협상 내용과 통합되었다. 그 결과물은 다시 국경 지역으로 보내졌고, 1728년 6월 25일 최종적으로 캬흐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3. 2. 몽골 현지 협상

1710년대부터 청나라강희제러시아 제국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상 무역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압력을 가하며 국경 협정을 맺으려 했다. 1719년과 1722년에 걸쳐 레프 이즈마일로프가 베이징에 파견되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표트르 대제는 죽기 직전에 국경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1725년 10월 23일, 러시아에서 복무하던 세르비아인 사바 블라디슬라비치는 지도 제작자와 사제를 포함한 120명의 직원과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그는 1726년 11월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에 로렌츠 랑게와 이반 부홀츠를 합류시켰고, 국경 측량을 위해 지도 제작자들을 파견했다. 만주 측 협상자는 투리선과 도미니크 파르네닌이었다.

6개월 후 조약 초안이 작성되었지만, 양측 모두 적절한 지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727년 5월에 블라디슬라비치와 투리선은 지도를 얻기 위해 바이칼호 근처의 셀렌긴스크로 돌아갔다. 8월 31일까지 초안 조약이 작성되었다(근처 강 이름을 따서 '부라 조약'). 셀렝가강캬흐타를 시작으로 국경 표지 설치 작업이 빠르게 시작되었다.[3] '아바가이투 서한'은 캬흐타에서 동쪽의 아르군강까지 63개의 표지를 나열했다. '셀렌긴스크 서한'은 캬흐타에서 서쪽의 "알타이 산맥 북서쪽 경사면에 있는 샤빈도바가 강"까지 24개의 표지를 나열했다. '부라 조약'은 베이징으로 보내져 이미 그곳에서 진행된 작업과 합쳐졌다. 그 결과가 국경으로 다시 보내졌고, 1728년 6월 25일에 ''캬흐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러시아어, 라틴어, 만주어로 된 세 가지 공식 버전을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인 중국어 버전의 조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3. 3. 조약 체결

1710년대부터 청나라 강희제는 대상 무역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압력을 가하여 협정을 맺으려 했다. 1719년과 1722년 레프 이즈마일로프의 베이징 파견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표트르 대제는 죽기 직전에 국경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1725년 10월 23일, 러시아에서 복무하던 세르비아인 사바 블라디슬라비치는 지도 제작자와 사제를 포함한 120명의 직원과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1726년 11월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에 로렌츠 랑게와 이반 부홀츠를 합류시켰고, 국경 측량을 위해 지도 제작자들을 파견했다. 만주 측 협상자는 투리선과 도미니크 파르네닌이었다. 6개월 후 조약 초안이 작성되었지만, 양측 모두 적절한 지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5월에 블라디슬라비치와 투리선은 지도를 얻기 위해 바이칼호 근처의 셀렌긴스크로 돌아갔다. 8월 31일까지 근처 강 이름을 따서 '부라 조약' 초안이 작성되었다. 셀렝가강캬흐타를 시작으로 국경 표지 설치 작업이 빠르게 시작되었다.[3] '아바가이투 서한'은 캬흐타에서 동쪽의 아르군강까지 63개의 표지를 나열했다. '셀렌긴스크 서한'은 캬흐타에서 서쪽의 "알타이 산맥 북서쪽 경사면에 있는 샤빈도바가 강"까지 24개의 표지를 나열했다. '부라 조약'은 베이징으로 보내져 이미 그곳에서 진행된 작업과 합쳐졌다. 그 결과가 국경으로 다시 보내졌고, 1728년 6월 25일에 ''캬흐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러시아어, 라틴어, 만주어로 된 세 가지 공식 버전을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인 중국어 버전의 조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조약의 주요 내용

캬흐타 조약을 통해 청나라러시아 제국 사이에는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외교 관계와 무역 관계가 수립되었다. 또한, 당시 몽골의 북쪽 국경(당시 청-러시아 국경의 일부)이 확정되었으며, 캬흐타에서는 러시아의 모피와 중국의 차를 교환하는 카라반 무역(캬흐타 무역)이 시작되었다.

청나라의 백성은 이 조약에서 만주어로 "둘림바이 구룬"이라고 불렸다.[1][2]

조약은 총 11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상업 관계와 외교적 면제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주요 내용
제1조, 제11조양국 간의 영원한 평화와 협력, 조약 문서의 언어 및 구성에 관한 규정
제2조도망자의 상호 인도에 관한 규정
제3조, 제7조새로운 국경선 설정. 이르티쉬강 유역 일부는 미할당 지역으로 남겨두고 추후 협의하기로 함.
제4조상업 관계에 관한 규정. 러시아는 3년마다 베이징에 대상(隊商) 파견 및 캬흐타와 추루카이투에서의 지속적인 국경 무역(캬흐타 무역) 허용. 이를 통해 러시아는 해상 무역 중심의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광저우 무역 외에 더 유리한 조건을 확보함.
제5조베이징에 러시아 종교 기관 설립 허용
제6조, 제9조양국의 외교 교섭 형태와 방식에 관한 규정
제8조, 제10조향후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의 해결 방법과 절차에 관한 규정


5. 조약의 영향 및 의의

캬흐타 조약을 통해 러시아 제국청나라 사이에는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될 외교 관계와 무역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 조약으로 당시 몽골의 북쪽 국경(당시 청-러시아 국경의 일부)이 확정되었으며, 캬흐타에서는 러시아의 모피와 중국의 차를 교환하는 카라반 무역이 시작되었다. 조약 원문에서는 청나라 백성을 만주어로 "Dulimbai Gurun|둘림바이 구룬mnc"이라고 칭했다.[1][2]

1726년부터 1727년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러시아-청나라 국경 협상에서는 몽골 지역 국경 문제와 더불어 넬친스크 조약에서 미결 상태였던 우다 강 유역의 귀속 문제가 논의되었다.[8] 이 과정에서 양국은 서로 지도를 교환하여 검토했는데, 러시아 측이 제공한 지도에는 캄차카 반도가 크게 그려져 있었고, 당시 청나라에게는 미지의 땅이었던 '에조'(에조치, 현재의 홋카이도)가 캄차카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8] 청나라는 이 지도에서 에조가 러시아 영토로 표시된 것에 주목하고 충격을 받았다.[8] 비록 베이징 회의에서 우다 강 유역의 귀속은 결정되지 못했지만, 청나라는 회의 종료 직후부터 에조와 사할린 섬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다. 1727년, 청나라는 아무르 강 하류 출신의 호지홍과 다이주를 사할린 중부 동해안에 파견하여 조사를 벌였다.[8] 이후 1729년에는 일본과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이란하라 출신의 꾜키교 이부게네 등을 사할린 중남부로 보냈는데, 이들은 일본산 갑옷, , 칠기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8] 1732년, 옹정제는 이부게네 등을 다시 사할린에 파견하여 중남부의 아이누를 포함한 총 146호의 주민을 청나라에 복속시켰다.[8] 이를 통해 청나라의 지배력은 사할린 남단까지 미치게 되었고, 사실상 사할린 섬 전체가 청나라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8] 참고로 일본인 마미야 린조가 사할린을 탐험한 것은 1809년의 일이며, 러시아와 청나라가 아이훈 조약을 체결하여 아무르 강 북쪽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한 것은 1858년이다.

5. 1. 조약의 수정 및 폐기

1768년 10월 18일, 캬흐타 조약 제10조를 수정하는 새로운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준가르 칸국을 멸망시킨 청나라에 대항하던 아무르사나를 비롯한 반군 세력이 국경을 넘어 도주한 사건과, 1762년 이후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무역 규모를 축소하고 1765년에는 아예 중단시킨 문제 등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협약을 통해 기존 조약의 처벌 관련 조항이 더욱 명확하게 규정되었다.

캬흐타 조약을 통한 무역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러시아에게 매우 중요했다. 청나라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때때로 무역을 중단시키는 방식으로 러시아를 압박하기도 했다. 1784년에는 러시아 측의 부랴트족과 청나라 측의 우리양하이족이 함께 흡수골 지역에서 중국 상인들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러시아가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방식이 청나라의 불만을 샀고, 이는 다시 7년 동안 양국 간의 무역이 중단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7년 동안 양국 관계의 긴장을 보여주는 여러 사건들이 발생했으며, 상호 합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4]

결국 1792년 2월 8일, 양국은 캬흐타에서 "국제 의정서"(恰克圖市約|차커투 시웨중국어)를 체결하여 기존 캬흐타 조약의 효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5]

참조

[1] 서적 Grounds of Judgment: Extraterritoriality and Imperial Power in Nineteenth-Century China and Japa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12-01-11
[2] 서적 Rule of law or rule of laws: legal pluralism and extraterritoriality in nineteenth century East Asi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3] 문서 Travels from St Petersburg in Russia to diverse parts of Asia Edinburgh 1806
[4] 간행물 Трансграничные миграции в пространстве монгольского мира: история и современность. Выпуск 2: tu̇u̇kh ba odoo t︠s︡ag, Volume 2
[5] 서적 History of Economic Relations Between Russia and China
[6] 문서 澁谷「研究フォーラム キャフタ条約と中央ユーラシア」(2007)pp.44-47
[7] 문서 澁谷「ウンコフスキー使節団と1720年代前半におけるジューン=ガル,ロシア,清の相互関係」(2007)p.107
[8] 문서 松浦(2003)pp.176-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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