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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전투 (14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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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소보 전투 (1448년)는 1448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헝가리, 알바니아, 왈라키아 군대가 연합하여 벌인 전투이다.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는 발칸 민족의 반란을 유도하고 기습 공격을 통해 오스만 군을 격파하려 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방해와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군대의 합류 지연으로 인해 후녀디는 오스만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이 전투로 인해 발칸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력을 잃고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 군단의 강력함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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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전투 (1448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아킨치가 헝가리 기사를 올가미로 제압하는 모습
아킨치가 올가미로 헝가리 기사를 제압하는 모습
기본 정보
분쟁 명칭코소보 전투
다른 명칭제2차 코소보 전투
이킨지 코소바 무하레베시 (İkinci Kosova muharebesi, 튀르키예어)
머소디크 리고메제이 차터 (második rigómezei csata, 헝가리어)
일부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오스만-헝가리 전쟁
오스만-왈라키아 전쟁
시기1448년 10월 17일 ~ 1448년 10월 20일 (율리우스력)
장소코소보 분지, 세르비아 공국
결과오스만 제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오스만 제국
카라만 후국
교전국 2헝가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보헤미아 왕국
몰다비아
리투아니아 대공국
왈라키아
지휘관 및 지도자
오스만 제국무라트 2세
메흐메트 왕자
연합군후녀디 야노시
프랑코 탈로베츠
미하이 실라지
병력 규모
오스만 제국50,000 ~ 60,000명
연합군31,000 ~ 47,000명 (기병 7,000명, 보병 24,000 ~ 40,000명)
피해 규모
오스만 제국4,000 ~ 34,000명
연합군6,000 ~ 17,000명 (헝가리인 9,000명, 용병 2,000명, 왈라키아인 6,000명)

2. 배경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한 후, 헝가리 왕국후녀디 야노시는 다시 한번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군대를 일으킬 기회를 얻었다. 같은 해 폴란드의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는 세게드 평화 조약 이후 오스만 제국과 맺었던 10년 휴전을 깨고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은 궤멸되었고 국왕은 사망했다. 2년 후인 1446년, 술탄 무라드 2세는 조약 파기에 대한 복수로 발칸으로 돌아와 헥사밀리온 성벽을 돌파하고 펠로폰네소스를 유린했다. 이후 교황 니콜라오 5세가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하자 무라드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스베티그라드 요새를 정복했다.[17]

후녀디는 알바니아의 지도자 스칸데르베그와 연합하여 세르비아보스니아 왕국을 포함하는 동맹을 맺고,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 24,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이 병력에는 8,000명의 왈라키아인이 포함되었고, 헝가리 기병대는 독일과 보헤미아의 보병 용병으로 보충되었다. 후녀디의 전략은 발칸 민족의 반란, 기습 공격, 그리고 동맹군과 합류한 후 오스만군의 주력을 일격에 파괴하는 데 기반을 두었다.

그러나 스칸데르베그의 군대는 오스만의 봉신이었던 세르비아의 주라지 브란코비치에게 공격받고 진군로가 차단되어 헝가리 군과의 합류가 지연되었다.[17]

2. 1. 헝가리 왕국의 상황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후녀디 야노시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새로운 군대를 일으킬 기회를 잡았다. 후녀디의 전략은 발칸 반도 주민들의 반란을 선동하고, 기습 공격을 통해 단 한 번의 전투로 오스만 군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중하지 않았고, 후방에 예비대를 두지 않은 채 군대를 이끌었다.[17]

1444년, 폴란드의 왕 브와디스와프 3세는 세게드 평화 조약 이후 오스만 제국과 맺었던 10년 휴전을 깨고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은 궤멸되었고 왕은 사망했다. 2년 후인 1446년, 술탄 무라드 2세는 발칸으로 돌아와 헥사밀리온 성벽을 돌파하고 펠로폰네소스를 유린했다. 이후 교황 니콜라오 5세가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하자 무라드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스베티그라드 요새를 정복했다.

한편, 바르나 전투 패배 4년 후, 헝가리의 가장 부유한 지주였던 야노스 후녀디는 알바니아의 지도자 스칸데르베그와 연합하여 세르비아보스니아 왕국을 포함하는 동맹을 맺었다.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기로 결심한 야노스 후녀디는 24,000명의 병력을 모았는데, 여기에는 8,000명의 왈라키아인이 포함되었고, 헝가리 기병대는 독일과 보헤미아의 보병 용병으로 보충되었다. 후녀디의 전략은 발칸 민족의 반란, 기습 공격, 그리고 동맹군과 합류한 후 오스만 군의 주력을 일격에 파괴하는 데 기반을 두었다.

1448년 9월, 후녀디는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강을 건너 세르비아코빈 인근, 세르비아 수도 스메데레보 외곽에 진영을 쳤다. 헝가리군은 독일, 왈라키아, 보헤미아, 알바니아 동맹군을 기다리며 한 달 동안 진영에 머물렀다. 스칸데르베그가 이끄는 알바니아군은 오스만군과 그 동맹국들에 의해 후녀디의 군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지연되었다. 알바니아 군은 세르비아-알바니아 국경의 산길을 점령한 세르비아 전제군주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군대와 베네치아의 북부 알바니아 공격으로 인해 지연된 것으로 보인다. 세르비아는 터키와의 이전 휴전으로 인해 야노스 후녀디의 군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브란코비치의 정확한 역할은 논쟁의 대상이다. 그 결과, 스칸데르베그는 기독교 대의를 저버린 죄로 브란코비치의 영토를 유린하고 약탈했으며, 후녀디는 스칸데르베그와 그의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2. 2. 오스만 제국의 상황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이 패배하고 폴란드의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사망한 지 2년 후인 1446년, 술탄 무라드 2세는 세게드 평화 조약을 파기한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발칸으로 돌아왔다.[17] 그 해 오스만 군대는 헥사밀리온 성벽을 돌파하고 펠로폰네소스를 유린했다.[17] 이후 교황 니콜라오 5세가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하자 무라드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스베티그라드 요새를 정복했다.[17]

십자군의 위협 소식에 무라드는 알바니아에 대한 작전을 포기했다.[8] 군대가 십자군을 상대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한 무라드는 소피아로 물러나 작전에 필요한 물자를 비축하고 증원을 받았다.[9] 소피아에서 물자를 모으는 동안, 왈라키아 군이 다뉴브 강을 건너 니코폴리스 산자크의 오스만 진지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9] 아킨지 부대가 대응하여 왈라키아 군을 기습, 격퇴하고 많은 포로를 생포했다.[9] 생포된 포로는 소피아로 보내졌고, 이 승리 소식은 십자군을 향한 행군을 앞둔 오스만 군의 사기를 높였다.[9]

한편, 알바니아의 지도자 스칸데르베그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封臣)이었던 세르비아주라지 브란코비치에게 공격받고 진군로가 차단당해 헝가리 군에 합류하지 못했다.[17] 스칸데르베그는 기독교 대의를 저버린 죄로 브란코비치의 영토를 유린하고 약탈했다.[10][13]

2. 3. 십자군 원정과 동맹

1448년, 후녀디 야노시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군대를 일으킬 기회를 잡았다.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후녀디는 다시 한번 오스만을 공격할 군대를 조직했다. 그의 전략은 발칸 반도 주민들의 반란을 선동하고, 기습을 통해 단 한 번의 전투로 오스만 군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이었다.[17]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했고, 이에 후녀디는 알바니아의 지도자 스칸데르베그와 연합하여 세르비아보스니아 왕국을 포함하는 동맹을 맺었다.[17] 후녀디는 24,000명의 병력을 모았는데, 여기에는 8,000명의 왈라키아인이 포함되었고, 헝가리 기병대는 독일과 보헤미아의 보병 용병으로 보충되었다.[17]

그러나 스칸데르베그의 군대는 오스만의 봉신이었던 세르비아의 주라지 브란코비치에게 공격받고 진군로가 차단되어 헝가리 군과의 합류가 지연되었다.[17] 브란코비치는 오스만과의 이전 휴전으로 인해 후녀디의 군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17] 결국, 스칸데르베그는 브란코비치의 영토를 약탈하는 보복을 감행했지만, 후녀디는 스칸데르베그의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17]

3. 전투

1448년 10월 17일, 야노슈 후냐디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코소보 평원(리고메죄)에 도착하여 오스만군과 대치했다. 헝가리군은 오스만군이 이미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전투는 3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 양측은 치열하게 싸웠다. 헝가리군은 초반에 오스만군 측면을 공격했으나, 오스만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후냐디는 주력 부대로 오스만군 중앙 돌파를 시도했으나 저지당했다. 둘째 날 밤, 양측은 포격전을 벌였다.

셋째 날, 오스만군은 최종 공격으로 헝가리군을 전멸시켰다. 헝가리군은 15,000명, 오스만군은 5,000명 정도의 피해를 보았다.[18]

3. 1. 전투 준비

야노슈 후냐디가 리고메죄(코소보 평원)에 도착했을 때, 술탄 무라드 2세는 이미 브란코비치를 통해 헝가리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고, 오스만군은 전장의 언덕을 장악하고 있었다.[18] 헝가리 기사들은 격전 끝에 언덕을 탈환하고 방어 기지를 설치한 후, 전투용 마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후냐디는 오스만 제국과 싸우기 위해 플레멘티나(Plementina) 언덕에 '타보르' 마차 요새를 건설했고, 오스만 제국은 이에 대응하여 자체 울타리를 건설했다. 헝가리군은 장거리 포격을 가했다.

헝가리군과 오스만군의 병력 규모 및 지휘관
구분헝가리군오스만군
병력 규모22,000명 ~ 30,000명[15][16]40,000명 ~ 60,000명[14][15]
총지휘관야노슈 후냐디무라드 2세
주요 지휘관야노슈 후냐디 (중앙), 왈라키아인 (우익)무라드 2세 (대포병, 예니체리), 메흐메트 (아나톨리아 군대, 우익)


3. 2. 전투 경과 (1일차)

야노슈 후냐디가 리고메죄(코소보 평원)에 도착했을 때, 술탄이 브란코비치를 통해 자신들에 대한 정보를 완벽히 파악하였고, 오스만군이 이미 전장에 있는 언덕을 장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8] 기사들이 격전을 벌여 언덕을 탈환하고, 방어 기지를 설치한 후에 전투용 마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음 날, 후냐디가 경기병과 중기병이 혼성으로 편성된 기병대로 오스만 군의 측면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루멜리아아나톨리아 출신으로 구성된 오스만군의 측면은 경기병대가 지원하러 올 때까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측면을 공격하던 기독교군은 오스만 투르크의 경기병대에게 패하고, 생존자들은 후냐디의 본영으로 물러났다. 후냐디는 그의 측면 부대가 패하는 것을 보고, 기사들과 경보병대로 이루어진 본대를 이끌고 공격을 가했다. 예니체리 군단은 이 공격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기병대는 오스만군의 중앙을 돌파하였으나, 오스만군의 본진에서 멈추고 말았다. 후냐디가 지휘하는 본대의 공격이 멈추자, 오스만군은 재편성하여 성공적으로 반격을 개시해 헝가리 기사들을 몰아내었다. 기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경장 부대들은 쉽게 격파당했다.

3. 3. 전투 경과 (2일차)

후냐디 야노시는 경기병과 중기병으로 구성된 혼성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루멜리아아나톨리아 출신의 오스만 군 측면 부대는 헝가리 경기병대가 지원하러 올 때까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의 경기병대가 도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헝가리 기독교군은 패배하여 후냐디의 본대로 후퇴했다.

후냐디는 측면 부대의 패배를 보고 기사와 경보병대로 이루어진 주력 부대를 이끌고 공격을 시작했다. 예니체리 군단은 이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헝가리 기병대는 오스만 군 중앙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오스만 군 본진에서 공격이 저지되었다. 후냐디가 지휘하는 본대의 공격이 멈추자, 오스만 군은 재편성하여 반격을 개시했고, 헝가리 기사들을 몰아냈다. 기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경장 부대는 쉽게 격파되었다. 헝가리군은 본진으로 퇴각했다. 퇴각하는 도중, 예니체리는 많은 헝가리 귀족들을 살해했으나, 후냐디는 놓치고 말았다. 밤 동안 오스만 투르크 포병대는 헝가리군에 곡사포를 쏘았고, 헝가리군도 대포로 응사했다.

10월 20일, 왈라키아인들은 무라드 2세의 제안을 받고 오스만 제국 편으로 돌아서면서 후냐디는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18]

3. 4. 전투 경과 (3일차)

다음날, 오스만군은 최종 돌격을 감행하여 남은 헝가리군을 전멸시켰다.[18] 밤 동안 오스만 투르크 포병대는 헝가리군에 곡사포를 쏘았고, 헝가리군도 대포를 이용해 응사했다.[18]

코소보 전투에서 이틀에 걸쳐 벌어진 전투는 양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남겼으나, 결국 두 번째 날 오스만군만이 대오를 유지한 상태로 전장에 남게 되었다.[18] 참전 병력을 보면, 헝가리군 24,000명[15][16]이고, 오스만 군은 40,000 혹은 60,000명 정도로 평가된다.[14][15] 오스만 군은 5,000명 정도, 헝가리군은 15,000명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18]

4. 영향

이 전투는 예니체리 군단이 술탄이 직접 지휘할 경우, 적에게 전열이 붕괴되어도 궤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한 번의 대패가 오스만군에게는 일시적인 혼란일 뿐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오스만군을 완전히 격파하려면 여러 번 연속으로 승리해야 했다. 무라트 2세는 1449년 왈라키아를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1450년에는 알바니아를 공격했다. 1451년 무라트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메흐메트 2세가 술탄이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1454년 세르비아에 대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1]

4. 1. 발칸반도에 미친 영향

이 전투의 패배 이후 발칸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에 저항할 힘을 잃었고, 결국 차례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1] 그러나 후녀디는 석방된 후, 오스만의 공격에 대하여 헝가리 왕국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다.[1] 스칸데르베그 역시 1468년 사망할 때까지 12년간 그의 조국 알바니아를 오스만군의 공격으로부터 훌륭하게 지켜냈으나, 그가 죽은 후 알바니아는 오스만에게 함락당하고 만다.[1]

4. 2. 헝가리 왕국에 미친 영향

후녀디는 헝가리 군대가 세르비아에서 저지른 피해에 대한 보복으로 브란코비치에게 포로로 잡혔다. 후녀디의 석방은 10만 플로린의 몸값, 후녀디가 브란코비치로부터 몰수한 영토의 반환, 그리고 후녀디의 후계자와 브란코비치의 딸의 약혼을 조건으로 협상되었다.[1] 다른 자료에서는 후녀디의 장남 라슬로를 스메데레보에 인질로 남겨두고, 데스팟의 헝가리 영지를 반환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2] 남은 재위 기간 동안 후녀디는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원정에 성공적으로 맞섰다.

4. 3. 알바니아에 미친 영향

스칸데르베그는 1468년 사망할 때까지 12년간 그의 조국 알바니아를 오스만군의 공격으로부터 훌륭하게 지켜냈으나, 그가 죽은 후 알바니아는 오스만에게 함락당하고 만다.[1] 스칸데르베그는 1451년 크루예 성 포위를 풀었다.[3]

4. 4. 오스만 제국에 미친 영향

이 전투는 예니체리 군단이 술탄이 직접 지휘할 경우, 적에게 전열이 무너지더라도 궤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한 번의 대패가 오스만군에게는 일시적인 혼란일 뿐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오스만군을 완전히 격파하려면 여러 번 연속으로 승리해야 했다.

발칸의 기독교 국가들은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오스만 제국에 저항할 힘을 잃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헝가리 왕국후녀디는 석방된 후 오스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스칸데르베그 역시 1468년 사망할 때까지 알바니아를 지켜냈다. 그러나 스칸데르베그 사후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

무라트 2세는 1449년 왈라키아를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1450년에는 알바니아를 공격했다. 스칸데르베그는 계속 저항하여 1451년 크루예 성 포위를 풀었다. 1451년 무라트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메흐메트 2세가 술탄이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1454년 세르비아에 대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1]

5. 역사적 평가 및 재조명

이 전투는 예니체리 군단이 술탄 스스로 전열에서 지휘할 경우, 적에 의해 전열이 붕괴하더라도 궤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 전투는 오스만군에게 한 번 크게 패배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소란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스만군을 완벽하게 격파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 계속적으로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발칸의 기독교 국가들은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오스만 제국에게 저항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녀디는 석방된 후, 오스만의 공격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헝가리 왕국을 지켜냈다. 스칸데르베그 역시 1468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12년간 그의 조국 알바니아를 오스만군의 공격으로부터 훌륭하게 지켜냈으나, 그가 죽은 후 알바니아는 오스만에게 함락당하고 만다.

참조

[1] 서적 Fatih Sultan Mehmed 2024
[2] 서적 Osmanlı Devleti'nin Kuruluş Tarihi (1299-1481) AKDEM YAYINLARI 2014
[3] 서적 A magyar nemzet hadtörténelme
[4] 서적 A Military History of the Ottomans: From Osman to Ataturk https://psi424.canka[...] 2022-04-08
[5] 서적 The Histories of Laonikos Chalkokondyldes, Volume I (Translated by Anthony Kaldellis, 2014)
[6] 서적 Mufassal Osmanlı Tarihi 1.cilt Mustafa Cezar
[7] 서적 Fatih Sultan Mehmed ve Zamanı Alfa Yayınevi 2021
[8] 서적 Geschichte des Osmanischen Reiches https://books.google[...]
[9] 서적 Varna (1444), İkinci Kosova (1448) Meydan Muharebeleri ve II. Murat https://books.google[...] Genelkurmay Basımevi
[10] 서적 Frashëri 2002
[11] 서적 Europe and the Turk: a pattern of alliances, 1350–1700 https://books.google[...] AMS Press 1954
[12] 서적 East Central Europe in the Middle Ages, 1000–150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3]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The thirteenth and fourteen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2010-12-08
[14] 서적 The Hutchinson Dictionary of Ancient & Medieval Warfare
[15] 서적 East Central Europe in the Middle Ages
[16] 서적 The Ottoman Empire 1326-1699
[17] URL http://books.google.[...]
[18] URL http://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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