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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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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22년)은 오스만 제국 술탄 무라트 2세가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한 사건이다. 1421년 메흐메트 1세의 사망 이후 황위 분쟁에 개입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되었으며, 오스만군은 팔코네트포를 사용했다. 공방전은 1422년 6월에 시작되었으나, 무라트 2세는 아나톨리아에서 동생 퀴취크 무스타파의 반란으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지 않았으며, 비잔티움 제국은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라고 믿었다. 비록 공방전은 실패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쇠퇴하여 결국 1453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멸망했다. 공방전 당시 성벽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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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22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1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지도
1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의 가장 오래된 지도
전투 정보
전투명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일부오스만 제국의 흥망성쇠, 비잔티움-오스만 전쟁
날짜1422년 6월 10일 – 9월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이스탄불, 튀르키예)
결과비잔티움 제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비잔티움 제국
교전국 2오스만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비잔티움 제국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오스만 제국무라트 2세
미할오을루 메흐메트 베이

2. 배경

1421년에 술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 후계자 분쟁이 시작되자 비잔티움 제국 황제 마누엘 2세는 개입하여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2]

분쟁에서 승리하여 지위를 굳힌 무라트 2세는 1422년에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했다. 이때 오스만군은 포신이 짧지만 구경이 큰 팔코네트포를 입수했다.[2] 한편 비잔티움 군도 기술적으로 동등한 수준이었고, 오스만 측은 "대포에서 발사된 돌을……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만들어야 했다.[2]

3. 공방전

1425년에 편찬된 비잔티움 제국의 연대기에 따르면 "6월 10일 수요일, 정오가 지나고 4시간 뒤, 미할로울루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도시 포위의 시작이었다. 전투의 목격자인 요안네스 카나노스에 따르면, 미하롤의 선봉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외를 휩쓴 뒤, 6월 20일에 오스만 본군이 공성 무기와 함께 도착하여 본격적인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라트 2세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동생 퀴취크 무스타파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앙카라 전투에서 한 번 몰락했던 오스만 제국이 다시 강대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게르미얀 베이국이나 카라만 베이국 등의 아나톨리아의 베이리크가 개입하고 있었다. 더욱이 역사가 두카스에 따르면, 반란군에는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2세로부터도 자금이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이로 인해 무스타파는 대규모 군세를 조직하여, 8월 하순 또는 9월 초부터 오스만 제국의 수도 부르사를 포위했다. 무라트 2세의 철수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지만,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이것이 성모 마리아가 개입한 기적이라고 여겨졌다.

3. 1. 큐축 무스타파의 반란

앙카라 전투 이후 몰락했던 오스만 제국이 다시 강대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게르미얀 베이국이나 카라만 베이국 등 아나톨리아의 베이리크들이 퀴취크 무스타파의 반란을 지원하였다. 역사학자 두카스에 따르면, 비잔티움 제국의 마누엘 2세 또한 이 반란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무스타파는 이 지원을 바탕으로 대규모 군세를 조직하여 8월 하순 또는 9월 초부터 오스만 제국의 수도 부르사를 포위했다. 이로 인해 무라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풀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4. 결과 및 영향

무라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실패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 지역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전락했으며, 심각한 경제난과 군사력 부족에 시달렸다.[3][1][2] 교황 비오 2세는 유럽 군주들에게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군사 지원으로 대포 제공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몇몇 대포가 제공되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력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3][1][2] 결국 1453년, 무라트 2세의 아들 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3][1][2]

5. 전설 및 민간 신앙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위에 테오토코스(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포위를 풀었다는 전설이 퍼졌다.[2]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카나노스는 로마인(비잔티움 제국인)들이 피로에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약하며 기뻐했고, 가장 거룩한 성모에게 찬가를 바치며 "이것은 사실 존경할 만한 풍부하고, 유명하며, 기억에 남고, 특별하고, 주목할 만한 기적이다"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를 찬양했다고 기록했다.[3][1][2] 또한, 카나노스는 오스만 군인들이 자주색 옷을 입은 여성이 도시 외벽을 걷는 것을 목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3][1][2]

참조

[1] 서적 The Walls of Constantinople, AD 324–1453 http://www.ospreypub[...] Osprey Publishing 2007-09-27
[2] 서적 The Walls of Constantinople, AD 324–1453 http://www.ospreypub[...] Osprey Publishing 2007-09-27
[3] 서적 The Walls of Constantinople, AD 324–1453 http://www.ospreypub[...] Osprey Publishing 20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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