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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민주 공화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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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콩고 민주 공화국의 역사는 9만 년 전부터 시작되어, 13세기에는 여러 왕국이 서콩고 분지에 존재했다. 14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콩고 왕국이 번성했으며, 이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적 지배 하에 콩고 자유국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다. 20세기 초 콩고 자유국은 잔혹한 통치로 국제적 비난을 받았고, 1908년 벨기에령 콩고로 병합되었다. 1960년 독립 이후 콩고는 콩고 위기를 겪으며, 모부투 세세 세코의 쿠데타로 자이르 공화국으로 국명이 변경되었다가, 1990년대 내전을 거쳐 1997년 로랑-데지레 카빌라에 의해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국명이 회복되었다. 이후 조셉 카빌라 시대를 거쳐 2019년 펠릭스 치세케디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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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민주 공화국의 역사
콩고 민주 공화국 역사
콩고 민주 공화국 국장
콩고 민주 공화국 국장
초기 역사
초기 역사1876년 이전
콩고 왕국1390–1914
룬바 왕국1585–1889
룬다 왕국1600–1887
쿠바 왕국1625–1884
초크웨 왕국1800–1891
예케 왕국1856–1891
식민지 시대
식민지화1876–1960
국제 아프리카 협회1876–1879
국제 콩고 협회1879–1885
콩고 자유국1885–1908
콩고 자유국 만행만행
벨기에령 콩고1908–1960
제2차 세계 대전 중 벨기에령 콩고1940–1945
독립 이후
독립1960년 이후
콩고 위기1960–1965
콩고-레오폴드빌1960–1971
자이르1971–1997
샤바 1I
샤바 2II
제1차 콩고 전쟁1996–1997
제2차 콩고 전쟁1998–2003
조제프 카빌라 대통령2001–2019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2019–현재
기타
관련 항목년도별 역사

2. 초기 역사

콩고 왕국 지도


현재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알려진 지역은 9만 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1988년 카탄다(Katanda Territory)에서 발견된 셈리키 작살(Semliki harpoon)은 거대한 메기류를 잡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가시 작살 중 하나이다.[3][4]

13세기까지 서콩고 분지에는 세 개의 주요 연합 국가가 있었다. 동쪽에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으로 여겨지는 콩고 디아 늘라자의 일곱 왕국이 있었는데, 은순디, 엠바타 왕국, 엠팡구, 그리고 아마 쿤디 왕국과 오칸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들 남쪽에는 오늘날 앙골라에서 콩고 강까지 뻗어 있던 엠펨바가 있었다. 여기에는 엠펨바 카시와 분다와 같은 여러 왕국이 포함되었다. 서쪽의 콩고 강 건너편에는 세 개의 작은 국가, 즉 분구(지도자), 카콩고, 응고요의 연합체가 있었다.[5]

콩고 왕국은 14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존재했다. 포르투갈인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루바 왕국, 룬다 왕국, 몽고족, 안지쿠 왕국과 함께 이 지역의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2. 1. 콩고 왕국과 주변 왕국



콩고 왕국은 14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존재했다.[86][87] 포르투갈이 도착하기 전까지 루바 왕국, 룬다 왕국, 몽고족, 테케 소왕국과 함께 이 지역의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13세기까지 서콩고 분지에는 세 개의 주요 연합 국가가 있었다. 동쪽에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으로 여겨지는 콩고 디아 늘라자의 일곱 왕국이 있었는데, 은순디, 엠바타 왕국, 엠팡구 등이 포함되었고, 남쪽에는 앙골라에서 콩고 강까지 뻗어 있던 엠펨바가 있었으며, 엠펨바 카시, 분다 등의 왕국이 있었다. 서쪽의 콩고 강 건너편에는 분구(지도자), 카콩고, 응고요의 세 개의 작은 국가 연합체가 있었다.[5]

2. 2. 초기 인류 거주



현재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알려진 지역은 9만 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1988년 카탄다(Katanda Territory)에서 발견된 셈리키 작살(Semliki harpoon)은 거대한 메기류를 잡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가시 작살 중 하나이다.[3][4]

13세기까지 서콩고 분지에는 세 개의 주요 연합 국가가 있었다. 동쪽에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으로 여겨지는 콩고 디아 늘라자의 일곱 왕국(Seven Kingdoms of Kongo dia Nlaza)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은순디(Nsundi), 엠바타 왕국(Mbata Kingdom), 엠팡구(Mpangu), 그리고 아마 쿤디 왕국(Kundi kingdom)과 오칸가(Okanga)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들 남쪽에는 오늘날 앙골라에서 콩고 강까지 뻗어 있던 엠펨바(Mpemba)가 있었다. 여기에는 엠펨바 카시(Mpemba Kasi)와 분다(Vunda)와 같은 여러 왕국이 포함되었다. 서쪽의 콩고 강 건너편에는 세 개의 작은 국가, 즉 분구(Vungu)(지도자), 카콩고(Kakongo), 응고요(Ngoyo)의 연합체가 있었다.[5]

콩고 왕국(Kingdom of Kongo)은 14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존재했다. 포르투갈인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루바 왕국(Kingdom of Luba), 룬다 왕국(Kingdom of Lunda), 몽고족(Mongo people), 안지쿠 왕국(Anziku Kingdom)과 함께 이 지역의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3. 식민지 지배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 2세는 비정부기구인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통해 콩고 자유국을 사적으로 지배했다.[88] 레오폴 2세는 콩고 자유국의 유일한 주주이자 회장이었으며, 콩고 자유국은 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 전 지역을 포함했다.[88][6]

레오폴 2세의 통치 하에 콩고 자유국은 20세기 초 가장 악명 높은 국제적 스캔들 중 하나가 되었다.[88][6] 영국 영사 로저 케이스먼트의 보고서는 1900년 고무 채취 원정 중 최소 122명의 콩고 원주민을 사살하도록 지시한 벨기에인을 포함, 냉혈한 살인을 저지른 백인 관리들의 체포와 처벌로 이어졌다.[88][6]

레오폴 2세 통치 시절 훼손된 어린이들


총 사망자 수에 대한 추정치는 다양하지만, 로저 케이스먼트의 1904년 보고서는 천만 명의 사망자를 추산했다. 케이스먼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무분별한 전쟁, 기아, 출생 감소, 열대병이 콩고 자유국의 인구 감소를 야기했다.[88][6] 1900년 유럽과 미국의 언론사들은 콩고 자유국의 상황을 대중에게 공개했고, 1908년 여론과 외교적 압력으로 레오폴 2세는 콩고를 벨기에령 콩고 식민지로 병합하게 되었다.[89][7]

1908년 11월 15일,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콩고 독립국에 대한 개인적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벨기에령 콩고는 벨기에 정부와 식민지의 직할령으로 바뀌었다.

벨기에의 콩고 통치는 국가, 선교사, 사기업 이익의 "식민지 삼위일체"(trinité colonial)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벨기에의 상업적 이익의 특권은 많은 자본이 콩고로 유입되고 개별 지역이 전문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와 민간 기업의 이익은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국가는 회사들이 파업을 깨고 원주민들에 의해 부과된 다른 장벽들을 제거하는 것을 도왔다. 이 나라는 식민지의 지배하에 전통적인 지도자가 유지되는 간접적인 통치 체제를 선호했던 영국과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보금자리, 계층적으로 조직된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고, 일정한 "토속적인 정책"(politique indigène)에 따라 통일적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높은 수준의 인종 차별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콩고로 이주한 많은 백인 이민자들은 사회 전반에서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흑인보다 우월한 대우를 받았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콩고는 전례 없는 수준의 도시화를 경험했고 식민지 정부는 콩고를 "모범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아프리카 수면병과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데 주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 중 하나는 도시에 새로운 유럽화된 아프리카인 중산층 (에볼뤼에)의 개발이었다. 1950년대까지 콩고는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보다 두 배나 더 큰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콩고의 풍부한 천연자원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의 핵 프로그램에 사용된 우라늄의 대부분을 콩고산이었다. 특히 우라늄냉전이 발전함에 따라 소련과 미국 모두의 이 지역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콩고에서는 '에볼뤼에(évolué)'라고 불리는 새로운 사회 계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사무원이나 간호사 등 숙련된 직책을 맡으며 중산층을 형성했으며, 프랑스어 구사 능력, 기독교 신앙, 중등 교육 이상의 학력 등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초기 '에볼뤼에'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지위를 이용하여 특권을 얻고자 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벨기에인들에 의한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1954년 바콩고 동맹(ABAKO)이 레오폴드빌 시의회 후보자 명단을 제안하면서 자치에 대한 요구가 시작되었다. 조셉 카사부부가 이 단체를 이끌면서, 하부 콩고 지역의 자치를 주장하며 식민 당국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1956년에는 30년에 걸친 독립 전환을 촉구하는 선언이 발표되었고, ABAKO는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며 대응했다.

1958년 10월, 파트리스 루뭄바, 시릴 아둘라, 조셉 일레오 등은 콩고 민족 운동(MNC)을 설립하여 콩고 독립을 평화적으로 달성하고, 국민의 정치 교육을 증진하며, 지역주의를 제거하고자 했다. 루뭄바는 범아프리카주의에 영향을 받아 더욱 급진적인 독립을 주장했다.

1959년 1월, 레오폴드빌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벨기에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사 위원회는 이 폭동이 인종 차별, 과밀, 실업, 정치적 자결에 대한 욕구 등이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에 벨기에 국왕 보두앵은 미래에 콩고에 독립을 부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MNC는 루뭄바의 MNC-L과 칼롱지와 일레오의 MNC-K로 분열되었다. 루뭄바는 더욱 강력하게 독립을 주장했고, 1959년 10월 스탠리빌에서 폭동이 일어난 후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NC-L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한편, 벨기에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은 온건파들은 폴 볼리아와 알베르 델보의 지도 아래 민족 진보당(PNP)을 결성하여 중앙 집중화, 전통 요소 존중, 벨기에와의 긴밀한 관계를 주장했다. 레오폴드빌 남부 지방에서는 앙투안 기젠가가 의장을 맡은 사회주의 연방주의 정당인 아프리카 연대당(PSA)이 설립되었다.

3. 1. 콩고 자유국 (1885년~1908년)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 2세는 비정부기구인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통해 콩고 자유국을 사적으로 지배했다.[88] 레오폴 2세는 콩고 자유국의 유일한 주주이자 회장이었으며, 콩고 자유국은 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 전 지역을 포함했다.[88][6]

레오폴 2세의 통치 하에 콩고 자유국은 20세기 초 가장 악명 높은 국제적 스캔들 중 하나가 되었다.[88][6] 영국 영사 로저 케이스먼트의 보고서는 1900년 고무 채취 원정 중 최소 122명의 콩고 원주민을 사살하도록 지시한 벨기에인을 포함, 냉혈한 살인을 저지른 백인 관리들의 체포와 처벌로 이어졌다.[88][6]

총 사망자 수에 대한 추정치는 다양하지만, 로저 케이스먼트의 1904년 보고서는 천만 명의 사망자를 추산했다. 케이스먼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무분별한 전쟁, 기아, 출생 감소, 열대병이 콩고 자유국의 인구 감소를 야기했다.[88][6] 1900년 유럽과 미국의 언론사들은 콩고 자유국의 상황을 대중에게 공개했고, 1908년 여론과 외교적 압력으로 레오폴 2세는 콩고를 벨기에령 콩고 식민지로 병합하게 되었다.[89][7]

3. 2. 벨기에령 콩고 (1908년~1960년)

1908년 11월 15일,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콩고 독립국에 대한 개인적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벨기에령 콩고는 벨기에 정부와 식민지의 직할령으로 바뀌었다.

벨기에의 콩고 통치는 국가, 선교사, 사기업 이익의 "식민지 삼위일체"(trinité colonial)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벨기에의 상업적 이익의 특권은 많은 자본이 콩고로 유입되고 개별 지역이 전문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와 민간 기업의 이익은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국가는 회사들이 파업을 깨고 원주민들에 의해 부과된 다른 장벽들을 제거하는 것을 도왔다. 이 나라는 식민지의 지배하에 전통적인 지도자가 유지되는 간접적인 통치 체제를 선호했던 영국과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보금자리, 계층적으로 조직된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고, 일정한 "토속적인 정책"(politique indigène)에 따라 통일적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높은 수준의 인종 차별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콩고로 이주한 많은 백인 이민자들은 사회 전반에서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흑인보다 우월한 대우를 받았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콩고는 전례 없는 수준의 도시화를 경험했고 식민지 정부는 콩고를 "모범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아프리카 수면병과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데 주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 중 하나는 도시에 새로운 유럽화된 아프리카인 중산층 (에볼뤼에)의 개발이었다. 1950년대까지 콩고는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보다 두 배나 더 큰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콩고의 풍부한 천연자원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의 핵 프로그램에 사용된 우라늄의 대부분을 콩고산이었다. 특히 우라늄냉전이 발전함에 따라 소련과 미국 모두의 이 지역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3. 3. 콩고 정치 활동의 증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콩고에서는 '에볼뤼에(évolué)'라고 불리는 새로운 사회 계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사무원이나 간호사 등 숙련된 직책을 맡으며 중산층을 형성했으며, 프랑스어 구사 능력, 기독교 신앙, 중등 교육 이상의 학력 등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초기 '에볼뤼에'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지위를 이용하여 특권을 얻고자 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벨기에인들에 의한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1954년 바콩고 동맹(ABAKO)이 레오폴드빌 시의회 후보자 명단을 제안하면서 자치에 대한 요구가 시작되었다. 조셉 카사부부가 이 단체를 이끌면서, 하부 콩고 지역의 자치를 주장하며 식민 당국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1956년에는 30년에 걸친 독립 전환을 촉구하는 선언이 발표되었고, ABAKO는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며 대응했다.

1958년 10월, 파트리스 루뭄바, 시릴 아둘라, 조셉 일레오 등은 콩고 민족 운동(MNC)을 설립하여 콩고 독립을 평화적으로 달성하고, 국민의 정치 교육을 증진하며, 지역주의를 제거하고자 했다. 루뭄바는 범아프리카주의에 영향을 받아 더욱 급진적인 독립을 주장했다.

1959년 1월, 레오폴드빌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벨기에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사 위원회는 이 폭동이 인종 차별, 과밀, 실업, 정치적 자결에 대한 욕구 등이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에 벨기에 국왕 보두앵은 미래에 콩고에 독립을 부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MNC는 루뭄바의 MNC-L과 칼롱지와 일레오의 MNC-K로 분열되었다. 루뭄바는 더욱 강력하게 독립을 주장했고, 1959년 10월 스탠리빌에서 폭동이 일어난 후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NC-L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한편, 벨기에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은 온건파들은 폴 볼리아와 알베르 델보의 지도 아래 민족 진보당(PNP)을 결성하여 중앙 집중화, 전통 요소 존중, 벨기에와의 긴밀한 관계를 주장했다. 레오폴드빌 남부 지방에서는 앙투안 기젠가가 의장을 맡은 사회주의 연방주의 정당인 아프리카 연대당(PSA)이 설립되었다.

4. 독립과 콩고 위기 (1960년~1965년)

1960년 1월 18일 브뤼셀에서 원탁회의가 개최되었다.[8] 회의 결과, 1960년 5월 22일에 총선거가 실시되고 1960년 6월 30일에 완전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발표되었다.[8] 선거를 통해 파트리스 루뭄바가 총리로, 조셉 카사부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8] 독립 후 국명은 "콩고 공화국"으로 정해졌으며, 중부 콩고도 독립 후 동일한 국명을 사용함에 따라 수도 이름을 따서 레오폴드빌 콩고와 브라자빌 콩고로 구분되었다.[8]

하지만 독립 당시 콩고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8] 지역 부족 지도자들이 중앙 정부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벨기에 행정관들이 떠나면서 숙련된 관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8] 1960년 7월 5일, 수도에서 콩고 군인들이 유럽인 장교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약탈을 시작했다.[8] 7월 11일에는 콩고에서 가장 부유한 주인 카탕가가 모이즈 초엠베의 지휘 아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8] 유엔은 2만 명의 평화 유지군을 파병하여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서구 용병들도 콩고로 몰려들었다.[8] 1960년 8월 8일, 카사이도 독립을 선언했다.[8]

소비에트 연방파트리스 루뭄바 총리의 요청에 따라 첨단 무기와 기술 고문을 제공하며 지원에 나서자, 미국은 이를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 대리 국가를 확보하려는 시도로 간주했다.[8] 유엔군은 콩고로의 무기 반입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미국은 루뭄바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8] 조셉 카사부부 대통령은 루뭄바 총리와 충돌했고, 미국은 카사부부와 동맹을 맺은 세력을 지원했다.[8]

1960년 9월 14일, CIA의 지원을 받은 조셉 모부투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고 루뭄바를 체포했다.[8] 1961년 1월 17일, 루뭄바는 카탕가의 수도인 엘리자베스빌(현 루붐바시)로 보내져 고문 끝에 살해되었다.[9] 2001년 벨기에 조사에 따르면, 루뭄바는 카탕가 지휘관의 명령 아래 카탕가 헌병에 의해 벨기에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당했다.[9]

스탠리빌에서는 루뭄바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앙투안 기젠가 지휘 아래 대립 정부를 수립하기도 했다.[8] 유엔과 콩고 정부군은 여러 역경 끝에 1961년 12월 30일 남카사이와 1963년 1월 15일 카탕가의 분리 독립 주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8]

1964년부터 콩고 동부에서는 심바가 봉기하여 상당한 영토를 점령하고 스탠리빌에 공산주의 "콩고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다.[10] 콩고 정부가 심바로부터 영토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반군은 현지 백인들을 인질로 잡았고, 1964년 11월 인질 구출 작전 중에 스탠리빌에서 심바를 몰아냈다.[10] 유럽 용병의 지원을 받은 콩고 정부군은 1965년 11월까지 심바 반군을 완전히 진압했다.[11] 심바 반군은 반란 중에 2만 명의 콩고인과 392명의 서방 인질(벨기에인 268명 포함)을 처형했으며,[12] 심바 진압 과정에서 총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12]

5. 자이르 (1965년~1997년)

1965년 11월, 당시 국가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제프데지레 모부투 중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5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90][13] 모부투는 1966년과 1967년 스탠리빌 반란에도 불구하고[91][14] 자신의 권력을 빠르게 공고히 했고, 1970년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7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3]

모부투 세세 세코 (1983년)


모부투는 '자이르화' 정책을 추진하며, 1971년 국명을 "자이르 공화국"으로 변경하고 시민들에게 아프리카식 이름을 채택하고 프랑스어식 이름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국명은 콩고어 "nzere" 또는 "nzadi" (포르투갈어로 "모든 강을 삼키는 강")에서 유래했다.[92][15] 레오폴드빌은 킨샤사로, 카탕가는 샤바로 바뀌는 등 지명 변경도 이루어졌다.[15]

1977년과 1978년 앙골라 인민공화국에 본부를 둔 카탕간 민족해방반군이 샤바 1차 전쟁과 샤바 2차 전쟁을 일으켰으나, 프랑스, 벨기에 낙하산 부대와 모로코 군대의 도움으로 격퇴되었다.[16]

자이르는 1980년대에 일당제 국가로 남았다. 반대파들, 특히 민주사회진보연합 (UDPS)이 활동했으나, 모부투 정권은 이들을 탄압하고 인권 침해를 자행하여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93][16]

냉전 종식 이후, 국내 시위와 정권의 인권 문제, 경제난, 정부 부패 등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며 모부투에 대한 압력이 증가했다.[16] 1990년 4월, 모부투는 제한된 다당제에 동의하면서 제3공화국을 선포했지만, 개혁이 지연되자 1991년 9월 군인들이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킨샤사를 약탈했다.[94][17] 킨샤사에 있는 외국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2천 명의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도착했다.[95][18]

1992년 주권 국가 회의가 개최되어 로랑 몬센보 파시냐 대주교가 의장으로, 에티엔 치세케디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모부투는 자신의 총리를 내세워 경쟁 정부를 만들었다. 1994년 두 정부가 통합되어 모부투가 국가원수로, 레옹 켄고가 총리로 취임했으나, 이후 2년 동안 예정되었던 대통령 선거와 입법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96][19]

6. 내전 (1996년~2003년)

1996년까지 이웃 르완다의 전쟁과 집단 학살로 인한 긴장이 자이르로 번졌다.[20] 투치 정부의 등장 이후 르완다에서 도망친 르완다 후투 민병대(인테라함웨)는 동부 자이르의 후투 난민 캠프를 르완다 침공을 위한 거점으로 사용해왔다. 1996년 10월 르완다군은 콩고, 르완다, 부룬디 국경이 만나는 루지지 평원의 난민 캠프를 공격하여 난민들을 흩어지게 했다.[20]

후투 민병대는 곧 자이르군(FAZ)과 동맹을 맺어 동부 자이르의 콩고계 투치족을 공격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투치족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민병대를 결성했다. 1996년 11월 자이르 정부가 대량 학살을 확대하기 시작하자 투치 민병대는 모부투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20]

투치 민병대는 곧 여러 반대 세력에 합류했고, 르완다와 우간다를 포함한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이 연합은 콩고 민주 공화국 해방을 위한 민주 세력 연합(AFDL)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 모부투 축출이라는 더 큰 목표를 추구하는 AFDL은 1997년 초 상당한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21] 1997년 5월 모부투와 카빌라 간의 평화 협상이 실패한 후, 모부투는 5월 16일에 국가를 떠났다. AFDL은 하루 후 저항 없이 킨샤사에 진입했고, 카빌라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임명하고 국가 이름을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되돌렸다.[21][22] 1997년 9월 모부투는 모로코 망명 중 사망했다.[23]

카빌라 정권은 자국 문제 해결 능력 부족과 동맹국들의 이탈로 위기를 맞았다. 1998년 8월, 콩고 민주 공화국 내 르완다의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해 우간다 군은 장-피에르 벰바가 이끄는 콩고 해방운동(MLC)을 지원하였고, 르완다 역시 콩고 내 반군을 지원하며 공격을 개시했다.[24] 곧이어 앙골라, 나미비아, 짐바브웨가 콩고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으며, 앙골라와 짐바브웨는 콩고 정부를 지원했다. 1999년 7월 루사카에서 전쟁에 개입한 6개 아프리카 국가 정부가 휴전 협정에 서명했지만, 콩고 반군은 서명하지 않아 휴전은 몇 달 만에 깨졌다.[24]

2001년 카빌라는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고, 그의 아들 조셉 카빌라가 권력을 승계했다.[24][25] 조셉 카빌라는 취임 후 전쟁 종식을 위한 다자간 평화 회담을 촉구했고, 우간다 및 르완다와 평화 협상을 통해 외국군 철수라는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24]

2002년 1월 북동부에서 종족 충돌이 발생하며 갈등이 다시 격화되었고, 우간다와 르완다는 철수를 중단하고 병력을 증파했다. 2002년 4월부터 6주 동안 선시티에서 카빌라와 반군 지도자들 간의 회담이 진행되었고, 6월에는 카빌라가 전직 반군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2003년 6월까지 르완다를 제외한 모든 외국군이 콩고에서 철수했다.[24]

콩고 전쟁은 콩고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적십자사와 입소스의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4분의 3(76%)이 무장 충돌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답했다.[26] 국제 사회는 콩고 전쟁의 참상에 비해 미흡하게 대응했다. 전쟁 종식을 위한 정치적, 외교적 노력은 있었지만,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 추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유엔 사무총장은 인권 침해와 인도적 재난을 비난했지만, 르완다와 우간다 등 점령 세력의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데는 소극적이었다.[27]

국가와 세계 최대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광대한 나라 전체에 안보를 제공하지 못함에 따라 2018년까지[97] 세계에서 가장 많은 120개의 무장 단체가 출현하게 되었다.[98][99] 무장단체들은 종종 동콩고의 광물자원에 관심이 있는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대리인으로 비난 받는다. 일부 사람들은 국군의 안보 부족의 상당 부분이 의리의 대가로 군대가 불법 벌목과 광업으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내버려둔 정부측에서 전략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반란 단체들은 종종 민족별로 민간인을 목표로 하고 민병대는 종종 "마이마이"라고 알려진 민족 지역 민병대를 지향하게 된다.[100]

6. 1. 제1차 콩고 전쟁 (1996년~1997년)

1996년까지 이웃 르완다의 전쟁과 집단 학살로 인한 긴장이 자이르로 번졌다.[20] 투치 정부의 등장 이후 르완다에서 도망친 르완다 후투 민병대(인테라함웨)는 동부 자이르의 후투 난민 캠프를 르완다 침공을 위한 거점으로 사용해왔다. 1996년 10월 르완다군은 콩고, 르완다, 부룬디 국경이 만나는 루지지 평원의 난민 캠프를 공격하여 난민들을 흩어지게 했다.[20]

후투 민병대는 곧 자이르군(FAZ)과 동맹을 맺어 동부 자이르의 콩고계 투치족을 공격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투치족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민병대를 결성했다. 1996년 11월 자이르 정부가 대량 학살을 확대하기 시작하자 투치 민병대는 모부투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20]

투치 민병대는 곧 여러 반대 세력에 합류했고, 르완다와 우간다를 포함한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이 연합은 콩고 민주 공화국 해방을 위한 민주 세력 연합(AFDL)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 모부투 축출이라는 더 큰 목표를 추구하는 AFDL은 1997년 초 상당한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21] 1997년 5월 모부투와 카빌라 간의 평화 협상이 실패한 후, 모부투는 5월 16일에 국가를 떠났다. AFDL은 하루 후 저항 없이 킨샤사에 진입했고, 카빌라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임명하고 국가 이름을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되돌렸다.[21][22] 1997년 9월 모부투는 모로코 망명 중 사망했다.[23]

6. 2. 제2차 콩고 전쟁 (1998년~2003년)

카빌라 정권은 자국 문제 해결 능력 부족과 동맹국들의 이탈로 위기를 맞았다. 1998년 8월, 콩고 민주 공화국 내 르완다의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해 우간다 군은 장-피에르 벰바가 이끄는 콩고 해방운동(MLC)을 지원하였고, 르완다 역시 콩고 내 반군을 지원하며 공격을 개시했다.[24] 곧이어 앙골라, 나미비아, 짐바브웨가 콩고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으며, 앙골라와 짐바브웨는 콩고 정부를 지원했다. 1999년 7월 루사카에서 전쟁에 개입한 6개 아프리카 국가 정부가 휴전 협정에 서명했지만, 콩고 반군은 서명하지 않아 휴전은 몇 달 만에 깨졌다.[24]

2001년 카빌라는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고, 그의 아들 조셉 카빌라가 권력을 승계했다.[24][25] 조셉 카빌라는 취임 후 전쟁 종식을 위한 다자간 평화 회담을 촉구했고, 우간다 및 르완다와 평화 협상을 통해 외국군 철수라는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24]

2002년 1월 북동부에서 종족 충돌이 발생하며 갈등이 다시 격화되었고, 우간다와 르완다는 철수를 중단하고 병력을 증파했다. 2002년 4월부터 6주 동안 선시티에서 카빌라와 반군 지도자들 간의 회담이 진행되었고, 6월에는 카빌라가 전직 반군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2003년 6월까지 르완다를 제외한 모든 외국군이 콩고에서 철수했다.[24]

콩고 전쟁은 콩고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적십자사와 입소스의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4분의 3(76%)이 무장 충돌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답했다.[26] 국제 사회는 콩고 전쟁의 참상에 비해 미흡하게 대응했다. 전쟁 종식을 위한 정치적, 외교적 노력은 있었지만,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 추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유엔 사무총장은 인권 침해와 인도적 재난을 비난했지만, 르완다와 우간다 등 점령 세력의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데는 소극적이었다.[27]

7. 조셉 카빌라 시대

7. 1. 과도 정부 (2003년~2006년)

콩고 민주 공화국은 2003년 7월부터 선거가 끝날 때까지 과도 정부를 수립하였다. 유권자에 의해 헌법이 승인되었고, 2006년 7월 30일 콩고는 1960년 독립 이후 최초의 다당제 선거를 치렀다. 조셉 카빌라가 45%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그의 경쟁자인 장-피에르 벰바는 20%를 기록했다. 이는 2006년 8월 20일부터 22일까지 수도 킨샤사 거리에서 두 정당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경찰과 MONUC(유엔 콩고 안정화 임무)가 도시를 장악하기 전에 16명이 사망했다. 2006년 10월 29일 카빌라가 70%의 득표율로 승리하는 재선거가 치러졌다. 벰바는 선거의 "불규칙성"을 비난했다. 2006년 12월 6일 조셉 카빌라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7. 2. 카빌라의 임기 연장 논란

조셉 카빌라는 2011년 12월 대통령으로 2기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야당 후보 에티엔 츠세케디가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의 개표 결과가 누락되는 등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었다.[28] 카터 센터는 선거의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29] 츠세케디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자신도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할 의향을 밝혔다.[30]

2015년 1월, 카빌라가 전국 인구 조사가 실시될 때까지 집권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가 킨샤사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발생했다.[31][32] 경찰과 시위대 간의 충돌로 최소 42명이 사망했다.[31]

2016년 9월에도 격렬한 시위가 발생하여 경찰과 공화군이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야당은 학생회장을 포함해 8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카빌라 대통령의 임기는 2016년 12월 19일에 만료될 예정이었지만, 후임자를 선출할 계획이 없어 2016년 12월 콩고 민주 공화국 시위가 발생했다.[33]

8. 펠릭스 치세케디 시대 (2019년~현재)

2018년 12월 30일, 카빌라의 후임을 결정하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34] 2019년 1월 10일, 선거위원회는 야당 후보인 펠릭스 치세케디를 당선자로 발표했고,[34] 그는 2019년 1월 24일 공식 취임했다.[35][36] 펠릭스 치세케디는 비탈 카메르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했으나, 카메르는 2020년 6월 공금 횡령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37] 그러나 카메르는 2021년 12월 석방되었다.[38]

2019년 1월에 물러난 전 대통령 조셉 카빌라의 정치 동맹 세력은 주요 부처, 입법부, 사법부 및 보안 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은 권력 장악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더 많은 의원들을 끌어들여 국회 의원 500명 중 거의 400명의 지지를 얻었고, 카빌라를 지지하는 양원 의장들은 모두 물러났다. 2021년 4월, 카빌라 지지자들을 배제한 새 정부가 구성되었다.[39]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은 전임 지도자 조셉 카빌라에게 충성하는 정부 내 마지막 잔여 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40] 2021년 1월, 펠릭스 치세케디는 2001년 로랑데지레 카빌라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사면했고, 15년 동안 투옥되었던 에디 카펜드 대령과 그의 공범들은 석방되었다.[41]

2023년 대통령 선거에서 치세케디는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42] 2023년 12월 31일, 관계자들은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이 73%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고 발표했다. 9명의 야당 후보들은 선거 결과를 거부하는 성명에 서명하고 재선거를 요구했다.[43]

9. 계속되는 분쟁

국가와 세계 최대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광대한 콩고 민주 공화국 전역에 안전을 제공하지 못함으로써 2018년까지 최대 120개의 무장 단체가 등장하게 되었고,[44] 이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일 것이다.[45][46] 무장 단체들은 콩고 동부의 풍부한 광물 자원에 관심이 있는 지역 정부의 대리인이거나 지원을 받고 있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 일각에서는 국가군의 안보 부재 상당 부분이 정부의 전략적인 행위이며, 정부가 충성심을 대가로 불법 벌목 및 채굴 작업으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군대를 방치했다고 주장한다.[49] 서로 다른 반군들은 종종 민족에 따라 민간인을 공격하며, 민병대는 종종 "마이마이"로 알려진 지역 민족 민병대를 중심으로 조직된다.[47]

9. 1. 키부 분쟁 (2004년~현재)

2004년부터 로랑 쿤다와 RCD-고마 소속 군인들이 국가민족방위회의(CNDP)를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켰다.[48] CNDP는 르완다 해방 민주 세력(FDLR)에 대응하고 바냐물렌게(콩고 투치족)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르완다의 지원을 받았다.[48] 2009년 콩고민주공화국과 르완다는 합의를 통해 르완다군이 콩고민주공화국에 진입하여 쿤다를 체포하고 FDLR 무장 세력을 추격했다.[48] CNDP는 정부와 평화 조약을 체결, 병사들은 국가 군대에 통합되었다.[48]

2012년, CNDP 지도자 보스코 은타간다는 평화 조약 위반을 주장하며 3월 23일 운동(M23)을 결성, 반란을 일으켰다. M23은 르완다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48] 2012년 11월 20일, M23은 고마를 점령했다.[48] UN은 개입군단(FIB)을 승인하여 M23을 패퇴시켰다.[49]

2017년부터 우간다와 르완다로 도피했던 M23 전투원들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46][50] 시세케디 대통령은 북키부와 이투리주에 "포위 상태"를 선포, 군대와 경찰이 민정 당국을 대체했다.[51]

키부 지역의 민족 갈등은 바냐물렌게로 알려진 콩고 투치족과 다른 민족 집단 간의 분쟁으로 번졌다.[52] 이웃 국가인 부룬디와 르완다도 개입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52] 2017년 6월, 콩고 주권을 위한 국민 연합(CNPSC)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여러 마이마이 민병대의 연합체이다.[53][54]

후투족 민병대와 다른 민족 집단 간의 충돌도 지속되었다.[56] 2012년, 콩고군은 FDLR과 후투족이 주도하는 마이마이 냐투라를 대리군으로 활용했다.[56] 2015년, 군은 FDLR 민병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57] 난데족 민병대와 냐양가족 민병대도 후투족을 공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60][62] 2019년 9월, 군은 FDLR의 수장 실베스트르 무다쿠무라를 사살했다.[65]

동맹민주세력(ADF)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반군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2016년 베니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된다.[49][67] 콩고군은 ADF를 이슬람주의 반군으로 규정하지만, 이들은 금광 채굴과 벌목에만 관심 있는 범죄 집단으로 여겨진다.[49][67] 2021년, 미국은 ADF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의 일부라고 주장했다.[68]

9. 2. 카탕가 분쟁

국가와 세계 최대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광대한 나라 전체에 안보를 제공하지 못함에 따라 2018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120개의 무장 단체가 출현하게 되었다.[97][98][99] 무장단체들은 종종 동콩고의 광물자원에 관심이 있는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대리인으로 비난 받는다. 일부 사람들은 국군의 안보 부족의 상당 부분이 의리의 대가로 군대가 불법 벌목과 광업으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내버려둔 정부측에서 전략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반란 단체들은 종종 민족별로 민간인을 목표로 하고 민병대는 종종 "마이마이"라고 알려진 민족 지역 민병대를 지향하게 된다.[100]

2013년부터 북부 카탕가 주에서 피그미족 바트와족은 루바족에게 종종 착취당하고, 주장에 따르면 노예로 만들어졌습니다.[70] "페르시" 민병대와 같은 민병대를 결성하여 루바족 마을을 공격했고,[45] "엘레멘츠" 또는 "엘레마"로 알려진 루바족 민병대가 반격하여, 특히 2015년 4월 "부밀리아 1" 이재민 캠프에서 최소 30명을 살해했다. 갈등 시작 이후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고향을 떠났다.[70] 이 갈등에 사용된 무기는 총기보다는 화살과 도끼인 경우가 많다.[45]

엘레마는 또한 콩고의 오트카탕가와탕가니카 주에서 주로 마체테, 활, 화살을 사용하여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정부군은 아바템보 부족과 함께 싸우며, 엘레마에 동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루바족과 타브와족 민간인을 공격했다.[71]

9. 3. 카사이 분쟁

국가와 세계 최대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광대한 나라 전체에 안보를 제공하지 못함에 따라 2018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120개의 무장 단체가 출현하게 되었다.[98][99] 무장단체들은 종종 동콩고의 광물자원에 관심이 있는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대리인으로 비난 받는다.[100] 일부 사람들은 국군의 안보 부족의 상당 부분이 의리의 대가로 군대가 불법 벌목과 광업으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내버려둔 정부측에서 전략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100] 다른 반란 단체들은 종종 민족별로 민간인을 목표로 하고 민병대는 종종 "마이마이"라고 알려진 민족 지역 민병대를 지향하게 된다.[100]

2016년부터 카사이 중부 주에서 주로 루바족으로 구성된 캄위나 엔사푸 민병대가 캄위나 엔사푸의 지휘 아래 국가 기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도자는 2016년 8월 당국에 의해 사살되었고, 민병대는 민간인을 공격하며 보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6월까지 3,3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0개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중 절반은 정부군에 의한 것이었다.[72] 민병대는 인근 카사이 동부(구 주), 카사이 주, 로마미 주로 세력을 확장했다.[73]

유엔은 수십 곳의 집단 무덤을 발견했다. 이 갈등은 반군이 대부분 루바족과 룰루아족으로 구성되어 루바족이 아닌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살해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정부와 연합한 바나 무라 민병대는 초크웨족, 펜데족, 테텔라족으로 구성되어 루바족과 룰루아족을 상대로 민족적으로 동기가 부여된 공격을 자행했다.[74]

9. 4. 이투리 분쟁

콩고 민주 공화국 북동부 이투리 주에서는 농업 종사자인 렌두족과 유목민인 헤마족 간의 무력 충돌인 이투리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75] 이 두 부족은 이투리 주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며, 벨기에 통치 시대와 모부투 세세 세코 집권 시기 헤마족이 우대받으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75][76] "이투리 분쟁"은 주로 1999년부터 2003년까지의 분쟁을 의미하지만, 그 이전부터 분쟁은 존재했고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76] 제2차 콩고 전쟁 기간 동안 이투리 주는 가장 폭력적인 지역 중 하나였다.[76]

2017년, 렌두족 출신의 농업 및 종교 단체인 "콩고 개발 협동조합(CODECO)"이 민병대로 재등장하여[76] 헤마족뿐만 아니라 알루르족도 공격하기 시작했고, 엔도-오케보족과 냐리족도 폭력에 가담했다.[80] 2020년 3월, CODECO 지도자 응주졸로 두두코 저스틴(Ngudjolo Duduko Justin)의 살해 사건 이후, 이 단체는 분열되었고 폭력이 새로운 지역으로 확산되었다.[80][77] 2019년 6월, CODECO의 공격으로 240명이 사망하고 30만 명 이상이 피난했다.[79][80]

주로 북키부와 남키부에서 활동하는 연합민주군(ADF)도 이투리 주에 개입했다.[68] 2021년 5월, 시세케디 대통령은 ADF를 해결하기 위해 이투리 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ADF는 같은 달 57명의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 공격을 지속했다.[68]

9. 5. 북서부 분쟁

2018년까지 콩고 민주 공화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120개의 무장 단체가 출현했다.[98][99] 이들 무장단체는 종종 동콩고의 광물 자원에 관심이 있는 지방 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대리인으로 비난받는다. 일부에서는 국군의 안보 부족이 정부의 전략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군대가 불법 벌목과 광업으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내버려 둔 대가로 의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른 반란 단체들은 종종 민족별로 민간인을 목표로 하고, 민병대는 종종 "마이마이"라고 알려진 민족 지역 민병대를 지향하게 된다.[100]

2009년 10월, 동고(Dongo) 남우방기 지역(Sud-Ubangi District)에서 어장 접근을 둘러싼 충돌로 분쟁이 시작되었다. 2018년 12월에는 욤비 주변에서 바텐데족이 바누누족을 학살하여 약 90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약 1만 6천 명이 이웃 나라 콩고 공화국으로 피난했으며, 국가 군부 요소가 연루된 치밀하게 계획된 학살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83]

10. 대한민국과의 관계

참조

[1] 서적 Congo : the epic history of a people HarperCollins
[2] 웹사이트 Felix Tshisekedi sworn in as DR Congo president https://www.aljazeer[...] 2019-01-24
[3] 웹사이트 Katanda Bone Harpoon Point | the Smithsonian Institution's Human Origins Program https://web.archive.[...] 2015-03-10
[4] 학술지 Barbed Bone Points: Tradition and Continuity in Saharan and Sub-Saharan Africa
[5] 서적 The Development of States in West Central Africa to 1540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4-09-21
[6] 웹사이트 Report of the British Consul, Roger Casement, on the Administration of the Congo Free State http://www.urome.be/[...]
[7] 서적 European atrocity, African catastrophe : Leopold II, the Congo Free State and its aftermath Curzon 2001
[8] 서적 The Congo, From Leopold to Kabila: A People's History https://archive.org/[...] Palgrave 2007
[9] 서적 The Assassination of Lumumba Verso
[10] 서적 Dragon Rouge: The Rescue of Hostages in the Congo https://catalog.hath[...] DTIC
[11] 서적 Modern African Wars (4): The Congo 1960–2002 https://books.google[...] Osprey Publishing
[12] 웹사이트 Chronology of the Democratic Republic of Congo/Zaire (1960–1997) http://www.sciencesp[...] Paris Institute of Political Studies 2016-01-25
[13] 웹사이트 Kasavubu Regime Ousted By Army Coup in Congo https://archive.nyti[...] 2018-09-25
[14] 서적 The New Mercenaries Corgi Books
[15] 서적 The River Congo: The Discovery, Exploration and Exploitation of the World's Most Dramatic Rivers Harper & Row
[16] 서적 African Struggles Today: Social Movements Since Independence Haymarket Books 2012
[17] 뉴스 Thousands of Troops on Rampage Of Looting and Violence in Zaire https://www.nytimes.[...] 1991-09-24
[18] 뉴스 New Riots in Zaire: 300 Are Evacuated https://mobile.nytim[...] 199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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