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오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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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이오완 사건은 1628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타이완 행정 장관 피터르 나위츠가 일본 상인 하마다 야효에의 활동에 위협을 느껴 그를 체포하고 재물을 몰수한 사건이다. 하마다 야효에가 나위츠를 납치하면서 사건이 발생했고, 네덜란드와 일본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사건 이후 네덜란드는 나위츠를 해고하고 일본에 인도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이는 훗날 일본이 쇄국 정책을 펼쳤을 때 네덜란드가 유일하게 무역을 허용받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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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오완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 이름 | 타이오완 사건 |
다른 이름 | 라우카 사건 (열여덟 가신 사건) 적모 사건 (홍모번 사건) |
발생 위치 | 타이완 타이난시 안핑구 (당시 타이오완) |
관련 국가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대만 원주민 |
발생 시기 | 1622년 ~ 1636년 |
배경 | |
원인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토지 강탈 및 무역 독점 시도 원주민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 침해 |
주요 사건 | 162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타이완 점령 시도 1624년: 제4차 함대 사건으로 타이오완에 상륙 및 오란다 성 건설 1629년: 라우카 사건 발생 1635년: 마타우 사건 발생 1636년: 네덜란드, 원주민 마을 공격 및 항복 |
전개 | |
주요 인물 | 마르틴뉘스 손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총독) 한스 풋만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총독) 라우카 (대만 원주민 지도자) |
주요 사건 상세 | 라우카 사건: 시라야족 라우카 마을 주민들이 네덜란드인 63명을 살해 마타우 사건: 마타우 마을 주민들이 네덜란드인 공격 |
네덜란드의 대응 | 원주민 마을 공격 및 학살, 강압적인 통치 강화 |
결과 | |
영향 | 네덜란드의 타이완 통치 강화 원주민 사회의 큰 피해 및 저항 약화 네덜란드의 토지 소유 및 무역 독점 강화 |
논쟁 |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 정당성 논란 원주민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것에 대한 비판 사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차이 |
추가 정보 | |
관련 문서 | 타이완의 역사 네덜란드령 포르모사 대만 원주민 |
참고 자료 | 중앙통신사, "馬前政権の「中国大陸寄り」指導要領 新政権が廃止/台湾" 포커스 타이완 |
2. 경위
1627년, 하마다 야효에는 타이완 원주민 16명을 '고산국 사절단'으로 위장하여 일본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알현시키려 했다. 이들은 타이완 섬 전체를 쇼군에게 바치기 위해 왔다고 주장하며 알현을 요청했다.[1] 당시 타이완에 유행병이 심했고, 이들은 모두 천연두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리카라는 사람만을 대표로 알현하게 하고, 나머지는 정원에 통하는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1] 이들은 너무 더러워서 성의 사람들에게 두 번 다시 데려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며, 구체적인 이야기가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먼 길에서 온 그들을 위로하는 의미로 모두 장군 이에미쓰로부터 선물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1] 이 사건으로 피터르 나위츠의 쇼군 알현이 저지되었고, 나위츠는 성과 없이 타이완으로 돌아갔다.[1]
1628년 6월(간에이 5년 5월), 타이오완(타이난 · 안핑)의 피터 나위츠는 스에쓰구 헤이조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귀국한 타이완 원주민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쇼군 이에미쓰에게서 받은 선물을 빼앗고 감금했다. 또한 하마다 야효에 선박의 항해를 금지하고 무기를 압수했다.[1] 하마다 야효에는 이러한 조치에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나위츠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야효에는 틈을 노려 나위츠를 납치하여 인질로 삼았다.[1]
이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야효에 일행을 포위했지만, 나위츠가 인질로 잡혀 있어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대치가 이어졌다. 이후 협상에서 양측은 5명씩 인질을 교환하여 나가사키로 가기로 합의했다.[1]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네덜란드 측은 일본 측 인질을 풀어주고 합의대로 네덜란드 측 인질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가사키의 대관(代官) 스에쓰구 헤이조는 네덜란드인들을 구속하고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을 폐쇄했다.[1]
2. 1. 주인선 무역과 타이완
주인선 무역이 이루어지던 에도 시대 초기, 명나라(중국)는 책봉 관계에 있는 국가와만 무역을 허용했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일본 상선은 중국 본토에 기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중계 무역의 중요성이 커졌다. 아유타야 왕조(태국)와 통킹(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과 타이완 섬 남부가 주요 중계 무역 거점으로 떠올랐다.[7]당시 일본,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대영 제국(영국) 상인 간 무역 경쟁이 치열했다. 1622년, 네덜란드는 마카오의 포르투갈 거류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펑후 제도를 점령했다.[7] 1624년, 명나라의 요구로 네덜란드는 타이완 섬으로 거점을 옮겨 질란디아 요새를 건설하고 타이난의 안핑을 '타이오완'으로 칭했다.[8] 네덜란드는 타이오완에 기항하는 외국 선박에 10%의 관세를 부과했고, 중국 상인들은 이를 수용했으나, 하마다 야효에 등 일본 상인들은 거부했다. 1627년, 네덜란드는 피터르 나위츠를 타이완 행정 장관으로 임명하고, 에도 막부와의 협상을 시도했다.
2. 2. 타이완 원주민 대표단의 일본 방문과 노이츠의 알현 저지
1627년 하마다 야효에는 타이완 원주민 16명을 '고산국 사절단'으로 위장하여 일본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알현시키려 했다. 하마다 야효에는 타이완 섬에서 16명의 타이완 원주민을 데리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들은 타이완 전토를 장군에게 바치기 위해 온 "고산국에서 온 사절단"이라고 말하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알현을 요청했다.[1] 그러나 당시 타이완에 유행병이 심했고, 이들 모두 천연두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리카라는 사람만을 대표로 알현하게 하고, 나머지는 정원에 통하는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1] 이들은 너무 더러워서 성의 사람들에게 두 번 다시 데려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며, 구체적인 이야기가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먼 길에서 온 그들을 위로하는 의미로 모두 장군 이에미쓰로부터 선물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1] 이 사건으로 피터르 나위츠의 쇼군 알현이 저지되었고, 나위츠는 성과 없이 타이완으로 돌아갔다.[1]2. 3. 타이오완 사건의 발발
1628년 6월(간에이 5년 5월), 타이오완(타이난 · 안핑)의 피터 나위츠는 스에쓰구 헤이조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귀국한 타이완 원주민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쇼군 이에미쓰에게서 받은 선물을 빼앗고 감금했다. 또한 하마다 야효에 선박의 항해를 금지하고 무기를 압수했다.[1]하마다 야효에는 이러한 조치에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나위츠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야효에는 틈을 노려 나위츠를 납치하여 인질로 삼았다.[1]
이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야효에 일행을 포위했지만, 나위츠가 인질로 잡혀 있어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대치가 이어졌다. 이후 협상에서 양측은 5명씩 인질을 교환하여 나가사키로 가기로 합의했다.[1]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네덜란드 측은 일본 측 인질을 풀어주고 합의대로 네덜란드 측 인질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가사키의 대관(代官) 스에쓰구 헤이조는 네덜란드인들을 구속하고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을 폐쇄했다.[1]
2. 4. 사건의 수습
1628년 사건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으나, 히라도번주와 스에쓰구 헤이조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스에쓰구 헤이조는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는데, 당시 일본이 쇄국 정책을 추진하며 외국과의 분쟁을 회피하려 했고, 막부 고위층이 연루되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8]네덜란드는 사건의 책임을 노이츠에게 돌려 해임하고 일본에 인질로 넘겼다. 일본은 네덜란드의 이러한 대응에 안도했으며, 이는 훗날 네덜란드만이 일본과의 무역을 허용받는 계기가 되었다.[8] 노이츠는 1632년부터 1636년까지 일본에 억류되었다.[8]
1636년, 네덜란드 상관장 대리 프랑수아 카론은 쇼군에게 등롱을 헌상했고, 사카이 다다카쓰의 진언으로 노이츠가 석방되었다. 1632년,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이 재개되었다. 1634년, 일본인의 타이완 도항이 금지되었고, 이후 정성공의 정씨 왕국이 성립될 때까지 네덜란드가 타이완을 통치했다.
3. 툰베리의 기록
1775년,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의 의사였던 칼 페테르 툰베리는 저서 《일본 기행》에서 이 사건을 언급했다.[9] 툰베리는 일본인의 높은 자존심과 복수심을 언급하며, 이 사건이 일본인 상인에 대한 노이츠의 모욕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9] 그는 일본인이 스스로를 정의감에 불타는 용감한 국민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모욕을 가하는 자에게는 가차없으며, 평소에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러한 감정을 마음속에 숨겨두었다가 기회가 오면 즉시 살상에 이르는 복수를 한다고 경고했다.[9]
참조
[1]
서적
Zeelandia, a Dutch colonial city on Formosa (1624–1662)
Springer
1985
[2]
뉴스
馬前政権の「中国大陸寄り」指導要領 新政権が廃止/台湾
https://web.archive.[...]
2016-06-01
[3]
서적
『ツンベルク日本紀行』第十章 日本人の顏貌及性格
https://dl.ndl.go.jp[...]
駿南社
1927-1931
[4]
서적
일본인 이야기.1:전쟁과 바다
[5]
서적
Zeelandia, a Dutch colonial city on Formosa (1624–1662)
Springer
1985
[6]
뉴스
馬前政権の「中国大陸寄り」指導要領 新政権が廃止/台湾
http://japan.cna.com[...]
2016-06-01
[7]
서적
조총과 장부:경제 세계화 시대,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와 상업
[8]
서적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9]
서적
『ツンベルク日本紀行』第十章 日本人の顏貌及性格
https://dl.ndl.go.jp[...]
駿南社
1927-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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