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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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는 1912년 4월 14일 밤, 영국 사우샘프턴을 출발하여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 사건이다. 출항 전 여러 차례 빙산 경고가 있었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충돌 당시 배는 빠른 속도로 항해했다. 충돌로 선체에 손상이 발생하여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고, 구명보트 부족과 미흡한 대처로 인해 2,224명의 탑승자 중 1,514명이 사망하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이 사고는 선박 안전에 대한 국제적인 논의를 촉발하여 국제해상인명안전조약(SOLAS) 채택 등 안전 규정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1985년 로버트 발라드에 의해 타이타닉호 잔해가 발견되었고, 현재는 해저 박테리아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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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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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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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12년 4월 14일~15일 |
시간 | 23시 40분 – 02시 20분 (02시 38분 – 05시 18분 GMT) |
기간 | 2시간 40분 |
장소 |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남동쪽으로 떨어진 해상 |
유형 | 해양 재난 |
원인 | 4월 14일 빙산과의 충돌 |
참가자 | 타이타닉호 승무원 및 승객 |
결과 | 해양 정책 변경; SOLAS |
보고된 사망자 수 | 1,490–1,635 |
2. 항해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E. J. 스미스 선장의 지휘 아래 타이타닉호가 첫 항해를 시작했다. 타이타닉호는 프랑스 셰르부르와 아일랜드 퀸즈타운(현재 코브)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출항 당시 승무원들에게 쌍안경 보관함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 육안으로만 위험을 확인해야 했다. 이는 빙산 발견 지연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당시 기상 조건에서는 쌍안경 유무와 관계없이 육안 식별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1]
타이타닉호는 출항 오전부터 다른 선박과의 전신을 통해 빙산 경고를 받았다. 특히 4월 14일에는 6통의 경고를 받았으나, 모든 통신문이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았다. 당시 통신기사는 마르코니 회사 소속으로, 승객의 전보 송신이 주 업무였고, 날씨 정보 중계는 부차적이었다.
4월 14일 오전 9시, RMS 캐로니아의 "빙산, 해빙과 유빙" 통신문과 오후 1시 42분 RMS 발틱의 "빙산과 수많은 유빙" 통신문은 스미스 선장에게 전달되어 항로 변경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오후 1시 45분 SS 아메리카, 오후 7시 30분 증기선 메사바호, 오후 9시 40분 캘리포니안호로부터의 빙산 경고는 타이타닉호 무전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무선 통신기사 잭 필립스는 고장났던 전신 장비와 승객 메시지 처리로 인해 경고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오후 10시 30분 캘리포니안호 통신기사 시럴 에반스의 마지막 경고는 필립스에 의해 "닥쳐! 닥쳐! 지금 케이프 레이스와 일하는 중이다."라는 말과 함께 중단되었다.[4]
선원들이 얼음의 존재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배는 최고 속도에 근접한 시속 22노트(41 km/h)로 계속 운항했다. 이는 사고 후 침몰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으나,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1912년 4월 2일 취항 당시, ''타이타닉''호는 올림픽급 여객선 중 두 번째 배였으며 세계 최대의 선박이었다. RMS ''올림픽''호와 함께 RMS ''루시타니아''호와 RMS ''모레타니아''호보다 총등록톤수가 1.5배, 길이는 30m 더 컸다.[5] 3,547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왕복동 기관은 높이 12m, 실린더 지름 2.7m로 당시 최대 크기였고, 하루 600톤의 석탄을 소모했다.[6]
1등석 구역은 매우 넓고 장엄했으며, 개인 산책로가 있는 파빌리온 스위트룸의 대서양 횡단 편도 요금은 4,350달러(현재 가치 약 4350USD 달러)를 넘었다.[7] 3등석도 당시 기준으로는 이례적으로 편안하고 풍족한 음식이 제공되었다.[7]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는 1912년 4월 10일 정오 직후 사우샘프턴을 출발하며 시작되었다.[8] 정박 중인 SS ''뉴욕''호와 ''오션닉''호를 통과하며 사고를 피했다. 예인선 ''벌컨''호의 도움과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의 엔진 전환 명령으로 충돌은 피했지만, 이 사건으로 출발이 최대 45분 지연되었다.[9]
몇 시간 후, ''타이타닉''호는 셰르부르 항에 기항하여 승객을 태웠고, 다음 기항지인 퀸즈타운(현재 코브)에는 4월 11일 정오경에 도착하여 오후에 더 많은 승객과 물품을 싣고 출발했다.[10]
''타이타닉''호는 대서양을 건널 때 승무원 892명과 승객 1,320명을 태우고 있었다. 이는 정원의 절반 수준이었는데, 비수기였고 영국의 석탄 광부 파업으로 선적이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11] 승객들은 백만장자부터 가난한 이민자들까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다.[12]
스미스 선장은 40년의 항해 경험이 있었고, ''타이타닉''호의 함장으로 임명되기 전 RMS ''올림픽''호의 함장을 역임했다.[13] 승무원 대다수는 훈련받지 않은 선원이었고, 숙련된 선원은 5%에 불과했다.[14]
빙산의 규모는 온화한 겨울로 인해 그린란드 서해안에서 많은 수의 빙산이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15]
''타이타닉''호의 석탄 창고 중 한 곳에서 출항 약 10일 전 화재가 발생하여 4월 13일에 진화되었다.[1] 그날 날씨는 아침의 강한 바람과 파도에서 저녁의 맑고 고요한 날씨로 개선되었는데, 배의 항로가 북극 고기압계 아래를 지났기 때문이다.[16]
2. 1. 빙산 경고 (9시 00분–23시 39분)
타이타닉호의 무선 통신사들은 1912년 4월 14일에 다른 배들로부터 표류하는 얼음에 대한 경고 메시지 6개를 받았다. 당시 북대서양의 얼음 상태는 지난 50년 동안 4월 중 가장 심각했다.[2]시간 | 선박 | 보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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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 카로니아호(RMS Caronia)(1905) | "빙산, 그로울러 및 해빙" [3] |
13:42 | 발틱호(RMS Baltic)(1903) | 그리스 선박 아테니아호로부터 "빙산과 다량의 해빙을 통과하고 있다"는 보고를 전달받음. |
13:45 | 아메리카호(SS Amerika)(1905) | "두 개의 큰 빙산을 통과했다"고 보고. |
19:30 | 캘리포니아호(SS Californian) | "세 개의 큰 빙산"을 보고. |
21:40 | 메사바호(Mesaba) | "많은 두꺼운 해빙과 많은 수의 큰 빙산을 보았다. 또한 해빙도 보았다."고 보고. |
22:30 | 캘리포니아호의 사이릴 에반스 통신사 | 마지막 경고를 보냈으나, 잭 필립스가 이를 끊고 "닥쳐! 닥쳐! 케이프 레이스에서 일하고 있다."라고 신호를 보냄.[4] |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갑판선원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미터에서 높이 20미터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 플리트는 즉시 1등 항해사 윌리엄 맥마스터 머독에게 보고했고, 머독은 배를 좌현으로 돌리고 엔진을 "전속 후진"하도록 명령했다.[42] 그러나 배의 회전반경과 속도 때문에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스미스 선장은 긴급 탈출 명령을 내리고, 승객과 승무원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누어주었다. 처음에는 승객 대부분이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구명보트에 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무로 만든 작은 보트보다 260미터 길이의 강철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배에서 가장 부자였던 존 제이콥 애스터도 아내에게 "여기가 저 작은 보트보다 안전해"라고 말했다고 한다.[1]
오전 12시 45분쯤, 정원 65명에 28명을 태운 구명보트 7호가 처음으로 내려졌다.[9] 곧이어 55분에 좌현에서 구명보트 6호가 7호와 마찬가지로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다. 여기에는 빙산을 목격했던 견시 당직자 프레드릭 플리트와 훗날 '침몰하지 않는 몰리 브라운'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마거릿 브라운이 타고 있었다.
오전 2시 5분, 접이식 구명보트 D가 타이타닉호를 떠났다. 이 보트는 마지막 구명보트였으며, 2개의 접이식 구명보트만이 남게 되었다.[9]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각자 살길을 찾으라고 했고, 배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배에 남은 사람들은 접이식 보트 2개를 기다리거나, 바다로 뛰어들거나, 선미로 달려갔다. 배가 기울면서 프로펠러가 완전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뒤 약 1시간 30분 후인 새벽 3시 55분에 아서 로스트론 선장이 이끄는 카르파티아호가 도착했다. 카르파티아호는 약 4시간 30분 동안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이 과정에서 5명의 생존자가 구명보트 안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생존자들에게는 따뜻한 커피, 담요,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었다.[3]
며칠 후, 시신 수습을 위해 맥케니 베넷 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이 보내졌다. 총 328구의 시신이 바다에서 수습되었는데, 그중 119구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이었다. 신원이 확인된 타이타닉 호 선원들의 시신은, 바다에서 죽은 선원을 선원들의 상징적인 고향인 바다에 돌려보낸다는 전통에 따라 영국에서 수장되었다.[1] 수습된 시신 중 일부는 캐나다의 핼리팩스에 매장되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승객들의 생존율은 객실 등급, 성별, 나이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다음 표는 탑승자 종류별 구조율과 사망률을 나타낸다.
당시 무선 통신사들은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의 직원이었다. 선박 회사의 직원이 아니였기 때문에 승객들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주된 업무였고, 기상 보고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3. 손상
타이타닉호는 우현 측면이 빙산과 충돌하면서 수면 아래 약 90미터가 손상되었고, 뱃머리로부터 5개 구획에 걸쳐 엄청난 해수가 배 안으로 들어왔다. 타이타닉호의 격벽 구조는 2개 구획(뱃머리로부터는 4개 구획)까지 물이 들어오면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으나, 5개 구획 이상에 물이 차면서 한계를 넘어섰다. 게다가 타이타닉의 격벽은 위의 E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선체가 부력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지며 잠기는 와중에 해수는 격벽을 넘어 차례차례로 다른 구획까지 흘러 들어갔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했다.
오랫동안 타이타닉호 선체에 큰 구멍이 났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적인 초음파 조사에 따르면 실제 손상은 총 면적이 약 약 1.11m2 에서 약 1.21m2에 불과한 여섯 개의 좁은 구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긴 틈은 약 약 11.89m였으며, 이는 판금 이음매를 따라 있는 철 리벳이 부러지거나 튀어나와 물이 넘어가는 좁은 틈을 만들었다는 것을 시사한다.[5]
수면 위에서는 충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1등급 식당의 승무원들은 배가 프로펠러 날개를 떨어뜨린 것 같다고 생각했던 진동을 느꼈다. 많은 승객들은 충격이나 진동을 느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충돌 지점에 가장 가까운 하층부에 있던 사람들은 훨씬 더 직접적으로 느꼈다.
배는 즉시 침수되기 시작했고, 초당 약 7112.33kg로 추정되는 속도로 물이 유입되어 배수 속도보다 15배나 빨랐다.
4. 탈출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선장에게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태울 것을 건의했고, 선장은 이를 승인했다. 1등 항해사 머독은 여성과 어린이가 모두 탑승한 후에는 남성도 탑승하도록 허용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여자와 아이들 먼저"를 "여자와 아이들만"으로 해석하여 여성과 어린이 우선 구조 원칙을 철저히 시행했다.[1]
그러나 여성과 어린이만 태웠기 때문에 자리가 있었음에도 남성은 승무원들이 승선을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구명보트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보트가 내려졌다.[1]
타이타닉호 침몰이 참사로 이어진 원인 중 하나는 구명보트 부족이었다. 당시 영국 상무성 규정에는 여객선이 여객 정원만큼 구명보트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규정은 978명, 그나마도 배의 배수톤수를 기준으로 했다. 또한, 미관, 비용 등의 이유로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타이타닉호에 1,178명 정도만 탈 수 있는 보트만 준비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처음 구명보트를 하선할 때에는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있었음에도 태우지 않았다.[1]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승무원들 사이에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정원 65인승 보트에 70명을 태우는 실험을 했는데 배는 뜰 수 있었지만 추진과 균형 잡기가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갑작스러운 사고에 당황한 승무원들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고 황급히 구명보트를 하선했다. 게다가 그 누구도 그런 배가 침몰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선원들도 정원이 얼마인지 헷갈렸고, 사전에 안전 교육 계획이 있었지만 취소되어 전혀 실행되지 않았다. 많은 보트가 정원을 채우지 않은 채 바다에 내려졌다. 만약 정원이 완전히 채워졌다면 승객의 절반은 생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1]
3등실 승객들은 탈출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복도 미로에 길을 잃거나, 선실 승객들의 숙소를 1등석과 2등석 구역과 분리하는 문과 칸막이 뒤에 갇히기도 했다. 이러한 분리는 단순히 사회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의 이민법에 따라 3등실 승객들을 격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타이타닉호의 승무원들이 선실 승객들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기도 했다. 일부 문은 잠겨 있었고 승무원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는 선실 승객들이 구명보트로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
5. 대피와 혼란
배 밑 보일러실에서는 화부들과 기관부 선원들이 물이 보일러에 닿아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증기와 해수를 배출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관실에서는 계속해서 전력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 후 5번 보일러실에서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기관사 몇 명이 펌프질을 하다가 6번 보일러실의 석탄 저장고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익사한 것이다. 화부장이었던 프레드릭 바렛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구명보트는 좌현과 우현 양쪽에서 하나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 정원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내려졌다. 구명보트 5호는 41명이 탔고, 3호는 32명, 8호는 39명, 1호는 겨우 12명(정원 40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혼란이 가속되기 시작했고, 사고도 약간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여성은 구명보트 10호와 배 사이에 떨어져 끼었다가 구조되었다. 어떤 승객들은 구명보트에 타기 위해 줄을 타거나 뛰어들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 부상자들도 생겨났다.
오전 1시 30분쯤에는 배의 앞머리가 잠기기 시작하고, 혼란은 계속해서 가중되었다. 구명보트도 이제 정원에 어느 정도 맞추기 시작했다. 구명보트 11호는 정원을 다섯 명 초과해서 내려졌고, 배에서 펌프질로 빠져나오는 물이 들어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13호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지만 마찬가지로 가까스로 피했으나, 밧줄에 문제가 생겨 옆에서 함께 내려지던 15호 바로 위에 내려져 깔릴 뻔했다. 다행히도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프레드릭 바렛을 포함한 선원들이 아슬아슬하게 밧줄을 잘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명보트 14호가 내려지려 하자, 공황에 빠진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타기 위해 우르르 밀려왔다. 이에 14호를 맡은 5등 항해사 로우는 혼란을 저지하기 위해 허공에 권총으로 경고 사격을 했다. 5분 후에는 구명보트 16호가 내려졌다.
구명보트가 하나둘씩 내려짐에 따라 후미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접이식 보트 C는 오전 1시 40분에 내려졌으며 이 보트가 내려지기 직전에 두 사람이 몰래 탑승했다. 한 명은 가족을 구명보트에 미리 태운 승객이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화이트 라인 사의 사장이자 배의 선주였던 브루스 이스메이였다.
오전 1시 45분에는 구명보트 2호가 내려졌다. 이때 신원미상의 외국 승객들이 승선을 시도했으나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권총으로 위협하여 쫓아냈다.
6. 최후의 20분
오전 2시 10분, 바닷물이 보트 갑판까지 차올랐다. 이때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하는 악단이 체육관 바깥쪽 휴식터에서 마지막 연주를 시작했다. 이들이 연주한 곡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주님께 더 가까이(Nearer, My God, to Thee)'와 'Autoume'가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채 선교에 그대로 남았고, 배의 설계자 토마스 앤드루스(Thomas Andrews)는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고 그림을 응시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오전 2시 15분에서 17분 사이, 배는 보트 갑판까지 가라앉았다.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리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침수되는 통신실에서 탈출했다.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 두 척은 파도에 휩쓸려 떠다녔다. 접이식 보트 B는 30여 명이 탄 채 뒤집혔고, 접이식 보트 A는 제대로 떴지만 물이 반쯤 찼다. 이때 아치볼드 그레이시, 2등 항해사 라이톨러, 전파사 브리드와 필립스 등 몇몇 사람들이 환기구에 빨려 들어갔지만, 보일러실에서 발생한 뜨거운 공기 덕분에 다시 물 밖으로 나와 뒤집힌 구명보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때 굴뚝 1이 선교루 쪽으로 쓰러지면서 존 제이콥 애스터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을 덮쳤고, 그 여파로 생긴 파도가 접이식 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쓸어냈다. 얼마 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깨져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배가 급격히 기울면서 가구, 그릇, 보일러 엔진 등 온갖 물체들이 떨어지는 굉음이 발생했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화했다. 배가 더 기울자 많은 사람들이 균형을 잃고 미끄러졌다. 이후 침수되면서 굴뚝 2도 쓰러졌다.
오전 2시 18분, 물체들이 떨어지는 굉음이 더욱 커졌다. 보일러실이 침수되면서 전기가 잠깐 깜빡이다가 완전히 나갔다. 잠시 후, 바닷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가 2번째와 3번째 굴뚝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쪼개지면서 굉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났다. 동시에 굴뚝 3과 환기구 4가 부러졌다. 2012년 내셔널지오그래픽 팀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타이타닉호가 절단될 당시 수면과의 최대 각도는 23도였다.
오전 2시 20분, 선미가 그대로 사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완전히 침몰했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직각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7. 구조
오전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한 후, 카르파티아호는 속도를 줄이고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신들은 해류에 쓸려갔으며, 흩어진 잔해와 시신 1구만이 발견되었다. 결국 카르파티아호는 더 이상의 수색을 포기하고, 뒤늦게 사고 해역에 도착한 캘리포니안호에 추가 생존자 수색을 인계했다.[3]
생존자들은 4월 15일 오전 4시경 카르파티아호에 의해 구조되었다. 카르파티아호는 밤새 고속으로 항해했으며, 여러 빙산을 피해야 했기에 상당한 위험을 감수했다.[4] 카르파티아호의 불빛은 오전 3시 30분경에 처음 발견되었고,[4] 이는 생존자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지만, 모든 사람이 배에 오르는 데는 몇 시간 더 걸렸다. 접이식 구명정 B에 있던 30명 이상의 남성들은 마침내 다른 두 개의 구명정에 탑승하는 데 성공했지만, 한 생존자는 이동 직전에 사망했다.[4] 접이식 구명정 A 또한 위험에 처했고 거의 물에 잠길 지경이었으며, 탑승자 중 많은 수 (아마 절반 이상)가 밤 사이에 사망했다.[4] 남은 생존자들은 A에서 다른 구명정으로 옮겨졌고, 구명정에는 시체 3구가 남겨진 채 표류하게 되었다. 한 달 후 화이트 스타 라인의 오세아닉호에 의해 시체가 그대로 있는 채로 회수되었다.[4]
카르파티아호에 탑승한 사람들은 해가 뜨자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마치 풍경의 지점처럼 무수한 얼음 피라미드가 놓여 있는 얼음밭"이었다.[4] 아서 로스트론 선장은 주변에 모든 곳에 얼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높이가 약 60.96m에 달하는 20개의 큰 빙산과 수많은 작은 빙산, 그리고 얼음 조각과 타이타닉호의 잔해들이 있었다.[4] 카르파티아호의 승객들에게는 그들의 배가 빙산이 멀리서 언덕처럼 보이는 거대한 흰 얼음 평원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였다.[4]
구명정이 카르파티아호 옆에 다가가자, 생존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배에 올라탔다. 일부는 로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만큼 힘이 있었고, 다른 일부는 밧줄로, 아이들은 우편물 자루에 담겨 올려졌다.[5] 마지막으로 배에 도착한 것은 라이트홀러의 12번 구명정이었는데, 정원 65명에 74명이 탑승해 있었다. 이 마지막 생존자들도 오전 9시까지 모두 카르파티아호로 이동했다.[5] 구조된 사람들 중에는 가족이나 친구와 재회하는 장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까운 사람을 찾지 못하고 희망이 무너지는 결과를 맞이했다.[5]
오전 9시 15분에 마운트 템플호와 캘리포니안호 두 척의 배가 더 도착했다. 캘리포니안호는 무선 통신사가 업무에 복귀했을 때에야 사고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이미 구조가 필요한 생존자는 없었다. 카르파티아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현재 크로아티아의 리예카)의 피우메로 갈 예정이었지만, 생존자들에게 제공할 비축 물품이나 의료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로스트론 선장은 생존자들이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뉴욕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고려하도록 명령했다.[5] 카르파티아호는 현장을 떠났고, 다른 배들은 마지막으로 2시간 동안 수색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5]
8. 시신 수습 및 장례 절차
악단 단장 윌리스 하틀리는 잉글랜드 콜른에 매장되었고,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 소유주 이시도르 스트라우스는 브루클린 베델 묘지에 안치되었으나, 부인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벤자민 구겐하임과 그의 시종 빅터 기글리오는 시신이 수습되지 않았으나, 소속된 철강업 회사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1]
사고 후, 매케이-베넷호(CS Mackay-Bennett)에 의해 시신 수습이 이루어졌고, 캐나다 핼리팩스에 많은 신원 불명의 시체가 수습되어 매장되었다. 신원 확인은 21세기에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신원 불명의 시체 "NO.4"가 아이노 파누라로 확인되었으나, 이후 재감정에서 시드니 레슬리 굿윈으로 정정되었다.
9. 구조 현황
탑승자 종류 총원 구조율 사망률 구조인원 사망인원 1등실 어린이 6 83% 17% 5 1 2등실 어린이 24 100% 0% 24 0 3등실 어린이 79 34% 66% 27 52 1등실 여성 144 97% 3% 140 4 2등실 여성 93 86% 14% 80 13 3등실 여성 165 46% 54% 76 89 1등실 남성 175 33% 67% 57 118 2등실 남성 168 8% 92% 14 154 3등실 남성 462 16% 84% 75 387 승무원 여성 23 87% 13% 20 3 승무원 남성 885 22% 78% 192 693 어린이 총합 109 51% 49% 56 53 여성 총합 425 74% 26% 316 109 남성 총합 1690 20% 80% 338 1352 전체 총합 2224 32% 68% 710 1514
표에서 볼 수 있듯이, 1등실 어린이의 생존율은 83%였으나, 3등실 어린이의 생존율은 34%에 불과했다. 2등실 남성의 생존율은 8%로 매우 낮았으며, 3등실 남성의 생존율은 16%였다. 여성 승객의 생존율은 74%로 남성 승객의 생존율 20%보다 훨씬 높았다.
3등실의 생존율이 가장 낮은 이유는 3등실이 가장 낮은 구역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구역이 잠겨 있었고, 배에 익숙하지 않은 승객들이 길을 헤맸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1]
10. 의인들
11. 사고의 영향
당시 최신 과학기술로 건조된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산업혁명 이후 문명의 진보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던 서방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이 사고로 1,513명이 사망하여 당시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로 불렸으며, 생존자는 706명에 불과했다.[1]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 및 항해의 안전 확보에 대한 국제적인 논의가 이루어져, 1914년 1월에는 13개국이 참가한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회의"가 열렸고, 1914년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조약(SOLAS)이 채택되었다. 영국 상무성은 구명보트 구비 기준을 배의 총 정원에 맞게 변경하였고, 타이타닉호의 자매선인 올림픽호와 브리타닉호를 포함한 여러 배가 조약에 따라 구명보트를 늘렸다.
미국에서는 선박에 무선 장치 설치 의무가 강화되어 무선 통신 기계가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1]
침몰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공개 조사가 시작되었다. 미국 조사는 1912년 4월 19일 윌리엄 올든 스미스(William Alden Smith) 상원의원의 의장직 하에 시작되었고,[1] 영국 조사는 1912년 5월 2일 존 비검(John Bigham, 1st Viscount Mersey), 머지 경(Lord Mersey) 하에 런던에서 시작되었다.[1] 이들은 대체로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선박이 운반해야 하는 구명정 수에 대한 규정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부적절했다.[1]
- 스미스 선장은 빙산 경고에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1]
- 구명정이 제대로 채워지거나 승무원이 배치되지 않았다.
- 충돌은 너무 빠른 속도로 위험 지역으로 진입한 직접적인 결과였다.[1]
- 두 조사 모두 ''캘리포니아''호의 선장인 로드 경이 ''타이타닉''호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은 것을 강력하게 비난했다.[1]

어느 조사도 모회사인 인터내셔널 머칸타일 마린 컴퍼니(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 또는 (''타이타닉''호를 소유한) 화이트 스타 라인의 과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미국 조사는 관련자들이 표준 관행을 따랐으며 따라서 이 재난은 "신의 뜻"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1] 영국 조사는 스미스가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행을 따랐으며 이전에는 안전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된 적이 없다고 결론지었고,[1] 영국 선박만 지난 10년 동안 350만 명의 승객을 수송하고 단 73명만 사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1] 그는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숙련된 사람들이 했을 것과 같은 일만 했다"고 결론지었다. 영국 조사는 또한 "''타이타닉''호의 경우 실수였던 것이 앞으로 유사한 사례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과실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1]
이 재난은 해상 규정의 주요 변화를 가져왔다. 더 많은 구명정을 제공하고, 구명정 훈련을 제대로 실시하고, 여객선의 무선 장비를 24시간 운영하는 등 새로운 안전 조치가 시행되었다.[1] 국제 빙산 순찰대(International Ice Patrol)가 설립되어 북대서양의 빙산 존재를 감시했고, 해상 안전 규정은 국제 해상 인명 안전 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 (SOLAS)을 통해 국제적으로 조화되었다.[1]
12. 발견과 연구
1985년 9월, 미국의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는 뉴펀들랜드에서 68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심해 카메라를 통해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45] 미국과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하여 선체 파편을 인양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수심 약 4,000미터에서 발견된 두 동강 난 선체는 각각 600미터 떨어져 있었다.
1993년 9월, 미국의 조선 전문가 윌리엄 가츠케는 타이타닉호 침몰이 저급 강철판 사용으로 인한 인재(人災)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인양된 선체 파편을 연구한 결과, 충돌 시 휘지 않고 부서지는 질 낮은 강철판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면 침몰을 막거나 지연시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5] 그러나 타이타닉호를 건조한 회사가 사용한 강철판은 당시 최고급 강철판이었다. 당시 제철 기술로는 최고급 강철판조차 황 함유량이 많아 낮은 온도에서는 휘어지기보다 부서지는 특성이 있었다.
타이타닉호 잔해에서는 할로모나스 타이타닉이라는 박테리아균이 발견되었는데, 이 박테리아균이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먹어치우고 있어 2030년 이후에는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보기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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