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펀들랜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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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펀들랜드섬은 캐나다 동부에 위치한 섬으로, 면적은 108,860제곱킬로미터이다. 11세기에 노르드인들이 잠시 정착했고, 1497년 존 캐벗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섬에 도착했다. 1583년 잉글랜드가 뉴펀들랜드를 식민지로 선포했으며, 이후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다. 원주민으로는 베오툭과 도싯 문화가 있었으며, 1949년 캐나다 연방에 가입했다. 주요 도시로는 세인트존스가 있으며, 그로스 모른 국립공원 등 다양한 관광 명소가 있다. 1990년대 이후 대구 어획량 감소로 어업이 쇠퇴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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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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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별칭 | 더 락 |
위치 | 대서양 |
면적 | 108,860 km² |
면적 순위 | 캐나다 4위 세계 16위 |
해안선 길이 | 9,656 km |
최고봉 | 더 카복스 |
최고점 높이 | 814 m |
국가 | 캐나다 |
행정 구역 |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 |
최대 도시 | 세인트존스 |
최대 도시 인구 | 200,600명 |
인구 | 477,787명 |
인구 기준 | 2016년 |
인구 밀도 | 4.39 명/km² |
민족 구성 | 영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인, 프랑스어, 미크맥족 |
시간대 | 뉴펀들랜드 표준시 |
시간대 (UTC) | -03:30 |
시간대 (DST) | 뉴펀들랜드 일광 절약 시간제 |
시간대 (DST, UTC) | -02:30 |
가장 긴 강 | 익스플로이츠 강 (246 km) |
인구 순위 | 79위 |
주민 | 뉴피, 뉴펀들랜드인 |
명칭 | |
영어 | Newfoundland |
프랑스어 | Terre-Neuve |
프랑스어 (캐나다) | taɛ̯ʁˈnœːv |
아일랜드어 | Talamh an Éisc |
기타 | |
참고 문헌 | 눌라툭카붓 자료 캐나다 지도 정보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 정부 웹사이트: 면적 2006년 캐나다 통계청 국가 센서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캐나다 지도 - 강 내셔널 포스트 밀워키 저널 센티넬 1000년 |
2. 역사
뉴펀들랜드는 오랫동안 도싯 문화와 베오툭 원주민들이 거주했으며, 이들은 현재는 사멸된 베오툭어를 사용했다. 11세기에 아이슬란드 탐험가 라이프 에릭손이 세인트로렌스 강 어귀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빈란드"로 남쪽으로 더 향할 때 중간 기착지로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10] 최초로 확인된 방문은 약 1000년 전 노르웨이인들이 뉴펀들랜드 최북단(노먼곶) 근처 란스 오 메도에 노르드 식민지인 임시 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그린란드에서의 노르드인-이누이트 접촉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유적은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의 콜럼버스 이전 접촉에 대한 유일하게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로 여겨진다.[11]
이후 뉴펀들랜드를 방문한 유럽인들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어부들이었다. 베네치아 항해사 존 캐벗(Giovanni Caboto)이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계약 하에 1497년 브리스톨에서 탐험을 떠나 이 섬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1501년 포르투갈 형제인 가스파르 코르테-레알과 미구엘 코르테-레알은 북서 항로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뉴펀들랜드 해안의 일부를 측량했다.
1583년 8월 5일, 험프리 길버트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왕실 칙령에 따라 뉴펀들랜드를 잉글랜드의 첫 해외 식민지로 선포하여, 훨씬 후에 건설된 영국 제국의 전신을 공식적으로 수립했다.[12] 뉴펀들랜드는 영국의 가장 오래된 식민지로 간주된다.[13] 정착민들은 섬에 정착하면서 뉴펀들랜드 영어, 뉴펀들랜드 프랑스어 등 여러 가지 방언을 발전시켰다.[14] 19세기에는 아일랜드어의 방언인 뉴펀들랜드 아일랜드어도 있었다.[14] 스코틀랜드 게일어도 19세기와 20세기 초, 특히 코드로이 계곡 지역에서 노바스코샤의 케이프 브레턴 섬 출신 정착민들에 의해 사용되었다.[15] 게일어 이름은 어업과의 연관성을 반영했는데, 스코틀랜드 게일어로는 Eilean a' Trosggd(Eilean a' Trosg|대구의 섬gd)로 불렸고, 아일랜드어 이름 Talamh an Éiscga는 '물고기의 땅'을 의미한다.
유럽인이 1497년 존 캐벗을 시작으로 도착했을 때, 그들은 비오툭과 접촉했다. 이 시점의 섬에 있는 비오툭의 수는 약 700명 정도로 추정된다.[23] 이후 영국과 프랑스 모두 섬에 정착했고, 동부 캐나다와 현재의 노바스코샤 출신의 알곤킨어족계 원주민인 미크막이 그 뒤를 이었다. 유럽인과 미크막의 정착이 연중으로 이루어지고 해안의 새로운 지역으로 확장됨에 따라, 비오툭이 의존하는 해양 자원을 수확할 수 있는 지역이 감소했다. 19세기 초가 되자, 몇 안 되는 비오툭만 남았다. 대부분은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없어 사망했고, 기아로 사망했다.[24] 비오툭과 교류하고 돕기 위한 정부의 시도는 너무 늦었다.[25] 비오툭은 미크막과 달리 외국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후자는 유럽인들과 쉽게 교역했고 뉴펀들랜드 정착촌에 정착했다.
2. 1. 원주민
뉴펀들랜드는 오랫동안 도싯 문화와 베오툭 원주민들이 거주했으며, 이들은 현재는 사멸된 베오툭어를 사용했다.뉴펀들랜드의 초기 주민은 유럽인 도착 당시 거주하고 있던 베오툭족(Beothuk people)의 조상에 해당하는 민족 집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베오툭은 베오툭어로 "인간"을 의미했다. 베오툭족의 민족적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라브라도 반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간 이후, 비오툭이 본토인 라브라도르에서 이주하여 뉴펀들랜드에 정착했다. 학자들은 비오툭이 라브라도르의 이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18] 이 부족은 나중에 "멸종"된 것으로 선언되었지만, 일부 비오툭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기록되었다.[19] Beothukbue는 비오툭어로 '사람들'을 의미하며, 종종 알곤킨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20]
이 부족은 현재 일반적으로 멸종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들의 문화에 대한 증거는 박물관과 역사 및 고고학 기록에 보존되어 있다. 마지막 순혈 비오툭으로 여겨지는 여성인 샤나위디싯은 1829년 세인트 존스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21] 그러나 1835년경에 태어나 1910년에 사망한 산투 토니는 미크막과 비오툭의 혼혈 여성이었는데, 이는 일부 비오툭이 1829년 이후에도 살았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비오툭, 어머니를 미크막으로 묘사했으며, 둘 다 뉴펀들랜드 출신이었다. 비오툭은 라브라도르의 이누와 뉴펀들랜드의 미크막과 혼혈 또는 동화되었을 수 있다. 유럽의 역사 기록은 비오툭과 미크막 사이의 잠재적인 역사적 경쟁과 적대감을 시사하지만, 이는 원주민 구전 역사에 의해 반박된다.[21]

북구인(바이킹)이 "빈란드"에서 만난 스크레링(skraeling, 스크레린거)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은 아마도 후대의 베오툭족(Beothuk people)의 조상일 것이다. 유럽인과 북미 원주민의 최초 충돌은 1006년경, 현재의 란스오메도 국정사적(북구인 무리가 영구적인 정착지를 건설하려 했던 해안가 지역) 주변에서 일어났다. 북구인의 사가에 따르면, 스크레링들은 매우 흉포했으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한 새로 온 북구인들은 결국 정착을 포기하고 섬을 떠났다.
유럽인이 1497년 이후, 존 캐벗을 시작으로 도착했을 때, 그들은 비오툭과 접촉을 맺었다. 이 시점의 섬에 있는 비오툭의 수에 대한 추정치는 다양하며, 일반적으로 약 700명 정도이다.[23]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 모두 섬에 정착했다. 그 뒤를 이어 동부 캐나다와 현재의 노바스코샤 출신의 알곤킨어족계 원주민인 미크막이 정착했다. 유럽인과 미크막의 정착이 연중으로 이루어지고 해안의 새로운 지역으로 확장됨에 따라, 비오툭이 의존하는 해양 자원을 수확할 수 있는 지역이 감소했다. 19세기 초가 되자, 몇 안 되는 비오툭만 남았다. 대부분은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없어 사망했고, 기아로 사망했다.[24] 비오툭과 교류하고 돕기 위한 정부의 시도는 너무 늦었다.[25] 비오툭은 미크막과 달리 외국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후자는 유럽인들과 쉽게 교역했고 뉴펀들랜드 정착촌에 정착했다.
현재 뉴펀들랜드 섬 주민들은 조상을 아메리카 원주민(그 대부분은 대륙에 거주하는 미크맥족(Mi'kmaq, Mi'gmaq, Micmac))에게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많다.
2. 2. 유럽인의 도래와 식민지 시대
뉴펀들랜드는 오랫동안 도싯 문화와 베오툭 원주민들이 거주했으며, 이들은 현재는 사멸된 베오툭어를 사용했다.11세기에 아이슬란드 탐험가 라이프 에릭손이 세인트로렌스 강 어귀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빈란드"로 남쪽으로 더 향할 때 중간 기착지로 이 섬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10] 최초로 확인된 방문은 노르웨이인들이 뉴펀들랜드 최북단(노먼곶) 근처에 노르드 식민지인 란스 오 메도에 임시 기지를 건설한 것이며, 약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린란드에서의 노르드인-이누이트 접촉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유적은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의 콜럼버스 이전 접촉에 대한 유일하게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로 여겨진다.[11]

약 500년 후인 1497년, 이탈리아 항해사 존 캐벗(Zuan/Giovanni Caboto)은 잉글랜드의 헨리 7세 왕의 명령을 받고 노르웨이 정착민 이후 처음으로 뉴펀들랜드에 발을 디딘 유럽인이 되었다. 그의 상륙 지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섬의 동쪽 해안에 있는 본어비스타 곶(Cape Bonavista)로 여겨진다.[29] 그레이트 노던 반도 끝자락에 있는 보울드 곶이 상륙 지점이라는 주장도 있다.

캐벗 이후 뉴펀들랜드를 처음 방문한 유럽인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바스크, 프랑스, 영국 출신의 이동성 어부들이었다. 1501년, 포르투갈 탐험가인 가스파르 코르테-레알과 그의 형제 미구엘 코르테-레알은 북서 항로를 찾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뉴펀들랜드 해안 일부를 지도에 표시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아일랜드 어부들이 왔는데, 그들은 너무나 많은 어장을 발견하여 그 섬을 Talamh an Éiscga (아일랜드어로 '물고기의 땅' 또는 '어장')라고 불렀다.
1583년 8월 5일, 험프리 길버트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왕실 칙령에 따라 뉴펀들랜드를 잉글랜드의 첫 해외 식민지로 선포하여, 훨씬 후에 건설된 영국 제국의 전신을 공식적으로 수립했다.[12] 뉴펀들랜드는 영국의 가장 오래된 식민지로 간주된다.[13]
정착민들은 섬에 정착하면서 뉴펀들랜드 영어, 뉴펀들랜드 프랑스어 등 여러 방언을 발전시켰다.[14] 19세기에는 아일랜드어의 방언인 뉴펀들랜드 아일랜드어도 있었다.[14]
1610년 7월 5일, 존 가이(John Guy (governor))는 잉글랜드 브리스톨에서 다른 39명의 식민 개척자들과 함께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 쿠퍼스 코브(Cuper's Cove, Newfoundland and Labrador)로 향했다. 1620년까지 잉글랜드 서부 지방의 어부들은 뉴펀들랜드 동부 해안을 지배했고, 프랑스 어부들은 섬의 남부 해안과 북부 반도를 지배했다.

1713년 유트레흐트 조약 이후, 프랑스는 섬의 남쪽과 북쪽 해안에 대한 지배권을 영국에 양도했다. 프랑스는 남부 해안의 풍부한 어장인 그랜드뱅크에 위치한 생피에르 미클롱 섬만을 유지했다.
2. 3. 뉴펀들랜드 자치령과 세계 대전
뉴펀들랜드와 그 군대인 로열 뉴펀들랜드 연대는 미국 독립 전쟁 등에서 영국 식민지의 일원으로 영국 편에 서서 싸웠다. 뉴펀들랜드는 개혁가이자 의사인 William Carson|윌리엄 카슨영어을 비롯하여, Edward Patrick Morris, 1st Baron Morris|에드워드 패트릭 모리스영어, John Kent|존 켄트영어 등에 의한 의회 개최를 위한 투쟁을 거쳐, 1832년에 식민지 의회(오늘날까지 주 의회로 이어지고 있다)를 열었다. 그러나 이 신정부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로 인해 분열되어 불안정했다. 1842년, 의회는 임명제에 의한 입법 위원회와 합병했고, 다시 1848년에 양원제로 돌아왔다. 이후, 자유주의 운동의 흐름을 받아, 후의 의원 내각제로 이어지는 제도로 자치권이 강한 책임 정부(responsible government) 만들기에 대한 운동이 시작되었다.1854년, 뉴펀들랜드 식민지는 영국 본국으로부터 책임 정부의 수립을 인가받았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가 임명한 식민지 총독은 현지 책임 정부 의회에 따라 활동하도록 변경되었다. 1855년 선거에서, 프린스에드워드섬 출신의 필립 프랜시스 리틀(Philip Francis Little)이 보수당에 대해 다수를 획득했고, 리틀은 초대 수상이 되었다. 1869년, 투표에 의해 뉴펀들랜드는 캐나다와의 연합안을 거부했다. 1898년에는 세인트존스에서 섬의 북쪽 해안의 건더, 서쪽의 코너브룩을 지나, 섬의 서쪽 끝의 채널-포르토바스크까지를 동서로 잇는 협궤의 뉴펀들랜드 철도가 개통되어, 연선의 임업 등의 개발이 진행되었다.[17]
1904년, 영불협상의 일환으로, 프랑스는 1713년의 유트레히트 조약 이래 권리를 보유해 온 섬의 서해안, “코트 프랑세즈 드 테르뇌브”를 포기했다. 1907년 9월 26일에는, 뉴펀들랜드는 대영제국의 자치령 '''뉴펀들랜드'''가 되어, 사실상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 래브라도의 경계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캐나다 자치령 퀘벡 주와 뉴펀들랜드 자치령 정부의 분쟁 요인이었지만, 1927년에 현재의 경계가 확정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섬의 사회에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뉴펀들랜드는 영국 등의 편에서 참전하여, 약 25만 명의 인구 중 5,482명이 영연방의 병사로 해외에 나갔다. 약 1,500명이 전사하고, 2,300명이 부상했다. 1916년 7월 1일, 솜 전투의 첫날, 프랑스 북부의 격전지 보몽아멜에서, 로열 뉴펀들랜드 연대의 753명의 병사가 참호를 넘어 돌격했다. 같은 날의 희생자는 다수에 달했고, 다음날 아침 점호에 응답한 것은 불과 68명이었다. 뉴펀들랜드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젊은이의 4분의 1을 잃었고, 차세대를 담당할 젊은 세대의 현저한 감소는 경제의 쇠퇴로 이어져, 캐나다와의 연합이라는 결과로 귀결되었다는 논의도 있다. 현재도, 캐나다 사람들의 많은 수가 건국 기념일(캐나다의 날)을 축하하는 7월 1일에, 뉴펀들랜드에서는 전사한 젊은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뉴펀들랜드 자치령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비와 대공황으로 고전하여, 1934년에 책임 정부를 반납하고, 런던의 직할 식민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영국 자치령을 자칭하고, 후에 영연방 왕국으로서 독립국이 된 뉴질랜드나 캐나다와 달리, 뉴펀들랜드는 결국 독립한 주권 국가가 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도 뉴펀들랜드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섬의 각지의 해변에 대서양의 병참망을 지키기 위한 미국군의 기지가 생겨, 미국의 존재감이 높아졌다(렌드리스법 참조). 기지와의 관계로 현금이 대량으로 유통되어, 섬의 경제가 화폐로 돌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행정 조직은 미국과 깊이 연결되게 되었다.
2. 4. 캐나다 연방 가입
뉴펀들랜드는 1949년 3월 31일 자정 1분 전에 캐나다에 합류했다.[42] 1948년 국민투표는 매우 치열했으며, 캐나다와 영국 모두 캐나다와의 연방을 지지했다. 서부 캐나다 출신 정치인인 잭 피커스길은 운동 기간 동안 연방 진영에서 활동했다. 섬에서 소수였던 가톨릭 교회는 독립 유지를 위해 로비를 했다. 캐나다는 가족의 각 자녀에 대한 "베이비 보너스"를 포함한 재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했다.[42]연방 지지자들은 뉴욕시의 사회주의 신문에서 일하면서 사회주의적 정치 성향을 키운 전직 라디오 방송인인 조셉 스몰우드가 이끌었다. 연방 이후 스몰우드는 선출된 주총리로 수십 년 동안 뉴펀들랜드를 이끌었다. 주총리로서 그의 정책은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에 가까웠다.[42]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는 캐나다에서 가장 늦게 영토가 된 곳이다. 1949년까지 뉴펀들랜드는 영국 식민지였으며, 특히 책임 정부 포기 전까지는 자치령으로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과 함께 대전에 참전하는 등 독립국처럼 행동했다. 같은 해,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현저히 다른 캐나다 가입을 둘러싼 주민 투표에서 찬성 50.50%, 반대 49.50%를 기록했다. 주민 투표는 캐나다 지지파와 영국 지지파 간의 격렬한 싸움이 되었지만, 근소한 차이로 캐나다 가입이 결정되었다. 이는 잭 피커스길의 역할이 크다고 여겨진다. 가톨릭 교회가 독립 유지를 위한 로비 활동을 하는 등 종교 단체도 큰 역할을 했다. 재정적 유인도 컸으며, 특히 "베이비 보너스" 공약은 영향력이 있었다.[42]
연합파는 조이 스몰우드가 이끌었다. 그는 뉴욕의 좌익 신문에서 일했던 시절에 사회주의적 정치 성향을 익혔지만, 주지사로서 그의 정책은 자유주의에 가까웠다. 그는 선출된 뉴펀들랜드 주지사를 6선 22년 동안 역임하며 지지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섬 주민들 중에는 베이비 보너스와 같은 재정적 인센티브를 캐나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라기보다는 스몰우드의 자비의 산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42]
3. 지리
뉴펀들랜드섬은 대략 삼각형 모양이며, 각 변의 길이는 약 500킬로미터(약 498.90km)이고 면적은 108,860제곱킬로미터(약 108856.66km2)이다. 뉴펀들랜드와 그 주변의 작은 섬들을 포함한 총면적은 111,390제곱킬로미터(약 111394.83km2)이다. 북위 46°36′~51°38′ 사이에 위치한다.
뉴펀들랜드는 주로 아한대 기후(쾨펜 Dfc) 또는 습윤 대륙성 기후(쾨펜 Dfb)를 보인다. 섬의 남동쪽 끝 지역은 해양의 영향을 충분히 받아 아극지방 해양성 기후(쾨펜 Cfc)로 분류된다.
뉴펀들랜드섬은 래브라도 반도와는 벨아일 해협으로, 노바스코샤주 최남단의 케이프브르턴섬과는 캐벗 해협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 섬은 세인트로렌스 강의 하구를 막고 있는 듯한 위치에 있으며 세인트로렌스 만을 형성한다. 섬 남쪽 해안 앞바다에는 프랑스의 해외 영토인 생피에르 미클롱이 있다. 주변에는 트윌링게이트섬, 뉴월드섬, 포고섬, 벨 섬 등이 있으며 아발론 반도 등 여러 반도가 돌출되어 있다. 서부에는 섬 내 최대 호수인 그랜드 호수가 있다.
해양성 기후이지만, 한류인 래브라도 해류가 섬의 동쪽 해안을 따라 남하한 후 남쪽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기온은 다소 낮다. 봄은 늦고 짧으며,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은 혹한이다. 1월에는 섬 전체가 영하가 되며, 여름에도 고원에는 눈이 남아 있다. 강수량은 충분하며, 북서쪽보다 남쪽 해안이 약간 더 비가 많다. 섬의 북동부는 겨울에 수십 센티미터의 강설량이 있다. 바람이 강하며 남쪽 해안은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 특히, 남부 아발론 반도 앞바다나 그랜드뱅크 부근은 세계에서 가장 짙은 안개가 발생하는 해역이다. 그랜드뱅크는 멕시코 만류와 래브라도 해류가 만나는 조류 지점으로, 세계적인 어장으로서 뉴펀들랜드의 이주와 경제에 크게 기여해 왔다.
겨울에는 저기압이 섬 근처를 통과하기 때문에 11월부터 3월까지는 노르이스터라고 불리는 폭풍이 여러 번 섬을 덮쳐 강풍이 몰아친다. 여름에는 남쪽에서 발생한 허리케인이 접근하여 강풍과 폭우를 가져온다.
뉴펀들랜드의 절반은 숲 지역이지만, 남부와 서부의 넓은 지역에는 이끼만 자라는 이탄지나 불모지가 있다. 섬 남서쪽의 비교적 온난한 계곡에는 물푸레나무와 느릅나무가 자라고, 중앙부와 서부는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주를 이룬다. 발삼전나무와 검은가문비나무는 북동부를 제외한 저지대에서 볼 수 있으며, 북동부에는 추운 기후에 강한 미국사시나무 등이 많다.
섬은 고원이 많으며, 섬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롱레인지 산맥은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뻗어나온 산맥의 연장이다.
4. 문화
주로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출신의 유럽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곳과는 다른, 신세계에 독특한 사회를 건설했다. 이는 북아메리카 본토에 다른 이민자들이 건설한 사회와도 달랐다. 어업 수출 사회였던 뉴펀들랜드는 대서양 연안의 많은 항구 및 사회와 접촉했지만, 지리적 위치와 정치적 독자성 때문에 가장 가까운 이웃인 캐나다와 미국으로부터 고립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대부분의 인구가 험준한 해안선을 따라 작은 외항 마을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규모 인구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겨울 얼음이나 악천후로 인해 오랫동안 고립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이민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만들어냈다. 뉴펀들랜드와 래브라도는 다양한 독특한 관습, 신앙, 이야기, 노래, 방언을 발전시켰다.[36][37] 고립된 지역의 해빙과 날씨, 그리고 주민들이 식량과 소득을 위해 의존했던 토착 야생 동물에 초점을 맞춘 독특한 어휘가 생겨났다.[38]
뉴펀들랜드가 대영제국 자치령이었던 시절, 캐나다와 거의 동등한 자치권을 소유하고 있어 법적으로는 "독립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다만 캐나다처럼 자치권을 완전히 행사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국가"로서의 경험과 캐나다의 다른 주에 비해 민족적으로 동질성이 높다는 점, 독자적인 역사와 방언 등으로 인해 "뉴펀들랜드인"(Newfoundlander)들에게는 강렬한 "뉴펀들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으며, 지금도 "캐나다인이 아닌 뉴펀들랜드인"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 하지만 캐나다로부터 재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은 없고, 뉴펀들랜드는 "주"와 "국가" 사이를 흔들리고 있다.
뉴펀들랜드인에 대한 캐나다 및 기타 지역의 외부 이미지는 친근하고, 외국인을 환영하며, 활기차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근면하게 일한다는 등 긍정적인 면이 있다. 캐나다 본토를 비롯한 북미 각지에서는 가족의 생활을 돕기 위해 뉴펀들랜드 출신의 노동자가 많이 와서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주기는 뉴펀들랜드의 예술가 크리스토퍼 프랫(Christopher Pratt)이 디자인한 것으로, 1980년 5월 28일에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래브라도 지역에는 1973년에 래브라도 사우스 입법 의회의 전 의원이었던 마이크 마틴이 디자인한 독자적인 비공식 깃발이 있다. 또한 19세기에 만들어진 "분홍색, 흰색, 녹색"의 삼색기가 섬의 비공식적인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비공식 삼색기는 20세기까지 항해 중에도 게양되었다. 이 세 가지 색은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이라는 뉴펀들랜드의 주요 민족·종교 집단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깃발은 여행객들로부터 아일랜드 국기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지금도 많은 가정의 처마 밑에 게양되어 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비공식 깃발의 인기는 최근 들어 더욱 높아지고 있으며, 기념품 가게 상품에 사용되거나, 패션에서도 뉴펀들랜드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우에 자주 사용된다.
5. 주요 도시 및 지역
순위 | 자치구명 | 인구 (2016년) |
---|---|---|
1 | 세인트존스 | 108,860 |
2 | 컨셉션베이사우스 | 26,199 |
3 | 마운트펄 | 23,120 |
4 | 패러다이스 | 21,389 |
5 | 코너브룩 | 19,806 |
6 | 그랜드폴스윈저 | 14,171 |
7 | 간더 | 11,688 |
8 | 포르투갈코브세인트필립스 | 8,147 |
9 | 토베이 | 7,899 |
10 | 스테픈빌 | 6,623 |
11 | 클래런빌 | 6,291 |
12 | 베이로버츠 | 6,012 |
13 | 메리스타운 | 5,316 |
14 | 디어레이크 | 5,249 |
뉴펀들랜드섬의 인구는 2001년 기준으로 466,172명이며, 주변 섬을 포함하면 50만 명이 넘는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이자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주도인 세인트존스는 이 섬의 남동쪽 끝, 대서양 연안에 있다.
6. 명소
유럽인들이 정착한 신대륙 최초의 장소 중 하나인 뉴펀들랜드는 유럽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인트존스는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영어권 북미에서 가장 오래도록 계속해서 거주해 온 지역이다.
세인트존스 통계 대도시권에는 마운트펄시, 컨셉션베이사우스 마을, 패러다이스를 포함한 12개의 교외 지역 사회가 있다. 이 지역의 세 번째로 큰 도시는 섬 서쪽 해안의 베이오브아일랜드에 위치한 코너브룩이다.
뉴펀들랜드 섬에는 바라코이스 폰드 주립공원과 같이 모델 숲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주립공원과 두 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 그로스모른 국립공원은 서해안에 위치하며, 복잡한 지질학적 특징과 뛰어난 경관으로 인해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이 1805km2인 이 공원은 대서양 캐나다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이며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 섬 동쪽에 있는 테라노바 국립공원은 보나비스타만 지역의 험준한 지형을 보존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땅, 바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적인 상호작용을 탐험할 수 있다.
- 랑스오메도는 섬 최북단(케이프 노먼) 근처에 있는 고고학 유적지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츠컨텐트(뉴펀들랜드 래브라도)는 하츠컨텐트 케이블 스테이션이 설립되면서 국제 통신 역사에 자리를 잡았다.
이 섬은 해양 카약, 캠핑, 낚시, 사냥부터 하이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광 기회를 제공한다. 동해안에서는 이스트코스트 트레일이 아발론 반도를 통해 포트 암허스트(세인트존스) 근처에서 캡파하이든까지 이어진다.
마블 마운틴 스키 리조트는 코너브룩 근처에 있으며, 캐나다 동부 스키어들에게 겨울철 주요 명소이다.
주요 지역 사회
- 간더: 간더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다.
- 그랜드폴스-윈저: 섬 중앙부의 서비스 센터이다.
- 채널-포트오바스크: 뉴펀들랜드의 관문으로 불리며, 마린 애틀랜틱 페리 터미널이 있는 곳이다.
- 스테픈빌: 이전에는 어니스트 하몬 공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며, 현재는 스테픈빌 공항이 있다.
교육 기관
- 뉴펀들랜드 메모리얼 대학교: 세인트존스에 있는 주립대학교
- 그렌펠 캠퍼스: 코너브룩에 위치
- 노스애틀랜틱 대학: 스테픈빌과 다른 지역 사회에 위치
보나비스타, 플라센티아, 페리랜드는 초기 유럽 정착 또는 탐험 활동의 여러 역사적인 장소이다. 포고 섬에 있는 틸팅 항구는 주 등록 문화유산 지구이자 캐나다의 국가 문화 경관 지구이다.
섬의 세 도시와 수많은 마을, 특히 여름 축제 기간 동안에는 오락 기회가 풍부하다. 나이트라이프의 경우 세인트존스 시내에 있는 조지 스트리트는 하루 20시간 동안 차량 통행이 금지된다. 세인트존스에 있는 마일 원 스타디움은 이 지역의 대규모 스포츠 및 콘서트 행사 장소이다.
3월에는 매년 바다표범 사냥(하프물범)이 이루어진다.
7. 현대의 뉴펀들랜드
뉴펀들랜드의 현재 주요 문제는 그랜드뱅크에 한때 풍부했던 대구의 급격한 감소와 그로 인한 어업의 심각한 쇠퇴이다. 전후, 전통적인 연승(延縄) 어업에서 대규모 트롤어선과 저인망 어업으로 전환되면서 수십 년에 걸쳐 남획과 해저 어류 산란장 파괴가 진행되어 극심한 흉어를 초래했다.
1990년대 이후, 정부는 어획량과 어획 시기 제한을 실시하고, 여러 차례 조업 금지를 선언했다. 일부 해역에서는 어획량과 어법 제한으로 대구 자원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최성기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어민들은 마을을 떠나거나 대도시, 또는 해저 유전으로 돈을 벌러 가는 등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주도 세인트존스 도시권을 포함하여 섬의 인구는 감소 추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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